소설리스트

게임 속 힘법사가 사는 법-66화 (66/145)

66. 암왕 (2)

***

암왕.

서대륙 역사상 그처럼 기괴하고도 예측 불가능한 드래곤은 또 없을 것이다.

‘건국 전쟁 때 그 드래곤은 수면기였어.’

그가 눈을 뜬 것은 인간이 주축이 된 연합군과 오크, 뱀파이어, 트롤 등 몬스터 진영 간 전쟁이 끝나고 제국이 생긴 지 수십 년의 시간이 지난 후였다.

하늘 산맥의 레어에서 정신을 차린 그 드래곤이 처음으로 한 일은, 그 사이 서대륙 땅 대부분을 차지한 제국을 상대로 선전포고를 하는 것이었다.

‘명분이 뭐였지? 아무튼 말도 안 되는 미친 소리였던 것 같은데.’

막 건국하여 국가의 골격을 세우고 제국민들의 삶을 돌보기 시작한 황실 입장에서는 청천병력 같은 소리였다.

- 몬스터들과 전쟁을 치뤄 간신히 이겼더니, 이제는 드래곤을 상대로 전쟁을 해야 한다고?!

당시 황제는 잔뜩 긴장한 상태로 전병력을 동원하여 전쟁 준비를 했다.

하지만 제국군은 드래곤이 영토로 선포한 하늘 산맥을 침공하는 선택은 하지 않았다.

그들은 드래곤이 어떤 짓을 할 수 있는 존재인지 잘 알았다. 제국군이 동부로 병력을 집중시키는 즉시, 용은 유유히 하늘을 가로질러 수도를 비롯한 전략 거점들을 모조리 불태워버릴 것이다.

그 결과는 제국의 붕괴일 터.

- 폐하, 더군다나 하늘 산맥은 갑옷으로 무장한 병사들이 활동하기에 불리한 지형입니다!

또한 그곳엔 온갖 마법적인 방어 체계가 집중되어 있을 게 뻔했다.

그래서 제국은 공성전 대신 수성전을 택한다. 전투준비태세를 전 제국령에 선포한 상태로 드래곤이 나타나기를 기다린 것이다.

그렇게 하루가 흐르고··· 이틀이 흐르고··· 사흘이 흐르고···.

결국은 몇 년에 가까운 시간이 흘렀다.

***

- ···대체 켈리페르는 뭘 하고 있는 거지?

제국은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드래곤은 정작 전쟁을 선포해 놓고도 전면전으로 보이는 행동은 전혀 취하지 않은 것이다.

제국 수도를 향한 공격은 없었으며 그런 조짐조차 발견되지 않았다.

- 설마 전쟁을 포기한 것인가? 그 사이 마음이 바뀌기라도 했나?

하지만 안도하기에는 너무 일렀다.

제국 수뇌들이 당황한 마음을 가라앉히고 긴장마저 느슨해져버린 어느날.

암왕은 자신을 잊지 말라는 듯 모습을 드러냈다.

제국군이 인적 드문 변방에서 대대적 훈련을 진행할 때, 그곳에 갑자기 나타나 군단 하나를 불태우고 사라진 것이다.

- 암왕이 드디어 전쟁을 시작했다!

몇 년의 준비 끝에 침공을 시작한 것인가?

바짝 긴장한 제국은 다시 싸울 준비를 했다.

하지만 또 몇 년 간, 아무런 움직임이 없었다. 황제를 포함한 수뇌들은 혼란에 빠졌다.

‘그 뒤로 몇백 년간 비슷한 일이 반복된 거야.’

전면전은 없었다. 암왕은 드래곤이라는 강대한 종족의 힘을 마음껏 펼쳐서 전면전에 돌입하는 대신, 게릴라전 비슷한 양상으로 치고 빠지기를 반복했다.

그 사이 제국군이 입은 피해는 참으로 애매한 수준이었다. 첫 전투처럼 군단 하나가 사라지는 충격적인 사건이 벌어지기도 했지만, 또 어떤 때에는 정찰대 한 소대가 순국하는··· 비극적이긴 하지만 압도적이라고는 할 수 없는 피해가 발생하기도 했다.

결국 그 후 몇백 년 동안 제국은 드래곤을 상대로 명목상의 전시 상태를 유지하고 있다.

‘이쯤 되니 암왕의 의도에 대한 해석도 분분하긴 한데.’

어떤 학자들은 현재 상황을, 다른 드래곤이 새파랗게 젊은(?) 암왕에게 압력을 넣은 결과라고 해석한다. 비밀리에 제국 황실이 암왕을 능가하는 강대한 고룡의 비호를 얻었다는 것이다.

또 어떤 학자들은, 암왕의 행동이 지극히 계산적이고도 의도적인 것이라고 주장한다. 큰 그림을 보면, 암왕이 이 세상의 평화를 유지하는 ‘억제력’으로 기능한다는 것.

‘후자의 해석도 무시할 건 못 돼.’

그도 그럴 것이, 암왕을 견제하느라 지난 몇백 년간 제국군은 경거망동을 못했다.

덕분에 명목상 제국의 지배 밖에 있는 몇몇 종족이나 변경의 왕국들은 지금도 독립을 유지하고 있는 것이다.

단적인 예로, 켈리페르의 선전포고가 없었다면 제국은 진작에 바다를 건너 동대륙을 정벌했으리라는 주장도 존재한다.

‘물론 다 가설이긴 하지만.’

그래도 좀 찝찝하긴 했다.

이 상황에서 내가 암왕을 죽여버리면, 그 여파는 어디까지 튈 것인가?

‘뭐, 어디까지나 추론일 뿐이고.’

범수가 당장 며칠 안에 암왕을 잡을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치 않는다.

하지만 무작정 '못한다'고 포기하며 손을 놓고 싶지도 않았다.

어차피 [The LIFE] 유저들 사이에서도, 언젠가는 암왕 역시 공략 대상으로 풀릴 거라는 예상이 우세했다. 암왕은 대수림에 버금가는 마경인 하늘 산맥에 살고 있는 몬스터들의 대장 격이니까.

그 공략을 게임 내 흐름보다 좀 빨리 진행할 뿐.

'일단, 지금보다는 더 강해져야 해.'

범수가 언제나 되뇌는 모토였다.

***

늪지에서 벗어나자 패트릭 일행은 광명을 찾은 얼굴이 되었다.

리더가 몇 번째인지도 모를 감사를 표했다.

“감사합니다, 범수 님. 이 은혜는 잊지 않겠습니다. 신의 이름으로 맹세합니다!”

“아, 뭐. 네.”

범수는 담담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대로 헤어지려고 하는데 패트릭이 할 말이 남았다고 했다.

“저희들끼리 의논을 해봤는데 말입니다.”

그들은 백작의 의뢰가 사실상 해결되었다는 점에 주목했다.

“그가 바란 것은 늪지가 변한 원인을 찾아달라는 것이었지요. 그건 당신이 잡은 바실리스크와 그 정체불명의 남자로 설명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모든 비밀을 알아낸 것은 아니지만 직접적인 원인은 찾았으니 성공으로 간주할 수 있습니다.”

더군다나 이 늪지는 정상으로 되돌아갔다.

“저희는 이대로 백작에게 가서 범수 님의 활약을 설명할 생각입니다. 그리고 애초에 약속 받은 보상보다 더 높은 금액을 받아내려 하는데.”

패트릭이 두 눈을 빛냈다.

“그 보상을 저희가 아니라, 자유 도시 센츄리온 길드의 범수 님께 직접 드리라고 요구하겠습니다!”

그는 칭찬을 바라는 듯이 활짝 웃으며 범수를 보았다. 사례를 하기 위해 최대한 머리를 굴렸으니 인정해 달라는 표정으로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 말을 들은 범수는 정작···.

‘하아, 뭔 말도 안 되는 소리야.’

한숨을 쉬고 싶을 뿐이었다.

패트릭은 예상과는 달리 반응이 영 시원찮자 당황했다.

“아니, 왜 그러십니까? 혹시 이름이 알려지는 걸 원치 않으신다면 일단 보상은 저희가 받은 뒤에 은밀하게 범수님께 다시 전달을···.”

“그게 아닙니다.”

나름 경험 많은 모험가들이라면서, 생각이 짧군.

범수는 그들이 방금 말한 계획을 절대 실행해서는 안 되는 이유를 설명했다.

“도중에 기절하시긴 했지만 그 ‘미친놈’이 어떻게 싸우는지 다들 보셨지 않습니까?”

묵묵히 고개를 끄덕인다.

“놈이 마법을 쓸 줄 아는 것 같았습니까?”

제일 먼저 반응한 것은 마법사, 애니타였다. 그녀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마법 비슷한 것은 한 번도 보지 못했어요. 기절하기 직전까지도요.”

그러면서, 자기들이 정신을 잃었을 때도 의식을 유지한 그레이 엘프를 보았다. 혹시 그는 다른 장면을 봤는지 질문하듯.

그런데 그레이 엘프는 식은땀을 흘리면서 입을 꾹 다물고 있을 뿐이었다. 그제서야 마법사는 이 엘프가 전투 후 여태 한마디도 안 한 걸 뒤늦게 떠올렸다. 갑자기 말하는 방법을 잊은 사람처럼.

범수가 말했다.

“놈은 마법을 쓰지 못했습니다. 그렇다면··· 바실리스크의 마정석을 그렇게 만든 놈은 또 누굴까요?”

“?!”

“그건 마법입니다. 어떤 계통인지는 모르겠지만, 오러로 할 수 있는 일은 아닙니다. 오러는 마나를 물리력으로 변환시킨 것에 불과하고 그런 복잡한 속성을 부여할 수는 없습니다. 그럼 자연스레 이런 질문이 이어집니다. 그 미친놈은··· 과연 혼자 움직이는 걸까요?”

패트릭은 범수가 어떤 결론으로 그들을 유도하는지 깨달았다.

“패거리가 있겠군요!”

범수가 전장 정리를 그토록 깔끔하게 한 이유도 알 수 있었다.

“그 뒤에 어떤 조직이 있다면 놈이 행방불명 된 걸 알아차리게 될 겁니다. 늪지의 사기가 사라졌다는 이야기도 곧 퍼지겠죠. 그런 직후 범수(부캐)라는 사람이 바실리스크와 남자를 때려 잡았다는 소문마저 번지면··· 그들은 어떻게 나올까요?”

범수는 이 돌대가리를 어떻게든 심문해서 그들 패거리의 규모와 능력 같은 걸 캐낼 생각이다.

그런 준비가 되기도 전에 암살 타깃 1호에 오르는 건 절대 원치 않는 바.

상상만 해도 목이 막히는 그런 고구마밭은 걷고 싶지 않았다.

“어쩌면 그 미친 놈이 조직의 우두머리이고, 마정석을 가져오는 일이 가장 어렵고 중요하기에 직접 나섰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반대로 놈이 조직의 말석을 차지했고 가장 하찮은 일을 맡아 이 늪지에 왔을지도 모를 노릇입니다. 이야기가 퍼지면 곤란합니다.”

일행은 늪에서 범수를 만난 사실을 타인에게 절대 언급하지 않겠다고 신 앞에 맹세했다.

이런 것쯤은 알아서 조심할 줄 알았는데··· 죽을 위기를 막 넘겨서 그런가 아직 머리가 잘 안 돌아가는 모양이다.

범수는 패트릭 파티를 가리키며 말했다.

“사실, 저보다 위험한 건 당신들입니다.”

“?!”

가장 먼저 말뜻을 이해한 사람은 마법사였다.

“우린··· 백작의 의뢰를 받고 늪지에 왔다는 기록이 이미 남아 있으니까요!”

“이제야 말이 통하는군요.”

그들이 대처할 수 있는 방법은 두 가지였다.

늪지가 정상화되었다는 이야기가 퍼지기 전에, 소문보다 빠르게 백작령에 돌아가서 임무에 실패했다고 보고하거나.

아니면 늪지에서 사망한 것처럼 이대로 사라져서 종적을 감추거나.

양쪽 다 완벽한 계획은 아니고 리스크는 존재했다.

“저흰 이미 착수금을 받아서 이대로 사라지면 백작까지 사람을 풀어서 저희 뒤를 쫓을 수 있습니다. 차라리 첫번째 방법이 나을 것 같습니다.”

다행히 이들 전에도 늪지를 탐사했다가 실패한 모험가들이 있었던 모양이었다.

또한 범수는 그 정체불명의 조직이 보기에도 '고작 이 네 명'이 그 괴물 같은 남자를 죽였으리라고는 믿지 않을 거라 예상했다.

이야기가 마무리 된 뒤, 파티의 리더는 범수에게 고개를 꾸벅 숙인다.

서대륙인들의 관습적인 인사가 뒤따랐다.

“여러모로 감사했습니다. 당신의 앞날에 행운의 여신께서 함께하시기를.”

범수는 그들의 배웅을 받으며 유유히 떠났다.

***

흑마를 함께 탄 범수와 하이 엘프의 모습이 지평선 너머로 사라진 뒤.

수인족 로토가 말했다.

“···그럼 우린 어쩌지?”

당장 백작령으로 전력질주해야 한다는 건 안다.

그가 우려하는 건 그 다음이다.

그레이 엘프가 재빨리 끼어들었다. 범수가 곁에 있는 동안은 벙어리처럼 입을 다물었던 그가 드디어 목소리를 낸 것이다.

“서부로 가는 건 어떨까?”

“?”

“그쪽은 아직 미개척지가 많아서 마탑도 별로 없어. 반대로 모험가를 필요로 하는 의뢰는 많고. 여러모로 체계가 느슨해서 작정을 하고 숨으면 제일 찾기 힘든 장소지.”

숨어야 하는 입장에서 가장 두려운 대상은 마법이다. 먼 거리에서 실시간으로 정보 전달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마탑이 없다면 마법사도 드물 터.

“혹시 그 ‘조직’에 정령사가 있으면 어떡하지? 내가 듣기로 정령은 하루만에 대륙 동쪽 끝에서 서쪽 끝까지 날아갈 수도 있다고 했어. 누가 정령을 풀어서 우릴 찾으면 어떡해?”

그레이 엘프는 고개를 저었다.

“정령으로 사람은 못 찾아. ···물론 찾는 대상에게 정령이 주목할 기운이 넘쳐 흐르고 그 정령사가 매우 뛰어난 능력자면 모르겠지만. 일단, 우리에겐 첫번째 해당 사항이 없잖아?”

빠르게 논의가 오간 뒤 모험가 파티는 말을 달릴 준비를 했다.

그런데, 애니타가 도저히 궁금증을 참지 못하겠다는 듯 그레이 엘프에게 물었다.

“저기, 우리가 기절한 뒤에 싸움이 어떻게 됐어요? 범수 님이 어떻게 이긴 거에요?”

흠칫!

그러자 엘프는 얼굴을 얼음장처럼 굳히며, 정색하는 목소리로 외쳤다.

“나, 난 아무 것도 못 봤어!”

“?!”

***

“와, 벌써 대수림이야?”

알터가 기가 막히다는 듯 중얼거렸다.

모험가 파티와 헤어진 뒤, 흑마는 저 늪지 쪽으로는 돌아보기 싫다는 듯 진저리를 내며 엄청난 속도로 달렸다. 범수와 엘프, 두 사람을 태웠다고는 상상하기 힘든 기세였다.

덕분에 일정보다 훨씬 빠르게 그들은 대수림에 진입했다.

“호오, 이 숲. 환경이 꽤 괜찮은데?”

범수가 고개를 갸웃했다.

“(이미 타버린) 숲이 고향인 하이 엘프에겐 이 밀림이 쾌적하게 느껴지나 보군요? 습도가 높은 건 늪지와 마찬가지인데요.”

“그건 그렇지. 그래도··· 여긴 뭔가 달라.”

“흠, 그나마 여기가 (이미 타버린) 원시림과 비슷한 환경이라서 그런 걸 수도 있겠군요.”

대수림은 몬스터의 영역이 되었기에 마경이라고 불린다. 하지만 몬스터만 빼면 자연 환경 자체는 엘프가 살기에 괜찮은 편인 것 같다.

‘몬스터들만 어떻게 처리한다면, 하이 엘프들이 여기로 이주를 해 와도 되겠군. ···뭐, 금역 때문에라도 불가능한 일이지만.’

그런 생각을 하다보니 저번에 떠올렸던 의문이 다시 생각났다.

“그런데, 알터.”

“음?”

“당신, 그렇게 큰 사고를 치고 지금까지 어떻게 살아있는 거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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