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게임 속 힘법사가 사는 법-105화 (105/145)

105. 다시, 혼자 (2)

“식사 도중에 제가 몇 번이나 떠 봤습니다만··· 극도로 주의하는 듯한 반응이었습니다. 정보가 될 만한 대답이 거의 없었습니다.”

범수의 출신지에 대한 단서를 조금이라도 얻기 위해 이런 저런 주제로 말을 던져 봤지만.

상대는 입을 꾹 다물기만 했던 것이다.

“허나, 평범한 집안 출신이 아닌 것은 분명합니다. 지금까지 보고된 능력만 봐도 그렇습니다.”

카실리온 2세가 말했다.

“능력 이야기가 나온 김에, 다시 묻지.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 너무 많아. 설사 그가 동방의 명가 출신이라고 가정해도 그게 정말 다 ‘비술’로 가능한 일들인가?”

황태자는 손에 들린 서류를 내려다보았다.

“본 드래곤을 상대할 수 있는 괴력, 한밤 중에 태양 같은 빛을 소환하는 마력, 우리 쪽 오러 유저들도 뚫을 수 없었던 뜨거운 불길을 이겨내는 저항력···.”

개중엔 범수 본연의 능력이 아니라 아이템 빨로 얻은 것도 있었지만, 이들은 그것을 구분해내지 못했다.

“각각의 능력만 따지면, 비슷한 효과를 낼 수 있는 동방의 비술이 각기 존재하기는 합니다. 하지만 비술은 한 가문에 한 개가 상식입니다. 이 세 가지 모두가 비술이라면, 범수라는 자는 세 곳의 명가에서 비술을 전수받았다는 뜻이 됩니다. 상식적으로 불가능한 일입니다.”

카실리온 2세의 눈동자에 깊은 빛이 서렸다.

“많이 양보해서 그 능력 중 하나는 비술이라고 해도, 나머지 둘의 근원은 불명이라는 것이군.”

“제 생각도 그렇습니다.”

“한 사람이 그리 많은 재능과 재주를 가진 것은 납득하기 어렵네. 행운의 여신께서 그를 지나치게 편애하신 게 아니라면, 뭔가 다른 이유가 있겠지.”

화제를 돌리며 묻는다.

“그 문신은?”

범수가 영웅건을 벗었을 때 드러난 문양을 말하는 것이다.

센은 매우 곤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잘 아시겠지만 동대륙에는 수백 개의 국가가 존재하며, 각국 내에서도 씨족에 따라서 문화와 풍습이 다릅니다. 이마에 문신을 새기는 풍습도 존재할 터이지만, 그 문양의 뜻을 제가 다 기억하거나 해석하지는 못합니다.”

황태자는 시선을 돌렸다.

테이블에 모여 앉은 자들 중에는 이틀 전 범수를 함께 관찰했지만 식사는 함께하지 않은 자가 있었다.

비공식 석찬 때는 어둠 속에 은닉해 있던 그에게 카실리온 2세가 질문했다.

“자네가 보기엔 어떻던가? 그의 이마에 새겨져 있던 문신 말이야.”

얼굴에 서늘한 빛이 감돈다.

“’인장’ 같던가?”

고대의 인장.

황태자는 소문으로 전해지는 그 고대 유물에 대해 이미 알고 있었다. 이 자리에 있는 다른 이들도 마찬가지였다.

카실리온 2세는 범수의 활약을 전해들은 순간부터 그가 인장의 소유자가 아닌가 의심했고, 범수와 대면하자 순수한 호기심의 발로처럼 위장하여 확인하려 한 것이다.

물론 범수는 그것을 뻔히 예상했지만 말이다.

마법사가 답했다.

“고대 인장에 대해서는 알려진 것이 많지 않습니다. 다만, 그날 저희가 본 것처럼 복잡하고도 큰 문신 형태는 아니라고 압니다. 또한 서적에서 말하기를 인장은 푸른 빛을 내며 발광한다고 하는데, 그 동방인 이마는 빛을 발하는 기색이 없었습니다.”

“마법으로 가린 것은 아닌가?”

“식사 중 몇 번이나 마력 탐지 주문을 외워서 그의 몸을 수색하였습니다만 어떤 반응도 없었습니다.”

그들은 상상하지도 못할 것이다. 그 탐지 주문을 범수가 미리 파악하여 전부 빗겨낸 사실을.

가만히 듣고 있던 심복, 리암이 덧붙였다.

“예복으로 갈아입을 때 곁에 있던 시종들을 통해서도 확인했습니다. 그 동방인 몸에는 그 외의 문신 같은 것은 없었다고 합니다.”

황태자는 다시금 실망한 표정을 지었다.

“결국 우리의 상식으로 이해할 수 없는 능력을 지닌 것은 맞으나, 그것이 꼭 고대의 인장이라고 장담할 수는 없다는 결론이 나오는군.”

황태자는 인장의 존재에 대해 알게된 순간부터, 그것을 제국을 위해 쓸 수 있을지 고민해 왔다.

리암이 수긍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인장 관련 정보는 계속 사람을 풀어 수집해 보겠습니다.”

황태자가 이토록 인장에 관심이 많은 이유가 있었다.

일설에 전해지기를, 그 유물을 손에 넣은 자는 능력을 키워나감에 따라 홀로 천 명, 혹은 만 명까지도 대적할 수 있는 초인이 된다고 한다.

일반인도 그리 성장하는 판에, 소드 마스터나 고위급 마법사가 그것을 얻으면 효과는 상상을 초월할 터.

말 그대로 ‘1인 군단’이다.

황태자는 이것이 암왕의 견제를 피하여 병력을 증강시킬 열쇠가 아닐까 생각하고 있었다.

병사의 수를 늘리는 대신 특정 인원의 전투력을 상상 이상으로 강화시키는 방도.

‘병력 규모의 증가 대신 질적인 강화! 암왕의 눈을 피할 수만 있다면 이게 최선책일 터.’

물론 고대의 인장을 필요한 만큼 많이 수급한다는 시나리오는 황태자도 기대하지 않았다.

그가 바라는 것은, 일단 인장을 입수한 다음 그것을 연구하여 비슷한 아티팩트를 열화판이라도 만들어내는 것이다.

“안타깝군. 실마리에 가까이 갔다고 생각했거늘.”

그때, 리암이 조심스러운 말투로 말했다.

“그런데, 그 동방인··· 이대로 둬도 괜찮겠습니까? 맥케인 공과 따로 움직이는 지금이 기회일지도 모릅니다.”

리암은 범수를 매우 경계하고 있다.

황태자도 짐작한 이유를 그의 충신은 하나씩 읊기 시작했다.

“그는 고향을 등지고 떠나왔다고는 했지만 대뜸 전하 앞에서 ‘동대륙 정벌’에 대해 논했습니다. 물론 전하께서는 부인하셨지만 앞으로 그가 경솔되게 떠들고 다니면 좋지 않습니다. 가뜩이나 제국 훈장까지 받은 자가 말입니다.”

리암과 황태자가 그 안건에 대해 이리도 민감하게 간주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그들은 실제로 농경지 확장을 위해 동대륙을 침략하는 시나리오까지 검토한 적이 있기 때문이다.

어디까지나 세계수 관련 작전이 실패할 경우의 예비 전략안이었으며, 암왕이 건재한 이상 실행이 불가능하다고 결론을 내린 후이지만.

어쨌든 이런 이야기가 황실에서 논의되었다는 소문이 도는 것은 좋지 않다.

“더군다나, 그를 곁에 두고 관찰하면 불확실하고 신비로운 그 능력의 비밀을 파악할 수 있을지도···.”

“그를 강제로라도 잡아 두라는 말이냐?”

“명하시면 방법을 찾아보겠습니다.”

하지만 황태자는 1초도 고민하지 않았다.

바로 고개를 젓는다.

“안 될 말이다. 그는 맥케인의 동료야. 잘못 건드렸다간 맥케인이 움직일 것이고 최종적으로 ‘금역의 주인’까지 자극할 염려가 있다.”

물론 린이 나설지 나서지 않을지는 알 수 없다.

그녀는 암왕의 선전포고 같은 세상의 큰 일에는 얼핏 초월해 보이지만, 역모 집단 같은 건에는 황실에게 귀띔을 주는 듯 종잡기 힘든 행보를 보여왔기 때문이다.

맥케인도 그녀에게 청탁 같은 것은 넣을 수 없다고 했으나, 자신의 동료에게 이변이 생기면 또 어떻게 움직일지 알 수 없는 노릇.

아무리 생각해봐도 제국 차원에서 맥케인과 그의 주변인들에게 위해를 가하거나 신변을 구속하는 것은 스스로의 목을 조르는 행동처럼 느껴졌다.

“그들은 포기하도록 하자.”

결국 황태자는 범수에게 어떤 식으로든 강제적 영향력을 끼치는 것을 포기했다.

그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이유를 말했다.

“제국의 적으로 두기에, 드래곤은 하나도 너무 많다.”

***

다시 합류하기로 약속한 채, 다른 두 명과 잠시 찢어진 범수는 북쪽을 향했다.

성문 통과는 들어올 때보다도 훨씬 쉬웠다.

소문이 어떻게 퍼졌는지, 거대한 흑마를 타고 오는 동방인의 모습을 멀리서 보자마자 경비대원들이 길을 터줬기 때문이다.

이번에 훈장을 받은 세 명 중에서도 범수는 외견으로 판별하기 가장 좋은 조건이었다.

“가자! 흑!”

“푸히히힝!”

엘펜하임 북문 밖으로 나온 범수는 전속력을 다해 북부 가도를 달렸다. 흑마는 풍성한 갈기를 흩날리며 마음껏 질주했다. 다른 말들과 페이스를 맞출 필요도 없었기에 더욱 박차를 가한다.

오랜만에 느껴보는 속도감.

기수도 짜릿한 기분이었지만 흑마 역시 오랜만의 전력질주가 마음에 드는 듯한 모양이었다.

범수는 일부러 도발하듯이 말했다.

“야, 너 뭐야. 이게 진짜 전속력이야?”

“푸힝?”

“황성에서 놀고 먹는 동안 너무 찐 거 아니야? 예전보다는 좀 느려진 것 같은데?”

“푸히히힝?!”

말은 무슨 그게 무슨 말이냐는듯 눈을 희번득거리더니, 더욱 힘찬 기세로 치고 나가기 시작했다.

범수의 눈꺼풀 사이로 햇살이 번뜩이고, 귓가를 찢는 바람소리가 경쾌하다. 범수는 크게 웃으며 소리쳤다.

“그래! 이거지. 가자! 더 빨리!”

예전보다 포동하게 살이 붙은 상태임에도 흑은 놀라운 스피드를 보여주었다.

녀석의 컨디션을 고려하여 전력 질주와 적당한 경보를 반복했지만, 범수는 예상했던 것보다도 빨리 산맥의 어귀에 도착했다.

‘뭐야? 여기까지 하루는 꼬박 걸릴 거라고 생각했는데.’

해가 미처 저물기도 전에 산맥에 도착한 것이다.

“며칠 실컷 먹은 게 이제 좀 소화가 됐냐?”

“푸히힝!”

산길에 진입해서는 어쩔 수 없이 속도를 줄여야 했다. 흑마는 아직 기운이 남아있는 것 같지만, 몇 걸음만 벗어나도 벼랑이 보이는 좁은 길목에서 낙마의 위험을 감수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 외에도 천천히 나아갈 이유가 하나 더 있었다.

‘흐음.’

또각! 또각! 또각!

가볍게 걷는 말의 등 위에서, 주변에 무성한 나무들을 살핀다.

푸드득!

날개짓 소리. 까마귀 몇 마리가 날아와 거리를 두고 나뭇가지 위에 앉았다. 그리고 범수를 관찰하듯 뚫어지게 바라본다.

평범한 여행자들은 이상한 점을 느끼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범수의 감각은 그 새들의 특이점을 깨달았다.

‘살아있지 않아. 전부 언데드다.’

흑마법사들이 부리는 패밀리어 같다.

‘저런 식으로 방문자들을 사전에 파악하는 거군.’

어쨌거나, 지금 범수가 찾는 것은 저 죽은 까마귀들이 아니다.

산길을 계속 나아가면서도 범수는 적합한 타깃을 찾았다.

그런데 마주치는 동물들은 거의가 언데드였다.

‘아니, 이 동네는 어떻게 산 동물보다 죽은 동물이 더 잘 보이냐? 하긴, 원래 그랬지.’

산 동물이면 본능에 따라서 사람 눈에 띄지 않게 숨어들 것이기 때문이다.

잠시 후.

마을로 도착하기 직전에야 범수는 목표로 삼을 만한 것을 찾아냈다.

‘오! 살아 있다.’

그것은 나뭇가지 위에 앉아서 쉬는 참새였다. 지금까지 본 작은 동물들과는 달리 심장이 뛰고 호흡도 하는 중.

범수는 조용히 품에서 작은 돌맹이 하나를 꺼냈다. 손톱보다 작은 자갈로 산길에 오를 때 미리 챙겨 둔 것이었다.

그것을 나뭇가지 사이로 겨냥하며 각도를 잰다. 속으로 스스로에게 주의하듯 말했다.

‘힘 조절!’

그리고 돌맹이를 손가락으로 튕겼다.

팟!

“짹!”

정확한 조준과 타격.

머리를 강타당한 참새가 나무 아래로 떨어졌다.

‘다행히 머리가 통째로 날아가진 않았군.’

이 정도면 힘 조절은 마스터했다고 봐도 될 정도다.

범수는 다가가서 죽은 새를 거뒀다. 일부러 인벤토리 대신 허리춤의 주머니에 넣어 둔다.

‘좋아, 준비는 끝났군.’

흑에게 다시 출발 신호를 했다.

“이제 마을로 들어가자.”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