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7. 마신의 제단 (2)
원로는 범수를 데리고 지하로 내려갔다.
그곳의 공간은 흑마법사들에게 중요한 성지 치고는 매우 간소하고 휑했다. 바깥 건물과는 달리 별다른 장식조차 없다.
예전, 흑마법사들이 어려웠던 시절 가꾼 모습 그대로 보존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긴, 이 공간은 엄청나게 중요한 문화재 같은 것일 테니.’
간단한 문양이나 글귀조차 새겨져 있지 않은 휑한 제단과 그 뒤에 서 있는 신상.
마신을 형상화했을 동상 역시 평범하기 짝이 없다.
보통 마신이라고 하면 염소의 머리를 지닌 괴물이나 촉수가 여럿 달린 기괴한 괴물을 상상하곤 한다.
하지만 [The LIFE] 세계관에 존재하는 마신의 동상은 평범한 사람의 실루엣을 표현한 조각상이었다.
이목구비도 전부 뭉툭하게 생략되어 있기에 인간인지, 엘프인지, 드워프인지조차 구분하기 애매하다.
‘마신 설정과 캐릭터 디자인을 너무 대충한 것 아니냐고 유저들에게 욕먹었지.’
혹은, 관련 설정이 아직 정리가 안 된 상태라 일단 대충 저렇게 집어 넣었을지도 모른다는 합리적인 추측도 존재했고 말이다.
제단 앞으로 범수가 다가가자 원로 흑마법사가 말했다.
“이미 알겠지만 제물의 조건은 단 한 가지네. 자네가 직접 목숨을 빼앗은 생물의 사체.”
저렇게 말하면 뭐든 다 될 것 같지만, 부단한 실험을 통해서 바이러스나 미생물은 안 된다는 것이 유저들 사이에 입증된 상태.
균이 득시글거릴 더러운 천 조각 따위를 독한 술에 담가 소독한 뒤 바쳐도 신은 응답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 안에는 분명 죽은 바이러스 따위가 둥실 떠 다닐 텐데 말이다.
파리나 모기 따위를 받아주지 않는 것도 이미 실험을 통해 입증되었다. 하지만 의외로 벌레의 형상을 지닌 몬스터는 또 제물로 받아준다고 한다.
“자네는 무엇을 준비했는가?”
범수는 허리춤의 주머니에서 죽은 참새를 꺼냈다.
그걸 본 흑마법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자네가 직접 죽인 게 틀림없나?”
“직접 죽였습니다.”
“그러면 되었네. 간혹 더 강하고 큰 짐승을 바치면 더 많은 축복을 받을 거라 착각하는 지망생들이 있지. 하지만 오랜 역사가 증명하고 있네. 어떤 동물을 죽여서 바치든, 그게 기준에만 맞다면 모두가 같은 선물을 받지. 그 뒤는 개개인의 역량과 노력에 달려 있네.”
뛰어난 흑마법사가 되기 위해서는 그 사람의 노력과 재능이 중요하다는 이야기.
제물은 흑마법사의 능력을 개화하는 계기가 될 뿐, 다른 요소까지 결정하지는 않는다는 뜻이다.
하지만 과거 사람들은 이 사실을 몰랐기에 힘겹게 별의별 맹수나 몬스터를 죽여 제단까지 가지고 왔다고 한다. 자신의 실력과 가능성을 입증해야 마신이 더 큰 선물을 주리라는 미신적 소망 때문이었다.
제국이 생기기 전, 흑마법사들 사이에 인신공양이 유행하며 몇몇 국가의 공적으로 몰린 이유도 거기에 있었다.
‘동물이나 몬스터보다도 사람을 제물로 바치면 마신이 더 기뻐할 거라는 근거 없는 믿음이었겠지.’
범수는 흑마법사가 인도하는대로 죽은 참새를 제단 위에 올려 놓았다.
“이 앞에 무릎을 꿇고 눈을 감게.”
시키는대로 하자 흑마법사가 뭔가를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흑마법사들이 마법을 쓰는 걸 몇 번 봤기 때문에, 범수는 저게 그들의 주문과도 다른 별개의 언어라는 것을 알았다.
아마도 스펠이라기보다 성직자들의 경문에 가깝지 않을까 싶다.
귀에 들리니 일단 머릿속에 강제로 암기되기는 했지만, 무슨 뜻인지는 전혀 알 수 없었다.
잠시 후.
우—웅!
‘어라?’
범수의 감각이 말해주었다.
뭔가 시작되었다는 것을.
우—우---웅!
‘게임에서는 간단한 이펙트랑 같이 1초만에 끝나 버렸는데.’
이 세계에 직접 빙의되고 나니 많은 부분이 달랐다.
범수는 감각이 기묘하게 반응하는 것을 느꼈다.
‘누군가··· 다가오고 있다!’
경문을 외우는 흑마법사의 목소리는 반대로 점차 멀어지는 것 같다고 느낄 무렵.
‘···왔다!’
범수가 무릎 꿇고 있던 제단이 진흙처럼 물컹거리더니 붕괴하는 것 같이 느껴졌다. 순식간에 중력이 사라진 것처럼, 넓고 공허한 공간에 몸이 던져지는 것 같다.
감고 있던 두 눈을 뜬 기억은 없다. 그럼에도, 색상과 형태가 새로 피어나는 것이 느껴졌다. 앞에 펼쳐진 어둠은 전부 같은 색이 아니었다. 그 안에서도 쉼 없이 채도를 변화시키며 파도처럼 너울을 만들었다.
사아아-!
어느 순간, 어둠의 파도가 두 갈래로 갈라지며 그 속에 감춰두었던 것을 드러냈다.
‘···누구?’
그는 인간 남자였다. 주변의 어둠에 녹아들 듯한 검은 머리카락. 어떤 사물도 없음에도 의자에 걸터앉은 것처럼 편한 자세다.
그가 고개를 든다.
당혹감 때문인지, 범수가 그 얼굴의 정체를 알아차리는 데에는 약간의 시간이 걸렸다.
‘저건, 나잖아?!’
게임에 빙의한 현재의 얼굴이 아니다.
그것은 범수가 인지하는 현실, ‘지구’에서 범수가 지니고 있던 본래의 얼굴이었다.
이곳에 온 지 100일도 지나지 않았는데, 벌써 원래 얼굴이 가물거리다니!
그나저나··· 이건 뭘까? 환상?
범수가 혼란을 느끼는 사이 ‘범수’의 얼굴을 지닌 남자가 말했다.
“너무 그렇게 당황하지 않아도 돼.”
목소리는 본래 자신의 것과 약간 차이가 있나 싶었다.
하지만 곧 깨닫는다. 원래 본인 목소리는 자기 귀에는 좀 다르게 들린다지?
어쩌면 지구에서 주변 사람들이 듣던 내 목소리는 저런 음성이었을지도 모른다. 범수가 그런 생각을 하는 사이 남자가 다시 말했다.
“이 얼굴로 나타난 건, 네 무의식과 반응했기 때문이야. 자신이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대상을 형상화한 것이지.”
범수는 이 공간에서 자신도 말을 할 수 있는지 궁금했다.
그런 의문을 떠올린 순간 자연스럽게 음성이 흘러 나왔다.
“가장 소중한··· 대상?”
“충만한 자기애의 증명이라기보다는 네 본능이 반응한 선택이라고 봐도 될 거야. 무의식의 발현이니까.”
그렇게 이해하기 힘든 말을 늘어놓더니 남자가 갑자기 오른손을 내밀었다.
분명 방금 전까지만 해도 빈 손이었던 것 같은데 그 손바닥 위에는 죽은 참새가 놓여있었다.
“그나저나, 참새? 이게 정말 최선이야?”
“······..”
범수는 왠지 말을 매우 신중하게 해야할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며칠 전 황태자 앞에서 ‘동대륙 정벌’이니 뭐니 할말 못할 말 다 했던 범수이지만.
지금 이 순간은 그때보다 훨씬 조심해야 한다는 직감이 머리를 꿰뚫었다.
남자는 따지는 말투였지만, 재미있다는 듯 입가에는 미소를 머금은 상태로 범수를 본다.
가까스로 답했다.
“자신이···.”
“자신이 직접 죽인 동물이면 크든 작든, 강하든 약하든 상관없다고?”
남자는 범수가 말하려고 머릿속에서 만들어낸 문장을 낚아채듯 대신 말했다.
범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전 그렇게 알고 있었습니다.”
“그건 ‘누구나’ 받을 수 있는 기본적인 자격을 위한 대가지. 명목 상의 거래도 거래이긴 하니까, 상대 역시 뭐라도 받아가야 할 거 아니야? 그러니 눈가리고 아웅 식으로 어지간하면 대충 다 용인해 주는 거지.”
심지어 말투와 억양까지 지구의 자신이 쓰던 것과 똑같다.
이게··· 무의식의 발현이라고?
“하지만 넌 ‘누구나’가 아니잖아? 네게 평범한 이들과는 다른 무언가를 주려고 해도, 이 참새로는 안 돼. 그니 선택지를 줄게. 이대로 참새를 바치고 다른 아이들이랑 똑같은 걸 받아갈래? 아니면, 좀 다른 걸 바칠래?”
범수의 머릿속에 혼란이 가득했다.
흑마법사를 택한 유저들 후기에도 이런 현상에 대한 설명은 없었다. 이 세계에 살아가는 사람들의 상식으로 판단해도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지금 저 이야기들은 다 뭐지?
참새 말고 다른 걸 바치면 어떻게 된다는 것인가? 애초에, ‘다른 것’의 조건은 또 무엇인가? 그리고 다른 흑마법사들은 경험한 적이 없는 일을 왜 범수만 겪고 있는가?
남자가 씩 웃으며 말했다.
그 모든 의문들을 꿰뚫어 봤다는 듯.
“답을 잃고 혼란스러울 때에는 ‘아래’를 봐.”
이해하기 어려운 말이지만 일단 기억해 둔다.
남자가 이어서 손짓했다.
“일단 이건 돌려주지.”
그의 손바닥에서 참새가 사라지더니 범수의 눈 앞에 다시 나타났다.
남자는 어쩐지 온기가 섞인 것 같은 목소리로 말했다.
“이 참새를 다시 가지고 올지, 아니면 다른 걸 가지고 올지는 네 자유야. 그때까지 여기서 기다리고 있을게.”
깜박했다는 듯 뒤늦게 덧붙인다.
“그리고 ‘아고르’, 저 불쌍한 아이는 쉽게 깨어나지 못할 거야. 내가 이렇게 가까이 오는 걸 견뎌낼 정도로 재능이 넘치는 아이는 아니거든. 너와 다르지.”
아고르는 또 누구야?
나와는 다르다고?
“각성제도 소용 없어. 하지만 네겐 기절한 사람을 깨우기에 약보다 좋은 걸 가지고 있는 것 같군? 다른 아이들의 오해를 피하려면 그걸 쓰는게 좋을 거야.”
거기까지 말하더니, 남자는 범수를 쫓아내듯 손짓했다.
“이제 그만 가 봐. 더이상 여기 머물면 좋을 게 없으니.”
그 말이 떨어지자마자, 범수가 뭘 어떻게 하려고 한 것도 아닌데 이 공간에서 튕겨 나가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휘이이이익-!
순식간에 범수와 남자 사이에, 하늘에 뜬 별들 사이의 그것만큼 머나먼 거리가 생겨난 느낌이었다.
범수의 인지 영역에서 남자가 사라져갔다.
더이상 그 얼굴을 볼 수는 없었지만, 상대가 나지막하게 남긴 목소리가 마지막으로 울렸다.
“그럼, 다음에 또 보자고.”
***
범수는 눈을 떴다.
“···아니?!”
요동치던 감각이 정상으로 돌아왔다.
눈을 감기 전에 봤던 제단이 보인다.
그 다음으로 범수의 시선에 들어온 것은, 입에 거품을 물고 쓰러진 노인이었다.
“그르르륵···!”
범수가 눈을 감기 전까지만 해도 분명 엄숙하게 제례를 집행하고 있었던 그.
그런데 지금은 흰자가 보이게 눈동자를 까뒤집고 몸을 경련하는 중이다.
범수는 환상 속 남자의 말을 떠올렸다.
- 네겐 기절한 사람을 깨우기에 약보다 좋은 걸 가지고 있는 것 같군?
‘설마?’
행동은 빨랐다.
“인벤토리!”
인벤토리 창을 열어서, 크리스의 각성제 대신 다른 유리병을 꺼냈다. 그 안에는 뿌옇고 흰 빛의 액체가 담겨 있었다.
예티의 수육 국물.
뚜껑을 열자 군침이 도는 향이 금방 퍼졌다. 범수는 그 내용물을 노인의 열린 입가에 조심스레 흘려 넣는다.
반응은 즉각적이었다.
번쩍!
순식간에 눈을 부릅뜨는 노인.
“쿠··· 쿨럭? 커헉?”
잠시 헛기침을 몇 번 하더니.
“쿠에에에에엑!”
물 밖으로 막 꺼낸 참치처럼 몸을 요동친다.
그리곤 곧 “우에에에엑!” 하고 엄청난 소리를 내며 뱃속의 모든 것을 토해낼 기세로 구역질을 시작했다.
그 소음이 바깥까지 들린 모양이었다.
“괜찮으십니까?!”
문이 열리고 지상의 접수처에 앉아있던 흑마법사가 지하로 뛰어내려온다.
“윽! 이게 무슨 미친 냄새···?”
코를 감싸쥐고 당황하던 그는, 뒤늦게 아래의 광경을 보고 깜짝 놀라서 외쳤다.
“아고르 원로님!”
범수는 생각한다.
‘역시나.’
어둠 속 남자가 말한 불쌍한 아이, ‘아고르’는 이 원로 흑마법사였다.
그는 이 노인이 기절할 것도, 범수가 만든 수육 국물이 아니면 깨지 않을 것도 예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접수원은 급히 내려와 아고르를 부축하려다가 멈췄다. 상대의 입에서는 아직도 배출이 계속 진행 중이었던 것이다.
접수원은 주저하다가 결국 아고르의 등을 조심스럽게 두드려줄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고개를 돌리며, 함께 있던 범수를 의심스러운 눈으로 째려본다.
“혹시?!”
오해를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그는 이 성스러운 장소에서 외부인인 범수가 원로 흑마법사를 독살이라도 하려던 것인지 의심했다.
멀쩡한 사람도 정신이 나갈 것 같은 이 냄새는 독극물이 틀림없어 보였다.
“윽···!”
그때.
가까스로 구토를 멈춘 아고르가 손을 저었다.
“그만! 그런 게 아니다!”
입가에 가득한 토사물을 닦아내며 범수를 보는 아고르의 두 눈에는 그 전까지는 없던 감정이 서려 있었다.
“······!”
그것은 깊은 경외감이었다.
“자, 자네는···.”
고개를 젓는다. 그리고 범수를 지칭하는 단어와 말투도 바뀐다.
“아니. 당신은··· 대체 누구십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