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게임 속 힘법사가 사는 법-115화 (115/145)

115. 신과 함께 (3)

***

원래 게임에서는 가능했지만 지금은 불가능한 기능들.

개중 범수가 가장 기대했던 것은 바로···.

‘로그인과 로그아웃이 가능하다면 최고지!’

7년 버티고 소원을 이룬다는 목표는 지금도 그대로다.

하지만 그 7년을 버티는 와중 현실 세계를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다면 어떨까?

삶의 질이 지금과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올라갈 뿐만 아니라 범수의 생존 확률도 높아질 것이다.

‘위험하면 일단 로그아웃해 버리는 방법도 있고.’

더군다나 범수는 지금의 몸, 그러니까 마법사 부캐가 지니 야수왕의 인장이 원래 본캐 것이었음을 상기했다.

지금 현실로 돌아가 본캐의 아이템을 더 가지고 올 수 있다면 이곳에서 삶의 난이도가 대폭 낮아질 것은 자명했다.

‘물론 로그아웃 기능은 사기에 가깝긴 하지.’

만약 그게 불가능하다면···.

‘세이브 앤 로드라도!’

세이브 포인트를 만든 다음 그 시점으로 돌아가는 기능을 이 세상에서 재현할 수 있다면?

이건 시간을 되돌리는 초능력이나 마찬가지다.

무언가 놓친 것이 있거나 대응할 수 없는 큰 위기와 맞닥친 순간.

범수는 언제든지 과거에 지정한 순간으로 돌아가 미래를 바꿀 수 있을 터.

‘어쩌면 죽어도 되살아날지도 몰라. 게임처럼 세이브 지점에서 다시 시작하는 거지.’

실로 무시무시한 능력이라고 할 수 있었다.

손에 넣는 순간, 7년 따위는 얼마든지 버틸 수 있다고 장담할 수 있을 정도로.

그런데.

팟! 파파파팟!

그러한 기능을 기대하던 범수는.

갑자기 눈 앞에 폭죽처럼 터지는 현란한 빛 효과에 당황했다.

‘아니, 이건?!’

범수의 눈앞에 네모난 창들이 수도 없이 많이 떠올랐다.

그것들은 시스템이 보여주는 인벤토리 창과는 비슷하면서도 달랐다.

범수가 딱히 뭐라고 명렁어를 읊은 것도 아닌데 시야를 덮는 그것들.

각각의 창은 대부분 비슷한 내용을 표시했고 그 수치만 조금씩 달랐다. 범수의 동체시력은 지금 떠오른 창이 전부 79개임을 포착했다.

그리고 그 창은 전부···.

‘상태창이잖아?!’

반투명의 창 너머 마신을 본다.

“방금 봉인을 풀어 주셨다는 본능이···.”

“지금 내겐 보이진 않지만 너는 뭔가를 보고 있는 듯하구나. 그것이 여태까지는 허락되지 않은 권능 중 하나이리라.”

로그아웃도 세이브도 아니였다.

그것은 상태창이었다.

‘그 중요한 기능들을 놔두고 상태창이라니!’

범수는 실망했다.

이어서는 의문이 든다.

‘그나저나, 왜 이렇게 많이 떴어? 그리고 난 딱히 지금 상태창을 불러 오겠다는 생각도 하지 않았···.’

곧 눈앞에 펼쳐진 현상의 원인을 깨닫는다.

이 세상에 떨어지고 나서, 범수는 한 번씩 생각이 날 때마다 ‘상태창!’을 외쳤었다. 현재 레벨과 스탯이 궁금했기 때문이다.

어느 정도 자주 소리내어 발음했냐면···.

‘정확하게 79번이나 외쳤었군.’

그때 뜨지 않았던 상태창들이 지금 이 순간 한꺼번에 떠오른 것 같았다.

마치 렉 걸린 컴퓨터가 키보드와 마우스를 연타해도 반응하지 않다가, 나중에 창을 한꺼번에 수십 개 띄우는 것처럼 말이다.

‘지금까지는 봉인인가 뭔가 때문에 억눌려 있던 것들이 한꺼번에 반응한 거야!’

범수는 그 상태창들 중 최신의 것을 찾았다.

가장 앞에 위치했을 뿐만 아니라 전체적인 항목의 수치와 등급도 가장 높았기에 발견하기가 쉬웠다.

=======================

캐릭터 이름: 범수 부캐

레벨: 99 (58%)

스탯: 체력: 215(+180) / 지구력: 200(+180) / 손재주: 35 / 방어력:110(+90) / 지력: 179 / 마력:210(+25)

특성: 아리스의 가호(MAX) / 마력 출력 강화(MAX) / 마나 감응(MAX) / 마력 제어(S->SS) / 마법 저항(S) / 독 저항(A) / 집중력(A) / 암기력(S) / 야생의 감각(null->MAX) / 정령 동화(null->A) / 속성 저항(null->S) / 마나 소모 감소(null- >C) / 마나 회복 속도 증가(null->C)

명성: 서대륙 대부분의 모험가와 귀족들이 당신의 이름을 기억합니다. 흑마법사들 사이에 당신의 명성이 빠르게 퍼지기 시작합니다. 이 세계에 존재하는 모든 쉐도우 고스트가 당신을 알며 두려워합니다. 몇몇 신들이 당신을 주목합니다.

상태: 행운의 여신의 가호로 행보에 운이 깃들며 필멸자에게 허락되지 않은 권능을 사용할 수 있습니다. 다만, 아직은 권능 일부가 봉인된 상태입니다.

========================

“이게··· 뭐야?”

그 상태창의 내용은 범수를 상당히 당황하게 만들었다.

레벨은 예측한 것보다 살짝 높다. 하지만 놀랄 정도는 아니었다. 명성도 납득할 만하다.

일단 눈길을 끈 것은 스탯.

‘이 정도였다고?!’

캐릭터 생성 때 마법사 특성에 몰빵한 터라 지력과 마력을 제외한 스탯은 성장이 느리게 설정되었다.

때문에 레벨이 3~4개 오를 때 마다 체력과 지구력은 겨우 1씩 올랐을 것이다.

- 체력: 215(+180)

이 수치의 의미를 곱씹는다.

레벨이 99까지 오를 동안, 순수한 육신의 능력으로 쌓은 체력은 고작 35에 불과한데 아이템 효과로 180이 추가되어 215가 되었다는 뜻.

그 밖에도 비슷한 표시들이 보인다.

- 지구력: 200(+180) / 방어력:110(+90) / 마력:210(+25)

체력과 지구력이 오른 것은 야수왕의 인장 덕분일 터이고, 방어력이 90 추가된 건 드래고닉 아머의 효과이리라. 마지막으로 마력이 소폭 오른 것은 현자 샤카-즈레이의 반지 효과다.

그런데···.

‘인장의 효과가 저만큼이나 된다고?’

본래 이 아이템의 효과는 각각의 스탯을 100씩 올려주는 것이었다. 다섯 번이나 강화한 효과가 그랬다.

하지만 지금은 180 증가라는 효과를 보여주고 있다.

‘이것도 정령왕을 잘 먹였기 때문인가?’

물리공격력과 피통에 영향을 주는 체력.

이미 실험한 바에 따르면 맥케인의 체력도 아직 100을 넘지 못한다.

범수의 체력은 소드 마스터인 그의 두 배에 달한다는 뜻이었다.

‘아니, 특성은 또 왜 이래?’

게임에서 경험한 것보다 자신이 훨씬 강해진 이유, 인장이 기억하고 있던 이상의 효과를 내어 줬다는 사실은 알겠다. 이미 예측했던 결과이기도 했다.

그를 더 당혹하게 만든 것은 ‘특성’ 쪽이었다.

캐릭터를 생성할 때 범수가 집어 넣은 적이 없는 것들이 마구 섞여 있었기 때문이다.

- 아리스의 가호(MAX)

‘아리스? 그건 행운의 여신 이름이잖아.’

서대륙에서 가장 대중적인 교단에서 숭상받는 여신.

머리가 복잡해진다.

‘아리스의 가호라고? 이딴 건 게임할 때 본 적이 없는데?’

그리고 가장 놀란 부분은 현재 상태를 설명하는 문장이었다.

보통 독에 중독되거나 저주 같은 것에 걸리면 이 부분을 읽고 그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지금 그 문장을 보면···.

‘여신의 가호로 행보에 운이 깃듭니다?’

어이가 없었다. 지금까지 운이 좋아 봤자 얼마나 좋았다고!

‘아, 아닌가?’

···가만히 생각해 보니 평범한 사람들보다 운이 좀 좋았던 것 같기도 하고.

이 세계에 떨어진 후를 기준으로 삼으면 말이다.

저도 모르게, 혼잣말처럼 중얼거린다.

“설마, 정말로 행운의 여신이?!”

마신이 그 말을 들은 것 같았다.

“과연. 그녀의 개입이었나?”

행운의 여신, 아리스.

그녀는 서대륙에서 가장 신도를 많이 둔 신들 중 하나다. 그만큼 교단의 위세도 대단했다.

그녀의 교리는 서민들은 물론이고 부유한 상인이나 귀족, 심지어 황족에게까지 쉽게 전파될 수 있는 종류였다. 살아가면서 행운을 바라지 않는 자들은 드물기 때문이다.

동시에 아리스는 행복을 상징하는 신이기도 했다. 사람들이 행운을 통해 바라는 것은 당연히 불행이 아니라 행복한 삶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평화를 상징하는 신이기도 하지.’

제국이 성립되기 전까지만 해도 서대륙은 항상 크고 작은 전란에 시달렸다.

거기에다가 산 너머 산으로, 공략되지 못한 던전에서 튀어나온 몬스터 때문에 사람들은 항상 목숨의 위협에 시달려야 했다.

그 시절 사람들에게 평화로운 삶이란 행운이 뒷받침되어야 가능한 일이었다. 따라서 아리스는 행운의 신인 동시에 평화의 신으로 섬겨진다.

‘이 신이 내게 개입했다고?’

여기에 온 뒤 마신의 제단을 제외하고 신전과는 깊이 엮여 본 적 없는 범수는 혼란스러웠다.

아직 그녀로부터 어떤 계시도 받은 적 없는 것은 물론이고, 존재감 역시 느껴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리둥절한 범수와는 달리 마신은 뒤늦게 뭔가를 알아차린 듯 고개를 끄덕였다.

“행운을 상징하는 그녀는 ‘확률’ 또한 관장하지.”

주사위를 생각해 보면 쉽게 연상할 수 있는 사실이었다.

“그렇군. 그녀는 무수한 대체 우주의 가능성을 헤아리고, 아득할 정도로 많은 갈래 중 네가 존재하던 세계 또한 찾아낸 것이군.”

“···네?!”

“그런 다음에는, 네가 특정 세계에 존재할 확률을 흐트러뜨리고 흔들 수 있었겠지. 그리하여 네가 이곳에 올 수 있었던 것일 터. 대체 어떻게 그리도 큰 인과를 쌓았는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충분한 인과가 쌓이지 않으면 서로가 서로에게 간섭할 수 없기에, 다른 신들의 행보를 알 수 없다고 했던가?

또한 인과는 신이 필멸자에게 개입하는 데에도 필요하다고 했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이야?’

머리가 아픈 이야기였지만 한 가지만은 확실했다.

이곳을 나간 뒤 행운의 교단을 꼭 방문해야한다는 것.

아마도 7년을 버틴다는 조건에도 그 여신의 의지가 깃들어 있으리라.

우-우웅!

그때, 주변을 채우던 어둠이 더이상 형태를 유지할 수 없을 정도로 출렁이기 시작했다.

마신의 형상과 목소리가 멀어지기 시작한다.

“이제 정말 시간이 다 되었군.”

이대로 범수를 내보낼 것 같은 기세이던 마신은, 의외의 말을 덧붙였다.

“네 용건은 다 다룬 것 같으니 마지막으로 내 뜻을 하나 더 전하지.”

“?!”

“네가 바친 어스 웜은 자연적으로 그리 된 것이 아님을 알 터다.”

“맞습니다. ‘순례자’라는 녀석들의 짓으로 짐작되는데···.”

“그들이 나의 신도들을 붙잡아 놓고 내 힘을 훔치고 있구나.”

“?!”

범수의 두눈이 휘둥그레해졌다.

더 자세한 내용을 듣고 싶었지만, 신의 목소리는 이미 너무 멀었다.

“이미 죽은 나의 신도들을 구해주었으니, 살아있는 신도들 또한 도와주지 않겠느냐? 그리 하면 또다시 충분한 인과를 쌓게 될 것이다.”

그 인과는 마신이 범수에게 직접 개입할 수 있는 길을 열어줄 것이다.

“어쩌면, 봉인된 너의 다른 권능 또한 해방시킬 수 있을 만큼 충분한 인과일지도 모르지.”

그 울림을 마지막으로, 범수는 심상 세계에서 튕겨져 나갔다.

***

팟!

범수는 눈을 떴다.

주변을 가득 채우던 어둠은 사라지고 다시 지하의 풍경이 보인다.

제단 위에 올려져 있던 어스 웜의 머리는 사라진 뒤였다.

‘이번엔 제례를 완전히 마쳤다!’

동시에 범수는 심장 안쪽, 마나 하트 근처에 변화가 생겨난 것을 인지했다.

그것은 비유하자면 심장 바깥에 여과장치가 하나 더 붙은 것과 비슷했다.

출렁!

마나를 살짝 움직여 본다. 그것은 본래 원소 마법을 쓸 때처럼 자연스럽게 움직였다.

하지만 범수가 의지를 가한 순간, 그 일부는 마나 하트 가까이 새로 생긴 링(ring) 형상에 몰려 그것을 통과하며 성질을 변화시켰다.

‘이게 흑마력. 흑마법을 쓰는 원동력이군.’

범수는 이제 흑마법을 쓸 자격이 생긴 것을 확신했다.

다음은 시선을 내려서 손에 쥔 것을 본다.

마신이 준 스크롤이었다.

‘인벤토리!’

즉시 그것을 아공간 안으로 넣어서 숨긴다.

‘이 인벤토리도··· 내 권능이라고?’

주문 한 번 외우지 않고 물체를 다른 공간으로 넘기는 기적을 일으켰지만.

범수는 목격자를 걱정하지 않았다.

왜냐면, 이미 눈을 뜬 그 순간부터 그의 귀에는 어떤 소리가 들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끄윽··· 끄르륵!”

첫 제례 때와 마찬가지로, 흑마법사 아고르가 눈을 까뒤집고 기절해 있다.

‘이번에는 신과 함께한 시간이 길었으니, 제례의 주관자로서 더 부담이 되었겠지.’

이번에도 보통의 방법으로는 깨울 수 없을 것이다.

범수는 다시 인벤토리를 열고 예티 수육 국물이 든 작은 병을 꺼냈다.

그리고 이틀 연속으로 이 진한 스프를 마시게 된, 본인 외 첫 번째 인간이 된 늙은 흑마법사를 향해 동정의 눈길을 보내며 입가 사이에 뿌연 액을 흘려 넣었다.

“······?!”

곧, 노인은 발작을 시작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