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7. 자유도시에서 (3)
범수의 얼굴이 굳었다.
“설마?”
담담한 어조로 하이 엘프는 말을 이었다.
“범수, 넌 인간이지? 다른 지성체들처럼 네 선조들은 아주 오래 전부터 불을 발견하고 써 왔을 거야. 추울 때 몸을 덥히거나, 음식을 익히거나, 어둠을 밝히기 위해서. 이건 가장 기초적이고 원시적인 불의 활용법이지. 대다수의 종족들에게 큰 도움이 되는 불의 중요한 기능이고.”
물끄러미 범수를 보며.
“하지만, 하이 엘프들은 어땠을까? 우리의 머나먼 선조들 말이야. 너희 인간의 조상들만큼 그들에게도 불이 꼭 필요했을까?”
“···그렇진 않았겠죠.”
범수는 게임을 할 때 읽어 둔 하이 엘프의 설정을 떠올린다.
“당신들은 어지간한 기후에는 그냥 적응해버려요. 북해 근처에 살던 엘프들이 ‘눈의 엘프’라고 불리는 별도의 종족으로 변해버린 것처럼. 그들은 영하의 추위에도 불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죠? 비교적 온건한 기후에 살았던 당신의 선조들 역시 마찬가지일 거에요. 싸늘한 밤이 와도 추위에 떨지 않고 버틸 수 있었겠죠.”
엘프는 맞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범수는 이야기를 계속했다.
“그리고, 하이 엘프는 지금까지도 생식 위주의 식사를 하죠. 옛날에도 마찬가지였을 거에요. 과일이든 고기든 익히지 않고 먹으니 불이 필요 없었겠고. 밤에는? 난 당신들보다 더 밤눈이 밝은 종족을 본 적이 없어요. 혹시 꼭 필요할 때면 빛의 정령을 부르는 식으로 해결했겠죠.”
“맞아, 우리들도 그렇게 생각해. 아마 하이 엘프의 선조는 다른 종족들의 조상들보다 불에 대한 의존도가 훨씬 낮았을 거야.”
다만, 하이 엘프가 불을 쓸 줄도 모르는 미개한 종족은 아니라며 덧붙인다.
“물론 상대적으로 의존도가 낮았을 뿐이지 불 없이 문명을 발전시켰다는 이야기는 아니야. 생활에 꼭 필요한 재료를 얻는데 불은 필요하지. 식물성이든 동물성이든, 아니면 광물성이든 불로 가열하지 않고 얻는 원료는 많지 않아. 하다 못해 내 직업처럼 철을 제련하는 일에도 불이 필요하지.”
그는 잔잔한 목소리로 말을 잇는다.
“다만, 우리가 사는 환경이 큰 영향을 줬을 거야. 산불은 인간들에게도 재앙이지만, 숲에 사는 하이 엘프들에게는 최악의 악몽이지. 우리는 불을 최대한 드물게, 조심히 다루는 관습을 오랫동안 지켜왔어. 어느 정도냐면 불을 다룰 수 있는 자격을 지닌 별도의 직업이 존재할 정도지. 그 사람들이 하는 일은 정말 불씨를 지키고 관리하며, 산불이 일어나지 않게 막고, 불을 필요한 작업장까지 옮기는 일 뿐이야.”
이 말을 반대로 생각하면, 특정 직업을 제외한 대다수의 평범한 하이 엘프는 일상에서 불을 보고 겪을 일이 거의 없다는 뜻이다.
“너희는 하다 못해 요리를 하기 위해서라도 매일 불을 피워야 하지. 우린 그렇지 않아.”
이런 여러 요소가 겹쳤기 때문일까?
하이 엘프들이 불에 대해 가지는 거부감과 다른 종족에 비해 격하게 느끼는 공포에 대해 알터는 말한다.
“너희 종족도 본능적으로 무서워하는 것들이 있지? 예를 들어, 뱀 같은 걸 보면 자기도 모르게 겁에 질리잖아? 그 작은 파충류를 처음 보는 아이들조차 울음을 터뜨리지. 너희 핏속에 누군가 그런 것들에 대한 두려움을 심어 놓은 것처럼 말이야. 하지만 불을 보고 우는 인간 아이들은 드물 거야.”
범수의 기억에도 그랬던 것 같다.
고개를 끄덕이자 엘프는 이어서 말했다.
“우린 반대야.”
움직임이 빠르고 감각이 예민한 하이 엘프는 걷기 시작한 순간부터 뱀 같은 작은 동물 따위는 장난감처럼 가지고 놀 수 있다.
“우리 중엔 뱀을 보고 우는 아이는 드물지만, 역으로 불을 보고 우는 아이는 많지. 여러가지 이유 때문에 우리는 본능적으로 그걸 두려워하게 된 것 같아. 그리고 불과 멀리하는 생활을 너무 오래한 나머지 그것을 다루는 감각도 둔해진 거지.”
범수는 대다수의 야생 동물들이 불을 무서워하여 가까이 오지 않으려고 하는 사실을 떠올렸다.
반대로 인간들은 모닥불을 보면 멍하니 그것을 바라보며, 평화로운 감정을 느끼기도 하고, 가까이 다가가 앉으려 한다.
인간들은 진화 과정에서 불에 대한 두려움을 어느 정도 극복했지만, 이 세계의 어떤 지성체들은 아직도 강한 공포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장로들은 추측했어. 아마 그것이 우리가 불의 정령과 깊은 관계를 맺지 못하는 이유라고 말이야. 그래서 좀 과격한 방법을 동원했지. 제비뽑기로 추첨된 수백 명의 아이들은 아주 어렸을 때부터 불을 가까이 하고 살아야 했어.”
“···그걸, 인간으로 치면?”
“뱀이나 거미, 바퀴벌레 같은 너희 입장에서 혐오스럽고 무서운 생물들이 가득한 방에 함께 갇힌 것이나 마찬가지겠지. 하지만 그건 시작에 불과했어. 나중에 가면 우린 그 불을 아주 가까이 하고, 심지어 ‘만져야’ 했거든. ”
범수가 탄식을 흘렸다.
“그건, 고문이잖아요? 불을 오히려 더 싫어하게 될 것 같은데요?”
하이 엘프는 담담하게 답했다.
“내가 말했지? 장로들의 고문은 내 입장에서는 고문처럼 느껴지지도 않았다고. 그리고 이 방법은 사실 다른 속성의 정령사들이 흔히 쓰는 방법이야. 그들은 물에 몸을 담그고, 맨 몸으로 바람을 맞고, 땅에 일부러 묻히기도 하거든. 그 방법을 그대로 답습했는데, 하필 그 대상이 불이었을 뿐이지.”
애초에 정령 친화력이라는 것은 신체의 어떤 감각을 깨우는 것에서부터 시작된다고 하이엘프는 말했다.
일단 그 감각이 깨고 나면 감정이 움직이는 것이라고.
그 이론에 근거해, 끔직한 과정은 오랫동안 이어졌다고 한다.
“장로회는 정기적으로 바깥에서 성직자들을 초빙했어. 우리 종족이 뛰어난 정령사는 많이 배출하지만, 뛰어난 성직자는 드물다는 사실은 널리 알려져 있잖아? 그들은 화상을 입은 어린 하이 엘프들이, 물론 그들 눈에는 성인으로 보였겠지만, 여튼 그런 이들이 너무 많다는 사실에 놀랐지만 장로들은 하늘 산맥에서 내려온 몬스터의 습격을 받았다고 둘러댔지. 그럼 그들은 우릴 진심으로 가여워하며 화상 흉터 하나 남기지 않고 우릴 치료해주고 떠났어. 그 뒤로는 또 비슷한 과정이 반복되었지.
“······.”
이야기를 듣던 범수는 구역질이 나올 것 같았다.
그는 머릿속으로 하이 엘프 장로회에 대한 온갖 욕을 쏟아내면서 말했다.
“···그래서 그 실험은 성공한 거군요?”
“절반의 실패, 절반의 성공이라고 할까?”
알터는 자기 자신을 가리키며 씩 웃는다.
스스로를 ‘절반의 실패’라고 정의한 엘프는 그 결과를 좀 더 자세히 설명해 주었다.
“수백 명의 후보 중 나 하나였지. 최상위 정령과 계약한 정령사는 말이야.”
하이 엘프들은 원하던 대로 뛰어난 불의 정령사를 얻었다.
헌데 그 과정에서, 알터의 마음 속 어떤 부분은 망가져버렸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계약을 맺고 나서도, 장로들은 계속 나를 귀찮게 했어. 기껏 연을 맺은 정령도 제한된 장소, 그러니까 절대 산불이 날 일이 없는 곳에서만 부르도록 했지. 그리고 자꾸 나를 데리고 이상한 실험 같은 걸 계속했다니까? 난 그게 마음에 들지 않았어. 그리고 난 이미 숲에 대한 애착 같은 건 없었거든. 이딴 숲이 타는 게 무서워서 날 통제하려 드는 게 싫었어. 그래서···.”
“그래서, 태우고 싶었군요.”
“그래서, 태웠지.”
범수는 알터가 자신의 고향에도 동족들에게도 전혀 애착이 없는 이유를 이해했다.
다만 여전히 100%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알터를 망설임 없이 숲을 태울 수 있는 엘프로 만들어 놓고도, 그를 포기하지 못하고 통제도 하지 못한 상태로 방치하는 장로회의 태도였다.
아무리 알터의 정령이 특별하다고는 해도 말이다.
그러자 대장장이가 말했다.
“아마 장로들이 제일 무서워하는 시나리오는 내가 이대로 죽어버리는 거야. 더 이상 몰아 붙였다가 내가 스스로 목숨을 끊기라도 하면 최악의 사태지. 또, 내가 숲 밖으로 추방된 뒤에도 제멋대로 이것저것 태우고 다닐 거라 생각했을지도 몰라. 결국은 큰 사고를 치고 이종족들에게 쫒기다가, 좀 더 얌전해진 상태로 숲으로 돌아와 제발 날 받아 달라고 애원할 거라 예상했지 않을까? 이 외유가, 내가 철이 들 계기가 될 거라고 멋대로 생각했을 수도 있지.”
하지만 알터는 그 욕구를 최대한 건전하게 해소할 방법을 찾은 것이다.
“아마 장로회는 너무 평온하게 잘 사는 지금 내 상태 때문에 당황할 수도 있어. 아직 나까지 신경쓰기엔, 타버린 숲의 뒤처리를 하느라 너무 바쁠 수도 있고. 지금 장로들의 상황까지는 정확히 모르겠군.”
확실한 것은, 언젠가는 알터를 다시 찾아올 것이라는 부분이다.
알터 본인도 예상하듯이.
“재미없는 이야기는 이쯤 해두지.”
***
알터의 한 마디와 함께 화제가 바뀌었다.
그는 뒤틀리고 약간은 망가진 자신의 정신을 온전하게 붙잡아 둘 수단, 그의 일생을 새로 바치게 된 대장장이 일에 다시 집중한다.
그는 부츠를 살피며 말했다.
“이 아티팩트, 무슨 능력이 있는지도 알아?”
“네, 그 용병이 죽기 전에 들었습니다.”
사실 들은 이야기는 없다. 빙의 전부터 알 뿐이다.
게임에서도 종종 봤던, 중/고렙들 사이에는 나름 대중화된 아이템이었기에.
‘전사 마그레이의 부츠. 레벨 100 착용 제한에 착용시 방어력과 체력이 각각 15, 손재주 30 증가 효과였지? 괜찮은 아이템이긴 하지만, 그대로 신기는 좀 아까워.’
알터 몰래 슬그머니 ‘상태창’을 읊는다.
팟!
=====================================
캐릭터 이름: 범수 부캐
레벨: 99 (61%)
스탯: 체력: 215(+180) / 지구력: 200(+180) / 손재주: 35 / 방어력:110(+90) / 지력: 179 / 마력:210(+25)
.
.
.
=====================================
그 사이, 알터가 아이템을 살피며 말했다.
“흐음. 확실히, 네겐 이미 드래고닉 아머가 있긴 하지만···.”
“이걸 신은 상태에서 그 위에 드래고닉 아머를 겹쳐서 장착하면 돼죠. 지금도 경갑옷 위에 덧입는 걸요, 뭐.”
“좋아. 네가 준 어스 웜의 껍질을 재료로 한 번 개조해 보지. 어떤 결과물이 나올지 기대되는 걸?”
흡족한 미소를 짓는 엘프. 그의 두 눈에는 창작욕이 활활 불타오르고 있었다.
그 사이 범수는 소환한 상태창을 다시 읽고 있었다.
하이 엘프들을 죽일 때는 경험치를 얻지 못했지만, 자유 도시로 오는 사이 잡다한 몬스터를 좀 사냥했더니 경험치 퍼센테이지(%)가 아주 소폭 올라 있었다.
레벨이 올라갈 수록 요구 경험치가 상승하므로 레벨 100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언제 한 번 날을 잡아서 던전이라도 돌아야 할 것이다.
‘아무튼, 하루 정도만 시간을 빼면 레벨 100 달성이 가능하단 말이지.’
이쯤되니 그동안 인벤토리에 잘 보관만 해 놓았던 아이템이 생각난 것이다.
레벨 100 제한이 걸려 있기에 한동안 건드리지 않았던 부츠.
게임에서는 자격이 없는 캐릭터의 경우 아예 장착이 불가능했다면, 이 세계에서는 착용은 가능해도 특수한 능력이 전혀 발동하지 않는 식으로 구현되는 걸 이미 확인한 뒤였다.
‘확실히 능력치를 도합 60 올려주는 것이니 드문 아이템이긴 하지만, 약간 애매한 감이 있어.’
방어력과 체력 증가는 좋은데, 손재주를 30이나 올려주는 것은 범수 입장에서는 계륵이다.
손재주는 게임에서는 물리 공격의 정확도와 크리티컬 발동률, 평균 데미지 보정, 제작 스킬로 만든 작품의 완성도에 영향을 주었다.
헌데 이 세계에 온 범수는 딱히 자기 손으로 뭘 만들 일도 없고, 공격의 정확도는 인장의 감각이 보정해 주니 상관 없었다.
그것이 이 아이템을 그냥 착용하는 대신 알터에게 맡겨보기로 한 이유였다.
‘내 생각보다 레벨이 너무 빨리 올랐어. 진작에 의뢰할 걸 그랬네.’
드래곤 본을 가져다 줬더니 알아서 드래고닉 아머와 실드라는 아티팩트를 제작해 버린 알터.
이미 아티팩트인 아이템을 가져다 주면 그 성능을 또 다른 방향으로 한층 더 끌어올려 줄 수도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럼, 부탁합니다.”
“좋아. 어차피 당분간은 자유도시에 있을 거지? 완성되면 연락할게.”
***
셀레나의 저택에서 나온 범수는 다음 행선지를 향했다.
자유 도시에서 휴가를 보내는 사이 들러야겠다고 머릿속에 정해 놓은 순서대로였다.
잠시 후, 어떤 건물 앞에 멈춰선 그에게 신관이 다가와서 인사했다.
“당신의 행보에 행운이 함께하길 기원합니다.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이곳은 다름아닌 행운의 여신, 아리스의 신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