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게임 속 힘법사가 사는 법-134화 (134/145)

134. 나무 (3)

그 말에는 범수도 놀랐다.

“뭐라고?”

[방금 말한 대로다. 여기 시체가 남아있는 몬스터들··· 아, 오거로군. 이 오거들의 영혼은 단 하나의 예외도 없이 아직도, 죽은 후에도 그 시체 속에 머물러 있다.]

영혼이 죽은 후에도 시신에 머무는 일 역시 드물지는 않다.

특별한 원한이나 이루지 못한 사연이 있는 경우 특히 자주 있는 일이다.

흑마법사들의 성지, 켈브로이 마을 지하의 은신처에서도 비슷한 상황이 벌어졌다. 그곳의 망자들은 죽은 후에도 상당수 자신의 시신 곁에서 안식을 취한 것이다.

하지만, 그 확률조차 100%라고는 할 수 없었다.

“성불한 놈이 하나도 없어?”

[없다.]

“시신을 떠나서 배회하는 영혼도 없고?”

[시신을 떠나긴 커녕··· 그 주변을 돌아다니는 놈들도 없다. 전부 그 시신 안에 웅크린 채 밖으로 나오지를 않아. 이미 죽은 후에도.]

범수의 표정도 심각해졌다.

일반적인 상황은 아닌 것이다.

[그런데, 저 놈들은 지배해서 뭘 어쩌려고?]

범수는 생각하는 바를 말했다.

“애초에 던전이라는 곳은, 수상한 부분이 한, 두가지가 아니야.”

저 몬스터들은 대체 어디에서 온 것일까?

어떤 이유로 광폭화의 저주에 걸려 외부에서 들어오는 사람들을 끊임 없이 공격하는 것일까?

범수는 저 몬스터들의 기억에 그 해답이 있지 않을까 싶었다.

‘던전에서 살다가 브레이크 때 밖으로 나온 몬스터들은 안에서의 기억을 잃은 상태가 된다고 했어. 그럼, 아직 던전 밖으로 나가지 않은 몬스터는 어떨까?’

더군다나, 저들의 기억을 들여다 보고 싶은 이유가 방금 전 하나 더 생겼다.

대체 어떤 일을 겪었기에, 죽고 나서도 시신에 ‘묶인 듯이‘ 그 영혼들은 제자리를 지키는 것일까?

[알겠다.]

마령은 자신도 큰 호기심을 느낀 듯이 더 재촉하기 전에 작업에 착수했다.

검은 안개가 뭉친 인간의 상반신 비슷한 형태가, 그 꼬리는 범수의 손목 쪽에 연결된 채로 전장 곳곳을 누비며 뭔가를 ‘집어 삼키는‘ 듯한 제스처를 계속 취한다.

마나와 동화되지 않은 순수한 영혼은 아직 범수도 볼 수 없기 때문에, 그의 눈에는 마령이 허공

을 움켜쥐고 집어 삼키는 것처럼 보였다.

‘갓 죽은 영혼이 유령이 되려면 어느 정도 시간이 걸리는 모양이지.’

잠시 후.

[일단 전부 잡아 삼켰다. 그런데···.]

마령이 기이하다는 듯 이어 말한다.

[이 놈들... 정말 특이하군.]

마령은 그새 던전 몬스터들의 영혼이 지니는 비정상적인 특성을 하나 더 알아낸 모양이다.

[저항이 전혀 없는 걸?]

“아예 없다고?”

영혼을 복속시킬 때, 그 격에 따라 다르긴 하지만 대부분 어느 정도 저항을 보인다고 했다.

당연했다. 죽긴 했어도, 비록 자아가 희미하게 변했어도 자유 의지는 존재하는 법인데 마령은 그것을 꺾어서 짓눌러 버리니까.

헌데.

[이 놈들, 내가 명령하니까 그냥 바로 복속되어 버렸다.]

마령은 고개를 갸웃거린다.

[이상한데. 내가 듣기로 이 ‘오거‘라는 놈들은 지능이 꽤 높은 편일 텐데? 몬스터 치고는 말이다.]

“오크와 동급으로 추측되니까.”

몬스터의 지능에 대해서는 서대륙의 학자들 사이에서 연구가 제대로 되어 있지 않다. 그런 실험 자체가 불법이기 때문이다.

누군가는 오크나 오거를 교육시키면 인간과 비슷한 수준의 사고 능력을 갖출 수 있다고 주장하지만 소수파의 의견에 불과했다.

몬스터를 교육시켜서 지식을 줘 봤자 이 대륙에 먼저 살고 있던 원주민들, 그러니까 인간이나 엘프, 드워프, 거인족 같은 종족들에게 더 큰 위협이 될 터이기에 그 시도 자체가 중대 범죄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흐음. 지능이 높은 놈들이 이렇게 쉽게 넘어온다? 희한하군. 이렇게 빠르게 복속될 거면 시신에는 왜 그렇게 끈질기게 남아있었던 거지?]

뭔가 석연치 않은 듯한 울림으로.

[···아니, 반대로 말하면 그 몸 밖으로 도망칠 의지조차 없었던 건가?]

그렇게 중얼거리며 마령은 본격적으로 흡수한 영혼들의 기억을 뒤지기 시작했다.

헌데, 복속시키는 과정과는 달리 기억을 탐색하는 일에는 꽤나 난항을 겪는 모양이었다.

[끄으응!]

“왜 그래? 이제 뒤늦은 반항을 시작했나?”

뭔가 일이 마음대로 되지 않는 듯 끙끙거리는 마령을 향해 범수가 물었다.

그러자 마령은 검은 기운을 잠깐 출렁이더니, 이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아니 여전히 반항은 없다. 영혼 안을 들여다보려고 시도만 해도 바로 뚫리는군.]

“그럼 뭐가 문제야?”

[기억의 상당 부분이··· 이미 삭제되어 있다.[

“뭐?”

들으면 들을수록, 알면 더 알수록 수상하다.

그나저나, 이대로 헛수고로 끝나는 건가?

범수가 얼굴을 찡그리는데.

[아, 잠깐!]

마령이 뭔가를 발견한 듯이 외친다.

[여기 딱 한 녀석만큼은 기억이 꽤나 많이 남아있군.]

잠시 후.

꾸르르륵!

마령의 가슴에서 검은 덩어리 같은 것이 솟구치더니, 곧 오거의 머리 형태가 되었다.

뛰어난 눈썰미로 자신이 죽인 오거들의 얼굴을 전부 기억하며, 그 생김새도 물론 구분해 낼 수 있는 범수는 그가 비교적 후방에서 달려오던 오거라는 것을 알았다.

그렇게 명확하게 구분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물론 범수가 비상한 기억력을 갖췄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저 오거가 거의 마지막에 죽었던 개체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초반부 오거들이 떼를 지어 몰려올 때도 전열의 후방에 있었기 때문에 전격 폭풍을 피할 수 있었다는 뜻이다.

또한 그 후에 범수가 망치를 휘두르기 시작했을 때도 다른 오거들보다 천천히, 아주 약간 더 소극적으로 공격했기에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목숨을 유지했다가 죽었다는 뜻.

‘음, 아주 약간의 차이라서 그냥 무시했는데. 이거 달리 생각해보면··· 다른 오크들보다 광폭화의 저주가 좀 약하게 먹혔다는 뜻인 걸까?’

범수가 생각에 잠긴 사이.

[이 녀석이 기억하는 걸 토해내도록 하겠다.]

마령이 그렇게 말하는 즉시, 검은 기운이 뭉쳐서 만들어진 오거의 머리가 말했다.

[크릉. 크뤠뤡. 캬칫! 퀘렉!]

당연히 범수는 그 말을 한 마디도 알아듣지 못했다.

“하긴 여기 녀석들이 제국어 같은 걸 할 리가 없지.”

아직 던전 밖으로 나온 적도 없고 제국의 언어 역시 접한 적이 없는 몬스터인 것이다.

놈과 영혼이 연결되어 사고를 읽을 수 있는 마령의 통역을 기다린다.

그런데.

[······호오?]

마령은 상당히 놀란 기색이었다.

“왜? 뭐라고 했는데?”

마령이 잠시 침묵하더니 말했다.

[너, 혹시 알고 있나? 이 세계가 유일한 차원이 아니고, 다른 세계도 존재한다는 사실을. 정령계나 마계 같은 곳 말고도··· 물질에 기반을 둔 필멸자들이 살아가는 세계는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이 존재하지. ]

그걸 왜 모르겠어?

내가 바로 그 ‘다른 세계’에서 온 사람인데.

그러고 보니 마령도 처음 소환되었을 때 말했었다. ‘이 세계에는 관심이 없다’고

그 기억을 되짚으며 범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안다.”

[그럼 설명이 빠르겠군. 이 오거는, 처음부터 던전에서 태어나 살았던 것이 아니다. 그렇다고 네가 살던 그 세계가 고향도 아니야. 전혀 다른 제 3의 세계에 살던 필멸자다.]

마령은 범수가 놀랄 것이라고 생각한 모양이지만 그는 이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다. 게임의 배경 설명에서 이미 충분히 암시했던 사실이기 때문이다.

던전은 시간과 공간이 뒤틀린 공간. 또한 그 뒤틀린 공간은 차원의 단위까지 확장될 수 있으리라.

한편, 몬스터들이 이계의 주민이라는 사실은 서대륙 사람들 사이에서도 유력한 학설로 받아들여지는 이야기이기도 했다.

허나 범수가 궁금한 것은 오거의 고향이 아니다.

“다른 세계에 살던 종족이 왜 던전에서 이러고 있는 거야?”

[크륵 퀘루륵, 퀘게!]

마령이 그 말을 옮겼다.

[이 녀석이 살던 세계는 여기와 마찬가지로 여러 종족이 섞여서 거주하는 곳이었다. 오거 외에도 오크, 트롤, 뱀파이어 같은 종족들이 각자의 영역에서 살았지.]

전부 익숙한 이름들이다.

던전에서 자주 출몰하며, 요즘은 거의 없지만 몇 백 년 전까지만 해도 자주 발생한 던전 브레이크를 통해 바깥 세상으로 나온 덕에 바깥에서도 그 수를 늘려가고 있는 이종족들.

던전에는 저들 말고도 여러 몬스터가 나오는데, 오거 등을 여타 몬스터와 구분하는 기준은 서대륙 내에서 원시 부족 비슷한 것을 구축할 정도로 지능이 높다는 것과 죽여도 마정석 같은 것은 나오지 않는다는 것이다.

범수의 입장에서는 잡아도 경험치를 준다는 부분에서는 동일하지만 말이다.

간단한 예를 들어 방금 전에 사냥한 수백의 오거들의 경우도 경험치는 주지만 마정석은 나오지 않았다.

마령은 말을 계속 옮긴다.

[그 세계 역시 완벽하지는 않았고, 항상 평화롭지도 않았으며, 전쟁도 종종 일어나지만 이 녀석들은 어떻게든 살아가고 있었던 모양이야. 그런데 시간을 가늠하기 어려울 정도로 오래 전, 그 세계에 갑자기 격변이 생겨났다.]

그 뒤로 이어진 말에 범수가 놀라며 두 눈을 부릅떴다.

[그 세상 곳곳에 기이한 문이 생기기 시작했지. 그 문은 시간과 공간이 뒤틀린 장소로 연결되었다. 놈들은 그 안을 탐험하고 조사해 보기 시작했지.]

“잠깐··· 설마?”

마령은 무덤덤한 정신파로 긍정했다.

[그래, 이 놈들이 살던 세계에도 던전이 생겨났다고 하더군.]

오거를 비롯한 그 세계의 종족들은 처음에는 그 미궁을 경계했지만, 점차 적극적으로 공략하게 되었다.

그들의 고향에서는 자연적인 경로로 얻을 수 없는 보물들 때문이었다.

[하지만 던전 탐험은 무섭고도 위험한 일이었다. 그곳에는 괴물들이 나왔거든.]

괴물에는 두 종류가 있었다.

죽여서 마정석을 주는 놈들과, 주지 않는 놈들.

[헌데, 놈들 입장에서는 마정적을 주지 않는 던전 몬스터들이 더 무서웠다고 한다.]

그들은 마정석을 주는 몬스터와 비교하여 지능이 매우 높은 이종족들이었다.

[그 ‘똑똑한 괴물’들은 기이한 능력을 지닌 보호구와 무기를 착용하고, 놀라운 요술을 부려서 맨손에서 불을 뿜으며, 날붙이에서 강철도 자르는 푸른 빛을 발했다고 하더군. 종족도 여러 종류였는데, 오거들은 그 중 가장 개체가 많은 이종족에게 ···’탈렌-데이모스‘라는 이름을 붙였다고?! 호오라!]

마지막의 감탄사는 오거의 말을 옮긴 것이 아니라 마령 자신이 내뱉은 것이었다.

[그놈들 외에도 ‘슈레이-피치‘나 ‘안토-브루이’ 같은 이종족도 있었지만 앞선 종족보다는 그 수가 많지는 않았다고 한다.]

알지 못할 종족들의 이름이 이어지더니.

마령은 거기에서 잠깐 통역을 멈췄다.

그리곤 범수에게 묘한 목소리로 언질을 한다.

[어이. 이쯤에서 하나 알려줘야 할 것 같아서 말이야. 매우 흥미로운 내용이군.]

“뭔데?”

[내가 방금 그대로 옮긴 고유 명사··· 그러니까 ‘탈렌-데이모스‘가 오거들 말로 무슨 뜻인줄 아나?]

범수가 알 턱이 없었다.

그러자 마령이 매우 재미있다는 듯이 말했다.

[벌거벗은 원숭이. 혹은, 탈모증에 걸린 원숭이 정도가 되겠군.]

···털 없는 원숭이라고?

[그리고 ‘슈레이-피치‘는 시끄러운 귀쟁이. ‘안토-브루이’는 냄새나는 난쟁이라는 뜻이다. 뭔가 연상되지 않나?]

잠깐만, 설마?

[잠깐만, 이 오거의 머릿속에는 ‘탈렌-데이모스‘··· 그러니까 던전에서 출몰하던 이종족 중에 ‘털 없는 원숭이’라고 불린 종족의 생김새가 저장되어 있다. 내가 보여주지.]

그 말이 끝나자마자.

꾸르르륵!

마령의 어깨에서 검은 기둥이 솟구쳐 오르더니, 오거가 기억하는 ‘지능이 높고 매우 무서운 몬스터’의 형상을 만들어내기 시작했다.

그 형상을 눈에 담은 순간 범수도 경악했지만.

[맙소사! 저건···?!]

아직까지 소환을 해제하지 않고 한 손에 들고 있던 망치, 드래곤 슬레이어에 깃든 요정 역시 경악하며 비명을 질렀다.

요정의 정신파를 듣지 못한 마령은 범수에게 집중하며 묻는다.

[어때, 꽤나 익숙한 생김새이지 않나?]

“······.”

범수는 바로 대답하지 못한다.

그리고 마령이 만들어낸 형체, 복색이 조금 특이하긴 하지만 아무리 봐도 ‘인간‘을 흉내낸 것이 틀림 없는 그 검은 덩어리를 보며 잠시 침묵을 지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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