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5. 나무 (4)
범수가 말을 잇지 못하는 사이.
망치의 요정은 시끄럽게 그의 머릿속에 정신파를 계속 밀어 넣었다.
[주인님! 대체 요상한 괴물이 '저걸' 어디서 보고 흉내낸 거죠?]
“넌 또 대체 왜 그러는 거야?”
요정이 이상하게도 호들갑을 떤다 싶었다.
지금 마령이 범수에게 하는 말은 범수만 들을 수 있다.
따라서 요정은 대화의 반쪽만 들었기에 돌아가는 상황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놀라는 걸까? 마령이 사람의 형상을 만들어 낸 이유도 모르면서.
그때, 요정이 범수의 의구심을 풀어주었다.
[저 옷은··· 제 예전 주인님이 한창 활동하던 시대의 복장이라고요!]
뭐라고?!
마령에 이어서 요정까지 범수를 놀라게 했다.
이 망치의 예전 주인이라면 드래곤 슬레이어이며, 서대륙의 현대 문명이 지금처럼 다시 구축되기 한 참 전의 시대··· 그러니까 ‘고대‘라고 불리던 시절의 사람이다.
요정의 설명에 따르면, 서대륙에 아직 던전이 존재하지 않아서 그런 단어조차 용언에 존재하지 않았던 시절 말이다.
“잠깐만, 그게 정말이야?”
[네! 맞아요. 그 시절에도 시대의 흐름에 따라 복장이 조금씩 바뀌긴 했지만··· 저건 저희 주인님이 한창 용을 잡으러 다닐 때 유행하던 복장이에요! 세세한 부분까지 아주 정확하게 재현했다고요!]
잠깐만, 정리해 보자.
갑자기 쏟아져 들어오는 정보들 때문에 머리가 어질어질할 정도였다.
저 오거들이 던전에 들어오기 전에 원래 살던 세계.
그 세계에 갑자기 나타난 던전에는 털이 없는 원숭이라고 불리는 몬스터가 등장했는데, 그 종족은 결국 인간이었던 것 같다.
‘손에서 불을 뿜어내는 기적은 마법일 테고, 날붙이에서 빛을 발하는 건 오러였을 테지.’
그들 입장에서 그 인간들은 실로 막대하고도 위협적인 적이었을 것이다.
왜냐면 그들의 정체가··· 본래 이 서대륙에 살던 고대인들이었으니까!
심지어 지금 이곳에 사는 엘프와 드워프들의 선조들도 함께 던전에 출몰했던 것 같다.
범수는 고대인에 대해 알고 있는 정보를 떠올린다. 게임의 배경 설정으로 접했던 지식을.
‘현대의 서대륙과는 비교할 수 없는 고도의 문명을 이루었던 이들. 하지만 알 수 없는 이유로 폐허가 된 유적지만 남기고 사라져버렸다. 그리고 그 시절의 문명은 완전히 끊겨 버렸어.’
고대인들이 왜 갑자기 사라져버렸는지, 그 이유는 아직 알려져 있지 않다.
‘던전에서 발견되는 아티팩트들은 대부분 고대인들이 쓰던 도구라는 설정이었지.’
그들이 이 대륙을 지배한 것은 아주 오래 전의 일이다.
현재 살아있는 드래곤들조차 그 시절을 경험한 생존자가 남아있지 않을 정도로.
다만, 대부분의 종족에게는 그때의 기록조차 남겨져 있지 않은 것과는 달리, 훨씬 오랜 세월을 사는 드래곤은 당시의 기록이 가지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추측도 존재한다.
그들은 고대인의 멸망에 얽힌 비밀을 알지도 모른다는 합리적인 의심.
하지만 게임 내에서 드래곤과 독대하여 그 비밀을 물어본 플레이어가 없기에, 아직 추측의 영역에만 머무는 것이다.
‘염후 정도 되는 드래곤이라면 알고 있을까? 만났을 때 물어볼 걸 그랬네.’
하지만 그때는 대뜸 고대인이 멸망한 이유를 아냐며 질문을 할 분위기가 아니였다.
딱히, 그 주제에 큰 관심도 없었고 말이다.
어쨌든 요정이 놀란 것은 놀란 것이고, 범수는 지금 그녀에게 자세한 사정을 설명해 줄 여유가 없었다.
마령이 설명을 이어나갔기 때문이다.
요정이 마령의 설명을 듣지 못했듯이, 마령 역시 요정이 경악하며 내뱉는 소리를 듣지 못했다.
[그래, 아무리 봐도 인간이지? 흥미롭군. 이쪽 세계의 던전에서는 오거 같은 종족이 몬스터로 나오고 인간 등이 그 놈들을 사냥하는데, 저쪽 세계에서는 정 반대였다는 뜻이잖아?]
그러는 사이에도 오거의 영혼은 기억하는 내용을 자신의 언어로 계속 내뱉고 있었다.
영혼의 기록을 읽어내며, 마령의 설명은 계속된다.
[어쨌든 이 오거 입장에서 던전의 인간들은 아주 골치아픈 몬스터였어. 잡아봤자 마정석도 안 주는데 공략 난이도는 엄청 높았다고 하더군.]
그것은 서대륙의 인간들 및 게임의 플레이어들이 오거, 오크, 트롤 등에게 가지는 생각과 거의 비슷했다.
그나마 범수를 비롯한 플레이어들은 경험치라도 얻을 수 있었지만 말이다.
[이 녀석들은 던전 탐사를 계속해 나갔다. 그곳에서 얻는 아이템과 마정석을 탐내며 말이지. 그런데, 갑자기 이 녀석들의 세계에 예기치 못한 위기가 닥치면서 상황이 좀 달라진 것 같다.]
“예기치 못한 위기라니?”
[던전 밖의 세계에 각종 자연 재해가 휘몰아쳤다는군. 약속이라도 한 듯이 일생 한 번 겪을까 말까한 재난들이 겹쳐서 발생했다고 한다.]
어떤 지방에서는 1년 내내 내릴 비가 하룻밤사이 쏟아져서 홍수가 나는가 하면, 바로 옆 지방에서는 긴 시간동안 비가 한 방울도 내리지 않아서 농작물이 다 말라 죽었다고.
[게다가 시도때도 없이 거대한 회오리바람이 불어서 마을을 통째로 날려 버리는가 하면, 본 적이 없는 규모의 해충들이 몰려 들어서 모든 것을 갉아 먹기도 했다는군.]
범수는 등에 식은 땀이 흘러내리는 것을 느꼈다.
이 이야기, 어디에서인가 많이 들어본 이야기다.
‘앞으로 약 3년 후, 서대륙에 닥칠 일과 거의 똑같잖아?!’
이게 정말 우연일까?
그렇게 치부하기는 힘들다는 생각이 든다.
[식량이 모자라자 무슨 일이 생겼을까? 답은 뻔하지.]
그 전부터 완벽하게 평화롭다고는 말할 수 없었던 오거들의 고향.
그 세계에서는 서로의 식량을 탐하며 참혹한 전쟁이 벌어졌다.
[전쟁은 길게도 이어졌지. 먹을 것이 모자라자 그들은 서로 다른 종족을 잡아먹기도 했다.]
그 전까지는 서로를 지성체라고 여기던 이들이 서로를 식량으로 간주하게 된 비참한 세계.
[전쟁은 길었지만, 영원히 이어지지는 못했다. 결국 전쟁을 일으킬 수준의 병력을 동원할 정도의 세력과 통제력조차 유지하지 못하게 되었거든. 그리고, 식량도 모자란 상태에서 사방에 피가 흐르고 생명들이 죽어가니··· 결국 역병까지 번지게 되었지.]
누군가는 지성체가 지성체를 먹기 시작하면서 그 병이 시작되었다고 추측하기도 했지만, 그 진짜 원인은 결국 누구도 알아낼 수 없었다.
[이 오거가 기억하는 것은, 그 병이 정말 지독했다는 것 뿐이야.]
그 역병은 심지어 시간이 지나면서 더 진화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때까지 살아남은 종족들이 치료약을 개발해도, 조금 더 시간이 지나면 그 약이 듣지 않고 증상은 비슷한 또 다른 병이 돌았다.
“비슷한 증상이라고?”
[그래. 그 병에 걸린 이들은 시간이 지나면서 광증을 보였다고 하더군. 처음에는 기억이 좀 왔다갔다 하는 정도로 시작했지만, 날이 갈수록 매우 폭력적으로 변하고, 마침내 이성을 완전히 잃고 괴물처럼 변해버렸다고 해.]
범수의 얼굴이 더욱 심각해졌다.
광증이라면, 마치 광폭화에 걸린 것처럼?
[어쨌든, 살아 남은 사람들은 해결책을 찾아야 했다. 그 중 한 명이 떠올린 것이··· 바로 ‘던전‘이었지.]
“던전은 왜?”
[그곳은 시공간이 뒤틀려 있었기 때문이다. 오거를 비롯한 그 세계의 종족들은, 던전 안에 들어가면 병세가 더이상 진전되지 않는 것을 깨달았다. ]
“···병이 악화되지 않는다고?”
[그래. 병에 감염된 걸 알게 된 이들은 자신을 지키기 위해, 생각할 수 있는 능력과 자아를 지키기 위해, 그리고 주변의 이들을 지키기 위해 스스로의 발로 던전 안으로 들어갔지.]
“하지만 그 안에는 몬스터··· 그리고 침입자들을 공격하는 인간들이 있었다면서.]
정확히는 고대인이라고 불리는 인간들의 선조 및, 엘프와 드워프 같은 종족들의 선조가.
[병이 돌 쯤에는 이미 던전 내의 공략이 상당 부분 진행된 후였다. 지금 이 세계처럼 말이야. 최대한 몬스터가 등장하지 않는 안전한 구역에 머물었다는군.]
서대륙의 사람들도, 던전 안에서는 일정 기간 이상 머무는 것을 엄격하게 금하며 불가피한 상황이 아니면 적당한 타이밍에 지상으로 귀환하도록 주의를 기울인다.
다음 순서를 기다리는 모험가 길드에게 공략할 기회를 주기 위한 약속 때문이기도 하지만, 너무 오래 그곳에 머물면 감각이 회복 불가능할 정도로 망가지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사람의 감각을 일그러뜨리는 던전 그 특유의 기운은 무슨 방법으로도 막아낼 수 없다.
오거의 고향에 살던 주민들도 이미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죽음을 피하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던전에 틀어박히게 된 것이다.
[이 오거도 결국은 시간감각이 흐려졌고, 그곳에서 얼마나 오랜 시간을 보냈는지도 기억하지 못한다.]
오거의 기억은 어느 순간에서부터인가 끊겼다
그리고 죽음을 피하기 위해 고향 세계의 던전으로 숨어들었던 오거는, 지금 이곳··· 전혀 다른 세상, 서대륙과 연결된 던전 안에서 몬스터로 등장했다가 범수의 손에 죽었다.
“······.”
기억을 모두 읽어낸 뒤.
마령과 오거의 영혼을 돌려 보낸 범수는 생각에 잠겼다.
‘이 사실이 시사하는 것은?’
그런데, 그 생각에 더 오래 매달려 있을 여유도 없었다.
찌릿!
황야의 지평선 너머에서 적이 다가오는 것을, 범수의 예민한 감각이 포착해 냈다.
쿵-! 쿵-! 쿵-!
‘2차 웨이브군.’
범수는 망치를 꽉 쥐며 전방을 노려보았다.
그러자 마령과 오간 이야기를 궁금해하던 망치의 요정도 더이상 재촉할 수 없었다.
쿵-! 쿵-! 쿵-! 쿵-! 쿵-!
좀 전에 오거들이 수백이나 몰려올 때보다 더 시끄럽고, 더 크게 땅이 울린다.
잠시 후.
황야의 지평선에 거대한 먼지 폭풍이 피어 올랐다.
그 사이에 섞여 들어 맹렬하게 달려오는 실루엣을 보고, 범수는 상대의 정체를 확인한다.
오거보다도 훨씬 큰 신장. 3미터는 넘는 것 같다. 회색의 피부. 체중은 몇 톤은 되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살인지 근육인지 구분하기 힘든 거대한 덩어리가 몸 곳곳에 덕지적지 붙어 있다.
저 몬스터의 외형에서 가장 특이한 부분은 ‘눈‘이었다.
얼굴에도 대여섯개의 눈알이 붙어있는 것은 물론이고, 헐벗어서 그대로 드러난 가슴에도 열 개가 넘는 눈이 옹기종기 모여서 광기에 서린 눈빛을 빛내고 있다.
범수는 그 정체를 입 밖에 낸다.
“아르고스!”
그 목소리에는 범수 답지 않게 약간의 당혹감이 섞여 있었다.
지평선 너머에서 달려오는 수백의 아르고스.
놈들은 잡으면 마정석 주는 몬스터다. 경험치 외에도 부가 수익을 기대해 볼 수 있다는 뜻이다.
그건 반가운 일이지만, 범수가 놀란 이유는 따로 있었다.
‘두 번째 웨이브에서 아르고스가 나와? 저 놈들은 적어도 다섯번째는 되어야 나오는 놈들 아니었나?’
등장 순서가 너무 빠르다.
하지만 그 생각에 매달려 있을 여유가 없었다.
아르고스 떼는 그 거대한 덩치에서 상상하기 힘들 정도로 빠르게 다가왔다.
범수는 체내를 살핀다. 아직 마나가 넉넉치 않다.
‘일단 몇 마리 잡아보고 나서 판단해 볼까?’
평균적으로 아르고스 한 마리가 주는 경험치는 오거 보다 훨씬 컸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다.
촤르르륵!
망치에 의지를 전하자, 등의 용골 조각들이 하늘로 분수처럼 치솟으며 드래고닉 실드의 형태를 만든다.
범수는 둥실 떠오른 그 방패 위에 뛰어 올랐다.
“가자!”
쒸이이이익!
바람을 찢으며 앞으로 돌진한다.
그러자 아르고스들의 수많은 눈들이 일시에 범수 쪽으로 꽂혔다.
동시에.
우-웅!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눈동자에 붉은 빛이 서렸다.
그것은 광폭화에 걸린 광기의 빛이 아닌, 마법적인 에너지가 만들어낸 적색이었다.
잠시 후.
팟!
파파파팟!
아르고스들이 일제히 눈에서 붉은 색 레이저를 뿜어냈다.
저 몬스터 특유의 원거리 공격!
이미 오거를 능가하는 강대한 괴력을 가졌음에도, 위협적인 레이저 공격까지 퍼붓는 실로 까다로운 몬스터다.
하지만 그 공격을 이미 예상한 범수는, 레이저가 쏟아져 나오기 직전에 이미 망치에게 의지를 밀어 넣은 후였다.
쒸이익!
범수가 탄 방패가 부드럽게 귀도를 바꾼다.
그러자, 방금 전까지 그가 날아가고 있던 허공을 붉은 광선들이 태우며 스쳐 지나갔다.
신출귀몰한 움직임으로 적광의 빗줄기 사이를 누비며 적들과 사이를 좁히는 범수.
그리고 전방에 달려오는 놈 하나를 노려서, 그 머리 위로 내려 꽂히더니.
“하압!”
힘껏, 망치를 휘두른다!
부-웅!
무거운 소리가 울리더니.
콰직!
아르고스의 머리가 잘 익은 수박처럼 터져 나갔다.
단 한 방.
바로, 그 순간이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절호의 타이밍.
범수는 쾌재를 불렀다.
“좋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