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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 속 힘법사가 사는 법-138화 (138/145)

138. 나무 (7)

그것을 진화라고 해야 할까, 아니면 적응이라고 해야 할까?

피를 흡수하면서도 씨앗은 알았다.

이것은 본래 자신의 종에게서는 있을 수 없는 현상이라는 것을. 자신은 본래 하늘에서 내려 쬐는 태양의 빛에 반응하고, 빗물을 빨아들이며, 이미 오래 전에 죽어 스러진 생물이 흙 속에 남긴 양분에 의지하여 살아가는 생물이었다.

방금 죽은 동물의 피를 흡수하여 양분으로 삼는 종류가 아니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씨앗은 환희에 가까운 충족감을 느꼈다.

[···할 수 있다. 이걸로 대체할 수 있어!]

목마른 목을 축이듯, 씨앗은 게걸스럽게 몬스터들의 혈액을 빨아들였다.

그러자 씨앗의 절박함에 호응하듯, 일상적인 상황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 벌어졌다.

몸에 스며든 혈액의 수분과 그 안에 들어있는 에너지가 씨앗과 반응하기 시작한 것이다.

동면에 가깝게 멈춰 있던 생체 시계의 바늘이 다시 움직였다. 잠들어 있던 생명력은 오랜 세월을 기다린 발아로 이어졌다.

싹을 틔웠다.

[드디어!]

그 뒤로도 씨앗이 싹을 틔운 땅에는 종종 몬스터의 피가 뿌려졌다.

정기적이진 않았으나 ‘바깥 세상’의 모험가들은 이따금 이 공간으로 들어와 몬스터를 사냥했고, 그들이 죽으면 또 다른 몬스터가 생겨났다. 이지를 명확하게 갖춘 씨앗은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를 판단할 수 있었다.

세월이 흐를수록 모험가들의 수는 늘어났다. 인간을 비롯한 몇 개의 종족들은 이곳의 몬스터들이 몸 속에 품은 마정석이나 그들이 들고 있는 무기를 노렸다.

인간들은 황야에 돋아난 잘 보이지도 않는 싹에는 큰 주의를 두지 않았다. 간혹 그들에 의해 짓밟히기도 했지만, 싹은 기이할 정도로 강인한 생명력 덕분에 죽지 않았다.

그렇게 긴 시간이 흐른 뒤, 싹은 어린 나무가 되었다.

***

나무는 그 후로도 있는 힘껏 뿌리를 뻗고, 근방의 대지에 스며든 피를 빨아들였다.

하지만 나무는 곧 한계를 느끼게 된다.

[이 이상 뿌리를 넓게 뻗을 수는 없다.]

이 황야에서 몬스터는 랜덤으로 소환되었고 바깥 세계의 종족들과 그들 사이의 싸움도 나무의 뿌리가 닿지 못하는 곳에서 벌어지는 일이 더 많았다.

허나, 나무는 더 성장하고 싶었다. 그는 깊고도 깊은 갈증을 느꼈다.

그 절박함은, 이번에도 더 큰 성장의 원동력이 되었다.

[내가 그들의 전장까지 뿌리를 뻗을 수 없다면.]

아주 간단하면서도 핵심에 닿아 있는 발상이었다.

[그들의 전장을 내 뿌리 가까이로 옮기면 될 터!]

갈망에 응답하듯, 나무는 한 가지 능력을 개발시켰다.

피를 흡수하여 성장하는 능력이 그랬던 것처럼, 이번의 능력 역시 종 본연의 것이라고는 볼 수 없었다.

기적에 가까운 일이었지만 이번에도 나무는 해냈다.

애초에 평범한 식물을 초월하는 종이기에, 이렇게 계속 새로운 능력까지 개화해 낸 것일지도 모른다.

[더 먼 곳에, 더 강한 몬스터가 있다.]

땅이 들려준 목소리를 통해 나무는 그것을 알고 있었다.

뿌리가 닿지 않는 먼 곳을 향해, 나무는 새로 얻게 된 힘을 발한다.

나무는 그들을 불렀다.

[이리로 오라!]

나무는 몬스터를 유인하는 파동을 발산할 수 있게 된 것이었다.

시도를 반복하며, 성공과 실패를 교차하여 경험한 끝에 나무는 알았다. 자신이 아직 너무 강하거나 지나치게 멀리 있는 몬스터는 부를 수 없다는 것을.

하지만 연습을 거듭한 끝에 약한 몬스터는 나무가 유도하는 대로, 그와 가까이 달려들도록 꾀어낼 수 있었다.

나무는 그 능력을 적절한 타이밍에 사용했다.

- 뭐, 뭐지?! 몬스터들이 갑자기 저 나무로 몰려들고 있어!’

바깥 세상에서 새로운 공략자들이 들어온 순간, 나무는 그 능력을 발휘했다.

-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알아서 몰려드니 일단 저 녀석들을 해치우면 되겠군!

모여든 괴물들을 따라 몰려든 모험가들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이 상황 자체가 나무가 의도한 것이라는 것을.

- 와, 평소보다 훨씬 빠르게 사냥이 끝났는걸?

- 우리가 찾아 헤맬 필요가 없이 자기들이 알아서 찾아오니 당연하지!

- 그런데, 대체 뭐가 원인일까? 이 나무는 몇백 년 전부터 여기에 있었다는데 말이야. 왜 갑자기 여기로 달려들기 시작한 거지?

모험가들은 혹시 나무에 뭔가 있을까 싶어 주의 깊게 살폈지만, 그들의 능력으로는 특별한 점을 찾아볼 수 없었다.

- 어쨌든 오늘은 운이 좋군. 너무 쉽게 끝났어.

- 앞으로도 계속 이런 식으로 할 수 있으면 좋을 텐데 말이야.

- 하하! 오늘은 놈들이 단체로 미쳐버린 모양이지만, 앞으로도 이런 행운이 계속 이어질 수 있겠어? 행운의 여신께서 나서주지 않는 이상은.

- 그렇겠지?

모험가들의 대화를 나무는 계속 듣고 있었다.

그는 생각했다.

앞으로도, 계속?

- 저, 저기 좀 봐...!

- 뭐야. 설마··· 저거 또 몬스터야?!

- 저 미친 놈들이 또 여기로 몰려든다!

나무의 능력이 허락하는 만큼 웨이브가 이어지고, 모험가들의 능력이 허락하는 만큼 사냥에 성공한 뒤.

두둑한 마정석과 수확물을 챙겨서 철수한 모험가들은 자신들이 경험한 사실을 세상에 알렸다.

그 소문은 빠르게 퍼졌고 이제 모험가들은 이 던전에 들어오면 여기저기 돌아다니는 대신 나무 곁에 붙어서 웨이브를 기다렸다.

- 온다! 놈들이 온다!

- 맙소사, 그 소문이 사실이었어?

그러면 나무가 몬스터들을 불렀고, 모험가들은 그들을 가차없이 도륙했다.

나무 입장에서 다행인 것은, 바깥 세상의 탐험가들은 몬스터들의 사체에 전혀 관심이 없었다는 점이다.

그들은 몬스터의 마정석과 무기만 빼앗고 피와 고기, 내장 따위는 대지 위에 굴러다니게 두었다. 그것은 나무가 남김 없이 흡수했음은 물론이다.

서로가 서로를 만족시키는 공생관계의 시작이었다.

***

그렇게 다시 기나긴 세월이 흘렀다.

모험가들은 계속 던전을 찾았다. 가끔은 몬스터 대신 탐험가들의 시체가 황야 위에 널브러지곤 했다.

수습할 동료마저 남지 않고 전멸한 경우, 그들의 사체는 몬스터들의 그것과 뒤섞여 피를 흘렸다. 나무는 차별없이 그 모두의 몸뚱어리 역시 흡수했다.

시간이 지나며 나무는 하늘에 닿을 듯 성장했고 크기가 커짐에 따라 흡수하는 능력 역시 고도로 발전시켰다.

언제부터인가 그는 마나의 존재를 인지했고, 외부의 탐험가들이나 몬스터들이 소지한 무구 중에 마나가 깃든 것이 낮은 확률로 섞여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바로 아티팩트였다.

[이런 것들 역시 내가 흡수할 수 있을 것 같군.]

그는 시도했고, 이번에도 성공했다.

나무는 이제 몬스터와 인간의 사체뿐만 아니라, 그들이 장비한 아티팩트 역시 빨아들였다.

그 능력은 더 많은 모험가들을 유혹하는 데 일조했다.

- 아니, 저 나무 좀 봐! 지금, 열매가 맺히는 거 맞지

- 이런 일은 아직까지 한 번도 없었는데?

나무는 자신의 내부에 흡수했던 아티팩트를 다시 열매로 맺는 형식으로 그들에게 돌려주었다.

물론 공짜는 아니었다. 그들이 충분한 수의 몬스터를 죽여서, 양분이 될 사체를 대지에 환원시킨 뒤에야 그 가치에 응당하는 아티팩트를 내주었으니까.

- 맙소사, 열매 안에서 마법 방패가 나왔어!

- 이건 기적이야!

그러자 이 던전을 찾는 모험가들이 더 많아졌다. 당연한 일이었다.

그 상태로 또다시 헤아릴 수 없는 긴 시간이 흘렀다.

이제 외부의 모험가들은 정기적으로 찾아왔다. 오가는 대화를 들으니 자기들끼리 순번까지 정해가며 오는 것 같았다. 나무가 그들에게 줄 아이템의 고갈을 걱정해야 할 정도였다.

헌데, 고갈을 걱정하기 전에 더 큰 우려가 나무를 덥쳤다.

바로 그의 생의 목적에 대한 것이었다.

나무는 무엇을 위해 사는가?

[나는··· 이미 충분히 성장했다.]

본능이 속삭여 준 나무의 세 가지 소명.

그 중 첫번째 사명은 이미 이뤘다.

나무는 충분히 크게 자라났다. 더이상 성장할 수 없는 크기까지.

사람과 괴물을 흡수하며 자랐기 때문인지 푸른 잎이 돋아나지는 않았다. 마치 겨울의 나무처럼 헐벗은 상태다. 하지만 그 몸집 만큼은 한계에 도달했음을 나무는 알았다.

허나, 문제는 다음이었다.

본능 속에 깃든 두 번째 사명을 이 상태로는 이룰 수 없음을 통감한 것이다.

[성장하고 힘을 키운 뒤에는 그 힘을 다시 이 땅에 돌려주어 생명체들을 번성시키는 것···!]

이 땅에서는 도저히 다른 생명체들을 번성시킬 수 없었다.

황야에 존재하는 생물은 몬스터 뿐.

이들은 번식을 거의 하지 않고, 뒤틀린 공간을 통해 알 수 없는 장소로부터 전이되었다.

또한 이 황량한 땅에는 다른 식물조차 자라날 수 없다.

[방도는 무엇인가?]

나무는 고뇌한다

두번째 사명을 이룰 수 없다면, 자신이 이곳에 더 존재해야 할 이유는 무엇인가?

기나긴 시간을 들여 고민한 뒤, 나무는 결단을 내렸다.

[이대로 두번째 사명을 이룰 수 없다면, 세번째 사명이라도!]

나무의 세번째 사명은, 생명을 다하기 전에 다음 세대를 위한 씨앗을 남기는 것.

하지만 정상적이지 않은 방법으로 성장했기 때문인지, 나무에겐 아직 열매를 맺을 힘이 없었다. 성장의 한계점까지 도달했는데도 말이다.

그가 원하는 바를 이루기 위해서는, 더 강한 생물의 피와 고기가 필요하다는 것을 나무는 알았다. 지금까지 흡수한 몬스터로는 부족했다. 아직 먹어본 적 없는 대상이 필요하다.

또한 땅의 속삭임을 통해, 나무는 황야의 저 먼 곳에 그런 몬스터가 있다는 걸 알았다.

나무가 배운 적 없는 그 몬스터들의 이름은 베히모스였다.

이 황야에서 유일하게 나무가 아직 유인에 성공하지 못한, 다른 어떤 종보다도 강력한 몬스터.

[저것들까지 먹어치우면 열매를 맺을 수 있을 터인데!]

하지만 한계까지 자란 나무의 힘으로는 그들을 부를 수 없었다.

베히모스는 나무의 부름에 저항했다.

***

상황이 변한 것은 정체 불명의 인간들이 와서 이 땅에 무언가를 묻었을 때부터였다.

- 근데, 여기가 적합한 던전이긴 해?

그들은 그동안 봐 온 모험가들과는 달랐다.

나무는 그들이 들어오자마자 당연히 웨이브를 기다릴 줄 알고 몬스터들을 불러 주었다.

헌데, 일반적인 모험가 파티에 비교하여 훨씬 소수였던 그들 중 세 명만이 매우 귀찮은 듯한 태도로 (하지만 동시에 매우 빠르고도 효율적으로) 몬스터들을 학살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나머지 두 명은 예기치 못한 행동을 취했다.

땅을 파고, 이상한 아티팩트를 묻기 시작한 것이다.

나무가 그전까지 본 적이 없는 형태의 아이템이었다.

[저건··· 무엇이지?]

그 후, 그 기이한 모험가들은 첫번째 웨이브가 끝나마자마 나무가 맺은 열매를 회수하더니 별로 기쁜 기색도 없이 돌아가버렸다.

두번째 웨이브를 기다리지도 않고 말이다.

그리고 이어진 것은, 이미 범수가 실험을 통해 입증한 현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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