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게임 속 힘법사가 사는 법-144화 (144/145)

144. 배후 (5)

***

대륙의 북쪽 끝.

일년 내내 겨울에 가까운 추운 날씨가 이어지는 극한의 땅.

먼 옛날부터 이 땅에는 두 종족이 서로를 적대시하면서 살아왔다. 하나는 눈의 엘프라고 불리는 검은 머리의 엘프이며, 다른 하나는 신장이 3미터에 달하는 거인족이었다.

그 두 세력 간 전쟁은 거인족의 승리로 끝났고, 눈의 엘프는 거인족에게 복속되었다.

그리고 또 긴 시간이 지나 제국이 세워진 뒤, 초대 황제는 거인족들이 다스리는 북쪽 끝의 동토마저 자신의 영토로 만들고 싶어했다.

자존심이 강한 거인족들이 쉽게 무릎을 꿇지 않으리라는 모두의 예상과 달리, 거인족들은 큰 저항 없이 황제에게 충성을 맹세했다.

세간의 예상이 틀린 것은, 거인족들이 ‘강자’에게 존경과 충성을 바치는 문화를 제대로 이해해지 못했기 때문이다.

제국이 성립되는 과정에서 벌어진 전쟁, 몬스터들을 상대로 하여 거침없이 공세를 가한 제국군의 저력을 거인족들은 똑똑히 목격했다. 제국과 한 편에 서서 같이 싸웠기 때문이다.

개인의 무력이 아닌 집단의, 군대의 힘이 어떤 것인지 뼈저리게 체감한 거인족은 자신들에게 승산이 없음을 깨달았고, 자신보다 더 강한 집단인 제국에게 복속되는 것을 택했다.

기후 조건이 너무 열악하고 제국의 중심에서 너무 멀었기에 행정관이나 영주를 보내는 대신 거인족들이 자치하는 것을 허락받은 북극의 영토.

그 자치령에서도 인적이 극히 드문 어딘가에서, 마법적인 빛이 번뜩였다.

파앗!

빛이 사그라든 뒤 그 자리에 서 있는 남자는 정령사, 파이였다.

그는 두 갈래로 찢은 텔레포트 스크롤을 쥔 채 엄습하는 추위 때문에 몸을 떨었다.

“크윽!”

평범한 사람이라면 동사하기에 딱 걸맞은 추위.

파이는 즉시 정령을 불러 들인다.

“와라!”

화르륵!

그러자 불의 정령이 순식간에 소환되어 따스한 열기로 소환자의 몸을 감싼다.

정령이 뿜어낸 불은 파이의 옷자락을 태우는 일 없이 딱 적당한 온기로 그를 보호했다.

심장이 멎을 것 같던 추위가 물러난 것을 느끼며, 파이는 전방을 보았다.

사방이 순백의 눈으로 덮인 공간.

그 한가운데에 우뚝 선 성채가 하나 있었다.

그것은 현대의 인간을 포함한 그 어떤 종족들의 건축 양식과도 다른 기묘한 모습이었다.

‘내가 여길 또 오게 되다니.’

그렇게 중얼거리며, 파이는 성문을 향해 걸어나갔다.

그는 저번에는 텔레포트 스크롤이 아닌 다른 방식으로 이곳에 온 적이 있었다.

저 성채는 먼 옛날에 눈의 엘프들을 다스리던 지배 계층이 살았던 곳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민간에 전해지는 전설에 따르면, 저 성 내부는 지금 텅텅 비어있다.

사실 저곳의 거주민들이 실종된 것은 눈의 엘프와 거인족 간의 전쟁이 한창이던 시절에 벌어진 일이었다고 한다. 눈의 엘프들을 대표하던 고귀한 지배자는 물론, 그녀를 따르던 측근과 그녀의 친족들까지 하루아침에 흔적도 없이 신기루처럼 사라져버렸다는 쉽게 믿기 힘든 이야기가 전해진다.

팽팽하게 균형을 이루던 두 종족 간의 싸움에서 승기가 순식간에 거인족 쪽으로 넘어가고, 눈의 엘프들이 속수무책으로 함락당한 것은 지도층이 하루아침에 사라져버린 그 사건의 영향이 컸다는 이야기도 있다.

하지만 이 지역의 지배하게 된 뒤에도, 거인족들은 감히 저 성채 가까이로 접근하지 못했다. 그것은 나중에 통치권을 빼앗은 제국도 마찬가지였다.

거인족을 복속시키고 자치령의 곳곳을 시찰하던 제국군은, 거인족들이 저 성에는 절대 가까이 가지 않으려 드는 것을 보고 당황하게 된다.

- 뭐? 저주 받은 성이라고?

제국군을 이끌고 이곳까지 온 장군은 그 이야기를 미신으로 치부하지는 않았다.

그는 이 세계를 사는 사람답게 각종 신비를 이미 체험해 보았고 또 두려워할 줄 아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장군은 고집을 부려 성으로 진격하는 대신, 거인들이 말하는 대로 실험을 해 보았다. 사형이 예정되어 있었던 탈영병을 그곳으로 걸어가게 만든 것이다.

그리고 긴 시간을 뛰어 넘어 지금, 성을 향하는 길목을 걸으며 파이는 생각했다.

‘저 옛 양식의 군복을 입은 남자가 그때의 그 탈영병일까?’

파이가 바라보는 곳에는 얼음 동상이 우뚝 서 있었다.

그 안에는 경악한 표정으로 얼어붙은, 인간으로 보이는 남자 한 명이 갇혀 있었다.

이런 얼음 동상은 한, 두개가 아니었다. 파이로서는 짐작하기 어려운 긴 세월동안 수가 쌓여 왔을 동상들은 성으로 이어지는 길을 가리키는 안내판처럼 쭉 늘어서 있었다.

종족도 다양하고, 개중엔 지성체로 볼 수 없는 동물도 많다.

그 모두가 성으로 너무 가까이 접근했다는 이유로 저주를 받아 얼어붙은 것이다.

‘제국도 포기할 만하지. 제아무리 뛰어난 마법사를 데려와도 이 저주의 근원을 파악하지 못하고, 이미 걸린 저주를 푸는 방법도 찾아낼 수 없었을 테니.’

결국 제국 역시 거인족과 마찬가지로 저 성채의 비밀을 파악하는 것을 포기하고, 더이상 이 지역에 제국민이 접근하는 것을 금했다.

그리고, 그들을 그렇게 만든 알 수 없는 힘이 파이에게도 영향을 미치기 시작했다.

스으으으!

그의 몸으로 상식을 초월한 한기가 스며든다.

정령이 만든 불길로 몸을 보호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파이는 자신의 피부 위에 서리가 맺히는 것을 발견했다. 본래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파이는 공포를 느끼지 않았다. 표정 하나 바뀌지 않고 계속 앞으로 걸어 나간다. 이미 한 번 경험한 일이기 때문이다.

화르륵!

정령이 당황한다. 파이는 불의 정령을 안심시켰다.

“걱정하지 마. 그냥 두면 돼.”

그러자, 정령사가 장담한 대로 되었다.

한기가 파이의 몸 속으로 스며들어 그를 동결시키기 전에, 파이의 체내에 존재하는 기운이 반응한 것이다.

스으으!

그의 동료들과 마찬가지로 파이 역시 검은 기운을 보유하고 있었다.

칠흑의 안개 같은 무언가 스멀거리며 새어 나와 한기를 밀어냈다.

덕분에 얼어붙지 않고 파이는 계속 걸음을 옮긴다.

이윽고 성문 앞까지 도달한 파이는 다시 한 번 걱정했다.

그 분의 정신이 이곳에 없으면 어떡하지?

그것은 파이가 예측할 수도 통제할 수도 없는 영역이었다.

끼이이익!

오랜 시간동안, 눈의 엘프는 물론이고 거인족과 인간, 그 외 어떤 종족의 출입도 허락하지 않은 저주 받은 성의 문이 열린다.

파이는 안으로 들어섰다. 내부는 헤아리기 힘든 오랜 세월에도 불구하고 먼지 한 톨 보이지 않았다. 시간의 흐름을 완전히 벗어난 것 같은 기묘한 광경.

하지만 살아 있는 존재의 기척은 없다.

당황하지 않고 기억하고 있는 방향으로 파이는 계속 나아갔다. 1층의 넓은 홀을 가로질러 어떤 문으로 들어간다. 나선으로 이어진 계단을 계속 올라 도달한 것은 이 성채에서 가장 높은 첨탑의 내부였다.

“아!”

파이의 얼굴에 안도감과 공포가 동시에 스쳐 지나갔다.

첨탑의 창문 바로 앞에 놓인 예스러운 의자. 그 위에 어떤 남자 한 명이 앉아 있었다.

창 밖을 내려다보는 상대의 얼굴은 파이가 있는 곳에서는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이목구비를 확인할 필요도 없었다. 그의 뾰족한 귀와, 순백의 머리카락만 봐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이곳에 자신보다 먼저 와 있었다는 사실만으로도 충분했다. 파이는 바로 무릎을 꿇었다.

“······”

그를 비롯한 동료들에게 다른 이들을 초월하는 힘과, 잊혀진 옛 지식을 전수해준 존재.

그들의 여기까지 이끈 배후를 향해 머리를 조아리며 파이는 말했다.

“위대한 드래곤, 시엘라르칸을 뵙습니다.”

파이의 인사를 받은 드래곤은 대꾸 없이 잠시 창 밖을 계속 내려다보고 있었다. 사방을 하얗게 덮은 눈과 산 채로 얼어붙은 얼음 동상밖에 없는 바깥에서 어떤 의미를 발견하려는 듯이.

그리고 잠시 후, 파이를 향해 고개를 돌리지도 않고 이렇게 말했다.

“고하라.”

목소리가 약간 잠겨 있다.

파이는 그를 반 년 만에 보는 것이었고, 지금 잠에서 막 깬 상태임을 알 수 있었다. 잠에서 깬 것 역시 반 년만의 일일까? 거기까지는 알 수 없었다.

파이는 여기까지 달려온 이유를 설명하기 위해, 반 년 동안 있었던 일을 아뢴다.

“······”

파이의 설명이 끝난 뒤, 시엘라르칸은 이렇게 말했다.

“넷이나 죽었군.”

“······?!”

파이는 당황했다.

그는 상대에게 알카드와 알료사의 죽음은 보고했으나, 나머지는 아직 확인되지 않았다고만 언급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용은 이미 단언하고 있다.

“아인켈과 사피나는 죽었다. 네가 이미 확인한 다른 둘처럼.”

“그런···!”

“내가 ‘이 육신’에 있는 사이에는 느낄 수 있다. 너희들 몸에 넣어 준 힘을 말이야. 그 중 총 네 명의 기운이 사라졌군. 죽었다는 뜻이지.”

파이가 몰랐던 사실이었다.

또한, 파이는 시엘라르칸이 지금의 육신에 실로 오랜만에 그 정신을 옮겨 왔다는 것 역시 알 수 있었다.

그런 그의 상념을 드래곤의 목소리가 다시 끊어냈다.

“참으로 어리석은 짓을 했군.”

“···네?!”

“반년 전, 너희에게 던전의 사기를 응축시킬 수 있도록 아티팩트를 주었지. 그때 너희에게 내가 내린 명령은 단 두 가지였다. 변이체의 마정석을 최대한 많이 모을 것. 그리고, 제국이 그 사실에 신경을 쓰지 못하도록 다른 근심거리를 던져 줄 것. 기억하나?”

파이는 움츠러들며 답했다.

“기억합니다.”

“헌데, 내가 언급한 적도 없는 고대의 인장은 왜 찾아 다닌 거냐?”

파이의 이야기에서 지시하지 않은 내용을 발견하고 추궁하는 것이다.

정령사는 고개를 숙이며 변명하듯 말했다.

“황실에서 첩보를 입수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이미 황제의 역할을 상당부분 대신하고 있는 황태자에 대한 것이었다.

“황태자, 카실리온 2세는 고대의 인장에 흥미를 보이고 정보를 수집하는 중입니다. 그 목적은 암왕의 시선을 끌지 않고 제국군을 강화시키는 것입니다.”

제국군의 수를 늘리는 대신, 인장의 원리를 흉내내 암왕 몰래 제국군 병사를 초인으로 탈바꿈하려는 계획.

그것이 성공했다간 앞으로 순례자들의 계획에 지장이 생길 것이 명백했다.

그런 와중 ‘우연히’ 파이가 인장의 소유자로 의심되는 인간의 존재를 발견했고, 그 정보를 토대로 사피나가 계획을 짠 것이다.

제국이 확보하기 전에 인장을 자신들이 먼저 손에 넣기로.

여기에서 그들의 실수는, 잠에 든 드래곤의 허락을 받지 못한 채 일을 진행했다는 것이었다.

시엘라르칸이 말했다.

“쓸데없는 짓을 했군. 굳이 건드리지 않아도 될 자를 건드렸다.”

“······?!”

드래곤은 이어서 중얼거렸다.

“그나저나, 내 예상을 뛰어넘었구나. 그 짧은 시간에 이토록 강해지다니.”

파이의 얼굴이 혼란으로 물들었다.

용이 강해졌다고 평하는 그 대상이 자신들은 아닐 것이기에.

“그나저나··· 죽은 넷 중 적어도 셋은 ‘그’의 손에 죽은 것이 확실한데. 더군다나 지금까지 이야기를 들으면 너희들과 몇 번이고 계속 얽혔구나. 그렇군, 굳이 건드리고자 하지 않아도 그럴 수밖에 없도록 상황이 흘러갔나? 내가 그 방향으로 유도한 적은 없는데 말이야. 우연으로 치부하기 어려울 정도군. 운과 확률을 관장하는 여인이 개입하여 희롱이라도 한 것인가?”

“······.”

말뜻을 알아듣지 못한 파이의 얼굴이 흐려진 사이, 백발의 드래곤이 다시 말했다.

“허나, 한 가지는 칭찬하겠다. 그 맹랑한 레드 드래곤을 동부에 보냈다고?”

“···네. 금역의 주인은 아직도 하이 엘프 거주지 근처에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래. 현 상황에서 가장 골치 아픈 두 드래곤을 서로 붙어 있게 만든 것은 잘했다.”

극동에 둥지를 튼 드래곤은 시엘라르칸 입장에서 눈의 가시같은 존재였다.

또한 금역의 주인, 염후는 그새 변이체 및 던전에 얽힌 계획을 망가뜨린 원흉으로 떠올랐고 말이다.

파이는 조심스럽게 묻는다.

“이제 다시 잠에서 깨셨으니 그들을 직접 죽이실 겁니까?”

용은 고개를 젓는다.

“아직 이 몸으로는 안 돼. 대부분의 힘이 다른 몸에 남아 있다. 그러니 적당한 도구를 찾아야겠지.”

마지막 문장을 말하는 그의 시선이 파이에게 잠깐 머물렀다.

시엘라르칸은 생각한다. 여태까지 써 온 ‘저 도구’로 두 드래곤을 상대하는 것은 역부족이리라.

또한 안배했던 다른 도구는 엉뚱한 곳에 정신이 팔린 것처럼 보인다.

그럼 누구를 택할 것인가?

잠시 생각에 잠겼던 시엘라르칸은 답을 찾아냈다.

가끔은 목표가 수단을, 수단이 목표를 겸할 수도 있는 법.

백발의 엘프는 흡족한 듯 미소짓는다.

“그래··· 서로가 서로를 죽이게 만드는 것도 좋겠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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