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5. 염후의 의뢰 (1)
알카드의 영혼이 토로한 비밀을 모두 머릿속에 집어 넣은 뒤.
범수는 마령과 그의 영혼을 손목의 인장으로 다시 돌려보냈다.
그 후, 방금 입수한 정보를 처리하는 그의 머릿속이 매우 복잡해졌다.
‘내가 예상했던 것과 일치하는 정보도 있지만··· 예상을 아주 초월하는 부분이 더 많은 걸?’
그리고 빙의 되기 전에 알았던 이 게임, [The LIFE]의 메인 스트림 스토리와도 매우 긴밀한 연결이 되어 있었다.
그 게임이 이 세계의 현실을 투영하여 만들어 진 것이라면, 범수가 플레이를 하던 시점을 기준으로 아직 밝혀지지 않은 비밀이 많았음을 범수는 새삼 깨닫는다.
‘유저들이 알고 있던 진실이 다가 아니였어. 그 이면에는··· 이런 일들이 벌어지고 있었던 거구나.’
순례자들의 배후.
이것은 게임 내에서는 아직 언급조차 된 적 없는 부분이었다.
범수는 진정한 흑막이 누구인지 이제서야 알게 되었다.
그 ‘드래곤’에 대해 좀 더 생각하기 전, 범수는 지금 당장 처리해야하는 현실적인 문제로 다시 시선을 돌린다.
이 던전에서의 용무는 전부 끝났다.
그럼 바로 저 게이트 밖으로 복귀하면 되는가?
‘아니, 아직 안 돼.’
방금 알카드의 기억을 훑으면서, 그를 포함한 순례자들이 게이트 밖에서 무슨 만행을 저지르고 왔는지 범수는 확인했다.
‘입구의 행정관과 병사들을 잔혹하게 살해했지.’
이대로 돌아갔다간, 자칫 잘못하면 범수가 그 범인으로 몰릴 리스크도 존재한다.
‘여기에서 조금만 기다리자.’
범수는 알카드의 기억을 통해 얻은 추가적인 정보를 떠올린다. 그는 병사들을 살해하기 전에 나름 충분한 조사를 했던 것 같다.
이곳의 병사들은 정기적으로 교대를 하는데, 그 주기가 지금으로부터 몇 시간 남지 않았다. 순례자들은 그들이 이곳에 나타나기 전에 범수를 처리하려는 계획이었다.
‘곧 게이트를 점검할 마법사와 교대 병력이 함께 도착할 거다.’
그들은 게이트 앞에 널브러진 시신들을 보고 경악할 것이다.
그리고 증거를 찾다가 서류를 확인할 텐데, 그곳에는 마지막으로 이곳을 공략하기 위해 들어간 사람의 이름··· 즉, ‘범수’의 이름이 선명하게 기록되어 있을 터.
‘거기에는 내가 던전 게이트로 들어간 걸 확인한 다음 행정관이 친필로 남긴 서명이 적혀 있겠지.’
범수가 이 게이트로 들어가기 전까지, 행정관을 비롯한 병사들은 살아있었다는 증거가 된다.
그리고 게이트를 점검하기 위해 함께 온 마법사는 자신이 할 일을 할 것이다.
보통 이런 게이트에는 왕국 소속의 마법사들이 걸어 놓은 주문이 존재한다. 그 마법에 접근할 수 있는 마법사는 주문이 기록해 놓은 게이트의 출입자들을 더블 체크 할 것이고, 범수가 게이트에 들어간 이후 다시 나오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여기까지만 그들이 확인하면 범수는 살인 누명을 벗을 수 있다.
‘그런 다음 마법사는 이 범행을 저질렀을 유력한 용의자들의 얼굴을 확인하겠지.’
범수가 게이트에 들어간 뒤, 서류에 기록되지도 않은 순례자 세 명이 추가로 들어가고 그 중 다시 한 명이 다시 나오는 모습을 마법사는 확인할 터다.
그리고 당연히도, 이들이 게이트에 들어갈 때까지 행정관이 살아있었다는 사실을 나타낼 증거는 없다.
혐의는 범수에서 순례자들 쪽으로 자연스레 넘어가는 것이다. 그들이 죽인 것이 사실이기도 하고.
‘조금만 기다리자.’
잠시 후.
범수가 예상한대로 게이트의 표면이 출렁였다.
우우웅-!
잔뜩 긴장을 한 채로 쏟아져 나오는 왕국의 병사들과, 그들 뒤를 따라 나오는 마법사.
“아니···?!”
그들은 눈에 적개심을 띄운 채 범수와, 그의 발치에 널브러져 있는 키메라의 불타버린 잔해를 바라보았다.
그 직후.
“허억?!”
마법사가 기겁을 하며 한 곳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나··· 나무가!”
그가 응시하는 곳에는, 지금까지 이 던전에 수많은 모험가들을 유인한 ‘과실’을 제공했던 이름 모를 나무가 말라 비틀어져 죽은 것이 보였다.
마법사가 넋이 나간 듯 머리를 쥐어 잡는 사이, 병사들 중 대표로 보이는 경계심 가득한 목소리로 물었다.
검은 머리 덕분에 그의 정체를 추측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다··· 당신이 범수 부캐님입니까?”
범수는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맞습니다.”
그리고는, 주변 환경을 둘러보며.
대체 이곳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영문을 알 수 없어 하는 그들을 향해 덧붙였다.
“아무래도 설명이 필요하겠군요.”
***
범수의 짧고도 핵심만 명확하게 요약한 설명이 끝난 뒤.
간신히 패닉에서 돌아온 마법사가 아연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니까··· 저 나무는 ‘이 남자’들이 죽였다는 거군요.”
범수는 한 점 부끄러움이 없는 떳떳한 얼굴로 답했다.
“네, 그렇습니다.”
그가 죽인 것은 아니니 캥길 것은 없었다.
사실을 다 고하려면 이야기가 너무 구구절절해지고, 범수가 나무와 대화한 내용까지 전해야 하니 오히려 일이 더 복잡해질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에 비해 죽은 자는 말이 없는 법이니까.
아, 범수 외 사람들은 그 말을 들을 수 없다는 표현이 더 정확하겠지만.
“흐음···.”
마법사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이 말을 믿어야 하는지 말아야 하는지 난처한 얼굴이다. 하지만 믿으려고 해도 믿지 않으려고 해도 범수의 증언 외에 증거가 없는 것이 현실이었다.
일단 자신이 저 밖의 병사와 행정관을 죽인 범인이라는 의심은 하지 않는 것 같아서 범수는 안도했다. 그 범인이 순례자들이라는 사실은 거의 확신한 것 같다. 게이트에 남겨진 기록이 그렇게 말하고 있으니까.
“헌데, 이들이 왜 범수 부캐님을 노린 겁니까?”
마법사가 이들의 대표 역할을 하는 것 같다.
범수는 이 또한 최대한 간결한 언어로 설명했다.
“엘펜하임의 제국경매장에서 있었던 일을 혹시 아십니까?”
마법사가 기억을 더듬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 일은 아마 제국 전체에 소문이 퍼졌을 겁니다.”
행정관은 소식에 좀 어두운 편이었지만, 왕국의 수도에서 거주하는 마법사는 그나마 빨리 이야기를 접했던 것 같다.
‘다행이군. 설명이 그나마 쉽겠어.’
범수는 그날 일을 떠올리며 말했다.
“그날 경매장에 불을 지르고 경매 상품을 도난당하려다가 제게 당한 여인은 어떤 조직의 소속으로 비밀스러운 임무를 수행 중이었다고 생각됩니다.”
그 목적이 제국의 붕괴, 즉 역모였다는 이야기까지는 여기에서 할 수 없다. 황실에서 비밀을 지켜달라고 신신당부를 했기 때문이다.
“그 이야기를 접한 해당 조직에서는 제게 앙심을 품은 것 같습니다. 복수를 위해 제 뒤를 쫓고, 이곳에서 살해하려고 한 것이지요.”
“아니 그 조직이라는 것은 대체···?”
범수는 심각한 얼굴로 말했다.
“제게 표창을 하시기 전, 황태자 전하께서는 제게 비밀 엄수를 명령하셨습니다. 정녕 그들과 얽힌 자세한 정보를 얻고 싶으시다면 정식 경로를 통해 황실에 청을 넣는 편이 좋으실 겁니다.”
“······!”
마법사는 쉽게 대답을 하지 못했다.
대수림 남부의 소왕국들은 전부 제국을 상국으로 모시는 봉신국들이다.
제국에서 기밀로 처리하는 정보를 얻으려면 매우 조심스럽게 접근을 하여 ‘청을 올리는’ 형식을 띄어야 하는데, 이 마법사에게 그런 일을 결정할 권한까지 있으리라고는 생각하기 힘들다.
“그런···!”
한편, 마법사는 소문이 아니라 명백한 사실로 전해진 정보를 떠올리고 있었다.
범수는 제국 전역의 도시 및 영지에서 ‘무제한’으로 지원을 요청할 수 있는, 전례를 찾아볼 수 없는 특혜를 허락받은 사람이다. 그런 훈장을 내렸다는 것은 범수를 황태자가 그만큼 아낀다는 뜻이며, 제국을 모시는 왕국 입장에서도 함부로 건드리기 힘든 사람이라는 뜻.
그럼에도, 마법사는 고뇌했다.
현장의 유일한 생존자인 범수를 이대로 보내면 안 될 것 같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혹시··· 저희와 함께 왕성으로 가셔서 조사를···.”
범수는 단호하게 거절했다.
“제가 지금 워낙 바빠서요. 심문이 필요하시면 정식으로 서면 요청을 보내주십시오.”
“······!”
마법사의 머릿속에서 두 가지 개념이 번갈아 그를 억눌렀다.
현장의 유일한 생존자.
하지만 동시에, 황태자의 총애를 받은 제국훈장 수훈자.
한참을 고민하던 마법사는 결국 이렇게 말했다.
“···알겠습니다, 조만간 협조 공문을 보내 드리겠습니다.”
범수가 가는 길을 막지 않겠다는 항복 선언이었다.
***
그들과 함께 게이트 밖으로 나온 범수는 멀리 떨어져 숨어 있던 흑을 불렀다.
녀석은 순례자들이 나타나기 전부터 용하게도 낌새를 알아차리고 안전한 곳에 숨어있었던 듯했다. 놈들도 말을 찾아서 잡아 죽이는 일에는 관심이 없었고.
흑에게 출발 명령을 내린 범수는, 자유도시를 향해 질주 하며 다시금 생각에 빠졌다.
‘순례자들의 목적은··· 제국의 붕괴였지.’
이것이 게임을 플레이하는 유저들에게 알려져 있던 정보이다.
하지만 범수는 그 이면에 숨겨져 있던 비밀들까지, 오늘 알카드를 통해 알아낼 수 있었다.
‘이 조직의 간부들은 전부 제국에 원한을 가진 인물들이었어.’
제국에 의해 멸망당한 나라의 왕족이었던 아인켈처럼 다른 이들에게도 비슷한 사연이 존재했다.
‘지금 시점에서는 조직의 뿌리가 될 간부들이 거의 모든 임무를 맡아서 하고 있다. 그 이유는, 아직 밑에서 부릴 부하들의 수가 충분하지 않기 때문이야.’
이 조직의 규모는 몇 년 후 지금과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커지게 된다.
게임 내에서는 알려지지 않은 그 비밀은, 변이체의 마정석이었다.
‘마정석이 흡수한 던전 사기를 이용해, 자신들의 열화판들을 대량 ‘생산’해 내게 되는 거지. 그들이 몇 년 후 대륙 곳곳에 나타나 음모를 실행시킬 부하들의 정체이고.’
그 계획은 게임에서는 성공했지만, 지금 이곳에서는 범수가 아인켈을 확보하여 정보를 캐고 염후가 던전의 아티팩트를 싹쓸이하는 과정에 의해 저지되었다.
게임 내의 역사가 이미 바뀌게 된 것이다.
그리고 범수는 게임에서 알려지지 않은 비밀 하나를 추가로 알아냈다.
‘그렇게 많은 부하들을 만들어 낸 뒤 이 놈들이 할 짓은···.’
게임 내에서 순례자들이 역사에 본격적으로 등장하기 전.
수가 불어난 조직원들이 가장 먼저 한 일은 대륙 곳곳에서 ‘제물’이 될 인간들을 납치하여 자신들의 기지로 끌고 가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그들은 무엇을 위한 ‘제물’이었는가?
‘상상도 하지 못했어. 이 서대륙 전체를 타깃으로··· ‘저주’를 내리는 것이 가능하다니!’
저주의 타깃은 보통 사람이 된다.
하지만 순례자들은 상식을 초월한 규모의 제물을 바쳐, 무시무시한 흑마법을 만들어내려고 했다.
그 마법이 만들어낸 칼은 살아있는 사람이 아니라 이 대륙을 겨냥했다.
그 결과는?
‘그 전에 겪어보지 못한 자연재해가 하루가 멀다하고 이어지고, 역병이 창궐하고, 흉년이 몇 년이나 지속되었겠지.’
범수가 게임을 통해 경험한 처참한 시대가 이어지는 것이다.
‘그 대흉년이 자연스러운 것이 아니라, 순례자들이 유도한 저주의 결과물이었다니!’
범수는 게임 속의 순례자들이 운이 좋았다고 생각했다. 하필 그들이 활동할 쯤에 대흉년이 닥쳤으므로.
그런데 사실 그것은 우연이 아니었고, 그들이 딱히 타이밍을 잘 맞춘 것도 아니었다.
그 대흉년 자체가 순례자들이 세운 계획의 일부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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