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화
“그것보다 보석함!”
저 논문을 읽어 봐도 언니가 무슨 내용의 연구를 하고 있는지는 전혀 짐작할 수 없었다.
나는 머리를 도리도리 흔들고 나서 얼른 에스더 언니가 말한 보석함을 찾기 시작했다.
“음음. 책상에는 없고.”
5개의 서랍을 모두 열어 보았지만, 서랍 안에는 필기구와 메모지만 있을 뿐이었다.
단지, 상판 바로 아래 가장 긴 서랍에는 펜과 편선지가 들어 있었는데 나는 우선 그것을 흘끗 보고 닫아 두었다.
‘보석함 찾은 뒤에 살펴보자.’
메모나 편지는 귀중한 정보원이다. 비록 본가에 남아 있던 메모에는 건질 것이 없었지만 말이지.
“찾았다!”
책상에는 없었고, 결국 옷장을 뒤지다가 구석에서 보석함을 찾아낸 나는 그것을 들고 환호성을 질렀다.
근데 생각해 보니 에스더 언니! 보석함을 어디다가 두었다는 얘기는 왜 안 해 준 거야? 시간 낭비했잖아?
하여튼 그 언니는 맹한 구석이 있다니까?
“흐음. 정말로 알뜰하게도 보냈네?”
텐자르 대륙에만 있다고 하는 코끼리의 상아 조각이 장식된 우아하고 커다란 언니의 보석함.
그 보석함을 열자 붉은 벨벳의 안감이 눈에 들어왔다.
즉, 안은 거의 비어 있었다는 이야기다.
‘키이라의 부탁으로 가장 비싼 것을 중심으로 램버트 은행의 금고에 넣어 두었다.’라고 에스더 언니는 말했는데.
“정말 보석은 싹 쓸어갔구나.”
남아 있는 것은 진주랑 라피스라줄리 같은 준보석뿐.
“어, 이건?”
그렇게 조그마한 공간에서 이리저리 굴러다니고 있는, 거의 돈이 되지 않는 작은 귀걸이나 반지, 그리고 은으로 만든 펜던트 목걸이를 보다가 나는 깜짝 놀라 어떤 반지를 집었다.
“진짜 오래간만이다!”
그것은 어린 시절에 유행했던 프리징 꽃반지였다.
내 또래면 다들 추억의 아이템이라고 생각하는데, 아마 내가 8살 때였나, 9살 때였나? 아마 그쯤이라고 기억한다.
그때 한창 신문에 연재되던 소설 때문에 생화 꽃반지가 유행한 적이 있었다.
“이런 게 아직 있었네?”
‘글을 읽을 줄 아는 잉기스의 국민이라면 모두 다 한 번은 읽었다.’라든지, ‘한 번도 읽지 않은 사람은 있지만 한 번만 읽은 사람은 없다.’라든지 하는 평을 내며 엄청나게 유행한 소설이었다.
그 소설의 주인공이 어린 시절 사랑하는 소녀에게 약속의 증표로 준 것이 바로 타임 프리징 마법을 건 꽃반지였다.
덕분에 정말로 한참이나 소녀들 사이에서는 타임 프리징 꽃반지가 유행했다.
비싼 거야 영구적으로 꽃이 유지되지만, 우리 같은 소녀들은 돈이 없으니 기껏해야 1~2년 정도 가는 싸구려만 살 수 있었지….
참고로 말하자면 저 소설은 비극으로 끝난다.
주인공은 첫사랑의 소녀와 함께하기 위해 왕이 되었지만, 소녀는 주인공의 마음은 전혀 알지 못했다.
게다가 소녀에게는 이미 다른 사랑하는 사람이 있었고 불치병에 걸려 있었던가?
오해와 오해가 만나서 진행되는 전형적인 눈물을 쏙 빼는 통속소설이었다.
하지만 너무 재미있어서 나도 꼬맹이였던 주제에 매일 할멈이나 크리스 아주머니에게 읽어 달라고 졸랐지만 말이지.
“언니는 클로버 꽃으로 했구나?”
소설에서는 들국화였나? 아무튼, 클로버는 아니었다.
의자에 앉아 나는 아주 얇고 투명한 반지 안에 들어 있는 클로버 꽃을 이리저리 돌려 보았다.
“바니가 정말로 클로버 화환을 잘 만드는데….”
여기저기 돌아다니기 좋아하고, 축구 같은 공놀이에 눈이 돌아가는 전형적인 개구쟁이 소년이었지만, 바니는 뜻밖에 손재주가 좋았다.
조랑말을 타고 탄타라 초원을 누비던 꼬맹이들, 우리가 항상 말을 쉬게 하는 곳은 클로버가 만발한 초원이었다.
한가로이 풀을 뜯는 조랑말을 보며 데굴데굴 구르거나, 큰대자로 누워 하늘에 떠다니는 구름을 보는 것만으로도 나는 행복했다.
“나 반지! 화환!”
그리고 힘껏 달린 바람에 두근거리는 심장이 진정될 때쯤이면 난 언제나 바니에게 발딱 다가가 외쳤다.
“나 예뻐?”
그리고 내 재촉에 바니는 ‘어쩔 수 없지’라며 하얗게 핀 클로버 꽃으로 목걸이, 그리고 화관을 만들어 주곤 했다.
그리고 나는 바니가 만들어 준 화관 세트를 하고 초원을 빙글빙글 달렸고.
“신부가 되면 난 클로버 세트를 할 거야!”
라고 외친 듯도 하네?
와, 나 어렸을 때부터 일편단심이었구나?
정말 기특하지 않아? 그런데 이런 날 두고 바니는, 정말!
“키이라도 만들어 줄까?”
그리고 가끔 언니도 연습 올 때 알렉산드라를 타고 우리와 함께 오기도 했다.
그때마다 바니는 언니에게도 반지나 작은 꽃다발을 만들어 주곤 했다.
그러고 보니 언제부터 바니는 언니를 ‘키이라 아가씨’라고 부르게 된 것일까?
어렸을 적엔 나를 부르는 것처럼 키이라라고 불렀었는데….
“그립다.”
또 생각해 보니까, 언니는 바니에게 고맙다는 인사도 하지 않고 되게 도도했었다.
고맙다는 인사도 안 했다니까?
아, 그래서 그랬나? 그렇게 언니가 ‘난 네 고용주’라는 티를 팍팍 내서 바니가 존칭을 쓰게 된 것일까?
언니도 참 웃겨. 세스 아저씨랑 아빠가 얼마나 친했는데. 아빤 세스 아저씨에게 눈을 반짝이며 형이라고 부를 정도였다고.
‘굳이 그렇게 벽을 쌓고 있을 필요가 있나?’라고 그 당시에는 생각했었는데….
“그러니까 그런 두 사람이 왜 갑자기 사랑의 도피냐고!”
나는 자신도 모르게 책상을 주먹으로 쾅- 내려쳤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안 돼.
언니는 정말로 바니를 무시했었다고. 그런데 언제 두 사람이 사랑했었다는 거야? 응?
하아…. 이해할 수 없어. 언니는 연습하러 목장에 왔을 때도 항상 전속 코치들이랑 연습했었지.
나와 바니에게는 눈길도 안 주었었다고!
내가 나오는 레이싱 시합 때도 언니는 거의 특별 관중석에 앉아서 관전하기만 할 뿐이었는데….
“아, 진짜 모르겠다!”
결국 나는 그렇게 외치고 책상 위에 엎드렸다.
그리고는 다시 타임 프로징이 걸려 싱싱함을 유지하고 있는 작은 클로버 반지를 들어 햇빛에 반짝여 보았다.
“감상에 잠겨 있을 시간이 아니야!”
그렇게 한참을 반지 안 꽃을 바라보고 있다가, 나는 탁- 하고 책상을 치고 일어나 언니의 반지를 보석 상자에 다시 넣었다.
“음…. 진주 귀걸이와 터키석 펜던트 목걸이. 라피스라줄리 귀걸이, 실금 반지, 그리고 이 꽃반지까지인가?”
그리고 다시 보석함을 뒤적거려 남아 있는 것을 착실하게 기록하고는 나는 보석함을 닫았다.
귀걸이와 세트인 다이아몬드 목걸이도, 커다란 루비 반지도, 화려한 에메랄드 귀걸이도 없는 것을 보니,
‘에스더 언니, 순금 세공 장신구 이상은 다 가져다 은행에 넣었다는 거군?’
아마 언니가 가지고 있는 가장 비싼, 그 커다란 알이 주렁주렁 달린 다이아 목걸이와 티아라는 저택에 있을 것이다.
언니가 중요한 무도회 때마다 차고 나가던 그 유서 깊은 가보 말이다.
‘일단 일류 보석점이 현금으로 쎄게 사 줄 수 있을 정도의 것은 다 가져갔군.’이라 생각하며 나는 이번에는 연필을 들었다.
“어디 보자. 여긴 어떨까?”
나는 아까 전 서랍 안에서 발견한 편지 세트를 꺼내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본가의 메모장에는 거의 아무것도 나타나지 않았지만 말이지?
‘어?’
그리고 그렇게 편지 세트를 들었을 때, 사이에서 무언가가 툭- 하고 떨어졌다.
‘명함?’
떨어진 것은 두꺼운 고급 종이로 만들어진 명함이었다.
그리고 그 명함에는 솔로몬 대학의 교수 이름이 적혀 있었다.
‘누구지?’
그런데 ‘솔로몬 대학’?
적어도 나는 처음 들어보는 대학이었다. 게다가 전공은,
“식물학?”
식물학? 그럼 에스더 언니랑 관계있는 사람인가?
그렇게 생각하며 나는 일단 앞뒤로 계속 돌려 보던 그 명함을 책상 위에 올려 두고 다시 편선지에 시선을 돌렸다.
“흐음….”
샤샤샥 하고 연필로 문질러 본 두꺼운 편선지에는 본가 때와 같이 거의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으나 마지막, 언니가 강한 펜으로 서명한 ‘닥터 램버트’란 서명은 확실하게 보였다.
“닥터?”
학위를 말하는 것인지 아니면 언니의 의사 자격을 말하는 것인지?
그러나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언니는 아직 학위도, 자격도 따기 전일 텐데?
그러나 아무리 봐도 언니의 필체였다.
도대체 이 서명은 무슨 의미일까? 언니가 서명할 때는 ‘키이라 아비게일 램버트’라고 풀 네임을 쓸 뿐이었는데….
‘닥터라는 명칭이 필요한 경우란?’
대체 무엇이지? 나에게는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아, 모르겠다. 일단 나중에 테오랑 상담 좀 해 봐야겠다.”
계속 미간을 찌푸린 채 생각해 봤지만 정말로 나는 알 수가 없었다.
* * *
“미스 리버프론트의 유학 소개장 아니야?”
그리고 개인 사서함 부스에서 이제까지의 성과에 대해서 보고를 할 때, 수화기 너머에서 테오는 그렇게 말했다.
“소개장? 유학? 그럴 리가. 에스더 언니는 졸업만 하면 바로 수도 대학 교수 자리가 보장되어 있다고.”
“그건 모르는 거야. 물론 미스 에스더는 위스퍼러 교수가 가장 아끼는 제자이지만, 학자라는 인종들은, 특히 천재 학자라는 인종들은 변태라고, 변태.”
뭔 소리야, 이건?
“아주 그냥 뭐 하나 모르거나 신기한 거 있으면 거기에 달려들어서 알아낼 때까지 먹는 것도, 자는 것도 잊고 매달리는 지식 변태들이라고.
볼프강 크리스토퍼 실라가 왜 아직도 재혼 못 하고 홀아비 상태인데? 그 인간도 학계에서 인정도 못 받는 무슨 입자 연구인가에 미쳐 가지고 말이야, 연구 자금 모은다고 이리저리 계약직만 하고 말이야. 지금 교수 일도 계약직일걸?”
‘볼프강 크리스토퍼 실라’라면… 아! 루시와 레오나드의 작은 아버지인 그 사람!
“어? 그 사람 홀아비야?”
“음, 뭐 그렇게 되었어.”
그 이상 테오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뭐, 이해가 갔다.
솔직히 제대로 된 아내가 있었다면 실라가의 아들이 그 정도로 추레한 모습으로 돌아다니지 않을 테니 말이다.
“흐음.”
그래, 그래서 볼프강 실라, 아니 실라 교수가 항상 혼자 다녔구나?
“보석상 쪽은 알아봤어?”
“대강 레이디 키이라가 사라진 날 전후로 잉기스시티 보석상에 입고된 것이 있는지 알아봤는데 눈에 확 튀는 것은 안 들어온 모양이야.”
“응. 기숙사에는 적당한 것을 가지고 갔을 거니까.”
“그나저나 너희 은행 금고는 확인해 봤어?”
“아직.”
에스더 언니는 ‘비싼 것을 보냈다.’ 정도만 기억했을 뿐, 어떤 보석들이었는지 정확하게 말해 주지 않았다.
이래서야 장물로 들어갔을지도 모르는 것을 찾을 수나 있으려나….
‘사파이어랑 루비였나? 뭐 그런 거 있었던 거 같은데…. 다이아도 있었나?’라니, 그건 누구나 할 수 있는 말이잖아.
아무튼, 이 언니는 여전히 식물 이외에는 아무런 관심도 없다니까?
진짜 이 언니, 옛날엔 나도 바니도 ‘키이라의 동생인 빨강 머리와 별장 근처 목장의 금발 남자애’로만 기억해서, 방학에 우리 별장에 처음 놀러 왔을 때 인사하는 우리를 못 알아보고 그냥 지나쳤었던 적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