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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약 약혼 지침서-75화 (75/100)

75화

스위트룸에서 책을 읽으며 나를 기다리고 있던 마리를 향해 인사 대신 그렇게 첫마디를 내었을 때, 마리는 눈을 똥그랗게 뜨며 안경을 손가락으로 내렸다.

“…뭐?”

“혹시 나, 전혀 주위를 보지 않는 타입이야?”

“너… 그걸 지금 알았니?”

가차 없기는….

아무렇지도 않게 그렇게 대답하는 마리를 향해 입을 삐죽 내밀자 마리는 또 깔깔거리며 말하였다.

“야, 내가 너에게 눈치 없다고 면박 준 게 한두 번이 아닌데 아직도 그런 걸 묻고 있어?”

“내가 그렇게까지 눈치가 없어? 나, 의외로 분위기 잘 읽는다고 생각했었는데….”

나, 주니어 챔프라고. 분위기를 못 읽는데 챔피언이 될 수 있어?

“친구도 한 번 사귀면 오래가는 편이고.”

“풋!”

내 말에 또 마리는 풋- 하고 웃었다.

그런데 생각해 보면 우리 네 명 중 가장 제멋대로인 건 너 아니야?

“윈디, 윈디. 솔직히 말하자. 우리 네 명 중에서 너랑 나는 눈치 되게 없어. 게다가 하고 싶은 말을 그대로 직설적으로 말하는 편이고. 뭐, 둘 다 악의는 없지만.”

“…….”

“우리 네 명의 우정이 변치 않는 것은 솔직히 에블린과 로즈가 우리에게 맞춰 주기 때문이야.”

‘왜 매번 말해도 잊어 먹는 것일까, 우리 챔프 아가씨는?’이라고 말하며 마리는 다시 소파에 앉아 책을 들었다.

“사실 테오도르 경 역시….”

“응?”

“아냐, 아냐. 그래. 다녀온 건 잘 되었어?”

‘내가 그 옷 빌려준 거 알지? 다 말해 줘야 인지상정?’이라며 마리는 씨익 웃었다.

결국 듣고야 말겠다는 이야기이군.

“그럭저럭?”

“그. 럭. 저. 럭?”

내 말을 한 음, 한 음 힘주어 그대로 따라 하며 마리는 코를 찡그렸다.

그러나 나는 마리에게 솔직하게 트루엘 형사와 했던 이야기를 공유할 생각이 없었다.

어쨌든 이건 사람의 목숨까지 서슴지 않은 테러 사건이고, 그런 무시무시한 사건에 귀중한 친구가 휘말리게 할 수 없으니 말이다.

마리는 삐친 표정이었지만 나는 무시하였다.

“나, 시니어 데뷔하기로 했다.”

“어머?”

대신 나는 원피스를 벗으며 아무렇지도 않게 마리에게 다시 승마 선수로 복귀함을 말하였다.

그러나 내 말이 마리에게는 폭탄선언이었는지 그녀는 놀란 표정으로 책을 내려놓았다.

“너, 그러면 바니 오빠 포기한 거야?”

내가 주니어에서 시니어로 이적하지 않은 이유를 알고 있기에 그녀는 깜짝 놀라 나를 바라보았다.

“잠깐, 버나드 영도 포기하고, 테오도르 비텐베리언과의 약혼도 무효가 되어 버리면…. 너, 설마 독신 여성 할 거야?”

‘헐…. 설마 네가 제2의 마가렛 공주님이 될 줄은 몰랐네?’라고 마리는 탄식하였으나 나는 가뿐히 무시하며 옷을 다 갈아입고 병풍 뒤에서 나왔다.

“누가? 나 결혼한다니까?”

“잉? 상대는 있고?”

“레오나드 실라.”

내 말에 마리는 너무나 놀랐는지 동작을 멈췄다가 갑자기 입을 뻐금거렸다. 그래, 놀랍지?

“왓?!”

실은 나도 놀랐어.

사실은 나도 방금 무의식적으로 말한 것이거든.

하지만 생각해 보면, 사교계든 승마계든 화려하고 센세이션하게 등장하는 데에 레오나드 실라 만한 것이 있나 싶다.

전 약혼자의 라이벌인 남자와 파트너가 되어서 등장한다는 것처럼 짜릿한 막장극이 또 어디 있겠는가.

“레오나드 실라아??? 실라가의 후계자? 그 북부의 왕자님?”

북부의 왕자님이라니, 이건 또 무슨 말인지.

내 말에 마리는 소파 위에서 들썩거리며 흥분하고 있었다.

읽고 있던 책은 어디다가 버렸는지 눈에 보이지도 않았다.

“너 언제 실라가의 공자와 그런 사이가 된 거야?”

“뭐, 그냥 어쩌다 보니?”

“진짜 너, 이전에 테오도르 경과의 약혼도 두루뭉술 넘기더니 레오나드 경과의 만남도 그냥 두루뭉술 넘길 거야?”

‘이번에야말로 꼭 모든 것을 듣겠어!’라고 마리는 의욕에 넘쳤지만, 솔직히 말해서 나는 할 말이 없었다.

솔직히 말해서 테오와는 계약 약혼이었고 레오나드 실라는 나도 모르겠지만, 걔가 날 좋아한다고 해서 살짝, 이용하는 것?

…이라고 어떻게 말하느냐고!

“테오와의 이야기는 신문에 많이 나왔잖아?”

그래서 그냥 그렇게 말하고 넘어가려고 했는데 마리는 더 퉁퉁 부은 얼굴로 팔짱을 낀 채 투덜거리기 시작했다.

이래서 믿을 수 없는 것이 사랑에 빠진 친구라는 둥 하면서 말이다.

‘나 좋다는데 데이트 한 번 해 준다고 치지, 뭐.’

실라 교수는 레오나드 실라가 내심 나를 좋아한다고 자신 있게 말하였고, 게다가 실라 공작이 나를 손자며느리로 찍었다는 말까지!

뭐, 실라 공작님 자체만이라면 시할아버님으로 부족함이 없으시지만, 사실 그 경박한 금발이 나에게 이제까지 했던 폭언들과 무례한 행동을 생각하면 이 정도 이용하는 것은 정말로 값싸다고 생각한다.

아니지, 오히려 내가 선물을 주는 거 아니야?

데이트라고, 데이트.

좋아하는 여자가 데이트를 먼저 제의해 주는 거라고. 게다가,

‘만에 하나, 이 청혼 자체가 진범인 실라 교수가 나에게 접근하기 위해 거짓으로 꾸민 말이라고 하더라도….’

오히려 모른 척 실라 교수의 제의에 넘어가는 척하면 실라 교수의 저의를 알 수 있는 것이 되지 않는가.

안네로제 언니는 혐의를 벗어났지만 실라 교수는… 모르는 일이지.

“도대체 이게 무슨 일이람? 갑자기 아무런 전조도 없이 갑자기 약혼한 친구가 갑자기 또 뜬금없이 파혼당할 위기에 처하더니, 이제는 다른 남자랑 초스피드로 약혼? 정말 윈디 너와 같이 있으면 사건의 연속이라 울렁거린다니까? 침착할 틈이 없어.”

‘정말 넌 시합 때도 그러고 사람을 조마조마하게 한다니까?’라고 말하며 마리는 다시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래서?”

“그래서라니?”

“그래서 레오나드 실라와는 언제 만날 거냐는 거야.”

마리는 ‘테오도르 비텐베리언이 참가하는 다음 무도회가 언제더라? 에블린에게 물어볼까나?’ 하고 탁상 달력을 들어서 펜으로 하나하나 날짜를 짚기 시작했다.

“무도회는 안 가.”

하지만 나는 무도회는 생각하지도 않았다.

테오의 그 자기 멋대로의 행동에는 질려 있었지만 그래도 레오나드 실라와 파트너가 된다면 어쩐지….

‘실라가에서 막무가내로 밀어붙일 것 같은 느낌이 든단 말이야?’

실라 공작님도 그렇지만 보기와 달리 실라 교수도 상당한 수완가라서 말이다.

탄타라에서 세스 아저씨를 구워삶아 버린 것을 보면 진짜….

“뭐? 그건 또 무슨 이야기야?”

“이번 잉기스시티 배에 출전할 거야.”

“오?”

마침 이 시기에 잉기스시티 경마장에서 열리는 대회가 있다.

그다지 큰 경기는 아니지만 엄연하게 정식 레이스이니 포인트를 획득하기 위해 참가하는 시니어 선수가 적지는 않은 경기이다.

“하긴, 레오나드 경도 승마 선수이니…. 너 결국 그럼 테오도르 경을 포기하지 않겠다는 거네?”

“무슨 말이야, 그건?”

“뭐, 모르면 되었어.”

대체 쟤는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모르겠다.

예술적인 기질이라고 해야 하나?

마리는 정말로 엉뚱한 생각을 하고 엉뚱한 결론을 내리는 적이 많으니 말이다.

‘그나저나 나 무사할 수 있는 건가?’

억울하게 목숨을 잃은 사람을 위해서라고 당차게 말한 나에게 트루엘 형사가 부탁한 것은 단 하나, 다시 화려하게 시합에 참가해 주길 바란다는 거였다.

나의 건재하고 뻔뻔한 행동으로 그들을 다시 자극하겠다는 심산인 거 같은데….

‘설마, 경호 정도는 붙여 주겠지?’

아무리 그래도 말이야.

설마 잉기스 경찰이 테러범과 같은 수준에서 놀겠어?

* * *

“오오! 레이디 그웬돌린이 우리 레오를 돌아봐 주었다니, 이건 정말로 기적에 가까운 기쁨이군요.”

라고, 말하며 실라 교수는 느끼하게 내 손등에 키스하였다.

처음 만났을 때만 해도 실라 교수는 좋아하는 연구에만 관심이 있는 괴짜인지 알았는데, 그것은 가면이었나?

정말, 테오가 질색하던 것을 이해할 것만 같다.

“같은 시니어 선수로서 같이 사전 탐사를 하자고 제안할 뿐입니다, 실라 교수님.”

하지만 역시 실험에 몰두하던 중이었는지 여전한 더벅머리에 뱅글뱅글 도는 두꺼운 실험용 안경을 끼고 있는 지저분한 외양은 잉기스 신사의 예법과 어울리지 않았기에 나는 얼른 손을 빼었다.

위험한 화학 약품이 묻을 것만 같은 느낌이기도 했고 말이다.

“아, 네. 그렇지요. 사전 조사로 좋은 선수의 의견을 참고하는 것이지요.”

살짝, 상처를 주지 않았나? 하고 걱정한 내 마음과는 달리 정말 모든 것을 다 안다는 듯한 저 여유로운 표정이라니….

옆에 있는 안네로제 언니가 오해하잖아요, 실라 교수!

“그웬돌린 양이 다시 승마를 시작한 것은 좋은 일이라고 생각해요.”

하지만 안네로제 언니가 레오나드 실라에게 호감이 있다고 가정한 내 추측은 틀린 것이었는지 안네로제 언니는 실험 차트판을 다시 품에 안은 채 황홀한 표정으로 교수님을 올려다보며 말하였다.

“어쩌면 킹과 퀸의 합동 시합인가요? 레오나드 님도 시합에 참가하시나요? 저도 같이 보러 가도 되지요?”

킹? 퀸? 언니의 말에 나는 기겁하고 말았다.

물론 나야 주니어 시합의 여왕이었지만 레오나드 실라의 실력은 그 정도는 아니란 말이야.

이건 시합을 달려 본 내가 가장 잘 안다고! 나보다 두 수는 아래라고, 레오 실라는.

뭐, 어찌 되었든 간에 다시 내 시합을 볼 수 있다는 희소식에 들뜬 언니의 옆에서 실라 교수는 ‘당연히 그날 실험은 중지야.’라고 말하더니, 곧 큭큭 하고 혼자 웃으며 ‘내가 그동안 치밀하게 뿌려 놓은 씨앗이 싹을 틔웠군.’ 같은 뜻을 알 수 없는 소리를 하였다.

뭐가 치밀하게 뿌려 놓은 씨앗이라는 건지….

“역시 교수님이세요. 역시 천재!”

“칭찬 감사합니다, 안네로제 양. 아, 물론 제가 천재라는 것은 사실입니다만.”

‘이건 뭐가 뭔지….’라고 생각하고 있는 나와 달리 언니는 또 눈을 빛내며 실라 교수에게 존경의 눈빛을 발사하고 있지만 말이다.

“내일 모래까지는 수도 호텔에 있을 테니 연락 바랍니다.”

그렇게 무언가 범접하기 힘든 두 사람의 세계가 실험실 가득 펼쳐지는 것을 견디지 못하고 나는 호호호 웃으며 실라 교수의 실험실을 빠져나왔다.

역시 자칭 천재 과학자들이란 이해할 수 없는 존재들이다. 하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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