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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약 약혼 지침서-86화 (86/100)

86화

그나저나 나는 안네로제 언니에게 어디에 묵는다고 말한 적이 없으니, 범인은 세스 아저씨와 실라 교수겠군.

“언니가 경기 볼 겸해서 다시 수도로 온다는 이야기는 들었지만, 본가로 안 가고 여기로 왔어?”

누차 말하지만 에스더 언니는 키이라 언니의 가장 친한 친구이며 도나 부인이 인정한 재원이다.

그런고로 이렇게 잠깐 수도에 외출 나올 때에는 당연히 본가 손님방에 묵었고, 언니가 본가에 있는 이상 에스더 언니를 호텔에 묵게 할 리가 없는데?

“흥, 그 못된 계집애. 절교야, 절교.”

“응?”

“나쁜 계집애….”

에스더 언니는 주어를 말하지 않았지만, 입을 삐죽 내밀며 툭하고 던진 그 절교 대상이 키이라 언니를 말하고 있다는 것은 충분히 짐작되었다.

“싸웠어?”

“아, 몰라! 아무튼, 그래서 네가 묵는 호텔에 같이 묵으려고 했는데, 망했어. 그러니까 일단 시내까지는 태워 줘!”

에스더 언니는 휙- 하고 내 쪽으로 고개를 돌리더니 또 풍풍 화를 내며 그렇게 소리쳤다.

“언니, 그럼 우리 호텔에 묵을래? 내 방에 묵어.”

“……?”

“방이 세 개나 있어서 침대도 남아. ‘어머님’이 예약하셨거든.”

내 말에 에스더 언니는 그 뉘앙스를 눈치채고는 ‘아∼아?’ 하고 추임새를 넣었다.

그리고는 다시 한번 어깨에 메고 있던 쇼퍼 백을 추스르며 말하였다.

“그렇다면 거절할 이유가 없지.”

역시 머리가 좋은 상대와 이야기하는 것은 일일이 설명할 필요가 없어서 편하다니까?

그렇게 나는 세스 아저씨에게 상황을 말하고 뒷정리를 팀 영에게 맡긴 채 에스더 언니와 함께 먼저 호텔로 돌아왔다.

아저씨야 ‘숙녀를 기다리게 해선 안 되지.’라고 말하며 흔쾌히 허락해 주었고 말이다.

그나저나 아무리 전에 이용하였던 호텔이 경기장과 가깝다고 하더라도, 역시 여자 혼자 커다란 짐 가방을 낑낑거리고 들고 걸어오는 것은 힘든 일이었을 것이다.

특히 에스더 언니처럼 책상에 앉아서 펜만 굴리는 학자로서는 무모한 짓이 아니었을까 한다.

각설하고 언니는 정말로 지쳤는지 지금 묵고 있는 호텔에 도착하자마자 신발을 벗어 던지고는 소파에 늘어졌다.

그리곤 곧바로 목욕해야겠다고 욕실로 달려간 것이다.

“하여튼 칠칠맞지 못해서는….”

짐을 가지고 온 호텔 보이에게 팁을 주며 쓰지 않고 있던 작은 방에 트렁크를 넣어 달라고 지시한 뒤, 나는 언니가 소파에 아무렇게나 벗어 놓은 모자와 쇼퍼 백을 챙기기 시작했다.

그나저나 에스더 언니, 진짜 울 언니와 싸운 건가?

“어라라.”

이따가 물어봐야겠다고 딴생각을 하고 있었기 때문일까?

나는 언니의 낡은 쇼퍼 백 잠금장치가 끊어져 있는 것을 보지 못했다.

그걸 모르고 부주의하게 들어 올린 바람에 가방 안에 있던 물건들이 우르르 소파 위로 쏟아지고 말았다.

“아….”

그리고 가방에서 쏟아진 물건 중, 대충 아무렇게나 접어 구겨 넣었던 무가지가 내 눈에 들어왔다.

‘왜 왕가는 아직까지 아무런 말을 하지 않는가.’라는 사설 제목과 함께 말이다.

[만약 희생자가 아무런 힘도 없는 마부가 아니라 램버트가의 영애였다면 왕가는 이 사건에 계속해서 침묵을 지켰을까?]

그리고 읽을 수밖에 없었던 그 사설의 결론 문구는 그것이었다.

그래, 무엇을 숨기랴.

활자 중독인 에스더 언니가 아마도 중앙역에서 받아서 대강 가방에 넣어 두었을 그 신문은 바로 그 데일리 타임지였다.

“그건 왜 보고 있어?”

마치 그 일이 일어나지 않은 것처럼, 일부러라도 지우려는 의도처럼 매체 대부분이 그 사건을 다루지 않고 있었지만 아직까지 끈질기게 회자를 하고 있는 데일리 타임.

짧은 논평을 읽고 있던 내 뒤로 젖은 머리를 말리지 않은 채 다가온 에스더 언니는 코웃음을 치며 내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쓸데없는 이야기야. 넌 신경 쓰지 마.”

“…….”

“왕가를 욕하는 건 익스큐즈드. 그러나 너에게까지 책임을 묻는 것은 너무 간 거지.”

말 없는 나를 향해 소파에 털썩 앉은 언니는 아직도 소파에 있는 가방을 뒤져서 안경을 꺼내었다.

그리고는 나에게 말했다.

“그런 쓰레기 신문은 저기 난로에다 던져 버려. 아무리 잉기스에 표현의 자유가 있다고 해도 너무 간 거지.”

“그런가?”

“그것보다 너는 이번 경기에나 신경 써. 이번 경기에서 지면 그 멍청한 레오나드 실라와 결혼하게 되는 거 아냐?”

“언니!”

아니, 대체 소문은 어떻게 난 거야?

왜 ‘교제 신청을 해 보겠다.’가 ‘결혼한다.’가 된 것이지?

그나저나 언니도 레오나드 실라가 멍청하다는 것은 인정하는 건가?

아무리 그래도 언니 지역의 영주 아들… 아니지, 손자 아니야?

“그나저나 어떻게 할 거니?”

“뭘 말이야?”

“테오도르 비텐베리언 말이야, 그 건방진 꼬맹이가 하자는 대로 그냥 이대로 갈 거야? 지금 상황을 보니까, 으음? 완전 복연하려는 듯?”

“하자는 대로 끌려가는 거 아니야.”

“흐음. 그래?”

그렇게 말하며 언니는 ‘저번에도 휘둘리는 것 같았는데….’라고 중얼거렸다.

자존심 상하게시리 말이다.

“아니라니까! 확실하게 정리할 거야. 이번 경기만 끝나면….”

“응, 알았어, 알았어.”

그러나 이미 언니의 관심은 그것에서 떠난 것인지 어느새 언니는 가방에서 노트를 꺼내 넘기며 펜으로 무언가를 끄적거리고 있었다.

“너희 자매가 은근히 연애 방면에선 헛똑똑이라는 건 잘 알고 있으니까.”

“진짜라니까?”

헛똑똑이라니!

그걸 모태 솔로인 에스더 언니에게서 듣고 싶지는 않다고!

게다가 에스더 언니는 안네로제 언니가 누굴 좋아하는지도 모르면서!

“알았다니까? 굿 럭. 아, 하지만 난 너에겐 레오나드 경도 나쁘지 않다는 것에 한 표.”

아니, 그 말을 하면서 왜 노트에서 눈을 떼지 않고 있는 건데?

그리고 왜,

‘아저씨나 언니나! 왜 레오나드 실라가 나에게 나쁘지 않다는 거야?!’

진짜 이유를 모르겠다니까?

* * *

막간극4: 그웬돌린은 모르는 예선 일의 이야기

수도 시민에게는 ‘시민 배’라는 약칭으로 더 불리는 잉기스시티 시민 배 예선전이 끝나자 그다지 많은 수는 아니지만, 시합 하나라도 놓치는 것을 질색하는 열성적인 팬들을 삼삼오오 이야기를 나누며 경기장을 빠져나오고 있었다.

팬들이 나누는 대화의 주된 주제는 이번 예선전에 좋은 성적을 거둔 선수들이었다.

특히 이번 예선 결과로 ‘과연 1위를 한 램버트가의 영애가 시드권 선수를 제외하고 다크호스가 될 것인가’에 대한 것이 가장 열띤 토론의 장이 되어 있었다.

“그렇지만 다른 선수들은 본 실력을 낸 것이 아니니….”

예선전을 포함하여 수많은 시합을 봐 온 열성 팬들이다.

매의 눈에 버금갈 정도로 뛰어난 분석력을 가진 아마추어 분석가도 물론 있는 것이다.

그렇게 다시 수도로 돌아오는 합승 마차에서 나름 유명하여 ‘선생님’이라고 불리는 남자는 그렇게 말하며 멋들어진 콧수염을 매만졌다.

“그렇죠, 선생님. 아무래도 라이언 윈디는 공백기가 있는 데다가 실적도 주니어와 아마추어뿐이니….”

“내 분석으로는 라이언 윈디보다는 3번 블루 썬더에게 주목할 필요가 있는 듯하네.”

“선생님 말씀이 맞아. 게다가 라이언 윈디는 여자들의 인기로 과대평가가 된 면이 있잖아? 우리 딸도 실력도 따지지 않고 그냥 그 이미지 때문에 팬이라고.”

“그러나 영애는 이전 에버린에서 사자좌 레오를 이겼잖아?”

“그렇지. 게다가 이번에도 암사자는 수사자를 이기겠다고 공언했고 말이야.”

그렇게 마차 안은 또다시 열띤 토론의 장이 되어 시끌벅적해졌다.

이들을 태운 합승 마차의 마부는 정말로 이때가 되면 저런 마권쟁이들 때문에 시끄러워진다고 생각하며 속으로 불평을 말하였다.

막차를 타는 자들은 대부분 불법 마권에 관여된 마권쟁이들이니 말이다.

정부의 규제로 마권은 구매 횟수에 제한이 있음에도 이 세상에는 불법이 너무나 많은 것이다.

게다가 시티 배는 경마도 아닌 레이싱 경기인데도 암암리에 사설 마권들이 돌고 있는 중이다.

그리고 시드권을 받지 않은 선수의 배당은 말도 안 되게 높았다.

이렇게 열성팬들이 떠드는 사이 잉기스시티 외곽 정류장에 한 젊은 남자가 내렸으나 그 남자에게 주목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마부 역시 그저 슬럼가에 한 승객 한 명이 내렸구나 싶을 뿐이었다.

그에게 있어서 승객의 인상은 ‘젊고 건장한 남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시끄러운 합승 마차에서 내린 남자는 요금을 치르고는 모자를 푹 눌러쓴 채 조심스럽게 안쪽 골목을 향했다.

요즘 젊은이들에게 살짝 유행이 지난, 푹 눌러 쓴 둥근 베레모 아래로 금발이 살짝 보였다.

남자는 잠시 길을 찾기 위해 주변을 둘러보다가 익숙한 길을 발견한 듯 발걸음을 한쪽 골목으로 향하였다.

싸구려 술집이 몰려 있는 골목이었다.

남자는 그중에서 이제 막 오픈을 알리는 방향으로 간판을 돌려놓은 가게로 들어갔다.

그리고 아무 망설임 없이 카운터에 앉아서 바텐더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턱수염의 남자 옆에 당연한 듯 앉았다.

“일은 잘 진행되고 있습니까, 동지?”

그리고 동의도 없이 갑자기 자신의 옆에 앉은 무례한 사람에게 턱수염의 남자는 아무렇지도 않게 그렇게 말하였다.

그의 말을 들으며 자리에 앉은 금발의 남자는 고개를 끄덕이며 바텐더가 건넨 맥주를 한 모금 들이켰다.

“위험했지만 다행히 포기하지 않고 계획대로 참가시킨 데다가 오늘 예선을 통과하였습니다.”

“그렇습니까. 수고하셨습니다.”

바텐더는 턱수염의 남자에게도 역시 맥주를 다시 따라 주었고 남자는 모자를 쓴 청년에게 건배를 제안하듯 잔을 들었다.

“계획은 예정대로 진행되는 것입니까?”

여전히 낮은 목소리로 금발의 청년은 조용히 턱수염의 남자에게 물어보았다.

그 말에 턱수염의 남자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아직 어떻게 할지 결정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곧 연락이 갈 겁니다, 동지.”

“그럼 언제까지 기다려야 합니까.”

청년은 꽤나 초조한 듯이 살짝 역정을 내었다.

그런 청년을 보며 턱수염의 남자는 젊은 혈기가 넘치는지 적극적이라고 생각하였다.

거사가 자꾸 늦춰지는 것에 불만을 표하고 있는 청년을 보며 그는 생각하였다.

성격이 급한 젊은이이지만 그러나 역시 우리에게는 거사를 진행하기 위해 이런 적극적인 젊은이가 필요하다.

‘하긴, 그럴 만도 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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