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9화
에스더 언니….
처음부터 알고 있는 거 말해 주었으면 좋았잖아!
다 알고 있었으면서!
이제야 알아 버린 사실에 흥분한 내가 갑자기 혼자서 씩씩거리자 테오는 ‘쟨 또 왜 저러나?’라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기 시작했다.
“으 씨, 에스더 언니가 결국 우리를 가지고 놀았어.”
“응? 미스 리버프론트가 왜?”
“그러니까 에스더 언니는 이미 모든 경위를 알고 있었으면서 일부러 가르쳐 주지 않은 채 단서만 흘리고!”
새롭게 깨달은 사실에 흥분하여 거기까지 말하다가 나는 입을 다물었다.
“아냐, 그냥 잊어. 인제 와서 뭐가 달라진다고.”
“…….”
나는 흥분을 가라앉힌 채 테오의 옆에 앉았다.
그리고 곧 우리 사이에는 또 침묵만 흐르기 시작했다.
테오도르 윌링턴 비텐베리언이 나를 좋아하고 있었다.
그것도 아마 5년은 넘게?
‘그럼 이제까지 못되게 내게 군 것이 다 내 관심을 끌려고 한 짓이었단 말이야?’
어머나 세상에나….
스무 살이나 된 남자가 요즘은 코흘리개 열 살 애들도 안 하는 짓을 했단 말이야?
나는 나도 모르게 비실비실 웃음이 나고 말았다.
그래, 저 세상 고고한 척은 다 하는 테오도르 비텐베리언이 사실은 철없는 꼬맹이였다는 거지?
아, 그런데 난 쟤가 실은 철없는 꼬맹이라는 것은 이미 알고 있었지?
“넌 내가 이 이야기를 듣고 ‘뭐야, 이 변태는?’라고 생각하곤 차 버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해 보지도 않은 거니?”
사실 나는 여느 소설들처럼 테오에게 ‘내가 왜 좋은지 그 이유를 말해 봐.’라고 묻고도 싶었다.
하지만 저걸 물어 버린다면 요 유리같이 연약한 테오의 자존심이 와장창 깨져 버릴 것 같다는 예상이 들었기에 슬쩍 질문을 바꾸었다.
“그건….”
살짝, 아주 살짝 내 말에 테오의 얼굴이 하얗게 질리는 것을 재미있게 바라보았을 때, 테오는 다시 건초에 등을 기대며 풀이 죽은 표정으로 말하였다.
“생각하지 못했는데….”
“풋-”
그의 대답에 나는 결국 참던 웃음을 터뜨리며 털썩- 하고 건초에 드러누웠다. 그리고 입을 열었다.
“비텐베리언가의 테오도르 씨. 우리가 청산할 것이 하나 더 있는데 말이야.”
“…….”
“우리의 약혼 계약 말이야. 계약의 전제가 사라졌으니까 처음 계약은 무효가 되거나 소실되었다고 생각하는데 내 말이 틀렸어?”
“…….”
“하지만….”
이제는 아예 숨길 것이 없다는 듯이 시무룩하게 변한 테오의 얼굴을 바라보며 나는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그리고 풀이 죽어 있는 테오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조건에 따라서 연장해 줄 수도 있어.”
“조건?”
‘어머나, 쟤가 저렇게 표정이 다양한 애였나?’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내 말에 테오의 표정은 당장에 화색이 되었다.
아주 이제 고백했다고 다 내려놓았구나?
“하지만 어떤 보수를 내주느냐에 따라서 기간은 달라져.”
내 말의 의미를 테오가 이해했는지 모르겠다.
그래, 솔직히 고백하겠다.
어느새인지 모르겠지만 나 역시 테오를 좋아하게 된 것 같다.
아니, 되었다. 응. 방금 자각한 것이지만 말이다.
처음 그의 포트레이트를 보았을 때 첫눈에 반한 것일 수도 있고, 아니면 같이 지내며 재미있는 녀석이라고 생각하는 사이에 빠진 것일지도 모르고.
어쩌면 테오가 나를 감싸고 다리가 부러졌을 때 내 마음이 넘어가 버린 것일지도 모르지….
아무튼, 나도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그러나 테오가 나를 좋아한다고 고백했을 때, 레오나드 실라가 고백했던 때와는 달리 비실비실 웃음이 나면서 기뻐진 것은, 역시 나도 테오를 그런 쪽으로 좋아한다는 의미겠지?
머리와 달리 감정은 솔직하니 말이다.
생각해 보니 바니가 결국 날 차 버렸을 때도 그다지 쇼크가 아니었었고….
“글쎄다. 램버트가의 그웬돌린 씨는 돈에 욕심이 없고 권력에는 더더욱 욕심이 없으니…. 내가 줄 수 있는 것은 역시 하나밖에 없을 것 같은데?”
그렇게 내가 피식피식 웃으며 그의 대답을 기다리자, 잠깐 고민하던 테오는 건초 위에 완전히 드러누워 버린 내 옆자리에 자기도 그대로 옆으로 기대 누웠다.
그러고는 비텐베리언 공자의 건방진 표정으로 돌아와 말하였다.
“이터널 러브?”
“풋-”
아서 왕자도 아니고…. 진짜 어느 로맨스 소설에서 나온 것 같은 민망한 대사를 저렇게 느끼하게 웃으며 말하다니.
하지만 그게 또 어이 된 일인지 테오다워서 나는 몸을 돌려 하늘을 바라보며 웃었다.
“알았어. 그럼 보수에 맞춰서.”
그렇게 말하며 나 역시 테오 쪽으로 돌아누웠다.
“계약은 종신 계약이야.”
피식 웃는 와중에 테오는 내 쪽으로 몸을 기울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눈치 빠른 나는 그가 이제부터 하려는 행위를 짐작하며 웃으며 눈을 감았다.
내 얼굴을 커다란 손이 감싸고 처음엔 타인의 입김이 이마에 닿았다.
심장이 두근거리는 소리가 바로 고막을 두드리는 것만 같았다.
음. 그래. 기품 있는 귀족으로서 뭐 처음은 그래야지.
그리고 천천히 테오의 감촉이 이마에서 멀어졌다.
그러나 이번에는 그 체온이 천천히 코끝으로 내려왔다.
‘아니, 이 녀석이?!’
아니, 코라니! 덕분에 두근거리던 내 심장은 팍- 하고 식어 버렸다.
평소에는 그렇게 뻔뻔한 녀석이 왜 이리 뜸을 들여?
부아가 나서 나는 살짝 실눈을 떴다.
그러자 내가 눈을 뜸과 동시에 따뜻한 감촉이 입술에 닿고 좀 더 깊은 곳에 따스함이 느껴졌다.
그럼 그렇지. 이번에도 딴 곳에 키스했으면 가만 안 두었어?
그렇게 결국 살짝 입을 벌려 키스를 받아 낸 나는 테오와의 두 번째의 키스를 끝내고 입을 열었다.
음…. 나도 첫 번째보다는 어색하지 않았다? 아, 민망해. 몰라!
키스가 끝난 후, 서로 민망한 기분이 들어 얼굴을 바라보며 킥- 하고 우리는 동시에 웃었다.
그리고 나는 장난스럽게 말하였다.
“나중에 우리 애들이 아빠가 어디서 프러포즈했느냐고 물으면 ‘건초 위에서’라고 해야 하나? 이거 좀 곤란하게 되었네?”
“뭐 어때?”
킥킥 웃으며 한 내 말에 테오는 여전한, 거만한 미소를 지으며 나에게 당연하다는 어투로 말하였다.
“잉기스의 모든 연인들이 이제부터 우리를 따라 할 테니 앞으로는 목가가 유행할 건데.”
역시 테오는, 역시 테오였다.
* * *
뭐, 그렇게 해서 우리의 계약 약혼은 종신으로 연장되었다.
“어, 그 말은 어폐가 있지 않아? 약혼의 종신 계약이면 죽을 때까지 결혼식은 없는 거 아니야?”
가장 처음으로 우리의 새로운 약혼의 전말을 들은 에스더 언니는 설명이 끝나자마자 그렇게 말했다.
그 말은 들은 테오는 깜짝 놀라더니 그 즉시 ‘재계약’을 외쳤고 말이다.
“뭐, 나는 결국 이렇게 되지 않을까 생각은 했지만 말이야.”
테오가 답지 않게 흥분하고 있는 모습을 바라보며, 현재 지금 이 순간 르본에서 유일하게 우리의 약혼이 처음부터 거짓이었음을 알고 있었던 언니는 마치 이 상황이 이렇게 될지 짐작하고 있었다는 듯이 팔짱을 끼며 훗훗- 하고 웃었다.
그 뒤 우리는 잉기스시티로 올라가기로 하였다.
에스더 언니에게도 우리와 함께 올라갈 것을 권해 보았지만, 언니는 우리의 제안을 ‘아직 식물 채집이 남았다.’며 일언지하에 거절하고는 밀짚모자를 쓴 채 다시 채집 도구를 들고는 씩씩하게 숲으로 향했다.
잉기스시티로 올라올 때는 기차를 이용하였다.
도나 부인이 빌려 준 에테르 마차도 있었지만 무언가 리키와 에이미에게도 휴가를 주고 싶은 기분이었다고 하여야 할까?
게다가 테오가 자신의 자랑스러운 비텐베리언 운송으로 나를 에스코트하고 싶어 하였기도 하고.
리키와 에이미는 플랫폼까지 따라와 배웅해 주었는데 두 사람이 내심 무언가 기뻐하는 모습을 보니 우리의 선택이 역시 훌륭했던 듯하다.
두 사람이 이제부터 얼마나 꽁냥꽁냥할 것인가가 어쩐지 눈에 그려졌다고나 할까?
“화해하신 것 같아 다행입니다.”
가장 먼저 잉기스시티에 도착하여 내가 향한 곳은 램버트가가 아니라 잉기스시티 경찰청이었다.
테오와 함께 경찰청에 들어온 나를 맞이한 트루엘 형사는 만면에 웃음을 띤 채 서로 손을 잡고 있는 우리를 향해 아무것도 묻지 않고 축하를 보내었다.
“그건 별로 좋은 생각이 아니군요.”
그리고 형사에게 이제까지 수사 상황을 확인하며 메어리에게 면회를 가고 싶다는 말을 전하였을 때, 그는 고개를 저으며 그렇게 말하였다.
“어째서이지요?”
“메어리 킨스는 당신을 증오하고 있습니다. 자신이 믿던 모든 것이 모래성처럼 사라진 이 순간, 당신에게까지 동정을 받게 된다면….”
형사는 그렇게 말을 흐렸다.
나를 증오하고 있다라….
“역시 내가 그녀를 쫓아냈기 때문일까요?”
“아아, 그건 아닙니다. 그것과는 상관이 없을 겁니다. 그녀는 그저….”
무언가를 더 말하려던 형사는 또다시 입을 다물었다.
그러고는 나를 향해 싱긋 웃으며 말하였다.
“아직은 때가 아니다. 그렇게만 결론짓도록 하겠습니다.”
“그런가요?”
“언젠가는 때가 오겠지요. 인간은 강하고 상처는 언젠가는 아무니까요.”
우리는 그렇게 마치 마음씨 좋은 이웃집 아저씨처럼 싱글싱글 웃기만 하는 트루엘 형사와 헤어졌다.
그리고 다음에 들린 곳은 램버트가였다.
“그래?”
같이 들어가겠다고 하는 테오를 말린 채 나는 혼자서 도나 부인을 만났다.
그리고 이제까지의 일을 간단히 말하였고 도나 부인은 언제나 그러하듯이 상대를 깔보는 표정과 목소리로 ‘그래?’ 그렇게만 말했을 뿐이었다.
그러나 나는 이제 더는 그녀가 무섭거나 싫지 않았다.
“부인에게는 감사하고 있습니다.”
“감사?”
“언니를 대신할 비텐베리언가의 약혼녀로 저를 믿고 선택하여 주신 것에 대해서.”
부인은 ‘네가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지만 나는 개의치 않았다.
어찌 되었든 간에 언니나 부인이나, 정말로 대단한 연기자들이니 말이다.
부인 나름의 무시와 냉대에도 계속 생글생글 웃고 있는 나를 한참 동안 바라보던 도나 부인은 살짝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
“키이라가 또 그 아이와 함께 병원에서 사라진 모양이더구나. 버나드의 퇴원 날짜가 남아서 방심했던 것이 잘못이었을까?”
“…….”
“때문에, 어차피 네게 좀 더 약혼을 연장할 것을 부탁할 예정이었다. 공작님의 건강을 위해서라도 말이다.”
끝까지 솔직하지 않으시기는….
나는 도나 부인의 말에 싱긋 웃으며 말하였다.
“맡겨 주세요, 어머님. 이제까지보다 훨씬 더 훌륭하게 비텐베리언가의 약혼녀 역할을 해낼 테니까요.”
왜냐하면, 이제 나는 실은 그녀가 나를 좋아하고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