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게을러서 차원최강-46화 (46/100)

제 46화

모여드는 사람들 (1)

“무, 물론입니다!”

“그런데 너희들 표정이 별로 좋지 않아 보인다?”

“시정하겠습니다!”

“군기가 바짝 잡혀 있군요! 책사진의 군기가 이 정도라면 병사들의 군기는 말할 필요도 없겠습니다.”

“뭐, 그렇겠죠. 우리들은 여신의 군대니까요.”

저 멀리서 성녀가 달려왔다.

라투스 자작을 포함하여 기사들은 성녀에게 한쪽 무릎을 꿇었다.

우리 선봉군 내에서나 성녀가 내 시녀 내지는 노예로 통하지, 제국 전체에서 보면 성스러운 성인 급의 인물로 추앙받는다.

“성녀님을 뵙습니다!”

“부디 저희들을 축복해 주시옵소서!”

“부담스럽게 왜 이래요?”

성녀는 그들을 한 번 훑어보고는 내게 보고했다.

“신전의 정화가 끝났어요! 이제 승작식이 준비되었다고 하네요.”

“아, 그래?”

내가 손짓하자 기사들이 알아서 가마를 대령했다.

그나마 오늘은 새로운 식구들이 도착해서 보는 눈도 있었기에 추기경이나 신성 기사단은 가마꾼에서 뺐다.

그들도 적응할 시간이 필요하기는 할 테니까.

가마에 탄 후 신전으로 향하려 하는데, 라투스 자작이 내게 부월을 내밀었다.

“저희들도 선봉군에 속하라는 황제 폐하의 명이 있으셨습니다.”

“제가 당신의 상관이 되는 것입니까?”

“곧 있으면 자작의 작위를 받으시기도 하고 제국 내에서는 성인(聖人)으로 추앙을 받고 계시기에 저는 불만 없습니다.”

“그럼, 말을 낮춰도 될까요?”

“그러시죠.”

“그래, 앞으로 열심히 해라.”

“네? 네! 그리하겠습니다!”

내가 손짓을 하자 가마가 출발했다.

라투스 자작을 비롯한 제2선봉대 지휘관들은 멍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발렌 남작이 사라진 자리.

라투스 자작은 가슴 깊은 곳에서 끓어오르는 찝찝함에 인상을 구기고 있었다.

제2선봉대 책사 아식스 남작은 발렌 남작의 가마를 바라보며 욕을 내뱉었다.

“저 정도면 성인이 아니라 후레자식이 아닙니까?”

“말을 가려야 한다. 저분이 우리 사령관인 것은 황제 폐하의 명령으로 정해졌다. 혁혁한 공로를 세우고 계시니 머지않아 백작으로 승작하실 거다.”

“승작이고 나발이고 아직 새파랗게 어린놈이 아닙니까? 게다가 작위도 자작님보다 낮습니다만.”

“작위야 곧 같아질 것이고, 여신님의 보호를 받고 있으니 나보다 높은 자리에 있다고 봐야지.”

“저는 동의할 수 없습니다.”

“그런 이야기는 속으로만 하는 게 좋을 거다. 잘못하면 상관의 명예를 훼손한 혐의로 엄벌에 처해질 수 있다.”

“쳇.”

아식스 남작은 똑똑한 책사였지만, 혈기 왕성한 것으로도 유명했다.

평민으로 시작하여 천재적인 두뇌로 준남작을 거쳐 정식으로 작위를 받았으니까. 작지만 영지까지 있는 영주였다.

그에 비하여 발렌은 여신의 신탁을 받았다는 이유로 승승장구하고 있었다. 어떤 책략들을 사용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여신의 힘이 절대적이라고 보았다.

그런 인간에게 고개를 숙여야 한다는 것이 탐탁지 않았던 것이다.

“우리도 승작식에 참석하도록 한다!”

말이 승작식이지 귀찮기 이를 데 없는 행사다.

굳이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싶기도 했다.

“으하하하함!”

-입 찢어지겠어요. 현실을 좀 직시하시죠? 보는 눈도 많은데.

“뭔 상관이야? 어차피 내 정체에 대해서는 알게 될 텐데.”

굳이 새로 온 놈들을 조심할 필요는 없었다.

처음부터 거짓말을 시작하면 수습할 수 없는 상황에 이른다. 거기에 신위를 받은 자로서 그런 거짓말을 하기는 싫었다.

-황제에게 보고가 들어가면요?

“그때에는 내가 가서 황제를 직접 손보면 되는 거고.”

별다른 걱정은 하지 않았다.

제국군 내부에서 불만이 터지면 수도로 돌아가 황제를 자근자근 다져 준다. 그리하면 알아서 명령이 내려올 것이고 상황은 해결되는 것이다.

지루한 행사가 이어졌고 드디어 내 차례가 되었다.

“그럼, 발렌 남작은 앞으로!”

재단 앞에는 베르체 추기경이 근엄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이런 승작식에는 꽤 지체 높은 사제들이 동원되었는데, 추기경은 교황의 바로 아랫자리다.

명성으로 보면 성녀가 높겠지만, 여성이라는 제약 때문에 베르체가 식을 주관하게 되었던 것이다.

베르체는 내가 한 번 흘겨보자 식은땀을 흘렸다.

“죄, 죄송합니다. 이게 어쩔 수가 없는 상황이라서.”

“쯧. 처신 잘해라. 지옥 가기 싫으면.”

“무, 물론입니다.”

우리는 주변에 소리가 들리지 않을 정도로 속삭였다.

어쩔 수 없이 베르체의 발치에 한쪽 무릎을 꿇었다. 당연히 성녀나 베르체는 뜨악한 표정을 짓고 말았다.

“빨리 끝내.”

“발렌 남작에게 여신의 이름으로 자작의 위를 내린다.”

“와아아아!”

짝짝짝짝!

박수갈채가 쏟아지자, 나는 가볍게 손을 흔들어 주고는 단상에서 내려왔다.

귀족들의 축하가 쏟아지는 가운데 바르하 후작이 앞으로 나왔다.

“자네의 모습을 보니 든든하군. 나는 이만 가지만 폐하께는 반드시 보고를 하도록 하게. 기다리고 계시네.”

“그러죠.”

바르하 후작은 영지를 빠져나갔다.

그는 칙사로서 매우 바쁜 사람이다. 내게 소식을 전하기 위해 왔지만, 다른 곳에 들러 황제의 명을 전파해야 하는 것이다.

슬슬 피로가 몰려와 영주성으로 돌아가려는데 라투스 자작이 앞을 가로막았다.

“지금 뭐하냐?”

“사령관님! 앞으로의 전략에 대해 논의를 하려 합니다! 그러니 지휘부로 왕림해 주십시오!”

“그건 내 참모들과 논하도록. 내가 좀 피곤해.”

“하지만…….”

나는 손을 휘휘 저었다.

아젠타 남작이나 클로얀 남작이 알아서 처리할 것이다.

전략이라면 이미 잘 세워 두었는데 뭐 하러 다시 이야기를 한단 말인가? 다 시간 낭비에 불과한 일이다.

라투스 자작은 제국군 군영을 거닐었다.

회의 전에 병사들의 사기나 군기 상태를 점검하기 위해서였는데, 한마디로 처참한 수준이었다.

낄낄거리며 술을 퍼마시는 장병들이 있는가 하면 아예 도박판을 벌이기도 했다.

라투스 자작은 도박판이 벌어지는 장소에서 일갈을 터뜨렸다.

“어찌 신성한 군영에서 도박판을 벌이는 것이냐!?”

“아, 이거요? 사령관께서 권장하시는 놀이입니다.”

“뭐, 뭐야? 사령관께서 도박을 권장하신다고!? 그게 무슨 미친 소리냐?”

“저희들이야 푼돈으로 도박을 하지만 종종 지휘관분들이 모여 큰판을 벌이고는 합니다. 베르체 추기경님은 가산을 다 탕진했다고 하던데요.”

“…….”

눈살이 찌푸려졌다.

당연히 라투스 자작은 이것이 병사들의 기만이라고 생각했다.

세상에 어떤 지휘관이 가산을 탕진할 정도로 도박에 빠진단 말인가? 그것도 전쟁통에 말이다.

여기에 베르체 추기경이 그런 모습을 보였다는 건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감히 귀족을 기만해!? 당장 체포해!”

체포를 해야 할 기사들이 딴청을 피웠다.

“지금 뭐하고 있나! 체포하라니까!?”

“아, 저기요.”

신성 기사단장 카르엔이 머리를 긁적이며 앞으로 나왔다.

신성 기사단장이라면 작위를 뛰어넘은 사람으로 제국의 고위급 귀족들도 대우를 해 주는 성기사였다. 그만큼 명성이 자자했다.

“저 병사의 말이 맞습니다.”

“지, 지금 뭐라고 하셨습니까? 단체로 미치지 않은 이상 도박을 권장한다고요!?”

“술도 권장합니다만.”

“도대체 왜요!?”

“좀 작게 말씀하시죠. 마귀가 활동하고 있으니까요.”

“헙!”

그는 입을 다물고 말았다.

신성 기사단장의 입에서 마귀라는 말이 언급되었다.

그 말은 지금까지 벌어지고 있는 일들이 전부 마귀를 속이기 위한 책략이라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노기가 가라앉았다.

“그런 거였습니까?”

“사령관께서는 이미 마귀를 한 마리 잡아서 처분하셨습니다. 실제로 우리들이 마귀를 속임으로 인하여 승리할 수 있었고요. 다 기적과 같은 일들이었습니다.”

“흠.”

병사들은 다시 아무런 일도 없었다는 듯이 낄낄거리며 도박에 열중했다.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는 광경이었으나 마귀를 속이기 위해 일부러 책략을 사용하는 것이라면 이해할 수 있었다.

“하하하! 갑시다. 어차피 내일부터는 함께 도박을 할 수 있을 겁니다.”

“저도 도박을 해야 합니까?”

“자작님은 여신의 군대 아니십니까? 당연히 해야죠.”

“설마 성녀님도 도박을 하십니까?”

“성녀님 빚이 50만 골드로 알고 있습니다. 지금은 좀 자중을 하시는 편인데 마귀를 속이기 위해서라면 사령관께서 대출을 더 해 주실 겁니다.”

“갚아야 한다는 소리입니까?”

“하하하! 저는 빚이 100만 골드가 넘는데요, 뭘. 그래도 이자가 50%밖에 되지 않으니 망정이지 그 이상이었으면 도박으로 본전 찾을 생각도 못 했을 겁니다. 사령관님은 참 좋으신 분입니다.”

아무렇지도 않게 가지고 있는 돈을 다 털리고 빚이 100만 골드나 있다고 껄껄거리며 말하는 신성 기사단장.

베르체 추기경과 같은 경우에는 빚이 200만 골드라고 한다. 도대체 여기가 여신의 군대인지 악마의 군대인지 라투스 자작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작전 회의실.

거대한 막사 안에서는 술과 안주가 푸짐하게 준비되었고, 지휘관들은 도박판을 벌이기에 바빴다.

일종의 문화 충격이라고 할까.

마귀를 속인다고는 하지만 대체 이게 뭔 짓들인가 싶었다.

“회의 안 하십니까!?”

라투스 자작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뭔 회의?”

부사령관을 맡고 있는 추기경이 머리를 벅벅 긁으며 물었다.

“앞으로의 책략에 대해 논해야 정상이 아닙니까. 저는 오늘 왔습니다만.”

“자네도 앉게. 내가 연장자이고 추기경이니 반말을 해도 되겠지?”

“그야 아무래도 상관없습니다만.”

“앉으라니까?”

그는 거의 강제로 앉았다.

테이블 위에는 도박을 위한 판돈들이 수북하게 쌓여 있었다.

추기경이 한마디를 했다.

“오늘 사령관께서는 안 오시나?”

“피곤하다십니다.”

“그럼, 내일은 우리가 찾아가도록 하세. 오늘은 전체적인 지휘관들이 모인 자리니까.”

“그리 말씀드리겠습니다.”

말릭 경이 패를 던지며 말했다.

라투스 자작은 미치겠다는 표정을 짓고는 군사를 바라봤다.

아젠타 남작 역시 담배를 꼬나물고는 익숙한 손놀림으로 금화들을 쓸어 넣었다.

도대체가 돈 개념을 상실한 인간들 같았다.

“피곤하시다면 어쩔 수 없지. 오늘은 우리끼리 노는 수밖에.”

그의 앞에도 패가 돌아갔다.

다들 마귀를 속이는 중이라고 하니 그 역시 도박을 하는 척이라도 해야 한다. 혹시 이렇게 도박을 하는 척 회의를 하는 것이 아닐까.

“군사, 혹시 책략이 있나?”

“물론입니다. 폐하와 성하의 직인이 찍혀 있는 전체적인 책략이 준비되어 있습니다.”

“아, 그런가?”

황제와 교황의 직인이 찍힌 책략이란다.

그런 기조가 처음부터 깔려 있다면 그다지 걱정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아젠타 남작은 책략서 원본을 그에게 보여 주었다.

-선봉군의 기본 책략: 닥돌

신성 칼도나 제국 황제(직인)

신성 칼도나 제국 교황(직인)

선봉군 사령관 발렌(직인)

“그런데 닥돌이 뭔가?”

“닥치고 돌격. 그냥 무식하게 돌격한다는 뜻입니다.”

“허어! 그게 말이 되나!?”

“다 그렇게 승리를 했습니다만.”

“어찌 그게 가능하단 말인가!”

“다 여신의 뜻이겠지요.”

적응이 쉽지 않다.

라투스 자작은 도대체 이 인간들의 머릿속에 뭐가 들었는지 해부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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