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47화
모여드는 사람들 (2)
저녁 무렵이 되었다.
실컷 밥을 먹고 꿀잠을 청하고 있었는데, 말릭의 목소리가 들렸다.
“도련님! 일어나 보십시오!”
“일어나 보라고?”
놈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
역시 나를 대할 때 어떻게 해야 하는지 충분히 인지를 하고 있었으므로 멀찌감치 떨어져서 군례를 취했다.
“쉬시는데 죄송합니다만, 한 번 나와 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무슨 일인데?”
“난민들이 몰려들고 있습니다!”
“난민들이라고?”
“마신의 군대가 이곳을 점령할 당시에 도망쳤던 여신의 세력들이라고 하던데요?”
“흠.”
나는 머리를 긁적이며 일어났다.
그들 속에 세작들이 숨어 있지 않으리라는 보장은 없었지만, 그렇다고 영지민이 될 수 있는 자들을 쫓아낼 수도 없는 노릇이다.
물론 세작이 끼어 있다고 해도 어떤 정보도 여기서 알아낼 순 없을 거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가마를 준비해라.”
“네!”
영주성 밖으로 나오자 찬 바람이 연신 몰아치고 있었다.
북부여서 그런지 비교적 따듯한 제국과 비교하면 매우 추운 날씨를 자랑하고 있었다.
성벽 앞에는 상거지 꼴을 하고 있는 난민들이 몰려와 있었는데, 그 숫자가 물경 수천을 헤아리고 있었다.
“저희들을 구원해 주십시오!”
“여신의 종들이 왔습니다!”
난민들은 거의 가족 단위다.
얼마나 옷을 빨아 입지 않았는지, 기워 입다가 못해 삭아 있었으며 온몸은 검댕이로 얼룩져 있었다.
나는 성벽 위로 올라왔다.
황제가 어느 정도의 영지민을 올려 보내 줄지는 모르겠지만, 많은 사람들이 전쟁이 한창인 이곳에 오기를 꺼려 할 것이다.
하지만 이들은 어떨까?
어떻게 해서든 성안으로 들어오고 싶어 한다. 바깥의 떠돌이 생활과 언제 마신의 군대에 사냥을 당할지 모르는 상태에서 살아왔으므로 성안이 바깥보다는 훨씬 안전하다고 느끼는 것이다.
성녀가 내 곁으로 다가왔다.
“선별 검사를 실시하고 들여보내는 것이 어떨까요?”
“선별 검사?”
“마기가 내부에 존재하면 알아낼 수 있어요. 그러니 신성력으로 선별 검사를 하면 괜찮을 것 같아요.”
나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딱히 마신의 군대에서 세작을 심어 두었다고 해도 별 상관은 없었고 사제들을 시켜 선별 검사가 가능하다고 하면 더더욱 거절할 이유는 없는 것이다.
어차피 집들은 다 비어 있었다.
고맙게 마신은 살림살이 하나도 가져가지 않고 두었으며 집집마다 식량은 넉넉했다.
“지금까지 고생 많았다.”
“와아아아아!”
“성자님 만세!”
난민들은 만세 삼창을 외쳤다.
여신이 추구하는 것이 자비였으므로 칼도나의 이름으로 받아들이면 될 것이다.
“칼도나의 이름으로 환영한다. 하나, 세작이 있을 가능성이 있으므로 신성력으로 선별 검사를 할 것이다. 마기를 지닌 자들은 들어올 수 없다. 동의하는가?”
“당연한 일입니다! 저희들은 부랑을 하는 와중에도 기도를 게을리하지 않았습니다! 드디어 여신께서 응답하신 거로군요!”
“난민들을 들여라!”
“고생하셨어요.”
성녀의 말에 나는 어깨를 으쓱였다.
“어차피 영지민은 필요했으니까.”
이틀 동안 무려 1만이 넘는 난민들이 소문을 듣고 몰려왔다.
마기를 지니고 있어 영지민으로 탈락되는 자들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영지로 입성할 수 있었다.
이런 추세라면 마도 연합 곳곳에 흩어져 있는 칼도나의 신도들을 끌어모아 더 많은 인구를 확보할 수 있을 것으로 보였다.
나는 카렌 영지의 영주로 임명되고, 이들은 앞으로 내 영구적인 백성이 될 것이다.
그들에게는 빈집들을 나눠 주었다.
물론 공짜로 준 건 아니었고 집마다 값을 매겨 영지에서 무이자 대출을 해 주는 형식으로 진행되었다.
일을 해서 3할 정도는 빚을 갚고 나머지는 생활하는데 사용하게 하였으며, 계약서까지 작성하여 서명한 이후에 그들은 새집을 가질 수 있었다.
그 밖에도 영지에 처리해야 할 일이 많았지만, 대부분은 책사들에게 떠넘겼다. 내가 영주라고 해서 직접 처리할 필요는 없다. 제국 중앙에서 올라온 수많은 인적 자원들이 있었는데 그들을 부려 먹어야 하는 것이다.
그런 와중에 급보가 도착했다.
“사령관님! 적들이 출현했습니다!”
“아, 그래?”
“무려 10만이 넘습니다!”
말릭은 적들의 출현에 호들갑을 떨었다.
하지만 당장 그들이 공격하지는 않을 것이다. 마신과의 약속이 유효한 이상 성을 공격한다는 건 말이 되지 않았다.
물론 공격을 당한다고 해서 카렌이 쉽게 점령될 일도 없었고 말이다.
“걱정 마라. 당장 무슨 일 나지는 않으니까.”
“그래도 나와 보셔야 합니다!”
“괜찮다니까.”
“다들 걱정이 태산입니다.”
“적들이 10만이라며? 성안에서 수성하면 충분히 막을 수 있다.”
“네? 수성을 하실 작정이라고요?”
말릭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불만 있냐?”
“그게 아니라 저희 기본적인 책략은 닥돌 아닙니까?”
“성채가 있는데 닥돌을 뭐 하러 해?”
“오오! 정말입니까!?”
말릭은 매우 기뻐했다.
놈은 내가 또다시 닥돌을 명령할 줄 알았나 보다.
내가 마신의 제안을 거절하고 놈이 빡돌면 본격적인 전쟁이 시작될 텐데, 그때에는 어느 정도 신경을 써야 할 것이다.
마신도 반인반마 놈들을 많이 동원할 텐데, 닥돌로는 어려울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렇다면 굳이 병력을 낭비할 필요는 없다.
지금까지야 다 계획이 있었으니 닥돌을 한 것뿐이다.
“내가 붕어 대가리인 줄 알았냐?”
“그런 것은 아니지만…….”
말릭은 몸을 움츠렸다. 분명히 내가 하이 킥이라도 날릴 것이라 생각했던 모양이다.
나는 혀를 한 번 찬 후에 성벽으로 향했다.
지휘관들의 인사를 대충 받아넘긴 후 성벽 너머를 바라봤다.
10만에 가까운 마신의 군대가 카렌 성 앞에서 진을 치고 있었다. 그렇다고 포위는 불가능했다.
카렌 성은 삼면이 강으로 둘러 싸여 있는 험지였으니까.
“많이도 몰려왔네.”
“사령관님! 전략은 어찌 되는 겁니까!?”
라투스 자작이 물었다.
우리가 이곳에 틀어박혀 있자 라투스 자작은 꽤나 몸이 근질거리는 모양이었다.
“오늘은 안 오니까 걱정 말고 자라.”
“그건 모르는 일 아니겠습니까?”
“왜? 너도 나와 내기할래?”
“아, 아, 아닙니다. 그런 살벌한 내기는 사양입니다.”
그의 말에 클로얀 남작과 그 일파들이 한숨을 내쉬었다.
이번 전쟁이 끝나는 순간 수도로 돌아가 벌칙을 수행할 생각을 하니 벌써부터 걱정되기 시작하는 것이다.
“그럼, 가서 쳐 자라. 전쟁을 시작해도 내일 하니까.”
“그래도 경계 병력을 늘리도록 하겠습니다!”
“뭐, 그러든가.”
경계 병력을 늘리는 건 나쁘지 않다.
마신 놈이 정말로 빡치면 새벽이라도 군대를 몰고 쳐들어오지 않으리라는 보장은 없었다.
오늘 밤에는 잠들지 않고 있었다.
마신의 군대가 출현했다는 것은 놈도 슬슬 한계가 오고 있다는 뜻이었으니까.
언제 답을 주겠다고는 이야기하지 않았지만, 시간을 질질 끌고 있으니 재촉을 하기 위해 군대까지 보낸 것이 아닐까.
분명히 오늘 안에 마신의 편지가 도착할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말릭의 목소리가 들렸다.
“도련님!”
“가져와 봐.”
“어? 어떻게 아셨습니까?”
“내가 모르는 것이 어디 있었냐?”
말릭이 편지를 내밀었다.
편지의 내용은 간단했다.
-친애하는 발렌에게.
이만하면 충분히 시간은 주었으리라 생각한다.
지금쯤 결정을 내렸을 테고, 이쯤에서 한 번 보았으면 좋겠군.
오늘 자정에 성문 밖에서 보도록 하자.
간결한 문체의 편지였다.
자정이라고 해 봤자 얼마 남지 않았다.
-어쩔 작정인가요?
에르나가 걱정스럽게 물었다.
나는 어깨를 으쓱였다.
“가 봐야지.”
마신과의 만남은 미룰 수가 없다.
좀 더 뜯어낼 거리가 없을까 고민했었는데 그럴 수가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마신은 당장 나와 함께하기를 바라는 것이다. 그리하여 여신의 군대를 멸하고 제국을 집어삼키자고 말이다.
그렇다고 나는 거짓말도 할 수 없는 입장이었다.
신격들이 대면하였을 때 거짓말을 하면 곧바로 신위를 잃는다.
휘적휘적 걸어서 성문 밖으로 나왔다.
마신은 그냥 성문 밖에서 보자고 하였으므로 알아서 올 것이다.
자정이 되자마자 한 청년이 모습을 드러냈다.
한눈에 놈이 마신 벨루가임을 알아볼 수 있었다. 특별하게 마기가 뿜어져 나오는 건 아니었지만 신격은 신격이 알아볼 수 있다.
나는 하품을 한 번 했다.
“으하하함, 피곤해 죽겠는데 너무 빠른 것 아니야?”
“이만하면 생각할 시간은 충분하지.”
“그래도 한 3년 정도는 그냥 둘 거라고 생각했었는데.”
“그럴 수가 없다는 걸 잘 알지 않나. 나는 전쟁을 일으켰고 인과를 그만큼 소모시켰다. 여기서 시간을 지체하는 만큼이나 인과율의 소모가 크다.”
“뭐, 그건 그렇지.”
한껏 거드름을 피웠다.
여기서 내가 애석하게 생각하는 것은 좀 더 마신에게 뜯어먹을 거리가 있었을 텐데 그러지 못했다는 점이다.
물론 지금 마신의 태도로 봐서는 뭔가 요구하면 거절할 가능성이 컸지만 말이다.
마신은 양팔을 벌렸다.
“자, 결정하라! 빠르게 결정하고 우리들의 세상을 만들어 보도록 하자.”
“미안한데.”
“음?”
“조까라.”
마신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분명히 내가 잘못 말했을 거라 생각했는지 다시 한번 이야기를 들으려는 인내심을 발휘하기도 했다.
“조까라는 것이 무슨 말이지?”
“이거.”
나는 가운데 손가락을 들어 올렸다.
마신의 눈살이 찌푸려졌다.
이 세계에서는 가운데 손가락을 들어 올리는 것에 대해 별다른 뜻이 없는 것 같았지만, 한눈에 봐도 좋지는 않다는 사실을 깨달았던 것이다.
“……거절인가?”
“그래, 이 병신 새끼야. 나를 꼬시려면 여신과 언약을 하기 전에 하지 그랬냐? 네놈 덕분에 카렌 영지는 잘 먹었다.”
“크윽! 이런 비천한 이계 놈이!?”
“하하하! 네놈이 혼자서 두 명의 신격을 감당할 수 있을까? 나는 아니라고 본다. 그럼, 잘 가.”
나는 그렇게 돌아섰다.
잘못하면 화살이 날아올 수도 있었으므로 잽싸게 성문 안으로 들어왔다.
마신과의 만남이 조금 아쉽지만 개운하기는 했다. 더 뜯어낼 수도 있었을 텐데…….
그 순간, 하늘에서 신성력이 내리꽂히며 어마어마한 변화가 일어났다.
꽈릉!
[위대한 업을 달성하셨습니다.]
[육체와 영혼의 ‘격’이 진화를 시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