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52화
카렌 공방전 (3)
“그렇단 말이지?”
“각하의 말씀이 맞았습니다. 적들이 땅굴을 파고 카렌 영지를 노리고 있습니다.”
“뭐, 그렇겠지.”
클로얀 남작의 눈동자에 경외의 빛이 스치고 지나간다.
이런 사실 정도야 전쟁의 경험을 통하여 충분히 숙지할 수 있었다. 놈들이 군대를 물리고 공격하지 않는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충분히 있었다.
다만 이번에 전쟁에 참여한 참모들이나 지휘관들은 마군단 녀석들과의 전투 경험이 없었고 항상 놈들이 써먹었던 전략에 면역이 없었을 뿐이다.
나는 그 즉시 참모들을 모았다.
아무리 게으름의 업이 중요하다고 해도 전쟁 자체를 가볍게 여길 수는 없었다.
연락을 받은 참모들이 모였다.
그들의 표정에서는 짙은 탄성의 빛이 보였다.
다만 나는 아쉬움을 전할 뿐이었다.
“아식스 남작과 내기를 했으면 좋았을 텐데, 그게 좀 아쉽다.”
“아, 아, 아닙니다. 저는 그저 사령관 각하의 지혜에 탄복할 따름입니다.”
이번에 아식스 남작이 내기를 했다면?
그때에는 그야말로 어마어마한 파장이 만들어졌을 것이다. 가볍게 끝날 일은 결코 아니었다.
“그럼 우리 나름대로 준비를 해 볼까?”
“또 어떤 준비가 있겠습니까?”
클로얀 남작이 갈색의 눈동자를 빛내며 물었다.
그는 서서히 내 신봉자로 바뀌어 가고 있는 중이다. 처음에야 애송이 지휘관을 믿지 못하였겠지만 지금은 연전연승이다.
무패 행진을 자랑하고 있었으니 그 믿음이 깨지기 전까지는 충분한 신뢰를 줄 것이 틀림없다.
“적들은 최소한 10개 정도의 땅굴을 팠을 것이다. 좀 더 많을 수도 있지. 한꺼번에 많은 인원을 동원하기 위해 땅굴을 넓게 팠을 거야.”
“그럴 가능성이 다분하죠. 놈들은 일격 필살을 노리고 있을 테니까요.”
참모들이 클로얀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단숨에 전쟁을 끝내지 않을 것이라면 이런 짓을 할 이유가 없었다. 그러니 단시간에 어마어마한 병력을 안으로 들일 수 있을 만한 땅굴을 파고 있을 것이다. 직접 확인이야 하겠지만 그 정도는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나는 천사령을 동원하여 정확한 땅굴의 위치를 짚어 주면 되는 것이다.
“예상 출구에 병력을 포진시킨다. 그리고 올라오는 족족 목을 친다.”
“수로는 어떻게 합니까?”
“적들이 충분히 들어갔다는 판단이 서면 그때 연결한다. 그리고 수장을 시켜 버리도록 하지.”
“각하의 명에 따르겠습니다.”
“오늘 안에 위치를 짚어 줄 테니까 병력을 대기시키도록 해.”
“적들은 언제쯤 올까요?”
“지금 추세로 봐서는 오늘 새벽이 될 것 같다.”
“빠르군요.”
“벌써 진동이 오는 것을 보면 그렇지. 인간이 가장 취약할 때가 언제지?”
“동이 트기 직전입니다.”
“놈들은 그때를 노린다.”
참모들이 얼굴을 굳혔다.
기왕 땅굴을 파기로 하였다면 아군이 취약할 시점에 쳐들어오는 것이 낫다. 그것이야말로 군사적인 전략의 기본이다.
그렇다면 시기는 쉽게 가늠할 수 있는 것이다.
만약 동이 트기 직전에 놈들이 쳐들어오지 않는다고 해도 상관없었다. 미리 대비하지 않고 기습을 받는 것보다는 훨씬 나았으니 병사들이 좀 고생을 하더라도 충분한 준비가 필요한 것이었다.
“다들 준비해.”
“네!”
“으하하함!”
참모들이 물러가자 하품이 절로 나왔다.
기분 좋게 자려 하였는데 놈들이 설치는 바람에 그럴 수 없게 되었다.
“엠파토르 공작인가 뭔가 하는 놈은 두고 보자. 내 수면을 방해한 죄로 네놈은 사형이다.”
차가운 한기가 스며드는 막사 안.
엠파토르 공작은 별안간 오한이 드는 것을 느끼며 몸을 떨었다.
“감기인가?”
으슬으슬 추워지고 있는 가운데 오한이 사라졌다.
그는 일시적인 현상이라고 생각하며 고개를 저었다.
총사령관의 막사로 소식이 속속 전해졌다.
“사령관 각하! 땅굴이 오늘 새벽 정도에 완료될 것 같습니다.”
“꽤 빠르군?”
“암흑 사제들이 노력을 한 덕분이죠.”
참모장 레이먼이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적들은 분명 아군이 군대를 추스르고 있을 것이라 생각할 것이다.
오늘 그렇게 대패를 당했으니 부상자를 수습하고 작전을 새롭게 구상하는 데만 해도 하루 이상이 걸린다.
하지만 아군은 하루도 채 되지 않아 땅굴을 완성했다.
지금은 거의 완성 단계에 놓여 있었다.
“적들의 움직임은?”
“단잠에 빠져 있습니다. 승리를 거두고 난 후에 약간의 술까지 내렸다고 합니다.”
“그것 참 어리석은 지휘관이로군.”
“놈들에게는 천군이 있을지 모르지만, 적 사령관이 매우 귀찮은 것을 싫어한다고 합니다. 오죽하면 닥돌 전략을 짜겠습니까?”
“아, 그거야.”
엠파토르 공작도 처음 세작들에게 소식을 접했을 때에는 당혹스러웠다.
닥돌 전략?
총사령관은 아니지만 그래도 선봉대 사령관이라면 적의 영토로 파고들어 전략적으로 중요한 위치를 선점하는 역할을 한다.
그럴 상황이 아니라면 적의 예봉을 꺾는 역할을 맡았는데, 기본적으로 수립된 전략이 닥돌이다.
지금이야 수성에 돌입하고 있었지만, 그 전에는 무조건 닥돌 전략을 고수하였다. 닥돌이란 닥치고 돌격의 준말이었다.
지금까지 놈은 그렇게 승리를 해 왔다. 말도 안 되는 화력에 기대서 말이다.
하지만 이제 그런 전략은 통하지 않을 것이다.
“동이 트기 직전의 새벽, 출격한다.”
“그리 명령을 내려 두겠습니다.”
신성 칼도나 제국 선봉대는 새로운 전략에 부응하여 인원을 배치하는 작업에 들어갔다.
물론 작전 30분 전까지는 책사들을 제외한 모든 지휘관들이 작전을 몰랐다. 세작들이 활동할 것을 염려해서다.
아젠타 남작은 책사진을 진두지휘하고 있었는데, 혹시나 비둘기가 활동할 것을 고려하여 매를 열 마리나 풀어 두었다.
전쟁에서는 정보가 생명이다.
특히나 적들의 전략을 미리 알아채고 대응하는 자세가 중요하였는데, 오래 전부터 전서구는 세작들의 중요한 정보 전달 연락책으로 쓰였다.
그에 대비하여 키우기 시작한 것이 바로 매다.
매는 비둘기의 천적으로 직접 서신을 전달하기에는 매우 어려웠지만 전서구를 잡아들이는 데에는 큰 효과를 발휘했다.
작전 30분을 남겨 두고 매가 활동하였으며, 작전을 명령받은 병사들은 자다 말고 일어나 작전지로 이동했다.
휘이잉!
칼바람이 몰아치자 병사들은 하나둘 정신을 차렸다.
일찍 기상을 한 것뿐이지 잠을 자지 않은 건 아니다. 여기에 육포를 씹자 어느 정도 기운이 돌아 진영을 갖추었다.
책사들은 멀리서 병사들이 이동하는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저는 솔직히 땅굴은 아니라고 봤었습니다.”
아식스 남작의 말이었다.
그가 어마어마한 위기(?)에 빠질 뻔했다는 사실은 책사라면 모두 알고 있었다.
이미 제도로 개선하면 스테이크를 썰며 똥을 싸야 하는 상황이었는데, 그보다 더한 벌칙을 수행할 수도 있었다.
사령관이 내기를 제안했던 것만 생각하면 몸서리가 쳐졌다.
아투스 남작이 피식 웃었다.
“자네는 아직 사령관님의 진면목을 몰라.”
“그저 귀찮아하는 줄만 알았습니다.”
“그 자체가 전략이라는 사실을 왜 모르나?”
“마귀를 속이는 것 말입니까.”
“그래.”
“그 역시도 말이 안 된다고 여겼지요. 세상에 마귀가 어디 있습니까?”
“있지. 우리들은 보았어.”
책사들은 몸서리를 쳤다.
지금 천사령으로 활동하고 있는 르네는 원래 마귀였다.
어린아이의 모습을 하고 있는 선량한(?) 얼굴의 마귀였는데, 사령관이 인정사정없이 짓밟았다.
그 당시에는 도대체 누가 마귀인 건지 헷갈릴 지경이었는데 시간이 지나고 보니 사령관의 행동이 옳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마귀는 짓밟아야 한다. 이 세상에는 많은 숫자의 마귀들이 활동하고 있었다. 지금도 마귀가 활동할지 모른다.
아식스가 대답했다.
“마귀가 정말 있다면 지금의 상황도 지켜보지 않을까요?”
“우리에게는 천사령이 있어. 평소에는 마귀들을 속이기 위해 대충 행동하지만 군사적인 책략이 세워졌으니 보안에 신경을 쓰겠지. 자네가 염려할 바는 아니야.”
“그렇군요.”
“작전 30분 전에 병사들을 깨운 것만 해도 여러 가지 이유가 있지만 마귀의 눈에 탐지되는 참사를 막기 위함이기도 하지.”
병력의 배치가 완료되었다.
“사령관께서는?”
근위병이 보고했다.
“주무십니다.”
“깨우지 그랬나?”
“그렇게 몇 명의 근위병의 코가 부러졌습니다.”
“…….”
아식스는 아투스 남작에게 설명을 요구했다.
당연하게도 아투스 남작도 지금의 상황을 설명할 수가 없었으므로 아식스의 눈빛을 묵살해 버렸다.
동이 트기 직전.
나는 실비아를 비롯하여 여러 책사들의 간곡한 부탁에 어쩔 수 없이 잠에서 깨어났다.
“으하하하함!”
밖으로 나오자 칼바람이 불었다.
옷깃을 절로 여미게 하는 날씨가 아닐 수 없다.
“졸려 죽겠군.”
“나오셨습니까.”
“르네.”
스스슷.
르네가 나타났다.
내가 자고 있는 동안 르네가 명령을 수행하여 적들의 예상 출구 지점을 전달해 주었다. 그 때문에 내가 잘 수 있었던 거다.
“놈들이 땅굴로 들어갈 준비를 하고 있어요.”
“마귀는 없었고?”
“마귀 둘을 아리아 님이 잡았어요. 지금은 감금을 시켜 두고 있어요.”
“하여간 그 녀석들은 지치지도 않아.”
책사들 사이에서 감탄의 빛이 흘렀다.
역시나 마귀가 활동하고 있다는 사실이 증명된 것이었다.
마귀에 대한 처분은 뒤로 미루기로 하고 작전 지역들을 살폈다.
아투스 남작이 보고했다.
“기사단이 선두에 섰고 병사들이 뒤에 정렬했습니다. 궁수들도 대기하고 있습니다.”
“마법사들은?”
“마법사들 역시 일찍 일어나서 정신을 가다듬고 있습니다.”
“수로는?”
“연결만 하면 됩니다. 간단한 조작으로 수문을 열 수 있습니다.”
“좋아. 그럼 기다린다.”
막 동이 트고 있었다.
지금까지의 경험을 토대로 하면 적들은 반드시 동이 트는 시간을 노릴 것이다. 전생에서는 그런 식으로 수도 없이 많은 공격들을 받았다.
그때에는 마귀가 활동하고 있다는 사실을 몰랐기에 아군의 전략은 막혔고, 적들은 아군이 어떻게 움직이는지 훤하게 꿰뚫고 있었다.
마귀에 대한 내용은 전쟁 막바지에나 알 수 있던 일이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나는 신위를 받았고 칼도나의 보호를 받았으며, 제국이 내 뒤에 있었다. 게다가 칼도나는 천군까지 내려 주기도 했다.
천사령을 거두어 이용하고 있었으니 전생에 비한다면 아스팔트 도로를 걷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르네가 다시 보고했다.
“적들이 몰려오고 있어요!”
“다들 들었지?”
“전 병력 위치로!”
척척!
이미 병사들은 준비를 마치고 있었다.
뒤쪽에서 상황을 알아차리려는 순간, 수문이 개방될 것이다. 그렇게 적들이 약해진 틈을 타서 모조리 쓸어버릴 생각이었다.
“적들이 올라옵니다!”
“와아아아!”
곧바로 전투가 벌어졌다.
아니, 미리 방패 벽을 쌓고 대기하고 있던 아군에 의해 적들은 수수깡처럼 쓰러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