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화 넌 이미 걸려 있다
“그렇다고 해서 그룩 님을 포기할 수는 없는 노릇이지.”
아예 처음부터 드워프의 맛을 보지 않았다면 모를까.
용혈 가방부터 천둥석 건틀렛.
그리고 이후에 맡겨진 스바프니르의 부산물로 만들어질 무구까지.
드워프가 아닌 평범한 인간 대장장이 솜씨로는 감히 쉽게 손댈 수 없는 재료들을 다듬을 수 있는 장인 중의 장인을 놓칠 수야 있을까?
“엔코. 주변에 결계를 부탁할게.”
“침입자라면 그냥 다 깨부숴 버리는 편이 좋지 않을까, 친구?”
“그건 최후의 수단으로 생각해 둘게.”
“우끼. 친구의 선택을 존중하겠다.”
잔나비식 협상도 단순 무식하니 좋겠지만, 미국이든 뭐든 간에 적으로 돌리고 싶지는 않아서 말이지.
어쨌든 간에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잔나비 일족의 결계.
덕분에 웬만큼 감이 좋은 사람이 아닌 이들의 눈에는 그저 평범하게 농사를 짓는 평범한 농부의 집처럼 보일 것이다.
“그럼 어디 무슨 목적으로 온 손님이려나?”
약간의 긴장감 속.
무엇을 목적으로 찾아온 손님일까 싶은 것도 잠시.
“실례합니다. 혹시 여기가 김진우 씨가 사시는 곳이 맞을까요?”
“네. 맞습니다만 무슨 용무로 찾아오신 거죠?”
가장 서열이 높아 보이나 주변의 경호원들과 비교했을 때 아무런 힘도 느껴지지 않는.
무無각성자로 보이는 여성.
그녀가 찾아온 이유는 전자의 경우도, 후자의 경우도 아니었으니,
“저는 나가모리 카나에라고 합니다. 우선 너무 늦은 사과 방문에 사죄의 말씀을 올리도록 할게요.”
“네? 사, 사죄요?”
“예. 기억하실지 모르겠지만 유리 자이스와 정수아의 암살 사건. 그곳에서 함께 좋지 않은 사건으로 얽히게 되셨다고 들었으니 사죄를 드려야 응당 옳겠지요.”
“……?”
질풍 길드가 일왕과 연금 협회와 함께 손잡고 저질렀던 그 암살 계획?
그게 왜 여기서 나와?
아니, 그건 그거고 진짜 문제는 나가모리 카나에.
이 여성의 방문이 손님의 끝이 아니라는 거다.
두두두두-!!!
이건 뭐, 시간차 공격을 하는 것도 아니고.
평범한 길목이 아닌.
공중에서 느껴지는 기척.
또한 이건 굳이 동화한 시야 공유가 없더라도 누군지 뻔히 알 것 같다.
“…….”
헬기와 함께 모습을 드러낸 청발 청안의 여인과 곁을 엄호하는 다수의 미국인.
“진우 씨!”
“환장하겠네.”
눈앞의 나가모리 카나에라는 일본인에 이어서 유리 자이스와 건장한 체구의 미국인 경호원들까지.
외딴 시골의 촌구석과는 어울리지 않는 손님들의 대집합이 지금 이 순간 이루어졌다.
* * *
“후우, 드디어 끝났군요.”
“고생하셨습니다, 카나에 님.”
“고생은 여러분들도 같이하셨죠.”
나가모리 카나에.
그녀는 태어날 때부터 많은 이들로부터 관심을 받았다.
일왕의 딸이라는 자리.
물론 지금 같은 현대 사회에서 일왕이라는 입지는 예전에 비하면 많이 위축되었다.
단순히 상징적인 국가원수라는 느낌뿐.
허나 일반적인 범인에 비하면 그 무게감은 결코 가볍지 않을 터.
더군다나 그러한 ‘상징적 국가원수’인 일왕이 암살을 계획했다는 사실이 만천하에 드러난 이후 카나에는 어떻게든 제 아비가 저지른 실수를 사과하기 위해 방한하여 바쁘게 움직였다.
“이제 일본으로 돌아가시는 걸까요?”
“아뇨, 따로 방문할 곳이 남아 있어요.”
각성자의 신체가 아닌지라 너무나도 지친 몸과 혀를 내두를 만한 일정.
온몸이 녹초가 될 지경이지만 카나에로서는 아직 들릴 곳이 남아 있었다.
‘김진우.’
지금까지 만나서 사과의 말씀을 올린 다른 이들과는 달리 시골의 외딴 촌구석에 위치해 있긴 해도 그녀의 감이 말하고 있었다.
결코 보통의 인물이 아니라는 것을.
그러나 이게 웬걸?
도착한 곳에 있는 것은 너무나도 평범한 농가와 너무나도 평범한 옷차림의 시골 농부 한 명만 있을 뿐이다.
‘내 착각이었던 건가?’
신묘한 기운으로 감이 좋은 그녀라지만 100% 전부 다 들어맞지는 않는다.
가끔씩 존재하는 꽝.
김진우가 바로 그 경우라고 생각하며 사과의 말과 함께 보상을 약속하고 떠나려 하던 찰나였다.
“카나에 님.”
“저도 알고 있어요.”
시골 촌구석에는 어울리지 않는 헬기 소리와 함께 내리는 이들.
그들 중 대표로 보이는 이는 카나에에게도 상당히 익숙한 얼굴이다.
유리 자이스.
미국의 인재임과 동시에 카나에로서는 가해자와 피해자가 대담하는 입장이기에 만나고 싶지는 않았던 인물.
그러나 미국에서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정령사의 가문이 헬기까지 대동해서 찾아온 것에는 다 이유가 있는 일.
‘김진우. 역시 이자에게는 무언가가 있었어.’
그녀의 감.
이번에는 어쩐지 꽝이 아닌 대박의 징조 쪽에 더욱 가까웠다.
* * *
“그쪽이 여기는 무슨 일이시죠?”
“이유가 있어서 찾아뵈었습니다. 김진우. 이분께서도 일왕에 의한 피해자분 중 한 분이시니까요.”
“사정이 있었다라……혹여 진우 씨에게도 저한테 했던 짓을 하려는 속셈은 아니겠죠?”
“결코 그럴 일은 없을 것입니다.”
“믿을 수가 있어야죠, 원.”
나가모리 카나에라고 소개했던 이와 헬기로 요란하게도 도착한 유리 자이스.
둘은 만남과 함께 서로 강렬한 인사를 나누고 있다.
아니, 사실상 ‘서로’라기보다는 한쪽의 일방적인 폭력이라고 해도 무방하다.
정수아나 진우를 대할 때와는 전혀 다른.
냉기를 풀풀 풍기고 있는 유리 자이스.
그러나 그녀가 화를 내는 이유도 어느 정도 이해는 된다.
암살에 대한 사죄를 위해 찾아왔다는 나가모리 카나에.
갑작스러운 방문이 처음에는 이해되지 않았지만, 지금은 알 것 같다.
‘일왕에게 딸이 하나 있다고는 들었지.’
가까운 이웃 나라 중의 하나인 일본이기에 다소 얕게나마 알고 있는 지식.
대통령이나 무슨무슨부 장관 등.
시골에서 농사짓는 진우에게는 평생을 살아가면서 만날 일 없을 인물.
그런데 그런 인물이 자신을 찾아왔고, 여기에 덧붙여서 자이스 가문의 여식인 유리 자이스까지 동시에 찾아왔다.
“볼 일 다 보셨으면 떠나시죠?”
“유리 자이스 님께는 진심으로 죄송합니다만 아직 저로서도 방금 막 만난 것인 상황이어서요. 물러설 수는 없을 것 같네요.”
“하아, 그래요?”
눈빛만으로 사람을 잡아먹는다는 느낌이 이러할까?
스파크라도 튈 것 같은 유리의 시선.
저 광경을 보면서 진우가 속으로 한 가지를 자신도 모르게 다짐했다.
‘한은 품게 하지 말아야겠다.’
여자가 한을 품으면 오뉴월에도 서리가 내린다는 말.
그리고 그것은 유리 자이스에게는 단순히 비유적인 표현이 아닐 거다.
물의 정령사.
물에 변화를 주면 얼음이 되고, 서리가 맺힐 수도 있으니 불가능한 일은 아닐 터.
그나마 한 가지 다행이라면 저 스파크 가득한 시선이 진우를 향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 정도?
“진우 씨도 그렇게 생각하시나요?”
“예?”
“저 사람이 이곳에 있어도 괜찮다고 생각하시냐고요.”
정정하겠다.
이놈의 입이 문제라고.
곧장 날 향하는 찌릿한 시선.
어째 대답을 잘해야 할 것 같은 기분.
그런데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초면에 일왕의 딸이 사과하고자 찾아왔다는데 이제 그만 꺼지라고 할 수도 없는 노릇 아닌가?
외교와는 아득히 거리가 먼데다가 여성에 대해서는 더더욱 거리가 먼 진우로서는 쉽게 선택할 수 없는 길.
허나 걱정 할 필요가 없는 것이 진우에게는 이쪽 부분으로 치트키가 존재한다.
꾸왁~ 꾸와아아악!
삐이이이익!
삐삐? 삐삐삐?
“어머 귀여워라…….”
“크흠흠! 안녕, 오리들아?”
존재 자체만으로도 귀여움을 가득 품은 생명체인 팜오리와 응애 오리들.
그 덕분에 서릿빛 기운을 가득 담고 있던 유리 자이스의 시선도 사르르 녹아내렸고,
“저, 일단은 다들 서 있기만 하기도 뭣하니 들어오시죠?”
이제는 척 하면 척.
진우는 그 타이밍을 놓치지 않고 파고들었다.
* * *
인형처럼 각자 하나씩 응애 오리들을 손에 든 유리와 카나에.
흙투성이인지라 더럽게 생각할 법도 하건만 응애 오리 특유의 귀여움과 보들보들한 털로 인해서 더러움은 이미 잊어버린 지 오래다.
“오리들이 참 순하네요?”
“아하하, 누추하긴 하지만 편하게 앉아 계세요.”
“배려에 감사합니다.”
팜오리들 덕분에 자연스럽게 이루어진 만남.
원래 같았으면 손님맞이의 트레이드 마크라 할 수 있는 찐 감자를 내왔겠으나 아이템화가 가능한 농작물은 전성과 자이스 가문을 제외하면 아무도 모르는 극비 사항.
그렇기에 진우는 이런 때를 대비해서 구비해 둔 쿠키와 차를 내왔다.
이미 앞서 찐 감자를 맛보았던 유리의 아쉬움이 느껴지는 시선을 보내왔지만, 그녀도 진우가 난감해질 만한 질문은 하지 않았다.
그저,
“진우 씨는 늘 볼 때마다 신기하네요.”
“그런가요?”
평범한 농가가 되어 버린 ‘겉모습’에 놀라움을 표할 뿐이다.
하긴, 드워프는 그렇다 치고 수많은 정령과 가축을 비롯하여 정령의 연못과 노움과 노에르가 실력을 발휘해서 쌓아 올린 건축물의 모습도 주변의 평범한 농가와 비슷하게 바뀐 상태다.
진우도 세계수의 끝자락에서 느꼈었던 잔나비 일족의 결계의 힘.
중급 물의 정령사인 유리 자이스도 제대로 감지해 낼 수 없을 정도면 대한민국 내에서도 웬만한 감정 계통의 직업이 아니고선 눈치도 못 챌, 실로 감쪽같은 숨기기 능력.
이 정도면 여간해서는 다른 사람들의 시선을 신경 쓸 필요가 없을 터.
뭐, 그건 그렇고.
“일단 찾아온 순서대로 이야기를 빠르게 진행하도록 하죠.”
미국과 일본.
둘 다 국력으로 보나 입장으로 보나 가볍게 여길 만한 나라들이 아니다.
그러한 나라에서 한가락 하는 일왕의 딸과 거대 가문의 방문.
물론 전자의 경우인 미국이, 유리 자이스가 찾아온 이유는 얼추 예상된다.
보나 마나 드워프인 그룩과 관계된 것일 터.
그렇다면 굳이 드워프가 농장에 있다는 사실을 일본에까지 알릴 필요는 없겠지.
“유리씨도 그편이 더 편하시겠죠?”
“……그렇게 하는 걸로 해요.”
알려져서 좋을 것 없는 것은 미국 또한 마찬가지였기에 딱히 거절하지는 않는다.
근데 어째 퉁명스러운 대답 속에 또다시 냉기가 풀풀 풍긴다.
자, 지금이야 응애 오리들!
삐삐삐!
삐이익!
진우의 시선에 담긴 뜻을 곧잘 알아채고 애교를 떨어 대는 녀석들.
덕분에 냉기가 다시금 사르르 녹아내린다.
정말이지 속내를 알 수가 있어야지 원.
아무튼 정리는 된 덕분인지 이야기의 진행은 빠르게도 이루어진다.
“그러니까 저에게 사죄의 의미로 2천만 엔을 주시겠다는 건가요?”
“네. 부디 부담 가지지 마시고 받아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흐음…….”
2천만 엔.
원화로 치면 거진 2억에 가까운 금액.
평범한 소시민.
시골 농부에겐 가히 적지 않은 돈.
그러한 양의 돈이 공짜로 생기는 것이었으니 보통의 경우라면 가타부타 따질 것 없이 받아들이는 게 맞다.
예로부터 공짜는 언제나 옳다고 하지 않았던가?
허나,
“2천만 엔이 적은 돈도 아니고. 사과의 비용으로는 너무 큰 금액이 아닐까요? 저로서는 굳이 빚을 질 만한 이유가 없어서 말이죠.”
“네? 아뇨, 결코 나쁜 마음은 없습니다.”
그와 함께 예로부터 전해지기를.
세상에는 이유 없는 공짜도, 호의도 없는 법.
사죄의 비용으로 주는 것이라고 해도 받는 순간 진우에게는 마음의 빚이 지어질 수밖에 없다.
덧붙여서 예전이라면 모를까.
1천억 원을 가뿐히 넘는 가격에 팔려 나가는 약초를 재배하는 입장에서 이제는 2억이란 금액도 진우에는 빚을 짊어지면서까지 받을 만한 비용이 못 된다.
“사과에 대한 것이라면 마음만 받아 두겠습니다. 돈은 필요 없습니다.”
“잠시만요. 다시 한번만 생각을…….”
일말의 고민도 없이 진행된 거절.
그래도 나름 일왕의 딸이라는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인물답게 한 번의 거절로 물러설 나가모리 카나에가 아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어떻게든 접점을 만들고자 하는 의지를 불살랐으나,
“어, 어라……?”
어째서인지 제대로 판단이 서지 않는 생각.
그럴 수밖에 없을 거다.
[드루이드의 특성, ‘뱀의 혀’가 활성화됩니다.]
넌 이미 걸려 있다.
뱀의 혀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