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6화 엘프와 드워프
“이익…….”
엘프 알레시아가 러시아에 있던 시절.
그녀는 그야말로 귀족 저리 가라 할 정도의 대접을 받았다.
앞선 자연의 축복을 통한 작물들의 성장 촉진도 그렇지만 무릇 헌터의 세계란 강함을 추구하는 곳인 법.
상급 바람의 정령인 실레스틴을 다룰 줄 아는 정령사이며, 동시에 자연 마법까지 다룰 줄 아는 그녀의 가치는 높았으며, 어디 가서 꿀릴 일이 전혀 없었다.
거기에 덧붙여 ‘엘프’라는 종족에 걸맞게 이형의 몬스터 따위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다운 외형까지.
외모지상주의가 만연한 세상에서 인간 외에 이만큼이나 인간의 이상향에 맞는 종족이 또 어디 있겠는가?
어딜 가든지 최상의 대접을 받을 수 있는 종족.
허나,
“이 난쟁이 똥자루들이 감히! 그렇다 말하는 너희들도 쓸모없기는 마찬가지잖아!”
“크헐헐! 이보게 그룩. 저 귀쟁이가 말하는 것 좀 보게나.”
“이거야 원. 우스워서 말도 안 나오는군. 지금 네가 생활하고 있는 집을 누가 만들었다고 생각하는 거냐?”
“그것도 불만이면 집에서 나와 가지고 노숙이라도 하던가. 저기 뮤린이라고. 사슴 곁에서 자면 춥지는 않을 거여.”
“독버섯도 있으니 조심하고.”
“……그, 그건.”
“왜? 그럼 염치 불구하고 감사하다고 하면서 ‘우리 드워프’들이 만든 곳에서 살아가라고.”
그러한 알레시아의 가치는 이미 작물과 약초에 대한 재배에 통달한 진우에게 있어서 아주 조그마한 도움만 얹어질 뿐이다.
그런 반면 두 드워프의 가치는 전혀 다르다.
농부와는 전혀 다른 작업인 무구 제작과 건축 등.
진우가 할 수 없는 것들을 대신해서 할 수 있는 대장장이들.
예컨대 전문 분야가 다르다는 거다.
“쯧. 엘프들은 감사 인사 한마디도 못하는 건가?”
“귀쟁이들이 그러면 그렇지.”
“…….”
까드득-!
제대로된 반론이 불가능한 드워프들의 말에 이만 갈아붙이는 알레시아.
허나 그런 그녀를 구원하는 것은 전혀 뜻밖의 존재였다.
- 헤에? 거기 엘프 언니는 실레스틴 선배님이랑 계약하신 거예요?
“으, 응? 그렇다만 무슨 문제라도 있는 건가?”
- 아니 아니~ 그건 아닌데~ 이곳에서 우리 바람 속성 정령만 선배님이 없어 가지고 말이죠. 혹시 괜찮다면 실레스틴 선배님을 소환해 주실 수 있을까요?
- 이봐, 실프. 선배가 없는 건 나도 마찬가지인데?
- 에이, 쩨쩨하게. 사소한 건 그냥 넘어가자고, 카사.
- ……사소하다고? 지금 불 속성을 무시한다는. 뭐 그런 뜻인가?
- 자꾸 쪼잔하게 파고들기야?
- 쪼잔한 게 아니라 확실하게 하자는 거지! 불 속성도 선배님이 없는 건 똑같다고!
- 알았어. 미안해. 미안하다구! 됐지?
- 오냐. 사과 잘 받았다.
어느새 다가와 티격태격하고 있는 실프와 카사.
물론 자유분방한 바람 속성과 제법 어울리는 편인 불 속성답게 금세 화해로 이어졌으나 알레시아에게 문제가 사라진 것은 아니다.
“계약한 것은 사실이지만 마땅한 이유도 없이 소환하는 건 아무래도 무리일 수밖에 없다.”
엘프라고 해도 피할 수 없는 마나의 한계.
하급에 속하는 실프 정도라면 모를까.
등급이 상승할수록 유지하기 위해서 소모되는 마나의 양은 배 이상으로 불어난다.
전투와 같이 다급한 상황이 아니고서야 보통의 정령사들은 정령을 소환해 두지 않는 것이 기본일 정도.
- 진우는 그런 거 신경 쓰지도 않는 것 같은데?
- 그건 인간이 대단한 거지. 일반적으로는 이 엘프의 말이 맞다. 실프.
“나도 그 부분만큼은 대단하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눈으로 포착되는 것만 수십 개체에 달하는 정령들이 농장에 머물고 있게 만드는 진우의 힘이 놀라울 따름이다.
뭐, 대부분이 하급이고 가장 높은 것이 중급이라고 해도 이 정도 되는 숫자를.
그것도 서로 속성이 다른 정령들을 유지하는 것은 상위종인 하이 엘프라고 해도 불가능하다.
엘프의 전설로만 알려진 로열 엘프 정도나 되어야 가능할 정도랄까?
“응, 역시 쓸모없는 귀쟁이로 확정이로군.”
“크헐헐! 애초에 기대도 안 했지만 말이야.”
“자자, 두 분도 그만 하세요. 그래도 새로 들어온 농장 동료인데 사이좋게 지내야죠?”
“흥! 진우 너도 겉모습에 속지 말아라! 엘프란 족속들은 믿어서는 안 된다고!”
“맞아, 맞아. 이곳에 있는 아가씨들과 비교해도 족히 10배는 더 오래 산 할망구라고!”
“시끄러워 난쟁이 똥자루 새끼들아!”
“뭐? 똥자루? 허 참 어이가 없어서. 오랜만에 망치에 피를 붙여 줘야겠군.”
“클클클! 자고로 엘프의 피를 머금어야 제대로 된 무구가 탄생하는 법이지!”
“허 참…….”
엘프와 드워프.
사이가 안 좋다는 것은 이미 많이 들었지만 이 정도로 견원지간일 줄은 몰랐다.
미운 정도 자주 접하다 보면 고운 정 되는 법이라고 했지만 이건 자칫했다가는 드워프든 엘프든 간에 어느 한 종족이 피를 봐야 끝날 듯한 상황.
물론 이미 뮤린과 엔코라는 록원지간을 경험해 본 진우이기에 해결법은 그다지 어렵지 않았으니,
“자꾸 싸우시면 이제부터 맥주는 전량 다 전성에 납품해 버릴 겁니다?”
“……치잇. 알았어, 알았다고!”
“귀쟁이! 너 운 좋은 줄 알라고!”
“그래도 사이좋게 지내려고 하시면 멈추라고 할 정도로 퍼 줄 테니까요. 아셨죠?”
“끄응, 그건 한번 노력은 해 봄세.”
“너무 기대는 하지 말라고.”
“네.”
유일하게 드워프를 컨트롤 할 수 있는 드워프 맥주.
그것을 만들 수 있는 것이 진우뿐인 이곳에서 이 설득을 이겨 낼 드워프가 세상에 어디 있을까?
투덜대며 망치를 어깨에 걸치고 작업을 위한 터전으로 향하는 드워프들.
그 태도에 알레시아는 처음으로 감동이라는 감정을 느꼈다.
이곳 농장에서 유일하게 자신의 편을 들어주는 진우.
비록 인간이라 할지라도 대지모신의 선지자라면 엘프에게도 능히 인정받을 만한 자격은 차고 넘치지 않겠는가?
하지만 세상에 이유 없는 호의는 없는 법.
엘프가 선사해 주는 축복이 진우의 특성인 ‘자연이 그대를 돌보리라’의 하위호환이라지만 그래도 아예 없을 때에 비하면 좋을 터였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런데 실프의 말이 진짜인가요?”
“어떠한 것을 말하는 걸까요?”
“바람의 정령. 그것도 상급을 소환할 수 있다는 부분이요. 아, 혹시 가능하면 중급으로도 소환이 가능한지도 말씀해 주시면 감사드리겠습니다.”
“물론 둘 다 가능합니다! 그렇지만 앞서 말씀드렸듯이 유지에 큰 마나를 소모하는 데다가 이유 없이 부르면 정령들도 불만을 늘어놓다 보니…….”
“그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예?”
“미리 말씀드리지 못해서 죄송하지만, 이곳은 대지모신 님의 축복이 가득한 곳이거든요. 정령을 유지하는 마나의 소모량도 극히 줄어들 테고 짜증을 내기는커녕 오히려 좋아할 수도 있을걸요?”
[대지모신이 긍정의 뜻을 내비칩니다.]
“대, 대지모신이시여! 그렇다면 선지자님의 뜻도 그러하시다면 불러 보도록 하겠습니다. 각각 한 개체씩이면 괜찮을까요?”
“네. 충분합니다.”
짧은 대화 끝에 바람의 정령을 소환하게끔 설득에 성공한다.
아마 대지모신의 긍정이 마지막 결정타를 날린 것 같기는 해도 그게 어디인가?
스륵- 스르르륵-
후우우웅-!
실프와는 비교도 안 되는 크기의 바람을 일으키며 서서히 형성화되는 바람의 정령들.
각각 중급과 상급.
날렵한 늑대의 형상을 하고 있는 슈리엘과 카사와 비슷하지만 좀 더 고급스러운 문양이 날개에 새겨진 독수리 형상인 실레스틴이 나타났다.
- 이곳은……. 대체 어떻게 된 것이지 알레시아?
- 이토록 풍요로운 땅은 정령계에서도 쉽게 볼 수 없는 곳이거늘! 이곳은 어디인 거냐, 알레시아. 저 기이할 정도로 친밀감이 느껴지는 인간은 누구인 건가?
“그게…….”
복잡한 상황에 당황한 알레시아와는 달리 이미 이런 사태가 익숙한 진우는 차분하게 답변을 시작한다.
“반갑습니다. 바람의 정령 선배님들. 저는 김진우라고 합니다. 이곳을 가꾸고 있는 대지모신의 충실한 신도이죠.”
- 오오! 그럼 앞으로 잘 지내보자꾸나.
- 킁킁! 너에게선 좋은 바람의 냄새가 난다.
“저야말로 환영이죠.”
새로운 정령은 언제나 환영인 이유.
그거야 두말하면 잔소리이지 않겠는가?
[업적을 달성했습니다! ‘바람의 중급 정령을 마주하다’]
[신용도가 3 상승합니다.]
[업적을 달성했습니다! ‘바람의 상급 정령을 마주하다’]
[신용도가 10 상승합니다.]
지금의 진우에게도 큰 도움을 주었으며, 앞으로도 큰 가치로서 기능하게 될 신용도.
그것을 무려 13이나 날로 먹게 되었으니 너무나 달달하여 이가 썩지 않고 배길 수가 없을 정도였다.
* * *
콰앙!
“허어? 지금 그게 말이 되는 소리인가!?”
어느 나라나 국회만큼 팝콘 뜯기 좋은 풍경이 없는 법이라고 했던가?
잘나신 정치인 나으리들 간의 말로 싸우고, 주먹이 오가는 그야말로 개판 오분 전.
각종 논란이 쉴 새 없이 쏟아져 나오는 공간이지만 오늘만큼은 그 주제가 주제인 만큼 의회의 분위기는 더욱 살벌하게 들끓었다.
“아주 미쳐도 단단히 미쳤군. 유석의 파편을 건네준다니. 제아무리 당신들 세상이라지만 이건 너무한 거 아니요?”
“유석의 파편은 우리 나라의 국보입니다. 그러한 것을 타국인에게 넘긴다는 사안은 결코 쉽게 넘어갈 수는 없겠는데요?”
“게다가 이미 엘프까지 빼앗기지 않았소? 지금 그것부터 되찾는 것이 순서에 맞지 않겠습니까?”
“당연한 소리를! 한국 정부에 압박을 넣어서라도 다시 알레시아를 데려오는 게 맞습니다!”
“다들 진정하시고 대통령도 다 뜻이 있어서 이러한 것을 제안하신 것 아니겠습니까? 그러니 좀 더 대화를…….”
“그러니까! 애초에 꺼내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되는 이야기라고!”
“후우…….”
어떻게든 대화를 이어 나가려 하는 측과 결코 대화를 받아 주지 않겠다는 측.
양보가 전혀 이루어지지 않기에 서로 고성이 오가는 현장이었으나 이내 문을 열고 들어서는 한 명의 인물로 인해 바로 차갑게 식어 든다.
“블라트 나자르프. 나가 주시죠. 지금은 대통령이 끼어들 자리가 아닙니다.”
“크흠. 너무 섭섭하게 굴지 말라고.”
“섭섭한 게 아니라. 법이 그렇습니다.”
“그게 문제가 된다면 바꾸면 그만이지 않겠나?”
“…….”
표면상으로는 민주주의를 모습을 띠고 있으나 엄연히 독재 국가인 러시아다.
그리고 그러한 국가의 대통령인 블라트 나자르프의 힘은 의회에 모여 있는 모든 정치인이 쿠데타라도 일으키는 것이 아닌 한 쉽게 끌어내릴 수 없을 정도.
물론 그것이 가능하다 하더라도 쉽게 행동에 옮길 정치인은 없으며, 용기와 애국심이 넘쳐나는 인물들도 아니었다.
꿀꺽-
나이를 먹어도 그 강함은 여전히 이름을 널리 알릴 정도인 전 S등급 헌터.
은근히 뿌리는 기운만으로도 일반인은 주눅이 들 수밖에 없을 정도.
하지만 정적을 제거할 것이라면 시치미를 뗄 수 있게끔 암암리에 진행을 하지.
대놓고 의회에서 정치인들을 대상으로 학살을 자행할 정도로 생각이 없지는 않다.
누가 뭐라 해도 블라트 나자르프는 러시아에서 수많은 지지층을 기반으로 둔 대통령.
그렇기에 국민이 원하는 것을 누구보다도 잘 알았고, 그에 대한 미끼도 뿌릴 줄 알았으니,
“우선 그대들에게는 사과부터 해야겠군.”
“예?”
“대, 대통령님. 그게 무슨?”
“유석의 파편도 그렇지만 자국의 중요한 인재라 할 수 있을 엘프를 거래를 위해 넘겨 준 것은 어디까지나 내 독단으로 내린 결정이었으니 말일세. 물론 거기에 일말의 후회는 있지 않지만.”
“지, 지금 엘프를 가지고 거래를 했단 말입니까?”
“그래. 국민을 위한 결정인데 뭔가 문제라도 있는 건가?”
“그, 타국의 인물에게 엘프를 넘겨 주는 게. 또 우리 나라의 국보인 유석의 파편도 넘긴다는 게 어째서 국민에게 이득이 되는 것인지 전혀 납득이 되지 않습니다.”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되지 않습니까?”
아니나 다를까?
이것을 블라트의 실수로 생각하고 덥썩 미끼를 물어 버리는 정치인들.
대놓고 쿠데타는 일으키지 못할지라도 국민의 여론을 활용한다면 얘기는 달라진다.
잘만하면 피를 흘릴 일 없이 탄핵을 시킬 기회가 될 일.
다만,
“왜 이해가 안 되겠나. 러시아에 발생한 몬스터 웨이브로 발생한 환경 동화가 진행 중인 게이트. 국민이 더욱 좋은 삶을 영위 할 수 있게끔 그것들을 닫을 수만 있다면 제대로 써먹지도 못할 유석의 파편 따위 1개든, 100개든 있는 대로 줄 수 있는 것 아니겠나?”
“……!”
허무하게 엘프를 진우에게 빼앗긴 실책도 기회로 만들어 내는 저력.
늘 높은 지지율을 유지하는 실세.
여론을 만지는 것에 도가 튼 독재자다운 말솜씨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