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상처
차갑게 식은 지유의 눈빛에 두 사람이 눈매를 움찔거렸다.
“지금 무서운 사람들이. 알지도 못하는 사람한테 가서 무슨 짓을 했는지 알아요?”
“우……우리가 뭘? 그러니까 네가 우리 피하지 않았으면 이런 일 없잖아. 그리고 네 집 앞에 있는데 대표가 온 거라고.”
“집까지 왜 따라가시냐고요!”
“날씨가 이렇게 추운데. 그럼 밖에서 기다려? 마침 너 아는 사람이고 회사 대표라니까 우리 사정 이해해주겠지 하고 따라간 거지!”
우리 사정.
잊을 만하면 걸고넘어지는 행동을 더는 참을 수가 없었다.
“큰 엄마. 그리고 언니.”
지독히 처참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도대체 나한테 왜 그러는 거예요?”
“몰라서 물어? 돈 달라고. 우린 먹고 죽을 돈도 없어! 네 큰 아빠는 죽겠다고 축 처져서 저러고 있지!”
그럴 사람이 아니었다.
오히려 큰소리를 치며 자신은 아무 잘못이 없다고 말할 사람이었다. 눈앞에 그들처럼.
“아무튼!! 그리고 그 네 잘난 시어머니는 돈 달라고 그러지. 그걸 우리가 다 해결해야 하니?”
“있는 돈 싹싹 긁어 드렸잖아요.”
“넌 속 편하게 회사는 다니잖니. 말 나온 김에 대출 좀 더 받아라. 아님. 이 집 전세일 거 아니야. 전세도 보증금으로 대출 더 받는 다더라.”
잇새로 짙은 한숨이 흘러나왔다.
기존 집 전세금도 몽땅 넘겨주고, 월세로 살고 있었다.
매월 내야 하는 월세와 대출이자.
몇 개월간 받지 못했던 월급 탓에 통장 잔고 마저 넉넉지 않았다.
회사가 다시 제대로 돌아가고, 이제야 숨을 좀 쉬겠구나 했던 상황.
아무것도 모르고 찾아와 득달같이 돈을 내놓으라는 그들의 행동에 먹구름이 낀 듯 가슴이 답답해졌다.
“집 파세요.”
지유의 한 마디에 두 사람의 눈이 걷잡을 수 없이 커졌다.
“그 집 팔고. 남은 돈으로 알아서 해결하세요.”
“그럼 우리는 어디 살라고!!”
“그건 알아서 하셔야죠!”
“그 집 대출도 있어서 집 팔면 남는 돈도 없는데! 우린 어디서 살라고! 우리가 길바닥에 나 앉아야 네 속이 편하겠니? 이게 정말 미쳤나!!”
“미친 건 내가 아니라 큰 엄마 가족이라고요!! 지금 몇 년째 같은 상황인데. 왜 정신을 못 차려요! 사람도 아니라고요!”
“이게 진짜!”
벌떡 일어난 큰엄마가 쫓아오듯 정신없이 다가왔다.
그리고.
쫘악!
날카로운 감각과 함께 지유의 고개가 옆으로 맥없이 떨어졌다.
지유의 눈동자가 정신없이 흔들렸다.
“이게 아주 그동안 곱게 놔뒀더니. 정신을 못 차리지.”
“……지금. 대체…….”
따끔거리는 볼을 손바닥으로 감싼 채 지유가 고개를 들었다.
“네 큰 아빠 왔으면. 넌 찍소리 못하고 얻어맞았어!”
“……왜 손대. 내 몸에 왜 마음대로 손대!”
부릅뜬 눈 안으로 분노가 담긴 눈빛이 번쩍였다.
쫘악!
조금 전보다 더 강한 아픔이 얼굴을 강타했다.
꾹 다문 입술 안으로 여릿한 피 맛이 느껴졌다.
“이게 아주 못 배워 먹은 집에서 태어난 년 아니랄까 봐. 어디서 눈깔을 치켜뜨고 지랄이야!”
큰 엄마의 손이 공중으로 다시 번쩍 들렸다.
“아우! 엄마 그만해! 위에 다 들리겠어!”
느릿하게 다가와 엄마의 손목을 부여잡은 진주가 못마땅한 눈빛으로 지유를 바라보았다.
“네 아빠가! 그 배워 먹지 못한 네 엄마랑 결혼 만 안 했어도. 너 같은 거 키운다고 우리가 고생 안 했어!!”
지유의 눈동자가 지독한 빛을 머금은 채 부들부들 떨렸다.
“이게 아주 먹여주고 재워주고 했더니. 배은망덕한 년.”
“엄마. 그만해. 이러다가 쓰러지겠어. 병원에서 혈압 높다고 조심하라고 했잖아.”
“저 독한 년 봐라. 저렇게 처맞고 울지도 않는다. 내가 저런 년 때문에 아주 건강도 다 망가지고. 아이고. 이런 싸가지 없는 년 때문에.”
한숨을 뱉은 진주가 큰엄마의 어깨를 끌어안았다.
“일단 가자. 아빠 전화 왔었어.”
“차라리 와서 이 정신 나간 년 정신 차릴 때까지 때리라 그래!”
“진정해. 그런다고 돈이 나와?”
“아이고. 돈 없는 것도 서러운데. 내가 이런 괄시나 당하고.”
“야. 송지유. 아빠 오면 너 맞아 죽을지 몰라서 우리 가는 거야! 고마운 줄 알아!!”
대꾸할 기운조차 남지 않았다.
“네가 그러니까 임 서방한테 이혼당한 거 아니야! 여자가 말랑말랑한 면이 있어야지. 저렇게 드세서는. 꼭 지 엄마처럼.”
가슴을 후벼 파는 지독한 통증에 지유가 천천히 눈을 감았다.
“엄마. 진정하고 이제 가자.”
어깨를 끄는 손길에 큰 엄마가 현관을 향했다.
“너 또 전화 안 받으면 다음에는 회사로 찾아갈 줄 알아! 그리고 그 돈은 네 시어머니 만나서 네가 알아서 해결해!!”
쿵.
문이 닫히는 소리에 지유의 어깨가 들썩였다.
온몸에 쭈뼛 달라붙는 소름에 손바닥으로 두 팔을 감쌌다.
주르륵 흘러내리듯 떨어진 몸이 바닥으로 무너져 내렸다.
영혼을 잃어버린듯한 눈동자를 천천히 들자, 거실에 놓인 전신 거울에 자신의 모습이 선명하게 보였다.
눈물조차 흘리지 못하는 처연한 얼굴을 가만히 담다가 고개를 떨궜다.
불길이 치솟아 몸을 서서히 태워오는. 그런 지옥 같은 곳에 앉아있는 기분이 들었다.
비참하다.
그리고 살고 싶지 않다.
몇 년간 깊게 누르고 있던 생각이 수면 위로 느릿하게 모습을 드러낸다.
어디로 가는지 모르고 흘러가는 인생 같았다.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벼랑 끝에 서 있는 기분이었다.
끝이 보이지 않는 낭떠러지로 떨어지면, 지금보다 편할까.
진절머리 나는 삶에 질린 마음이 가지 말아야 할 곳을 향해 달려간다.
무릎을 끌어안은 채 몸을 웅크렸다.
집안에 맴도는 따뜻한 공기마저 자신을 피해간 듯 시리도록 추운 공간에 앉아있는 기분이 들었다.
그렇게 추운 밤이 무심하게 흐르고 있었다.
***
빛이 잘 스며드는 창문.
계절과 어울리지 않게 따뜻함이 느껴지는 공간.
사무실에 책상 앞에 앉아서 창문 너머 어딘가를 바라보던 세준의 눈매가 마음에 들지 않는 듯 구겨졌다.
의자에 앉은 채 창문을 향하고 있던 몸을 천천히 돌렸다.
블라인드 너머 자리를 지키고 있는 지유의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사무실에 들어서는 순간. 인사를 건네는 직원들 사이에서 아무렇지 않게 고개를 꾸벅 숙이던 그녀.
평소보다 살짝 진해 보이는 립스틱을 바른 그녀의 입술이 한눈에 들어왔다.
가지런히 모인 입술 끝에 티 나지 않게 박혀있는 상처.
그녀의 앞을 지나는 짧은 시간 동안 기분이 느릿하게 가라앉았다.
똑똑.
들리는 노크 소리에 세준이 창문에서 시선을 떼어냈다.
기훈이 사무실로 들어왔다.
“메일 보낸 거 봤지?”
“아니. 아직.”
“지유씨가 어젯밤에 보냈다던데. 확인 한 번 해봐.”
모니터로 시선을 돌린 세준이 메일함을 열었다.
새벽 2시.
그녀의 메일이 도착한 시간이었다.
‘그 와중에 일했다는 소린데…….’
비집고 나오려는 한숨을 삼킨 세준이 메일에 첨부된 문서를 열었다.
옆으로 다가온 기훈이 책상 위로 살짝 걸터앉았다.
“중단됐던 리조트 사업 관련 서류들이야. 성우 쪽뿐만 아니라 다른 회사들도 문의가 좀 있네.”
“그래? 왜지?”
“왜 긴. 맥슨에서 투자한다고 하니까 그렇지. 그게 어디 쉬운 일이야?”
“말만 나왔지. 아직 정확한 건 없잖아.”
“대표님이 너 좀 예뻐했냐. 너 같은 천재는 한국 말고 미국에서 빛을 봐야 한다고 했다면서.”
세준이 피식 웃었다.
“그냥 한 말이야. 괜한 소문 듣고 다들 헛물 켜는 거야.”
미국에서 세준이 다니던 회사는 그다지 규모가 크지 않았었다.
미국의 유명기업 신사옥 건축 공모전에 세준의 팀이 제출한 설계안과 디자인이 당선되었다.
어렵게 따낸 설계권인 만큼 회사도 세준도 의욕을 불태웠던 시간이었다.
글로벌비즈니스 센터를 목표로 모든 것을 쏟아냈고 완공이 된 후 모든 사무실 분양 마감으로 시공사와 건축주에게 어마어마한 투자이익이 발생했다.
그때 시공사 ‘맥슨’ 에서는 세준의 능력을 크게 샀고, 회사를 나와 개인 회사를 차렸을 때도 투자를 아끼지 않았다.
최근 세준이 ‘빌드온’ 대표로 오면서, 동종업계에서 그의 움직임에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성우도 그중에 하나였다.
“쓸데없는 소리에 휩쓸리지 마. 한국 들어와서 맥슨 쪽에 연락한 적도 없으니까.”
“넌 왜 굴러온 복을 차는지 이해가 안 된다.”
“복은 무슨.”
“괜히 대표 앞에서 결혼할 사람이 있다는 둥 쓸데없는 소리를 해서는. 말만 잘했으면 근사한 기업 사위가 되고도 남았을 텐데.”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기훈이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결혼도 하고 싶은 사람이랑 해야지.”
“그중에 그런 사람이 생겼을지 누가 알아?”
“마음에도 없는 사람 만나는 거 귀찮아.”
“그래서. 지금 그러고 있는 거고?”
“뭐가?”
사무실 창문으로 고개를 돌린 기훈이 지유를 바라보았다.
기훈의 시선이 지유에게 닿은 걸 인식한 세준이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창문을 향했다.
촤르륵.
블라인드가 창문을 가리자 기훈이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세준을 노려보았다.
“아무튼, 쓸데없는 소리 듣지 말고. 건축주 미팅 날짜 잡아 줘. 성우는 일단 내일 만날 테니까.”
“네. 대표님. 시키는 대로 해야죠!”
눈썹을 씰룩인 기훈이 책상에 걸터앉았던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오늘 오후 회의 나 혼자 갈 거니까. 송지유 씨는 사무실에 있으라고 전해줘.”
“네가 하지 왜?”
“나가 봐.”
저걸 그냥 확.
미간을 가득 구긴 기훈이 사무실 문을 벌컥 열었다.
대표실을 나온 기훈이 곧바로 지유에게 향했다.
“지유 씨.”
“네. 팀장님.”
“아! 그냥 앉아서 들으세요.”
엉거주춤 일어나던 지유가 자리에 앉았다.
부드럽게 미소짓던 기훈의 표정이 천천히 어두워졌다.
“무슨 일 있으세요?”
“네?”
살짝 부은듯한 뺨을 바라보던 기훈이 금세 입매를 밀어 올렸다.
“아니에요. 피곤해 보이셔서요. 그리고 별건 아니고 오늘 오후 대표님 혼자 나가신다니까. 사무실에서 일 보세요.”
“아. 네.”
“그럼 수고하세요.”
가볍게 미소지은 기훈이 몸을 돌렸다.
마주하고 있던 얼굴을 빠르게 숙인 지유가 책상 위에 놓인 거울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혹여나 누가 알아볼까 봐 숨죽이며 보내고 있는 하루.
부은 뺨을 가만히 바라보며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외근을 마친 가을이 사무실로 돌아왔다.
“다들 퇴근했구나.”
모두가 퇴근한 사무실을 훑으며 자신의 자리를 향하던 중.
꼬르륵.
배에서 울리는 진동에 손으로 굶주린 배를 움켜잡았다.
“아. 배고파. 지유 기다리라고 해서 밥 먹고 갈걸.”
책상으로 다가가 가지고 온 자료들을 정리하던 가을이 분주히 움직이던 손을 멈추었다.
“가다가 돈가스 먹고 갈까?”
먹을 생각에 얼굴에 미소가 내려앉았다.
“아니다. 추운데. 순대국?. 크으. 생각만 해도 좋다.”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난 가을이 부리나케 사무실을 빠져나갔다.
“이모님. 얼큰 순댓국 하나요.”
번쩍 손을 들고 주문을 하는 순간.
“어? 가을 씨.”
익숙한 목소리가 뒤에서 들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