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고작 두 번째 결혼-18화 (18/80)

18. 그 시절 그리고 기억

“어? 가을 씨.”

뒤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가을이 몸을 돌렸다.

“식사하러 왔어요?”

“어. 팀장님.”

한 손을 번쩍 든 기훈이 빙긋 웃었다.

그리고 자리에서 일어나 외투를 챙겨 가을이 앉은 자리로 다가왔다.

“혼자예요?”

“네.”

“마침 잘 됐다. 나도 혼자예요. 같이 합석해도 되죠?”

“네. 그럼요.”

사람 좋은 미소를 담은 기훈이 마주 앉았다.

눈을 맞추고 있자, 괜한 어색함이 밀려와 입술을 억지로 밀어 올렸다.

그 날 술자리 이후 처음 단둘이 마주하는 자리였다.

사무실에서 데면데면 인사를 나누면서, 그 날의 일에 대해서는 일절 언급하지 않았다.

“나 안 그래도 가을 씨한테 물어보고 싶은 게 있었는데. 잘 됐다.”

기훈의 말에 가을이 속으로 흠칫 놀랐다.

‘혹시 그 날 일은 아니겠지?’

그 기억이 남은 머리를 때려서라도 잊게 하고 싶다며 자괴감에 빠졌던 그녀였다.

설마 하는 생각을 담으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뭔데요?”

느릿하게 눈동자를 추어올리며 조심히 묻자.

“아. 별건 아니고요.”

가벼운 목소리를 뱉은 그가 또다시 빙긋 웃으며 입을 닫았다.

‘아니. 왜 말을 하다가 말아. 별거 아닌 게 얼마나 별건데.’

긴장이 서린 눈빛으로 가만히 기훈을 응시했다.

잠시 머뭇거리듯 모은 입술을 꾹 눌러 물었던 그가 다시 입을 열었다.

“지유 씨랑 친하죠?”

“네? 아. 네.”

자신이 예상했던 이야기가 아님에 일단 안심을 한 가을이 서둘러 답했다.

“제가 알기로는 대표님이랑 두 분 같은 대학 나온 거로 알고 있는데. 맞나요?”

“네. 맞아요.”

이제는 이런 걸 왜 묻는 걸까 하는 생각이 느릿하게 담겼다.

“그런데 왜요?”

조심스레 가을이 입을 열었다.

“아니요. 세 사람이 친분이 없었나 봐요. 일절 거기에 대해서 티를 안 내서요.”

“뭐. 티 낼 게 있나요? 회사 분위기도 흉흉했고. 또 대표님이랑 아는 사이라고 떠들어서 좋을 게 뭐가 있어요.”

지유와 세준의 관계를 떠나서 솔직한 자신의 생각이었다.

학연. 지연. 대놓고 떠들어봐야 이득이 될 일은 없으니까.

“아. 하긴. 제가 생각이 짧았네요. 그냥 그게 막연히 궁금했었거든요.”

그랬구나. 가을이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가을 씨. 근데 뭐 시켰어요?”

“네?”

“뭐 시켰냐고요.”

질문이 저게 끝인가?

밀려오는 생각을 덮으며 빠르게 입을 열었다.

“얼큰 순댓국이요.”

“저는 그냥 순댓국이요. 매운 걸 잘 못 먹거든요.”

“아. 진짜요? 저는 이런 쌀쌀한 날은 얼큰한 국물 마셔줘야 하거든요. 국물에 소주 한잔을 크…….”

입 앞으로 잔을 꺾듯 행동을 취하던 가을이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다.

‘지금 손. 너. 뭐 하는 거야. 빨리 안 내려와?’

뇌의 명령을 따라 손이 테이블 밑으로 재빨리 사라졌다.

그 모습을 말없이 지켜보던 기훈이 재미있다는 듯 피식 웃었다.

“한잔할래요?”

“아니요!”

빛보다 빠르게 답을 외친 가을이 앞에 놓인 물잔을 번쩍 들었다.

시선을 피한 채 물을 한 모금 꿀꺽 마시는 순간.

“이모님. 여기 소주 한 병이요.”

“큽!”

채 삼키지 못한 물이 입술 사이로 삐져나와 재빨리 한 손으로 입을 막았다.

“저는 한잔하려고요. 생각 있으면 같이 해요.”

“아니에요. 저 술 별로 안 좋아해요.”

그동안의 나는 내가 아니었다.

자기 세뇌를 시작한 가을이 무념무상의 마음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주문한 순댓국과 함께 소주와 잔이 두 사람 앞에 놓였다.

“먹어요.”

“네. 팀장님도 맛있게 드세요.”

적당히 매콤해 보이는 빨간 국물을 한 수저 뜨며 그를 흘깃 바라보았다.

숟가락조차 들지 않고, 그가 소주병을 열었다.

그 순간 눈이 마주쳤다.

“진짜 안 마셔요?”

피식 웃은 그가 앞에 놓인 잔 안으로 맑은 액체를 채워갔다.

적당한 맵기의 국물이 입안을 적시자, 절로 입맛이 다져졌다.

“그러지 말고 한잔하지.”

넉넉한 목소리가 그 어느 순간보다 은혜롭게 느껴지는 순간.

‘어차피 네 이미지 세탁은 틀렸어. 그러니 그냥 마셔.’

또 다른 자아가 던지는 마음의 소리에 귀 기울이며 가을이 숟가락을 내려놓았다.

“네. 주세요.”

언제 망설였냐는 듯이 잔을 든 손을 쭉 뻗었다.

적당한 높이의 소주가 잔에 채워지자, 저도 모르게 만족스러운 미소가 번졌다.

“자. 마시죠.”

잔을 든 그가 손을 내밀고.

“네.”

맑은 액체를 찰랑대며 다가온 그녀의 잔이 청량한 소리를 내며 부딪혔다.

...“오늘 덕분에 혼밥 안 하고 즐거웠어요.”

순댓국집 앞에 마주한 기훈이 부드러운 목소리를 냈다.

“팀장님 덕분에 저도요.”

“뭐 타고 가요?”

“저 버스요.”

“아. 저는 지하철 타요. 반대 방향이네. 그럼 추운데 조심히 가요.”

내쉬는 숨에 입김이 또렷하게 번지는 날씨.

마주한 그를 바라보며 가을이 고개를 끄덕였다.

“내일 뵙겠습니다.”

“그래요.”

한 손을 가볍게 든 기훈이 먼저 몸을 돌렸다.

멀어지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가을이 자신이 가야 할 방향으로 느릿하게 몸을 틀었다.

한 걸음 한 걸음. 느릿하게 내딛던 가을이 눈매를 살포시 구겼다.

“아. 한 병은 뭔가 아쉬운데.”

이제는 입술까지 삐죽이던 그녀가 고개를 빠르게 모로 저었다.

“최가을. 무슨 알코올 중독도 아니고. 적당히 해라!”

자신을 꾸짖은 가을이 느릿하게 걷던 걸음의 속도를 올렸다.

“그래도 다행이네. 오늘은 무사히 넘어가서.”

아찔했던 그 날이 다시 떠올랐다.

어느 순간 끊겨버린 필름.

흐릿한 시선에 승용차 내부가 잡혔었다.

몽롱한 정신에 누구의 차인지 궁금해하기도 전에.

‘이제 정신이 들어요?’

귓불에 밀착해 오는 뜨거운 숨결에 정신이 번쩍 들었던 가을이었다.

내용을 듣자 하니.

회식이 끝나고 직원들이 뿔뿔이 헤어진 후.

화장실을 다녀오던 자신이 대리기사를 기다리던 기훈의 차에 올라탔던 것이었다.

어디 차에만 올라탔나. 그리고 무릎 위로 기어 올라가 끔뻑 잠이 들었다고 한다.

대리기사를 돌려보내고 자신이 깰 때까지 기다렸다는 남자가 온화한 목소리로 모든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불쾌감도 황당함도 없는 표정과 목소리에 오히려 더 민망함이 밀려왔었다.

“달리는 차에서 안 뛰어내린 게 용하지.”

제대로 대화조차 나누지 못한 남자의 허벅지 위에 앉아있었던 그 날을 떠올리자, 온몸에 소름이 돋아났다.

“그래. 오늘은 그래도 깔끔했다.”

나름 뿌듯함을 담은 얼굴로 걷던 가을이 그의 질문을 떠올렸다.

“지유랑 친하냐고? 그러다가 갑자기 세 사람이 같은 대학 나왔냐고 물었고…….”

그와의 대화를 곱씹다 보니, 그가 알고 싶었던 것이 세 사람의 관계가 아니라 지유와 세준의 관계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알고 묻는 거야? 아니면 정말 모르고 묻는 거야?”

곰곰이 생각하던 가을의 얼굴이 점점 진지해졌다.

“설마. 알고 있으면 어디 가서 얘기하거나 그러지는 않겠지?”

지유가 결혼했다는 것도 이혼했다는 것도 직원들은 모르고 있는 상황.

세준의 입이 무거운 것을 알고 있기에 걱정이 되지 않았다.

“하긴. 입이 가벼웠으면 벌써 회사 안에 다 그 날 일 얘기했겠지. 그리고 그래 보이지도 않고.”

자신의 판단이 맞으리라고 생각하면서도, 괜히 불안했다.

“혹시 모르니 잘 지켜봐야겠다.”

의심을 지우지 않은 눈빛을 머금은 채 집을 향했다.

***

다음 날.

-10분 후에 출발할 거야. 준비해.

회사 핸드폰에 도착한 세준의 문자를 확인한 지유가 스케줄 표를 확인했다.

‘4시 성우 미팅. 저녁 식사.’

식사.

그 단어 위에 지유의 시선이 한참을 머물렀다.

‘나는 안 가도 되는 자리겠지?’

잠시 생각을 담던 지유가 옆에 놓인 꽃다발을 바라보았다.

화사한 색상의 예쁜 꽃들로 만들어진 커다란 꽃다발.

미팅을 위해 세준이 준비하라고 시킨 일이었다.

지금껏 식사 대접 말고는 따로 선물을 준비한 적이 없기에 중요한 미팅인가보다 하는 막연한 생각을 했다.

조금 후 대표실에서 나오는 세준의 모습에 지유가 빠르게 일어나 가방과 꽃다발을 들었다.

“가죠.”

짧은 한마디와 함께 그를 따라 걸음을 옮겼다.

평소처럼 나란히 앉은 차 안에 꽃향기가 한껏 퍼졌다.

쌀쌀해진 날씨와 맞지 않게 봄인 것 같은 착각이 일게 만드는 좋은 향기.

꽃향기를 제대로 맡아 본 것이 언제인지 떠오르지 않았다.

지나는 계절조차 덥다 춥다 정도로만 기억할 뿐이지. 그 안에서 느껴지는 감성 따위는 사치라고 생각하며 살았던 시간이었다.

‘또 이러네.’

세준을 만난 이후부터 문득 옛 생각을 많이 하기 시작했다.

아무런 대화도 나누지 않은 채 함께하고 있는 공간.

시선에 보이는 것들. 향기로 느껴지는 것들. 그 하나하나가 밀쳐놨던 기억과 감정을 하나씩 끄집어냈다.

그 시절 나누었던 대화와 표정. 스쳤던 향기마저도 잊어버린 적 없었던 것처럼 떠오른다.

그럴 여유조차 없는 삶을 살고 있으면서, 기억을 뒤척이는 자신이 문득 우습게 느껴졌다.

“오늘은 같이 들어가. 식사도 같이하고.”

창밖에 닿아있던 시선이 세준을 향했다.

“식사도요?”

“응.”

불편함이 묻어나는 질문이었지만, 그는 가볍게 답했다.

“네. 그럴게요.”

지유도 더는 말 하지 않았다.

큰 엄마와 진주가 찾아온 날 이후 원래 많지 않던 대화였지만 둘 사이에 대화가 더욱 줄어있었다.

지유는 의식적으로 시선을 피했고, 그걸 아는 것인지 그도 그 전처럼 신경 쓰이는 눈빛으로 바라보거나 말을 건네지 않았다.

‘그래. 차라리 잘 됐다.’

이 불편함도 곧 익숙해지겠지.

그에게서 시선을 거둔 지유가 다시 창밖을 바라보았다.

...“들어가세요. 상무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사무실 앞에 도착하자, 비서가 곧장 고급스러워 보이는 짙은 갈색 문을 활짝 열어주었다.

열린 문틈 사이로, 언뜻 봐도 일반 사무실과 달라 보이는 내부가 보였다.

깔끔한 라인의 가구들과 적절한 곳에 배치된 작은 인테리어 소품.

자칫 차가워 보일 수 있는 색상과 디자인이 곳곳에 자리 잡은 화분 덕분에 따뜻하게 느껴졌다.

이 사무실을 사용하는 주인이 누구인지는 모르지만, 인테리어에 대한 감각이 뛰어나거나 애정을 갖은 사람일 것이라고 느껴졌다.

“강 대표님. 어서 오세요!”

기역 자로 꺾어진 사무실을 돌자, 맑고 경쾌한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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