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고작 두 번째 결혼-30화 (30/80)

30. 사랑 아니야

“세준 선배. 사랑하냐고.”

되묻는 목소리를 들으며 지유가 느릿하게 입매를 올렸다.

“아니.”

쓸쓸하게 느껴지는 목소리에 가을이 잠시 눈을 피했다.

사랑.

그를 다시 만나고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는 단어였다.

어쩌면 그와 헤어진 이후에 그녀에게는 존재하지 않는 그런 단어라고 여기며 살아왔다.

“……사랑 아니야.”

“나는 잘 모르겠다.”

모든 것을 내려놓은 목소리와 함께 가을이 술잔에 남은 술을 모두 비워냈다.

“그냥. 너무 심각하게 생각하지 말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 줘.”

“그걸 왜 네가 부탁처럼 하는데? 난 그것부터가 마음에 안 들어.”

이해받지 못할 관계라는 사실을 가늠하고 있는 그 자체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몰아붙일 일이 아님을 알면서도 답답함에 말이 곱게 나오지 않았다.

“미안해. 내가 화낼 일이 아닌데.”

“뭘. 다 알아.”

“아는 년이 그러지 아주. 짜증 나.”

짧게 웃음을 뱉은 지유가 미소를 머금었다.

“그나저나 너는 어떻게 됐어?”

“뭐가?”

흘깃. 가을의 시선이 지유에게 닿았다.

“선본 거 어떻게 됐냐고.”

“말도 마. 이번에는 아주 부잣집 아들내미가 나오셔서 줄줄이 제 와이프가 될 사람에게 가진 환상을 쏟아내더라.”

“큭. 외모는 어땠는데? 너 맨날 외모 타령하잖아.”

“아주 자알 생겼더라. 근데 아무리 잘생겨도 그런 동화책에 나오는 여주를 나한테 찾는 남자는 무리야.”

고개를 끄덕인 지유가 살며시 고개를 기울였다.

“그냥 선 안 본다고 해.”

“아빠한테 절대 안 통해.”

“네가 맨날 술 마시고 사고 치니까. 불안해서 그러시지.”

“너 우리 엄마같이 말하지 마. 내가 그리고 언제 사고를 쳤어? 그냥 어머! 하고 놀랄 일을 했을 뿐이지.”

“곱게 키운 막내딸이 어머! 할 일 하시면 아버님 넘어가시지.”

짜증 나.

작게 읊조린 가을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아니면 정말로 마음에 드는 남자를 만나.”

“너나 잘해. 뭘 나한테 훈수 둬.”

“하긴. 내가 할 말은 아니다.”

“그리고 갑자기 나한테로 관심 돌리지 마. 난 아직도 네가 세준 선배랑 결혼한다는 게 요만큼도 믿기지 않으니까.”

맥주를 다시 잔 안에 가득 채운 가을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대체 결혼은 뭘까?”

세상을 다 산 사람처럼 흘러나온 그녀의 목소리에 지유가 옅게 미소지었다.

“그러게…….”

작은 목소리로 답한 지유가 술잔을 천천히 기울였다.

도통 답이 보이지 않는 삶 속에 숨 쉴 수 있는 구멍이라고 생각했다.

적어도 첫 번째 결혼은 그녀에게 그런 의미였다.

하지만 원하지 않는 곳으로 흘러갔던 첫 번째 결혼.

고작이다는 단어를 붙이고 있는 세준과의 결혼은 어느 곳을 향해 흘러갈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그냥. 시간이 지나면 알게 되겠지?”

“뭐가?”

“아니야. 그냥 혼잣말이야.”

밉지 않게 흘기는 가을을 바라보며 잠시 가라앉았던 표정을 가다듬었다.

시간이 빨리 흘렀으면 하는 생각이 드는.

그런 밤이 지나고 있었다.

***

일요일이 조용하게 지나갔다.

혹시나 하는 생각과 다르게 세준에게 연락이 오지 않았다.

주말이 지나고 월요일 아침 회사에서 그를 마주했다.

세준의 사무실에서 회의를 마치고 나온 팀장이 직원들에게 새로운 업무를 지시했다.

그가 온 이후로 조금씩 체계가 잡혀가고 있었다.

할 일이 많아졌다며 투덜거리는 직원들의 표정은 하나같이 밝았다.

“그럼 지난번에 리조트 사업은 계속 진행하는 건가요?”

누군가가 팀장을 향해 물었다.

“아직 몰라. 건축주 미팅도 해 봐야 하고. 하겠다는 시공사가 나타나야 하니까.”

“아직 갈 길이 머네요.”

“시작되면 금방 정신없어질 테니까. 다들 지금을 즐겨. 아! 맞다. 그리고…….”

팀장의 목소리에 직원들이 하나같이 그에게 집중했다.

“이번 주에 지방에서 행사가 있어서 대표님이 며칠간 자리 비우실 거야. 지유씨는 나 팀장한테 스케줄 받아서 같이 움직일 준비하고. 그리고…….”

사무실을 느릿하게 훑던 팀장의 시선이 가을에게 멈추었다.

“갑작스럽게 행사가 잡혀서 가시는 거라. 나 팀장이 대표님 대신 업무 진행할 거야. 그때 가을씨가 같이 움직여.”

“저요?”

손끝으로 자신을 가리킨 가을이 눈을 번쩍 떴다.

“어. 혹시 해야 할 일 있어?”

“아니요. 네. 알겠습니다.”

가볍게 답한 가을이 고개를 끄덕였다.

팀장의 이야기가 끝이 나고 직원들이 각자의 자리에서 일을 시작했다.

점심시간이 지나고, 세준의 호출에 지유가 세준의 사무실을 향했다.

오늘은 외부 일정이 없는 날이었다.

그가 식사도 하지 않은 채 하루종일 사무실을 지키고 있었던 터라, 출근 후 가벼운 인사 이후로 처음 그를 대면하는 자리였다.

노트 후 사무실에 들어서자, 통화하고 있던 세준이 앉으라는 듯 눈짓했다.

사무실 가운데 놓인 커다란 테이블에 앉아서 그가 통화를 끊기를 기다렸다.

가만히 앉아서 창밖을 바라보던 지유가 세준에게로 시선을 슬그머니 돌렸다.

‘오늘도 안경을 꼈네.’

밖에서는 거의 안경을 끼지 않는 그였다.

안경을 꼈을 뿐인데, 한층 이지적인 분위기가 풍겼다.

그 모습이 낯설면서도 신기해서 저도 모르게 집중해서 그의 모습을 살피기 시작했다.

“네. 그럼. 내일 뵙겠습니다.”

통화를 끊은 세준이 핸드폰을 책상 위에 내려놓았다.

생각 없이 그를 응시하고 있던 지유가 재빨리 시선을 돌려 테이블 위를 바라보았다.

“왜? 내 얼굴에 뭐 묻었어?”

책상에 앉은 채 그가 물었다.

“아……. 아니요.”

그가 자리에서 일어나 지유의 앞으로 다가왔다.

“아니면. 할 말 있어?”

“아니에요. 안경을 끼고 있어서. 그냥 좀 달라 보여서요.”

대수롭지 않게 끄덕인 그가 지유의 앞에 마주 앉았다.

“얘기 들었지? 갑자기 일정이 잡혀서 내일 부산으로 3일 동안 갈 거야.”

“아직 정확한 건 못 들었어요.”

“일정은 나 팀장이 알려줄 거야. 내일 새벽에 출발해야 하니까. 준비하고.”

“네. 그럴게요.”

지유의 대답이 끝나자, 세준이 그녀의 앞으로 태블릿을 내밀었다.

그가 내민 태블릿 화면 위로 시선을 내렸다.

“결혼식 장소는 여기로 정했어. 지인들만 불러서 할 예정이라 규모가 크지 않은 곳으로 했어. 괜찮지?”

“네. 괜찮아요.”

“그리고 갑자기 잡는 거라서 주말에 비어있는 날이 하루밖에 없대. 혹시 원하는 날 있어?”

그런 게 있을 리가 없었다.

“저는 상관없어요.”

“그럼 12월 22일로 잡을게. 알고 있어.”

대략 3주 후였다.

“신혼여행은 미국으로 갈 거야. 그때 일정이 좀 있어서 만나야 할 사람들이 좀 있어서. 열흘 정도 예상하는데 더 길어질 수도 있어. 그건 내 스케줄 보고 정할게.”

신혼여행이라기보다는 업무상 출장 같은 느낌이었다.

“저는 다 괜찮으니까. 선배가 원하는 대로 정해요.”

조용한 목소리로 대답을 마치자 그가 시선을 둔 채 느릿하게 고개를 기울였다.

웃지도, 또 찡그리지도 않은 표정을 한 채 지그시 바라보는 그와 가만히 눈을 맞추었다.

“……왜요?”

침묵을 깨고 지유가 물었다.

“체념한 거야? 아니면 아무 생각이 없는 거야? 아니다. 둘 다 같은 건가?”

“그런 거 아니에요. 그러기로 약속했으니까. 선배도 약속 지켰고. 선배가 하는 대로 따라가야 한다고 생각해서 그래요.”

솔직한 마음을 뱉자, 그가 옅게 미소지었다.

“일단. 오늘은 사무실에 있을 거야. 나 신경 쓰지 말고 퇴근해. 내일 새벽에 집 앞으로 갈게.”

“네. 알겠습니다.”

“나가 봐.”

그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지유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사무실을 나와 자리에 앉은 지유가 책상 위에 놓인 달력을 바라보았다.

‘정말 얼마 안 남았네.’

달력을 한참 동안 멍하니 바라보다가 볼펜을 들었다.

날짜 위로 동그라미를 진하게 그리고 옆에는 아무것도 쓰지 않았다.

스케줄이 적혀있는 여느 날사이에 끼어있는 하루.

아직은 그냥 지나가 버릴 것 같은.

평범한 날들과 다르지 않아 보이는 그런 날이었다.

***

다음 날 새벽.

그의 차를 타고 부산으로 향했다.

5시간을 넘게 달려 행사가 있는 호텔에 도착했다.

“유명 시공사들이 개최하는 박람회 겸 세미나야. 일정에 맞춰서 움직여야 하니까. 낮에는 좀 바쁠 거야.”

“네. 어제 나 팀장님한테 일정표 받았어요.”

“지금 바로 미팅 잡혀 있어서 가봐야 해. 나 혼자 들어가야 하는 일정들도 있으니까. 그때는 너 편한 곳에 가 있어.”

“네. 그럴게요.”

서둘러 차에서 내린 그가 뒤도 돌아보지 않고 걷기 시작했다.

팔에 걸고 있던 재킷을 그가 서둘러 걸치는 순간 바닥으로 무언가가 툭 떨어졌다.

그의 지갑이었다.

재빨리 지갑을 주운 지유가 바쁘게 발을 움직였다.

“대표님. 이거요.”

듣지 못했는지 그가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이제는 뛰듯이 다가간 지유가 손을 뻗어 그의 팔을 잡았다.

“대표님! 이거!”

“……!”

걸음을 우뚝 멈춘 그가 살짝 놀란 눈으로 지유를 바라보았다.

“지갑. 떨어졌어요.”

“아. 고마워.”

그가 낚아채듯 손 위에 지갑을 가져갔다.

지갑을 건넨 지유가 그의 가슴 위로 시선을 멈추었다.

“일단 갈 테니까…….”

“저. 잠깐만요.”

“왜?”

몸을 돌리던 그가 움직임을 멈추었다.

그 순간 지유가 그에게 손을 빠르게 뻗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