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고작 두 번째 결혼-42화 (42/80)

42. 선배. 나 하고 싶은 말 있어요

뉴욕 공항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해가 저물어 있었다.

한국보다는 춥지 않았지만, 스치는 바람이 꽤 쌀쌀했다.

렌트카를 타고 곧장 호텔에 도착해서 짐을 내려놓고 다시 호텔 밖으로 나왔다.

능숙하게 뉴욕 도로를 주행하는 그의 모습이 신기했다.

“뉴욕에 살았었어요?”

“응. 계속 뉴욕에서 지냈어.”

그제야 이해 간다는 듯 지유가 고개를 끄덕였다.

“지난번에 백화점에서 만난 이모 기억나지?”

“네.”

“이모 아들이 여기 살아. 지금 형 만나러 가는 거야.”

지난번 세준과 이모의 대화가 언뜻 떠올랐다.

한참을 달리던 차가 낮은 주택이 줄지어 서 있는 도로에 들어섰다.

딱 영화나 드라마에서 보던 외국 느낌이 물씬 풍기는 동네였다.

이제야 미국에 와있는 것이 실감이 되어, 지유가 창문에 바짝 얼굴을 붙인 채 스치는 풍경들을 눈에 담았다.

조금 더 달리던 차가 한 집 앞에 멈추었다.

“다 왔어. 내리자.”

“네.”

차에서 내리자, 세준의 차가 주차된 집의 문이 활짝 열렸다.

“세준아. 왔어?”

한 남자가 반갑게 손을 흔들며 다가왔다.

“형. 오래간만이야.”

반가운 표정으로 다가간 세준이 그를 가볍게 포옹했다.

“결혼 축하해. 그리고 잘 왔어.”

그의 등을 툭툭 두드리며 끌어안았던 몸을 떼어낸 남자가 지유를 보며 환하게 웃었다.

“어서 오세요. 기다리고 있었어요.”

“안녕하세요. 송지유입니다.”

그가 성큼성큼 다가왔다.

“한대호예요. 세준이 사촌 형. 결혼 축하드려요.”

“네. 감사합니다.”

“일단 들어가시죠. 들어가자 세준아.”

한시도 웃음을 지우지 않는 그를 따라 집으로 향했다.

집 안으로 들어가자 맛있는 음식 냄새가 코끝으로 스며들었다.

“형수님은?”

“어머. 세준 씨. 왔어요?”

앞치마를 두른 여자가 두 팔을 벌리며 세준에게 다가왔다.

“잘 왔어요. 보고 싶었네. 결혼 축하해요.”

“저도요. 형수님. 잘 지내셨죠?”

“나야. 뭐 항상 잘 지내지,”

눈매를 곱게 접은 그녀가 역시나 지유를 보며 빙긋 웃었다.

“지유씨라고 했나요?”

“아. 네. 안녕하세요. 송지유입니다.”

“이미라예요. 반가워요.”

다가온 그녀가 살가운 표정으로 지유의 손을 두 손으로 꼭 잡았다.

“우리 능력 있는 세준 씨 누가 데려가나 했더니. 데려가는 게 아니라 아까울 정도로 예쁜 아가씨를 모셔왔네.”

“……감사합니다.”

“결혼 정말 축하해요. 너무 가고 싶었는데. 갈 수가 없었어요.”

“아니에요. 말씀만으로 감사해요.”

반기는 목소리와 표정이 한결같이 따뜻하게 느껴져 살짝 담았던 긴장이 스르륵 사라졌다.

“배고프죠? 음식 다 됐으니까. 이쪽으로 와서 기다려요. 세준 씨. 처음 와서 낯설 테니까 이쪽으로 와서 안내 좀 해.”

멀찌감치 떨어져 있는 세준을 향해 미라가 손짓했다.

“네.”

그녀의 말에 세준이 지유에게 바짝 다가왔다.

“저쪽이야. 가자.”

고개를 끄덕인 지유가 그를 따라 걸음을 옮겼다.

바깥에서 보던 것보다 집 안 내부는 더 넓어 보였다.

길게 뻗은 통로를 지나자, 거실과 분리된 또 다른 거실이 보이고 그 옆으로 주방이 나타났다.

집안 여기저기를 신기한 눈빛으로 살피는 지유를 보며 대호가 부드럽게 미소지었다.

“이 집 어때요?”

“네? 아. 뭔가 좀 구조가 신기해서요.”

“그렇죠? 이 집 세준이가 설계한 거예요.”

“아.”

눈매를 키운 그녀가 주변을 다시 살피기 시작했다.

“뭘 그런 얘기를 해. 배고파. 빨리 먹자.”

“왜? 민망하냐?”

한쪽 눈매를 찌푸린 그가 여전히 주변을 살피는 지유의 허리를 살며시 손바닥으로 밀었다.

“그만 보고 앉아.”

알겠다는 듯 빙긋 웃은 지유가 식탁 앞에 앉았다.

먹음직스러운 음식이 틈 없이 식탁 위를 채우고 있었다.

“미라가 너 온다고 며칠을 고민했다. 그러니 다 먹고 가.”

“고마워요. 형수님.”

“별말씀을.”

여전히 주방에서 분주히 움직이던 미라가 고개를 돌려 빙긋 웃으며 답했다.

“자기도 빨리 와.”

“네. 다 됐어요.”

앞치마를 재빨리 벗은 그녀가 와인을 들고 다가왔다.

“자! 다들 맛있게 드세요.”

활기찬 목소리를 뱉은 미라가 식탁 앞에 앉았다.

“세준 씨. 와인 마실 거지?”

미라가 와인병을 든 채 찡긋 웃으며 세준에게 물었다.

“아니에요. 운전도 해야 하고 내일 아침에 미팅 일정 있어요.”

“뭐야. 신혼여행인데 혹시 일해?”

말도 안 된다는 듯 미라가 눈을 구겼다.

“좀 일이 그렇게 됐어요.”

“너무하다. 하긴 신혼여행 첫날 부른 우리도 너무 했지만.”

미안한 눈빛으로 미라가 지유를 바라보았다.

“지유 씨. 이해해 줘요. 내일 대호 씨가 영국으로 출장 가서 오늘 아니면 시간이 없었거든요. 근데 세준 씨 바쁜 줄 알았으면 부르지 말걸. 오늘 오붓하게 보내게.”

“아니에요. 괜찮아요. 초대해 주셔서 감사해요.”

지유가 손사래를 치며 부드럽게 미소지었다.

어차피 그와 단둘이 호텔에 있는 것 보다, 이렇게 나와 있는 것이 그녀에게는 더 편했다.

“무슨 신혼여행 와서 일이야. 아무튼, 너도 일 중독이다.”

나무라는 대호의 말에 세준이 말없이 웃었다.

“지유 씨는 한잔할래요?”

“네. 저는 마실게요.”

지유가 고민 없이 답하자, 옆에서 시선이 느껴졌다.

“마셔도 되죠?”

“응. 그럼.”

지유의 물음에 세준이 선뜻 답했다.

“이 와인 제가 특별히 주문한 거니. 실컷 마시고 가요. 저기 두 병 더 있어요.”

“네. 감사합니다.”

투명한 잔에 와인이 채워지고 식사가 시작되었다.

첫인상처럼 마주한 부부는 살갑고 따뜻했다.

도란도란 오가는 대화 대부분은 그녀가 모르는 이야기였지만, 어색하거나 불편하지 않았다.

오히려 편하고, 안락한.

언제 느껴봤는지 알 수 없는 그런 느낌.

기분 좋은 분위기에 취해서, 한 모금씩 마신 와인잔이 비워지고 또 채워졌다.

“어머. 지유 씨. 취했어요?”

미라의 목소리에 세 사람의 시선이 지유에게 향했다.

대답 없이 눈을 동그랗게 뜬 지유가 배시시 웃었다.

“취했나보다.”

웃음을 담은 눈빛으로 미라가 그녀를 찬찬히 살폈다.

“괜찮아? 그만 마셔.”

“……괜찮……아요.”

평소보다 많이 느릿해진 말투로 답한 그녀가 눈매를 부드럽게 접었다.

“그러게. 시간도 늦었으니까. 이제 그만 마셔요.”

대호의 말과 함께 세준이 옆에 놓인 지유의 잔을 재빨리 들어 멀리 내려놓았다.

“어? 선배……. 그거 내 건데.”

두 팔을 공중에 뻗은 그녀가 울상을 지었다.

“선배라고 불러요? 후배야?”

“네. 대학교 후배.”

“선배. 주세요. 네?”

옆에서 바둥거리는 팔을 두 손으로 꼭 잡은 그가 미라의 물음에 답했다.

“내건 데.”

작게 읊조리며 입술을 쭉 내미는 그녀의 모습에 미라와 대호가 소리 없이 웃었다.

“안 되겠다. 취한 거 같아. 가 봐야겠다.”

“그래. 시간도 늦었어. 우리가 너무 오래 잡고 있었다.”

“그래요. 세준 씨. 얼른 가 봐. 신혼 첫날 미안하네.”

두 사람을 바라보며 괜찮다는 듯 빙긋 웃은 세준이 고개를 천천히 숙였다.

비스듬하게 얼굴을 숙이고 있는 그녀의 얼굴을 아래에서 지그시 올려다보았다.

커다란 눈망울 위로 눈꺼풀이 느릿하게 깜빡 깜박거렸다.

“일어날 수 있겠어?”

그녀가 느릿하게 고개를 모로 저었다.

하아.

길게 한숨을 뱉은 세준이 그녀의 허리를 한 손으로 감았다.

“일어나자.”

“네에.”

대답만 할 뿐 꼼짝하지 않는 그녀를 좀 더 힘주어 안았다.

“도와줄까요?”

“아니에요. 저 혼자 할게요.”

옆으로 다가온 미라가 세준에게 기대어 비틀비틀 걸음을 옮기는 지유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근데 진짜 예쁘다.”

그녀의 말에 세준이 흘깃 미라를 바라보았다.

“얼굴이 예쁘기도 하지만, 내가 사람 보는 눈이 있는데. 딱 봐도 좋은 사람이야. 잘 해줘.”

그녀의 말을 귀담아듣던 세준이 옅게 미소지었다.

“네. 그러려고요. 갈게요.”

“그래. 옷 내가 챙겼어. 얼른 나가.”

지유를 끌다시피 데려 나온 세준이 조수석에 그녀를 태웠다.

몽롱한 눈동자로 자신을 바라보는 그녀의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다 몸을 돌렸다.

“형. 나 갈게. 출장 잘 다녀오고.”

“그래. 오늘 너무 반가웠다. 남은 시간 잘 보내고 가. 일 좀 줄이고.”

“응. 그럴게. 형수님. 오늘 잘 먹었어요.”

“덕분에 나도 즐거웠어요. 나중에 한국 가면 그때 초대해 줘요.”

“그럴게요. 들어가요.”

운전석에 올라탄 세준이 곧장 호텔로 출발했다.

어느새 잠이든 그녀를 안은 채 호텔 룸에 들어섰다.

침대에 그녀를 내려놓은 세준이 가빠진 숨을 몰아쉬며 침대 옆에 놓인 의자에 털썩 앉았다.

“아. 목말라.”

생각지도 않은 곳에 에너지를 쏟은 세준이 냉장고로 다가가 생수를 꺼내어 돌아왔다.

단숨에 물을 들이켜고 생수병을 내려놓은 그가 눈매를 천천히 키웠다.

천장을 바라보며 누워있는 그녀가 천천히 눈을 떴다.

“깼어?”

그녀를 살피며 물었지만, 그녀는 아무 답도 하지 않았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가늠이 되지 않는 눈빛으로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던 그녀가 몸을 천천히 돌렸다.

그가 말없이 그런 그녀를 지켜봤다.

몽롱함이 번지기는 했지만, 무척이나 맑아 보이는 까만 눈동자가 자신을 가만히 담고 있었다.

눈을 끔벅일 때마다 쏟아져 내렸다 밀려 올라가는 속눈썹이 살랑살랑 움직였다.

계속 바라보고 있으면 빠져들 것처럼 깊고 까만 눈동자를 담은 눈매가 부드럽게 휘었다.

“선배…….”

핑크빛이 물든 작은 입술이 미약한 소리로 그를 불렀다.

“나 하고 싶은 말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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