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고작 두 번째 결혼-49화 (49/80)

49. 오늘은 할 거야

그런 것.

그의 또렷한 목소리가 상처를 내듯 가슴을 선명하게 긁고 지나갔다.

“쓸데없는 생각하지 말고. 자.”

고저 없는 목소리를 뱉은 그가 그녀를 등지고 다른 방으로 향했다.

괜히 물어봤다.

그냥 알겠다고 할걸.

뒤늦은 후회를 담은 그녀가 다시 침대 위로 몸을 떨궜다.

***

그가 말한 대로 변경된 일정에 맞추어 한국으로 돌아왔다.

열흘 일정으로 왔던 신혼여행의 반이 남은 상태였다.

“회사는 그냥 일정대로 출근해. 도착하면 병원도 가고. 좀 쉬어.”

집으로 향하는 차 안에서 그가 말했다.

“네. 그럴게요.”

“그리고 몸 좀 나으면 집도 정리해서 짐 옮기고.”

“네. 안 그래도 그럴 생각이었어요.”

차분한 목소리로 답하는 그녀를 그가 흘깃 바라보았다.

“오늘부터 내 집에서 지내.”

“오늘은 그냥 13층에 있을게요.”

“왜?”

“정리할 것도 있고, 아직 몸이 다 안 나아서. 같이 자면 선배가 불편할 거에요.”

호텔에는 각자 침대를 쓸 수 있었지만, 그의 집은 아니었다.

솔직한 심정이기도 했지만, 어쩐지 며칠을 숨을 쉬지 못한 것 같은 느낌에 혼자만의 시간을 가지고 싶었다.

“내 걱정해주는 건가?”

비아냥거리지는 않았지만, 어쩐지 어조가 곱게 들리지 않았다.

“그런 거 바란 적 없으니까. 그냥 집에서 지내.”

“…….”

“그럴 거면 결혼은 뭐 하려고 했어.”

딱히 답할 말이 없어 침묵을 지켰다.

“그리고 큰 아버님 전화 왔었어.”

갑작스러운 그의 말에 그녀가 눈매를 가득 키웠다.

“언제요?”

“어제. 신혼여행 다녀와서 바로 집으로 오라고 하셨는데. 일단 돌아왔다는 사실 전하지 마.”

“다른 말은 안 하셨어요?”

정면을 바라보던 그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아니. 왜? 내가 알아야 할 게 있어?”

“아. 아니에요. 그냥. 갑자기 전화가 왔다길래.”

놀란 듯 밀어 올렸던 눈꺼풀을 천천히 내린 그녀가 숨을 꿀꺽 삼켰다.

흘깃 닿는 시선이 느껴져, 잠시 당황했던 표정을 빠르게 가다듬었다.

“원래 일정 끝나고 큰 아빠한테 제가 전화할게요. 그냥 선배는 전화 오면 받지 마세요.”

“…….”

“괜히 바쁜 사람 잡고 귀찮게 하실까 봐요. 그 날 봐서 알잖아요. 대접받고 싶어 하실 거예요.”

그가 대답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한참을 달린 차가 오피스텔에 도착했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세준이 외출준비를 시작했다.

샤워를 마치고 나와, 단정한 정장을 꺼내 입은 그가 바닥에 캐리어를 펼쳐 놓은 채 멍하니 앉아있는 그녀를 바라보았다.

“빨아야 할 것 들은 세탁실에 내놔. 아주머니가 일주일에 두 번씩 와서 해주시니까. 그리고 옷들은 드레스 룸 정리해 놨으니 그쪽에 정리하고.”

그녀가 무엇을 어떻게 정리해야 할지 고민하고 있다는 사실을 바로 알아챈 듯 그가 하나하나 설명하기 시작했다.

“집에서 필요한 것들만 챙겨서 올라와. 가구 같은 건 내가 업체 불러서 정리할 거니까.”

“네. 그럴게요.”

“필요한 거 있으면 얘기하고.”

“네.”

문으로 향하는 그의 행동에 지유가 자리에서 일어나 걸음을 옮겼다.

“다녀오세요.”

자신이 뱉으면서도 어쩐지 어색함이 느껴지는 말이었다.

“병원 다녀와. 잊지 말고.”

“네.”

“다녀올게. 좀 늦을 거야.”

며칠간 들었던 말이었기에 이제는 익숙했다.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자 그가 집을 나섰다.

그녀가 몸을 돌려 그가 사라진 공간을 천천히 훑었다.

그와 함께 지내야 하는 아직은 낯선 공간.

새로운 세상을 만난다는 기대감보다 두려움이 늘 앞섰다.

빨리 익숙해졌으면 하는 바람을 작게 담으며 다시 가방이 놓인 곳을 향했다.

하나둘 짐을 꺼내어 정리를 시작했다.

대충 정리를 마치고, 병원을 가야겠다는 생각에 코트를 입으려던 그때.

바닥에 놓인 핸드폰이 진동했다.

화면을 확인한 지유가 잠시 머뭇거렸다.

그사이 전화가 끊어졌다.

그리고 다시 핸드폰이 진동하기 시작했다.

큰 아빠의 전화였다.

어차피 받지 않으면, 받을 때까지 할 것을 알기에 결국 그녀가 손을 뻗었다.

“네. 큰 아빠.”

-어디야? 미국이야?

쩌렁쩌렁 울리는 목소리에 귀에 바짝 붙였던 핸드폰을 살며시 떼어냈다.

“네. 미국이에요.”

-강 서방은 왜 전화 안 받아!

불쾌감이 느껴지는 목소리였다.

“어제 통화 했다고 들었어요.”

-지금 했는데 안 받는다고! 뭐 한다고 어른 전화를 안 받아. 신혼여행 가서 논다고 신났구먼. 강 서방 바꿔 봐.

“지금 잠깐 뭐 사러 나갔어요. 그냥 저한테 말씀하세요.”

다급하게 말을 뱉은 그녀가 숨을 꿀꺽 삼켰다.

-다른 건 아니고. 그때 뭐냐 집에 놓고 간 벨트 있잖아.

“네.”

-그거 다 좋은데 색이 마음에 안 들어. 내 바지가 다 밝은색이라서. 좀 더 화사한 색으로 사 오라고 얘기해라.

너무나 당당한 요구에 지유가 할 말을 잃었다.

-어차피 오면서 공항도 들리고 미국에서는 이런 건 널리고 널렸을 거 아니야.

“시간 되면 볼게요.”

-시간이 안 될 게 뭐가 있어. 지들 노느라고 그렇지.

“일단 알겠어요.”

빨리 전화를 끊고 싶은 마음에 지유가 재빨리 답했다.

-아. 그리고 한국 오면 바로 그날 집으로 와라.

“스케줄 보고 들릴게요.”

-스케줄 보고 말게 뭐가 있어. 신혼여행 다녀와서 어른한테 먼저 들리는 게 예의 아니야?

“네. 알아요. 근데 그 날은 바로 힘들 거 같아요. 세준씨 일 때문에 일정도 있고요.”

-나도 일 때문에 만나자고 하는 것도 있으니까. 그날 꼭 오라고 해.

순간 섬뜩한 기운이 몰려들었다.

“……일이요?”

-응. 너도 알다시피. 내가 강 서방 일 하는 쪽으로 예전에 조금 일 했잖아. 어차피 가족도 됐는데. 같이 하면 좋을 거 같은 일이 생겨서.

“그게 뭔데요?”

-네가 그걸 알아서 뭐하게? 남자들끼리 하는 얘기에 끼어들지 마라! 아직도 정신을 못 차렸지!

윽박지르는 목소리에 지유가 눈을 질끈 감았다.

그러지 말아야지 하면서도 핸드폰을 잡은 손이 조금씩 떨리기 시작했다.

“일단 제가 미리 얘기해 놓는 게 좋을 거 같아서요. 그리고 요즘 회사 새로 맡아서 바빠요. 다른데 신경 쓸 시간이 없을 거 같아요.”

-그건 내가 알아서 판단할 거니까! 넌 쓸데없이 끼어들지 마!

“그래도…….”

-말 끊지 말고 들어!! 강 서방 들어오면 바로 나한테 전화하라고 해! 병신같은 게 어디서 간섭을 하고 지랄이야.

흘러나오는 욕설에 그녀가 입술을 아플 정도로 꾹 눌러 물었다.

-여자가 일에 끼어들면 재수 없는 거 몰라? 지 엄마가 딱 그 꼴이었는데도 아직도 정신을 못 차렸지.

탁하게 흘러나오는 한숨을 소리 없이 내뱉었다.

그 이후로도 한참 동안 과거를 입에 담으며 듣고 싶지 않은 욕설을 뱉어냈다.

계속해서 쏟아지는 목소리를 들으며 그녀가 힘없이 바닥에 앉았다.

그에게 이런 모습을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아직 말하지 못한 것들이 많은데. 그런 상황에서 그가 직접 이런 부끄러운 사실들을 알게 하고 싶지 않았다.

“네. 알겠어요. 한국 돌아가서 찾아뵐게요.”

큰 아빠가 원하는 대답을 하고 나서야 전화를 끊을 수 있었다.

정신이 나간 사람처럼 한참을 앉아있던 지유가 천천히 눈꺼풀을 밀어 올렸다.

“아. 병원…….”

바닥에 내려놓은 코트를 보고 나서야 자신이 병원에 가려 했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한 발짝도 움직이기 싫은 상태였지만, 기분이 온전하지 않은 상태여서 몸까지 아프면 더 견딜 수 없을 것 같았다.

애써 힘주어 몸을 일으킨 지유가 코트를 입고 집을 나섰다.

.

.

.

진료를 마친 지유가 김밥 한 줄을 사 들고 집으로 돌아왔다.

다행히 감기가 거의 나은 상태이며, 밥도 약도 잘 챙겨 먹으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뻔한 이야기이지만, 요 며칠 그것마저도 하지 않았던 그녀였다.

재빨리 사 온 김밥을 먹고 약까지 챙겨 먹은 지유가 자신의 집을 향했다.

옷과 화장품 같은 꼭 필요한 물건들만 가지고 다시 그의 집으로 향했다.

대수롭지 않은 일이라고 생각했는데. 정리하는데 제법 시간이 걸렸고 어느새 창밖은 어둠이 차올라 있었다.

그가 언제쯤 올 거라는 예상은 하지 않은 상태로, 피곤한 몸을 이끌고 안방 욕실을 향했다.

샤워를 마친 그녀가 본인의 집에서 지낼 때처럼 챙겨 입을 옷을 들고 오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살짝 문을 열고 욕실 밖의 소리에 귀 기울였다.

고요함이 느껴지는 공간.

아직 그가 돌아오지 않았다고 생각한 그녀가 수건을 손에 든 채 욕실 밖으로 나왔다.

욕실에서 나와 꺾어진 모퉁이를 돌면 침대가 보이는 구조의 집.

멍하니 머리카락의 물기를 닦으며 몸을 돌린 순간.

“꺄악!!”

침대 위에 앉아있는 세준의 모습에 그녀가 놀라 비명을 질렀다.

그리고 재빨리 들고 있던 커다란 수건을 몸 가렸다.

비명을 지른 자신의 모습이 우스웠는지, 그가 피식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언제 왔어요?”

여전히 놀란 눈으로 그녀가 물었다.

“조금 전에.”

재킷을 벗어 침대 위로 내려놓은 그가 천천히 다가왔다.

바짝 앞까지 다가오는 그의 행동에 한 쪽 발을 반사적으로 물린 지유가 중심을 잡았다.

마치 키스를 하려는 듯 가깝게 고개를 숙인 그가 느릿하게 눈동자를 움직였다.

쓰다듬듯 얼굴을 스치고 지나간 시선이, 불룩하게 드러난 그녀의 살 위로 떨어졌다.

“병원 다녀 왔어?”

그가 말을 하는 순간 옅은 알코올 향기가 코끝을 번졌다.

“……네. 다녀 왔어요.”

차마 얼굴을 피하지 못한 채 천천히 답했다.

“뭐래?”

느릿한 말투로 물은 그가 천천히 손을 뻗어 허리를 부드럽게 감아왔다.

맨살 위로 밀려드는 차가운 손길에 소름이 돋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거의 다……나았대요. 약 잘 챙겨 먹으라고 했어요.”

“그래? 잘됐네.”

따갑게 느껴질 만큼 지그시 눈빛을 떨구며 그가 만족스럽게 미소지었다.

이제는 등줄기를 타고 올라간 손끝이 간지럽히듯 잘록한 곡선을 따라 미끄러져 내려왔다.

신경을 곤두세우는 손길에 그녀가 저도 모르게 잇새로 숨을 내뱉었다.

그 순간 아래로 떨어진 그의 눈꺼풀이 바짝 밀려 올라갔다.

“뜨겁네.”

점점 아래로 내려간 그의 손끝이 허벅지 사이로 천천히 밀려들었다.

뜨거운 물에 데워진 몸이 그의 손길에 의해 점점 뜨거워지기 시작했다.

그가 목덜미 사이로 깊숙이 얼굴을 내렸다.

입술로 야릇하게 목덜미를 지분거리던 그가 그 상태로 고개를 느릿하게 돌렸다.

취기가 번져 있다기보다는, 성적 욕망이 가득 담긴 눈동자가 짙은 빛을 담은 채 느릿하게 닿아왔다.

모든 것이 아슬아슬하게 느껴졌다.

그의 시선도. 그리고 예민한 곳 주변을 서성거리는 그의 손끝도.

꿀꺽 삼키지 못한 숨을 참지 못하고 내쉬는 순간.

“……오늘은 할 거야.”

귓가에 번지는 그의 뜨거운 숨결과 함께 아찔한 감각이 몸 안 깊숙이 밀려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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