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 조금씩 알게 될 것들
“……10억?”
민우의 눈꺼풀이 느릿하게 밀려 올라갔다.
“응. 지금 수중에 그 정도도 없으신가 봐. 그래서 괜히 속상하네.”
입술을 삐죽인 그녀가 속상한 눈빛을 머금었다.
‘10억이 그 정도라고?’
새삼 돈의 가치에 대한 그녀의 개념이 자신과 다름이 느껴져 민우는 당황스러웠다.
하지만 티 내면 안 된다는 강한 생각이 밀려들었다.
“그랬구나. 속상하겠다.”
전혀 속상한 일이 아니라는 생각에도 불구하고 최선을 다해 그녀를 달래기 시작했다.
“아무튼, 오늘은 미안하지만, 집에 갈게. 가서 아빠 얘기도 좀 듣고 내가 도울 수 있는 부분이 있으면 도와야지.”
“그래. 데려다줄게. 가자.”
“미안해. 오랜만에 나도 오빠랑 같이 있고 싶었는데.”
“아니야! 절대 그렇게 생각하지 마!!”
민우가 번쩍 뜬 눈을 맞추며 손을 꼭 잡았다.
“아……. 피곤하다.”
상체를 조수석 시트에 털썩 기댄 한나가 한숨을 깊게 내쉬었다.
“피곤하지? 빨리 가자.”
“응. 오빠.”
재빨리 시동을 건 민우가 페달을 깊게 밟았다.
***
원래 예정되어 있던 신혼여행의 마지막 날.
침대 위에서 눈을 뜬 지유가 짧게 숨을 들이마셨다.
침대 헤드에 상체를 기댄 채 핸드폰을 보던 세준이 느릿하게 눈동자를 떨궜다.
신혼여행 그리고 집에 머무는 며칠 동안 눈을 떴을 때 그가 옆에 있는 것이 처음이었다.
옆으로 누워 있던 지유가 얼굴 위로 떨어져 있는 머리카락을 넘기며 비스듬히 상체를 일으켰다.
“지금 몇 시예요?”
“9시.”
“……오늘은 안 나가요?
동그란 눈을 올려 뜨며 그녀가 물었다.
“응. 오늘은 일정 없어. 왜?”
“아니에요. 그냥. 요즘 계속 바쁜 거 같아서요.”
“나도 하루는 쉬어야지.”
그가 피곤함이 느껴지는 얼굴로 말했다.
“근데 그동안 집에서 뭐 챙겨 먹었어?”
그녀를 향해 고개를 반듯이 돌린 그가 물었다.
밤을 제외하고는 함께 지낸 시간이 없었다.
“그냥. 13층 집에 음식들이 있어서 그거 먹기도 하고. 사 와서 먹기도 했어요.”
“13층은 정리 끝났어?”
“네. 짐들은 거의 가지고 왔어요. 버릴 것들이랑 가구들만 있어요.”
“그럼 주말에 다 치울 테니까. 그렇게 알아.”
“네.”
핸드폰을 옆에 놓인 테이블로 내려놓은 그가 스트레칭을 하듯 목을 이리저리 돌렸다.
그리고 허리까지 덮고 있던 이불을 치우고 침대에서 천천히 일어났다.
“아침은 나가서 먹자. 갈 곳도 있으니까. 일어나서 준비해.”
그의 말에 지유가 완벽히 상체를 일으켜 앉았다.
“어디 가게요?”
욕실을 향해 다가가던 그가 몸을 세워 고개를 돌렸다.
“혼인신고하러. 신분증 챙기고.”
“아…….”
간결하게 답한 그가 욕실로 사라졌다.
혼인신고.
당연히 결혼하면 해야 하는 절차이지만,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이상하면서도 묘한 기분이 밀려왔다.
이제는 잠이 완벽히 달아난 눈동자로 그가 사라진 공간을 한참 동안 바라보다가 침대를 벗어났다.
.
.
.
오피스텔을 벗어난 그의 차가 곧장 구청을 향했다.
편안한 면바지에 두꺼운 점퍼를 걸친 그가 구청 안으로 조금 앞서 걸어 들어갔다.
평소와 차림이 달라서인지 무척이나 편안해 보이는 모습이었다.
표정 또한 그랬다.
반면 긴장이라기보다는 여전히 묘한 감정에서 벗어나지 못한 지유의 표정은 살짝 굳어 있었다.
두 번째 결혼이기는 하지만, 직접 혼인신고를 하러 온 것은 처음이었다.
어느 날 신분증을 달라던 민우가 혼자 혼인신고를 마쳤고, 그 사실을 몇 달이 지나서야 알았다.
그 사실을 아는 순간. 결혼이라는 것이 참 쉽고 허무하게 느껴졌다.
오늘도 마찬가지였다.
민원실에 도착해서 서류를 작성하고, 직원에게 신분증과 서류를 건네자 모든 것이 빠르게 끝이 났다.
보지 않아도, 보고 있어도 부부가 되는 것은 간단했다.
“오늘은 접수증만 드려요. 며칠 후에 서류 떼어 보세요.”
구청 직원이 사무적인 말투로 이야기를 건넨 후 재빨리 다음 번호표를 눌렀다.
“여기 신분증.”
“네.”
지유에게 신분증을 건넨 그가 다시 들어온 문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뭐 먹을래?”
바짝 따라붙어 걷는 그녀에게 세준이 물었다.
“선배. 먹고 싶은 거로 먹어요.”
“그래도 특별 한 날인데 너 먹고 싶은 거로 먹어.”
특별하다.
순간 의외라는 생각이 들게 만드는 단어에 그녀가 살포시 눈매를 키웠다.
허무하고 쉽다. 조금 전 자신이 담았던 생각과는 완벽히 다른 의미의 단어였기 때문이다.
그 순간 이상하게 가슴이 두근거렸다.
그와 특별한 관계가 된다.
이미 이어진 관계도 따지자면 그렇게 말할 수 있겠지만, 그것과는 선연히 다른 의미였다.
그가 조금 전 무슨 말을 했는지조차 잊은 채 멍하니 바라보고 있던 그때.
“아무거나 이런 답 말고. 너 먹고 싶은 거.”
그녀가 어떤 답을 할지 알고 있는 듯 그가 먼저 방어막을 치듯 말했다.
“아. 먹을 거.”
정신이 번쩍 든 그녀가 머리를 분주히 움직였다.
빠르게 고민이 끝났다.
“고기. 소고기 먹어요.”
그녀의 답에 그가 느릿하게 눈을 깜빡였다.
“아직 아침이라 연 곳이 없으려나?”
“있어. 가자.”
몸을 돌린 그가 앞장서 나아갔다.
도로 위를 빠르게 달린 차가 한옥으로 지어진 식당 앞에 멈추었다.
아직 11시가 안 된 시간임에도 꽤 많은 사람이 이미 가게 안에 자리 잡고 앉아있었다.
‘유명한 집인가?’
주차를 마친 두 사람이 가게 안으로 향했다.
“먹고 싶은 거…….”
“꽃등심이요.”
메뉴판을 건네기도 전에 튀어나온 그녀의 목소리에 그의 손이 공중에 멈추었다.
메뉴판이 펼쳐지지도 못한 채 다시 제자리로 돌아갔다.
“여기 꽃등심 2인……아니 3인분이요.”
미래를 내다본 듯 3인분을 시킨 그가 지그시 그녀를 바라보았다.
“고기 좋아해?”
살피는 듯한 시선을 한 채 그가 물었다.
“네. 좋아해요.”
1초의 고민 없이 그녀가 답했다.
“몰랐네.”
끄덕인 그가 수저와 젓가락을 그녀의 앞에 내려놓았다.
“선배는 뭐 좋아해요? 며칠 전에 집 앞에 슈퍼 갔었는데. 뭐 좀 사려다가 좋아하는 걸 몰라서 못 샀어요.”
“하나만 빼고 다 잘 먹어.”
“하나요? 그게 뭔데요?”
궁금한 눈빛을 한 그녀가 물었다.
“오이.”
“……오이요?”
“응. 오이 말고는 다 잘 먹어.”
지유가 깜빡깜빡 눈꺼풀을 빠르게 움직였다.
“오이 알레르기 같은 거 있어요?”
“아니.”
“그럼 왜 못 먹어요?”
“그냥. 그 맛이 싫어.”
큭. 그녀가 잇새로 웃음을 뱉었다.
강세준이 오이를 못 먹는다.
그럴 수 있는 일임에도, 무언가 어울리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어 저도 모르게 뱉은 웃음이었다.
“오이 못 먹는 사람들 꽤 있어.”
멋쩍은 표정을 지은 그가 시선을 피하며 앞에 놓인 물 잔을 들었다.
“하긴 저도 물렁물렁한 거 잘 못 먹어요.”
“물렁물렁한 거?”
“네. 도가니탕 같은 거나. 또 뭐 있지? 산 낙지도 못 먹고 아무튼, 물컹거리는 걸 잘 못 삼키거든요.”
“그래? 신기하네.”
물을 한 모금 머금은 그가 잔을 내려놓았다.
두 사람 치고 꽤 활발한 분위기로 이어졌던 대화가 금세 끝이 나고 정적이 찾아왔다.
순간 어색해진 분위기에 괜히 주변을 둘러본 그녀가 그처럼 물을 한 모금 머금었다.
“모르는 게 많네.”
혼잣말하듯 중얼거리는 그의 말에 머금었던 차가운 물을 꿀꺽 삼켰다.
“앞으로 조금씩 알게 되겠지.”
마치 기대하는 무언가가 있는 듯.
미동 없이 닿아있는 눈동자가 유독 선명하게 빛났다.
“……그렇게 되겠죠.”
속삭이듯 답한 그녀가 슬그머니 마주친 눈동자를 피했다.
주문한 음식이 나오고 식사가 시작되었다.
먹음직스럽게 구워진 고기를 자신의 앞으로 밀어주기만 할 뿐 그는 잘 먹지 않았다.
“제가 알아서 먹을게요. 선배도 먹어요.”
“알았어.”
한참을 놓지 않던 집게를 내려놓은 세준이 지그시 지유를 바라보았다.
“회사는 계속 나갈 거야?”
“네?”
예상치 못한 질문에 지유가 놀란 목소리를 냈다.
“너 불편할까 봐 묻는 거야. 직원들 시선도 있고.”
“저는 괜찮아요. 나가지 않겠다는 생각 해 본 적 없어요.”
당황한 듯 살짝 눈매를 키운 지유가 빠르게 말했다.
“그래? 그냥 집에 있는 쪽이 편하지 않아?”
“아니요. 괜찮아요.”
그녀가 고개를 모로 저었다.
“그래. 그럼 그렇게 해.”
그가 덤덤하게 답하고 다시 말을 이었다.
“그리고 앞으로 나랑 같이 다닐 필요 없어.”
“…….”
“예전 일 그대로 해도 좋고. 하고 싶은 거 있으면 얘기해. 기훈이한테 그렇게 말해둘 테니까.”
“네. 알겠어요.”
“먹어. 타겠다.”
그제야 젓가락을 든 그가 앞에 놓인 음식들을 먹기 시작했다.
***
다음 날.
세준과 함께 차를 타고 회사를 향했다.
자신이 아는 사람들 앞에 부부라는 관계로 처음 서는 자리였다.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까.
딱히 의식할 필요 없이 평소처럼 지내면 되겠지 라고 생각하면서도 긴장과 함께 걱정이 밀려왔다.
역시 자신과 다르게 덤덤해 보이는 그는 평소와 다르지 않아 보였다.
‘그래. 편하게 하자.’
다시 한번 마음을 가다듬으며, 눈앞에 모습을 드러낸 회사 건물을 넌지시 바라보았다.
살짝 앞서 걷던 세준이 사무실 앞에 다다라 문으로 손을 뻗었다.
불투명한 유리문이 활짝 열리는 순간.
갑자기 멈춰서는 그의 행동에 한 걸음 정도의 거리를 두고 따라 걷던 지유가 우뚝 걸음을 멈추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