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6. 쓰레기 새끼
“아버님. 저 임민우입니다!!”
다짜고짜 아버님이라고 부르는 남자의 모습에 한나의 아빠가 눈매를 구겼다.
“아버님이라니 무슨 소립니까?”
황당한 목소리를 들으며 민우가 재빨리 입을 열었다.
“한나한테 들으셨잖아요! 약혼하기로 한 남자가 바로 접니다.”
“약혼?”
“인사가 늦었습니다. 이렇게 찾아오려는 게 아니었는데. 한나가 연락이 안 돼서요.”
한나의 아빠가 자신과 다르지 않게 황당한 표정을 짓고 옆에 서 있는 남자를 바라보았다.
“박 비서. 이게 무슨 소리야?”
“저도……처음 듣는 얘기입니다.”
황당한 목소리를 낸 비서가 민우의 얼굴을 천천히 살폈다.
“지난번에 말씀하셨던 카지노 사업도 한나 대신 제가 투자했습니다. 그 얘기도 했다고 들었는데…….”
“카지노? 이건 대체 무슨 소리야?”
이제는 불쾌함이 깃든 표정으로 비서에게 물은 한나의 아빠가 민우에게 한걸음 다가왔다.
“아버님.”
“아버님이라고 그만 불러요. 불쾌하니까.”
“한나 어디 있습니까? 연락이 안 돼서요. 당장 만나서 이야기를 들으시면 이해가 될 겁니다.”
천천히 민우의 얼굴을 살피던 한나의 아빠가 무언가 떠오른 듯 눈매를 키웠다.
그리고 그 순간 매서운 눈빛을 한 한나의 아빠가 민우를 쏘아보았다.
“그 새끼가 너구나?”
갑작스러운 욕설에 민우가 눈을 번쩍 떴다.
“……네?”
“안 그래도 얼마 전부터 스토커처럼 따라다니는 새끼가 있다더니.”
“아닙니다. 뭐……뭔가 오해가 있으신 거 같은데. 저는 한나랑 약혼…….”
“어디서 네 맘대로 약혼이야!! 한 번만 더 지껄여봐!”
찌를 듯 떨어지는 목소리에 민우가 할 말을 잃었다.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고정하세요.”
비서가 다가와 말렸지만, 물러서지 않은 한나의 아빠가 눈을 번쩍였다.
“너 우리 한나 따라다니면서 괴롭힌 그 새끼 맞지?”
“네? 아니요.”
겁을 집어먹은 민우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있지도 않은 약혼자 행세하면서 이러는 놈이 그게 아니라고?”
“아닙니다. 저는 진짜로…….”
“박 비서. 경찰 불러.”
“아버님. 아닙니다. 저 그런 사람 아니에요!!”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 치기 시작한 민우의 발끝이 바닥에 있는 무언가에 부딪혔다.
순간 중심을 잃은 그가 바닥에 맥없이 주저앉았다.
“너 한 번만 더 우리 한나랑 내 앞에 얼씬거리면 바로 경찰서에 집어 넣어버릴 테니까 그렇게 알아.”
“아……아니에요. 아버…….”
차마 그를 더 아버님이라고 부르지 못한 민우가 억울함에 몸을 벌벌 떨었다.
“박 비서. 이 새끼 갈 때까지 지키고 있어. 난 먼저 출발할 테니까. 세상이 도대체 어떻게 돌아가려고 저런 놈이 버젓이 얼굴을 들고 다녀.”
쓰레기 보듯 바라보던 한나의 아빠가 차를 향했다.
한나와 결혼하면 언젠가 한 번쯤 타보지 않을까 상상했던 고가의 고급 승용차에 올라탄 한나의 아빠가 유유히 눈앞에서 사라졌다.
“다시는 여기 얼씬거리지 마.”
경고의 말을 던진 비서가 집으로 들어갔다.
쾅.
철문이 닫히는 굉음과 함께.
“으아아악!!!”
절망 섞인 비명을 질러낸 민우가 손으로 머리를 쥐어 잡았다.
***
지이이잉. 지이이잉.
운전하던 세준이 핸드폰 화면을 바라보았다.
모르는 번호였다.
가만히 바라보던 그가 누구인지 깨달은 듯 빙긋 웃으며 전화를 받았다.
“어. 나야. 잘 도착했어?”
-그럼. 바빠서 이제야 연락한다.
“미국은 어때?”
-어떻긴 당연히 좋지.
블루투스로 흘러나오는 한나의 목소리가 유독 밝았다.
“고생했다. 이제 그렇게 원하는 자리를 꿰차고 앉았으니 더 고생하고.”
-걱정하지 마. 어떻게 얻은 자리인데 그깟 고생이 문제야? 임민우 그 자식 옆에 있는 게 더 고생이었지.
그녀의 말에 세준이 피식 웃었다.
-이제 좀 현실 같네. 그 날 임민우 갑자기 호텔 찾아와서 얼마나 놀란 줄 알아? 이 일 날아가는 줄 알았다고.
“나도 놀랐다. 그래도 잘 됐잖아.”
호텔에서의 만남은 정말로 예상 밖의 일이었다.
-근데 덕분에 임민우가 내 말 믿은 거 같더라.
“무슨 소리야?”
-임민우. 안 찾아왔어?
“뭐 날 찾아올 일 있겠어?”
-진짜 투자했더라고. 내가 좀 냉랭하게 굴어서 흠칫했나? 지가 맨날 남 속여 먹던 짓이라서 절대 안 할 줄 알았는데. 정말 중이 제 머리는 못 깎나 봐.
“그래? 투자했다고?”
-어. 문자 왔더라고. 물론 씹었지만.
비스듬히 한쪽 입매를 밀어 올린 세준이 가만히 정면을 응시했다.
-딱 봐도 돈 많은 사람 데리고 사기 치는 게 보이던데. 그게 안 보이나?
“넌 그런 사기꾼들은 어떻게 알았냐? 직접 들어보니 이런데 누가 투자하나 싶던데.”
-아빠가. 요즘 은퇴하고 어디 돈 굴릴 곳 없나 찾는 사람 노려서 이런 놈들이 사기 친다고 알려줬거든.
“그래?”
-근데 혹시 모르지 그게 정말 투자에 성공해서 임민우 부자 될지도. 근데 그건 뭐 내 알 바 아니고.
“적어도 내 생각은 아니다.”
핸드폰 너머 그녀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이제 좀 속이 시원해?
“그냥. 그럴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아니다.”
-뭐야. 노력한 사람 힘 빠지게.
“벌 받아야 할 사람이 당연히 벌 받는 게 기뻐할 일은 아니지. 당연한 일이지.”
세준의 눈빛이 짙게 가라앉았다.
“아무튼. 넌 괜찮겠어?”
-나? 왜?
“임민우가 찾아가서 복수라도 하면 어쩌려고.”
-잠깐 만나서 놀고 헤어진 게 복수거리나 되나? 그렇게 따지면 걔 여러 번 복수 당했어야지. 지가 한 쓰레기 짓을 생각해야지.
“그래. 혹시 무슨 일 있으면 연락하고.”
-걱정 마. 너나 잘 해. 어떻게 다시 만난 건데. 이번에는 절대 놓치지 말고.
진심을 담은 목소리를 들으며 세준이 부드럽게 미소지었다.
-아무튼, 고마워. 나중에 미국 놀러 오면 내가 크게 한턱낸다!
“그래. 들어가라.”
통화를 마친 세준이 1년 전 기억을 더듬었다.
대학교 동기인 한나가 세준의 미국 사무실을 찾아왔었다.
“내 얘기 좀 맥슨에 해달라니까. 아직도 안 했지?”
서운한 눈빛으로 그녀가 물었다.
“나 그런 거 못 한다고. 그리고 네 능력이면 혼자 가능해.”
“참 남의 일이라고 쉬워. 줄 만 좀 닿게 해줘. 그 이후로 내가 알아서 할게.”
가끔 업무차 미국에 방문할 때마다 자신을 찾아왔던 그녀는 능력 있는 아버지 밑에서 자라 남부럽지 않은 자리에 앉아있었다.
하지만 그녀가 원하는 자리는 따로 있었다.
“그 얘기 하러 왔냐?”
밉지 않게 눈을 흘긴 그녀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내일 한국 가기 전에 얼굴 보러 왔어. 궁금한 것도 있고.”
“궁금한 거?”
“정말 한국으로 돌아갈 거야? 다 그만두고??”
다른 사람과 마찬가지로 안타깝다는 표정으로 그녀가 물었다.
“그럴까 생각 중이야. 아직 확실히 정하지는 않았어.”
“왜? 이유나 좀 알자.”
“있어. 그런 게.”
가늘게 뜬 눈으로 세준을 살피던 그녀가 책상 위에 펼쳐진 그의 지갑을 흘깃 바라보았다.
오래전부터 지갑 속을 지키고 있는 사진 한 장.
멀리서 보아도 여전히 같은 사진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사진에서 시선을 떼어낸 그녀가 슬그머니 그를 살폈다.
“세준아. 나 네 지갑 속 사진 좀 보여줘.”
“싫어. 왜?”
“아니. 내가 그 사진 몇 번 봤잖아. 궁금한 게 있어서 그래.”
“궁금해하지 마. 너랑 상관없는 일이야.”
흐음. 작게 소리 낸 한나가 천천히 입술을 움직였다.
“내가 되게 예뻐하는 동생이 있거든. 집에 돈도 좀 많고 애가 참 참하고 예쁜데. 애가 남자 보는 눈이 그렇게 없어.”
갑작스럽게 꺼낸 이야기를 가만히 귀담아들었다.
“2년 전에 걔가 어떤 쓰레기 같은 남자한테 당했어. 무슨 주식에 투자한다고 좋은 기회라고 돈도 빌리고 그랬었나 보더라고.”
“그런데?”
세준이 감흥 없는 목소리로 물었다.
“근데 뭐 돈이야 있다가 없고 그러는 거니까. 똥 밟았네! 치면 됐는데. 그 새끼가 유부남이었더라고.”
“쓰레기 새끼네.”
“응. 그래서 얘가 열 받아서 눈 뒤집혀서 오빠들 데리고 그 남자 집을 찾아갔거든. 나도 어떻게 생긴 새낀가 보고 싶어서 따라갔고.”
집중해 듣고 있는 세준을 지그시 바라보며 한나가 잠시 말을 멈추었다.
“근데? 왜 갑자기 멈춰?”
가볍게 미소지은 세준이 물었다.
“처음에는 내가 잘 못 본 거로 생각했는데……. ”
그녀가 말끝을 흐리며 책상 위에 놓인 세준의 지갑을 바라보았다.
순간 밀려드는 불안한 기분에 세준이 눈매를 천천히 구겼다.
“대체 무슨 소리야?”
끝까지 밀어 올린 눈꺼풀 아래 세준의 눈동자가 일렁이기 시작했다.
“아니. 사실 부인은 잘못이 없지. 근데 당한 사람은 어디 그런가? 그날 오빠들이 좀 집에서 심하게 난리를 쳤어.”
“……그런데?”
“그때 그 집에 있었던 그 남자 부인이. 내가 알고 있는 얼굴이었어.”
설마 하는 생각과 함께 세준의 잇새로 저도 모르게 탄식이 흘러나왔다.
“송지유.”
“…….”
“맞지? 사진 속 그 여자.”
일렁거리던 눈동자가 불길에 휩쓸린 듯 번쩍였다.
“그 동생이 그 남자 부인이 우리 학교 후배라고 했었어. 처음에는 이름 얘기했을 때 누군지 몰랐는데. 그날 가서 보고……!”
책상 위 지갑을 낚아채듯 들고 손을 뻗는 세준의 동작에 한나의 어깨가 크게 들썩였다.
“너 똑바로 말해. 정말 이 여자였어?”
한나가 차마 답하지 못한 채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이 여자냐고!”
“맞아.”
바닥까지 떨어진 것 같은 그의 표정에 한나가 입술을 꾹 다물었다.
“괜히 말했나 보다.”
밀려든 후회에 한나가 짧게 숨을 몰아쉬었다.
차마 그 날 사람들 앞에서 그녀가 무릎을 꿇고 연신 사과를 했다는 말은 전하지 못했다.
“근데 다행인 건 두 사람 이혼했대. 그런 쓰레기랑 살아봐야 고생이지.”
“이혼……했다고?”
“응. 좀 됐을 거야. 그 동생이 그러더라.”
다행인 건가. 혼잣말을 읊조린 세준이 피식 웃었다.
“그런 새끼는 똑같이 당해야 하는데. 그 동생도 마음고생 많았거든. 내가 다 갚아주고 싶더라.”
굳은 것처럼 미동 없이 앉아있던 세준이 떨구었던 눈동자를 천천히 밀어 올렸다.
“송지유야.”
“……응?”
“송지유가 내가 돌아가려고 고민하는 이유였어.”
오랜 시간 사진을 빼지 못하면서도 돌아가지 못한 이유.
아직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그 시간에 머물러 있는 자신과 다르게 그녀는 행복할지 모른다고 생각했었다.
설령 그녀에 대해 풀리지 않은 여러 가지 의문이 남아있지만. 그녀가 행복하다면 괜찮다고 생각했었다.
마치 내일 세상이 사라질 것 같은 얼굴로 찾아와 말했던 이별 선고와 결혼 소식.
‘분명히 이유가 있을 거야.’
그녀를 원망하면서도, 이해하려고 노력했었다.
하지만 피가 거꾸로 흐를 것 같은 가슴 아픈 이야기를 듣는 순간 그녀를 향한 마음을 막을 이유가 사라졌다.
“한나야.”
“응? 왜?”
“내가 너 원하는 대로 해줄게.”
지독하게 가라앉은 눈빛으로 그가 입을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