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4. 완벽히 돌아갈 시간
“하아…….”
지유가 떨림이 고스란히 느껴지는 벅찬 숨을 내뱉었다.
도무지 마주하고 있을 자신이 없어서 비스듬히 떨군 눈동자 위로 눈물이 가득 차올랐다.
“미안해.”
듬뿍 감정이 실린 목소리가 낮게 귓가를 파고들었다.
“아무것도 모르고 아프게 해서 미안해.”
억눌러 문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네 옆에 있으면 된다고만 생각했지, 널 아프지 않게 하는 방법을 몰랐어.”
악착같이 너를 가지고서도 나는 바보같이 똑같은 실수를 반복했다.
“네가 나한테 이야기할 시간조차 주지 않은 것도 미안해.”
“……흐흑.”
“아무것도 묻지 않아서 미안해.”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려 흐느낌이 묻은 입술을 적셔갔다.
“그리고…….”
한 걸음.
이제는 흩어져 나오는 숨결이 맞닿을 거리로 다가온 그가 천천히 손을 뻗었다.
그동안 들여다보지 못했던 아픔이 담긴 눈동자를 바라보며 뺨 위로 흘러내린 눈물을 부드럽게 닦아냈다.
“사랑해.”
흐트러진 시선 속에 번지는 햇살처럼, 눈부신 목소리가 밀려들었다.
“지금껏 한 번도 이 말. 해주지 못해서 미안하다.”
흐느낌에 자잘하게 들썩이던 그녀의 가슴이 바람이 불다가 멈춘 호숫가처럼 잔잔해졌다.
시간이 멈춘 듯 바라보고 있던 그녀의 눈동자에서 소리 없이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 모습에 마음이 아픈 듯 눈매를 미세하게 구긴 그가 숨을 깊게 내쉬며 부드럽게 미소지었다.
“네가 떠난 순간에도 난 한 번도 널 원망한 적 없어.”
나는 그리고 너는.
무엇이 두려워 이렇게 이 마음을 가슴에 품고 있었을까.
“사랑한다. 지유야.”
수백 번을 담고도 내뱉지 못했던 그때의 마음들이 이 순간 너에게 쏟아져 내려 전해지길.
“너를 처음 만난 순간도 그리고 지금도. 여전히 사랑해.”
“…….”
“그러니 이제 돌아와 줘.”
간절한 마음을 담은 목소리가 아름다운 바닷가 위로 잔잔하게 번졌다.
***
“오늘은 세준 씨 안 와?”
카페 마감 시간. 카페 안을 정리하던 윤희가 지유에게 물었다.
“네. 오늘 일이 좀 많대요.”
지유가 민망한 표정으로 답했다.
흐음. 작게 소리 낸 윤희가 살며시 고개를 기울였다.
“지유 씨. 혹시 나 때문에 안 돌아가는 거야?”
“네? 아니에요. 그런 거…….”
화들짝 놀란 지유가 손사래를 쳤다.
창밖은 봄바람에 꽃잎이 예쁘게 휘날리는 완연한 봄이었다.
서로의 마음을 제대로 깨달은 지 벌써 한 달이 넘게 지났지만, 지유는 돌아가지 않고 카페에 머물렀다.
의심을 버리지 않은 윤희의 눈빛에 지유가 입술을 살며시 눌러 물었다.
“안 그래도 돼. 난 처음부터 지유 씨가 돌아가길 바랐어.”
미안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자신이 있어서 한결 마음이 즐겁다는 그녀의 말이 떨쳐 지지 않았다.
“나 얼마 전에 친구 소개로 만남 남자가 내일 카페로 찾아온다네.”
“……네?”
지유가 화들짝 놀란 듯 눈을 크게 떴다.
“왜? 난 누구 만나면 안 돼?”
“아니요. 아니요. 그런 게 아니라.”
피식 웃은 윤희가 상기된 지유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동안 나도 마음을 꽁꽁 닫고 살았어. 근데 지유 씨랑 세준 씨 보니까. 사랑했던 그 시절들이 그리워지더라.”
추억을 담은 눈동자가 은은하게 반짝였다.
“당장 결혼을 하겠다는 것도 아니고. 그냥 너무 밀어내면서 살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했어.”
“…….”
“지나가면 후회한다는 말을 내가 지유 씨 한테 했으면서, 이 시간이 지나가는 건 내가 또 모르고 있더라고.”
지유가 부드러운 미소를 담은 채 그녀의 말에 귀 기울였다.
“그 사람도 내가 평생 그 기억을 끌어안고 살기를 바라지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어. 물론 잊기를 바라지는 않겠지. 영원히 사라지지도 않을거고.”
천천히 손을 뻗은 지유가 윤희의 손을 꼭 끌어 잡았다.
“제가 이런 말 할 자격은 없지만. 저도 그리고 언니도 행복했으면 좋겠어요.”
부드럽게 흘러나온 목소리에 윤희가 옅게 미소지었다.
“그래. 그러니까 빨리 여기 떠나. 나도 연애 좀 하게.”
큭큭. 작게 흘린 지유의 웃음소리에 윤희가 환하게 웃었다.
“근데 정말 언제 갈 거야? 세준 씨가 가자고 안 해?”
“……연애하재요.”
“응? 연애?”
윤희가 눈을 빠르게 깜빡였다.
“남들처럼 설레기만 하면서 보낸 시간이 저희 둘은 없었거든요.”
서로만 바라보기에는 벅찼던 현실.
“그리고 제가 좀 많이 망설였잖아요. 신경 쓰여서 그런지 그러자고 하더라고요.”
자신이 겪었던 과거의 아픔을 이제는 다 알고 있는 그였다.
긴 시간 동안 내보이지 못한 마음.
언제까지 기다릴 테니 천천히 오라고.
혹시나 아직 상처가 아물지 않아 망설일지도 모르는 자신을 위해 그가 했던 제안이었다.
“뭐야. 연애하려고 지금 여기 이용하는 거야?”
“네? 언니. 아니에요!”
웃음을 담은 채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 지유의 모습에 윤희가 환하게 웃었다.
“그래서 지금은 행복해?”
예전의 자신이라면 이런 질문에 망설였을 것이다.
“네. 행복해요.”
하지만 이제는 조금도 고민할 이유가 없었다.
“그리고 이제 돌아가고 싶어요.”
그의 배려 깊은 기다림마저도 그녀에게는 필요 없는 시간이었다.
인정하지 않았을 뿐, 사랑의 시작은 그를 만난 순간부터였다.
이제는 그에게 완벽히 돌아갈 시간이었다.
***
“대표님 어디 가세요?”
뒤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문을 빠르게 향하던 세준의 발이 브레이크가 걸린 듯 멈췄다.
“아. 네. 잠깐 외부 갔다가 퇴근할 거니. 다들 일 마치면 퇴근하세요.”
멈칫한 것이 느껴지는 세준의 얼굴을 가을이 멀리서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뭔가 있는데.”
조용히 중얼거리며 눈매를 좁히던 그때였다.
“뭐가 있는데?”
“아우. 깜짝이야!”
갑자기 귓가에서 속삭이는 목소리에 가을의 어깨가 들썩였다.
아주 가까운 거리에 머물러 빙긋 웃는 기훈의 모습에 가을의 상체가 훌쩍 뒤로 기울었다.
“느가 보믄 어쯔려거 이래.”
꾹 다문 잇새로 들릴락 말락 한 목소리를 뱉은 가을이 주변을 느릿하게 살폈다.
짙은 눈썹을 살짝 밀어 올린 기훈이 기울였던 상체를 천천히 세웠다.
“오늘 안 잊었죠?”
“알아……요.”
“그럼 이따가 봐요.”
주변의 시선 따위 괘념치 않는 듯 환하게 웃는 기훈의 모습에 은근히 긴장이 밀려왔다.
그러면서도 두근두근 심장이 뛰었다.
‘아니. 뭐 우리가 무슨 사이도 아니고. 누가 뭐라 할 게 있나?’
괜한 의식을 반성한 가을이 천천히 고개를 숙여 오늘 입고 온 옷을 살폈다.
10번의 데이트 중 오늘은 5번째 데이트였다.
딱히 만나면서 특별한 일은 없었다.
그냥 밥 먹고 술 한잔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뭐 데이트랄 것도 없네.’
신경 쓰지 말자고 다짐하는 마음과 다르게 이제는 옷을 확인한 눈동자가 책상 앞 거울에 닿았다.
‘머리 드라이를 좀 하고 올 걸 그랬나.’
거울을 가만히 들여다보던 가을이 가방 속에서 립스틱을 꺼냈다.
‘누구한테 잘 보이려고 이걸 발라.’
마음과 몸이 따로 노는 가을이 한참이 지나서야 거울에서 시선을 떼어냈다.
.
.
.
“여기!”
약속 장소 앞에 도착하자 저 멀리서 손을 번쩍 드는 기훈이 보였다.
첫날 지각을 한 이후로 늘 약속 시각 보다 훌쩍 일찍 와서 기다리던 기훈이었다.
“일찍 왔네. 아까 일 늦어질 거 같아서 기다릴 각오 했는데.”
한 걸음 앞으로 다가가자 기훈이 눈매를 반짝이며 말했다.
“그냥. 덮어놓고 나왔어.”
“왜 더 하고 나오지. 나 기다려도 괜찮은데.”
“됐어. 그냥 하기 싫었어.”
“혹시 나 보고 싶어서 서둘러 나왔어?”
“아니!!”
정색하는 가을의 모습에 선하게 웃고 있던 기훈이 눈매를 키웠다.
“뭘 그냥 한 말 가지고 그렇게 정색을 해.”
“아……아니. 내가 뭐 매……맨날 사무실에서 보는데! 보고 싶을 게 뭐가 있어.”
“알았어. 그냥 한 말이라고.”
괜히 가슴 어딘가가 콕 찔려 버벅거린 자신과 다르게 기훈은 태연해 보였다.
“가을아. 뭐 먹을래?”
“아무거나 먹자. 이제 사 먹는 밥은 다 똑같아서.”
귀찮다는 듯 답한 가을이 주변을 살폈다.
“그럼 집밥 먹을래?”
한 걸음 정도 떨어져 있는 거리를 불쑥 좁힌 기훈이 물었다.
“어? 집 밥? 잘 하는데 있어?”
“어. 있어.”
“그래. 거기 가자.”
유명한 가정식 백반집이 있나?
가볍게 생각한 가을이 기훈을 따라 움직이기 시작했다.
한참을 걷던 기훈이 한 오피스텔 앞에 멈춰섰다.
“들어가자.”
“여기야?”
이리저리 살펴봐도 가정식 백반집은 보이지 않았다.
“응. 여기가 우리 집이야.”
“아……. 응? 뭐?”
“우리 집이라고 들어가자.”
“저……잠깐만. 동구오빠! 기다려!!”
자신의 목소리는 들리지도 않는 듯 직행하는 기훈을 따라 가을이 후다닥 뛰어갔다.
‘지금 날 집에 데려가는 거야?’
엘리베이터에 올라탄 가을이 차마 묻지 못하고 흘깃 기훈을 바라보았다.
여전히 평온해 보이는 기훈의 모습에 살며시 눈매를 찌푸렸다.
‘혼자 살겠지? 설마 부모님이랑 같이 사나?’
혼자 살아도, 부모님이랑 같이 살아도 뭔가 이상한 상황임은 분명했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린 기훈이 빠르게 문을 열었다.
“들어가.”
활짝 문을 열어준 그가 환하게 미소지었다.
“응.”
집 안으로 들어가자 깔끔한 인테리어와 각을 잡은 듯 잘 정리된 물건들이 시선을 끌었다.
“……오빠. 혼자 살아?”
집 안 여기저기를 살펴보던 가을이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혼자 살지. 설마 부모님 계신 집에 널 데려왔을까 봐?”
“왠지 오빠는 그러고도 남을 거 같아서.”
피식. 가을을 보며 웃은 기훈이 곧장 주방으로 향했다.
“조금만 기다려. 밥 준비되면 부를게.”
그 소리에 가을이 쪼르르 주방으로 향했다.
“오빠가 밥하게?”
“마침 엄마가 보내주신 반찬들이랑 찌개 있어서. 집에서 밥을 잘 안 먹어서 어차피 놔두면 버려.”
“아. 그래서 집에 오자고 했구나?”
대수롭지 않게 말하며 끄덕이는 가을에게 기훈의 시선이 지그시 닿았다.
“왜 실망했어?”
“응? 뭐가?”
“그냥 밥만 먹는 거 같아서 실망했냐고.”
“뭔 소리야.”
동그란 눈을 깜빡이는 가을을 바라보며 기훈이 나른하게 입매를 밀어 올렸다.
“밥 먹고 다른 것도 할 거니까. 실망하지 말고.”
“……어?”
“방해되니까. 저쪽에 가서 좀 앉아있어.”
“어어어. 알았어. 밀지 마.”
등 떠미는 손에 휘청인 가을이 거실 소파를 천천히 향했다.
‘다른 것도 한다고? 무슨 뜻이지?’
오묘한 그의 말에 은근한 기대와 긴장이 동시에 차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