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고작 두 번째 결혼-75화 (75/80)

75. 나 이제 키스할 거야

정말로 집밥다운 집밥을 먹은 가을이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잘 먹었어?”

“어. 너무 잘 먹었어. 오빠 어머니 솜씨 대박이다.”

“엄마가 만드는 건 다 맛있지.”

“하긴. 우리 엄마 밥도 맛있긴 해.”

인정하듯 고개를 빠르게 끄덕이는 가을의 얼굴 위로 기훈의 시선이 닿아서 떨어지지 않았다.

“왜? 내 얼굴에 뭐 묻었어?”

“응. 거기 밥풀.”

“뭐? 어디?”

“농담. 다 먹었으면 저기 가서 앉아있어. 치우게.”

이씨. 콧등을 잔뜩 찌푸린 가을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조금 후.

기훈이 커피와 조각 케이크를 담은 접시를 들고 다가왔다.

거실 테이블 위에 들고 온 것들을 내려놓은 기훈이 가을의 옆에 나란히 앉았다.

“오오! 케이크 맛있겠다!!”

두 손을 환호하듯 흔든 가을이 재빨리 앞에 놓인 포크를 들었다.

“많이 먹어. 너 케이크 좋아하잖아.”

“응. 나 케이크 엄청 좋아해. 나 특히 딸기 케이크 좋아하는데. 어떻게 알고 딱 준비했대.”

“내가 너에 대해 모르는 게 뭐가 있겠냐.”

폭신한 케이크를 포크로 듬뿍 뜨던 가을이 순간 움직임을 멈추었다.

그리고 느릿하게 고개를 돌렸다.

새카만 눈동자로 자신을 지그시 바라보던 그가 설핏 입매를 밀어 올렸다.

“먹어. 떨어진다.”

“어? 어.”

잠시 멈추었던 손을 움직여 입안 가득 달콤한 케이크를 밀어 넣었다.

“맛있냐?”

“응. 무지. 오빠도 먹어.”

“됐어. 난 너 먹는 것만 봐도 배부르다.”

털썩 소파에 등을 기댄 기훈이 살짝 고개를 기울이며 다시 케이크를 포크로 찌르는 가을을 바라보았다.

“가을아. 너 지유 씨랑 연락하냐?”

“응. 하지.”

가볍게 답한 가을이 입을 오물거렸다.

“그렇구나.”

중얼거리듯 답하는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가을이 살며시 고개를 기울였다.

“왜? 오빠도 다 알고 있는 거 아니야?”

“응? 뭐가?”

기훈의 눈에 힘을 가득 주었다.

일부러 모른 척하는 것이 투명하게 느껴져 가을이 눈매를 가늘게 좁혔다.

“뭘 나한테까지 속이려고 그래. 두 사람 다시 만나는 거. 오빠도 알잖아.”

그제야 눈에서 힘을 뺀 기훈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난 사실 직접 듣지는 못했고. 사무실 들어갔는데 이 자식이 전화에 대고 막 꿀 떨어지는 목소리로 말하다가 후다닥 끊길래. 그냥 감 잡았지.”

“나도 그래.”

가볍게 답한 가을이 움직이던 손을 멈춘 채 말을 이었다.

“지유 떠나고 선배가 나 불러서 지유 어디 있는지 알려달라고 했거든.”

“그랬어?”

“응. 생각해보니까 내가 막아봐야 만날 사람은 어떻게든 만나고 깨질 사람은 깨지지 않을까 싶더라고. 그리고 그 날 선배가 정말 절실해 보였어.”

흘러가는 사랑은 인력으로 막을 수 있는 일이 아님을 잘 알고 있었다.

‘나 도와줄 사람 너밖에 없다.’

단단했지만 그 어떤 순간보다 절실했던 세준의 눈빛이 고스란히 떠올랐다.

“그리고 요즘 선배 보면 딱 모르겠어? 얼굴이 아주 환해졌잖아. 그리고 가끔 통화하는데. 지유 목소리도 좋더라고 말은 안 하지만. 그래도 안 물었어.”

“왜?”

“왜 긴. 이제 다른 사람 상관 말고 그냥 둘이 좀 잘 지냈으면 해서. 사실 나도 이러쿵저러쿵 말 많이 했는데. 뭣 하러 그랬나 후회되더라고.”

흐음 하고 숨을 들이마신 가을이 기훈과 눈을 맞췄다.

가만히 가을을 들여다보던 기훈이 천천히 입술을 움직였다.

“그래. 각자의 일은 각자가 알아서 하겠지.”

“응. 맞아.”

“그럼. ……이제 우리 얘기 좀 해볼까?”

갑자기 진지해진 음성에 가을의 눈꺼풀이 바짝 밀려 올라갔다.

손을 뻗은 기훈이 그녀의 손에 잡힌 포크를 느릿하게 손에서 빼냈다.

“……우리 얘기라니?”

“내가 아까 다른 거 한다고 했잖아.”

“……어.”

기대 못 한 진지함에 심장이 조금씩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급속도로 밀려든 어색함에 평소처럼 가볍게 농담을 던지려다가도 떨어지는 눈빛에 꽁꽁 묶인 것 같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최가을.”

“……네?”

짙게 떨어지는 목소리에 가을이 저도 모르게 존댓말을 뱉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기훈의 한쪽 입꼬리가 나긋하게 밀려 올라갔다.

“내가 세준이랑 지유 씨 보면서 생각을 해 봤어.”

“……뭐를?”

“아무리 사랑하더라도 타이밍이 안 맞으면 쉽게 갈 길도 힘들게 갈 수 있겠구나.”

동조하는 바였기에 가을이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나 10번 안 하려고.”

“……응?”

“시작이 반이라고 했는데. 벌써 5번 했으면 반은 넘은 거잖아.”

아. 데이트.

그제야 그의 말을 이해한 가을이 긴장된 눈빛으로 그의 입술에 집중했다.

“더 안 기다리려고.”

“안 기다리다니…….”

“10년 넘게 짝사랑했으면 충분하지 않아?”

가을이 뱉지 못한 숨을 느릿하게 삼켰다.

‘동구가 너 보려고 맨날 찾아온 거잖아.’

‘아직도 너 좋아하니까. 데이트하자고 하신 거 아닐까?’

정황상 그렇다고 넌지시 생각했을 뿐이지, 그의 입에서 직접 들은 적은 없었다.

이제는 확실히 알고 싶었다.

“오빠가……날 좋아한다고?”

가을의 물음에 평온하던 그의 눈매가 느릿하게 구겨졌다.

“설마……몰랐어?”

“그걸 어떻게 알아? 말을 안 하는데.”

헛. 저도 모르게 헛웃음을 뱉은 기훈이 입술을 꾹 다물었다.

“당연히 모르지.”

아주 순수한 표정으로 말하는 가을을 바라보며 기훈이 빠르게 눈을 깜빡였다.

그리고.

“큭.”

웃음을 뱉은 기훈이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왜 웃어?”

고개를 들어 이해 못 할 눈빛을 한 가을을 바라보며 기훈이 티 나지 않게 한숨을 내쉬었다.

“너 눈치 빠른 거 아니었어?”

“응. 나 빨라.”

“빠르긴 무슨.”

작게 읊조리는 목소리에 가을이 빠직 눈매를 구겼다.

“하긴 그러니 10년 동안 모르지. 안 되겠다.”

“뭐가 안돼?”

“여우인 줄 알았더니 순 곰탱이네.”

“뭐? 곰탱이. 이 동구가 진짜!!”

휙. 공기를 가르며 날아가던 그녀의 손이 공중에 우뚝 멈추었다.

순간 커다란 손으로 가녀린 손목을 감아 잡은 그가 천천히 팔에 힘을 주었다.

“……!”

끌어당기는 힘에 가을의 상처가 그에게 기울고, 한 뼘도 남지 않은 거리에 그의 얼굴이 자리 잡았다.

순간 숨을 삼킨 가을이 커다란 눈으로 그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동구가 원래 이렇게 잘 생겼었나?’

다들 잘생겼다고 했을 때 홀로 부정했던 그녀였다.

하지만 눈앞에 보이는 그의 얼굴이 이상하리만큼 잘생기고 거기에 더해 빛을 머금은 듯 반짝였다.

“이제 하나하나 다 알려줘야겠네.”

결심한 듯 단단한 눈빛을 한 채 속삭인 그가 부드럽게 입매를 밀어 올렸다.

간질간질 밀려드는 낯선 감각과 함께 온몸에 열기가 퍼지는 느낌이 들었다.

“나 너 좋아해. 이거 고백이다.”

하나하나 가르쳐 주겠다는 말을 실천한 그가 파고들 것 같은 진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자. 이제 답해야지.”

“……어? 답?”

“고백을 받았으면 답을 해야지. 그리고 나 10년 기다렸어. 나중에 이런 말은 절대 안 돼.”

도망갈 틈이 요만큼도 없어 보이는 상황.

그리고 도망갈 생각을 할 수도 없을 만큼 심장이 빠르게 뛰고 머릿속이 뒤엉켰다.

“아……아니. 잠깐만. 아까 하겠다는 게 그럼 고백이었어?”

“아니.”

칼 같은 답변에 가을이 눈을 번쩍 떴다.

“대답 안 할 거야?”

“고백 아니면 뭔데 그거 먼저 하자!!”

일단 빠져나갈 구멍을 찾으려고 안간힘을 쓰는 그녀를 보며 기훈이 피식 웃었다.

“아. 진짜!!”

가깝던 거리를 훌쩍 벌린 기훈이 소파에 다시 등을 털썩 기댔다.

“내가 진짜 너 때문에 못 살겠다.”

이마에 팔목을 얹은 채 그가 눈을 감고 중얼거렸다.

“……내가 뭘 어쨌다고.”

느릿하게 눈을 뜬 그가 고개를 돌리며 눈매를 살며시 접었다.

“좋아서. 최가을 네가 좋아서 못 살겠다고.”

쿵. 쿵. 쿵.

이제는 갈비뼈가 부러질 것처럼 가슴이 심하게 요동쳤다.

걷잡을 수 없이 밀려든 열기에 가을의 뺨이 붉은빛으로 물들었다.

그 모습마저 사랑스러워서 한참을 바라보던 기훈이 천천히 상체를 일으켰다.

다시 가깝게 다가오는 그의 모습을 숨을 삼키며 바라보았다.

“대답 내가 도와줄게.”

빠져들 것 같은 깊은 눈동자를 바라보며 가을이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나 이제 키스할 거야.”

스르륵 목덜미와 머리카락 사이를 파고드는 간지러운 감촉에 가을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

“시간 줄게. 싫으면 피해.”

느릿하게 번지는 목소리에 온몸에 전율이 흐르는 것만 같았다.

“하나.”

맞닿았다 떨어지는 입술을 바라보며 가을이 손을 꾹 말아쥐었다.

“둘.”

살짝 벌어진 가을의 잇새로 뜨끈한 숨이 느릿하게 흘러나왔다.

그 순간 기훈의 눈매가 작게 움찔거렸다.

긴장이 서린 눈빛으로 물끄러미 바라보던 가을의 눈꺼풀이 스르륵 떨어졌다.

피하고 싶지 않았다.

이렇게 심장이 뛰는 거면, 거부할 필요가 없었다는 생각이 밀려들었다.

“셋.”

기다림의 끝을 알리듯 짧게 끊긴 그의 목소리와 함께 뜨거운 감촉이 입술 위를 덮쳐왔다.

밀착된 잇새로 흘러든 짙은 숨이 뜨겁게 입안을 채워왔다.

허리를 감아 바짝 당기는 힘에 그의 넓은 품으로 가을의 몸이 빨려 들어갔다.

기다렸던 순간임을 알려주듯 입술을 타고 넘어오는 숨과 호흡은 거칠었지만 다정했다.

힘을 가득 주어 그의 가슴 위 셔츠를 잡고 있던 가을에 손에 스르륵 힘이 빠졌다.

오롯이 몸 위를 타고 흐르는 서로의 감각에 몰두한 두 사람이 오랜 시간 서로를 놓지 않았다.

기훈……아니 동구의 10년 짝사랑이 끝나는 순간이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