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 우리가 사랑할 시간
뉴욕공항에 도착한 두 사람이 곧바로 호텔을 향했다.
두 사람은 지난번과 같은 호텔을 선택했다.
호텔에 도착해 세준이 안내데스크로 키를 받으러 간 사이.
지유는 커다란 트리와 장식물로 예쁘게 꾸며진 호텔 로비를 구경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1년 전과 많이 달라진 것이 없는 공간.
하지만 지유의 눈에는 지금 이 공간이 기억 속 그 날보다 몇백 배는 아름답게 느껴졌다.
반짝이는 트리를 빙 둘러 걷고 있던 지유가 걸음을 멈추었다.
“아…….”
1년 전과 마찬가지로 같은 곳에 붙어있는 이벤트 팻말이 보였다.
-사랑하는 사람 그리고 가족, 소중한 사람에게 편지를 남겨보세요.
1년 후 크리스마스 때 자신이 적어 낸 이메일로 편지를 보내준다고 했었다.
기억을 더듬은 지유가 재빨리 가방에서 핸드폰을 꺼내었다.
정말로 이메일이 도착해 있었다.
“뭐해? 저건 뭐 하는 거지?”
이메일을 확인하려는 순간 세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벤트 하는 거예요.”
“그래? 해 볼래?”
“아니에요. 괜찮아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인 세준이 지유의 어깨를 부드럽게 감으며 걸음을 옮겼다.
“오늘 일정은 어떻게 되십니까?”
“일단. 나가죠?”
“어디로?”
“여기 스테이크가 너무 맛있는 집이 있대요. 뉴욕에 왔는데. 스테이크는 먹어봐야죠.”
“뭐야. 결국, 고기야?”
세상의 중심에서 고기를 외칠 것 같은 그녀를 바라보며 세준이 피식 웃었다.
“먹는 게 다 남는 거예요.”
작게 속삭인 지유가 서둘러 걸음을 옮겼다.
그녀의 계획에 따라 스테이크를 배불리 먹은 두 사람이 뉴욕의 밤거리를 걷기 시작했다.
“이쪽으로 가면 타임스퀘어인가?”
“그럴걸요?”
애매한 지유의 대답에 세준이 살며시 고개를 기울였다.
“왜요?”
그녀가 맑은 눈동자를 반짝이며 물었다.
“가고 싶은 곳 많다며.”
“지금 가고 있잖아요.”
“그러니까 지금 우리가 어디로 가고 있는 거죠?”
웃음을 참아 내린 세준이 물었다.
“사실 일정 없어요.”
“응?”
세준이 눈꺼풀을 살며시 추어올렸다.
스치는 바람처럼 부드럽게 미소지은 그녀가 새초롬히 그를 바라보았다.
“그냥. 이렇게 걷고 싶었어요.”
그를 바라보던 시선이 저 멀리서 아름답게 반짝이는 불빛을 지그시 담았다.
“오빠랑 손 꼭 잡고 걷고 싶었어요. 여기 다시 오지 않으면, 평생 뉴욕이 나한테는 예쁘지 않은 곳으로 남을 거 같았어요.”
덤덤히 흘러나오는 목소리를 들으며 세준이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근데 지금 이렇게 손잡고 걷고 있으니까. 어디를 가든 나한테는 예쁘고 행복해 보일 테니. 일정 같은 거 필요 없지 않겠어요?”
지유가 싱긋 콧등을 찌푸리며 웃었다.
표정을 가다듬은 세준이 부드럽게 미소지었다.
“사실 귀찮아서 안 짠 건 아니고?”
“들켰네.”
큭. 소리 내 웃은 지유가 예쁘게 눈매를 접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세준이 손을 꼭 잡은 채 고개를 기울였다.
초옥-.
입술 위로 달콤한 키스를 남긴 그가 사랑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작년에 갔던 곳 다 가자. 너 혼자 갔던 곳도. 우리 같이 갔던 곳도.”
지유가 환하게 웃으며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어디부터 갈까요? 다 가려면 오늘 좀 바쁘겠다.”
“응? 오늘 다 가려고?”
“네. 오늘 다 가야죠.”
빈틈없는 눈빛으로 그녀가 말했다.
“너무 늦었는데? 벌써 밤이잖아.”
“말 나온 김에 가야죠. 밤새 두 손 꼭 잡고 걸어서.”
“에이. 내일 가자.”
“원하는 거 다 해준다면서.”
순간 거짓말쟁이가 되어버린 세준이 난감한 미소를 지었다.
그때 어디를 갔더라.
기억을 더듬은 그가 입술을 굳게 다물었다.
“그래. 가자.”
세준이 결심의 뜻을 보여주듯 그녀의 손을 꽉 잡았다.
“하긴 다 가는 건 좀 힘들겠죠?”
이러려면 결심은 왜 했냐는 생각이 들 정도로 빠르게 그녀가 말을 바꾸었다.
“아니야. 가자.”
“그럼 우리 딱 한 곳만 갈까요?”
예쁘게 눈을 반짝이며 지유가 말했다.
“그래. 그러자. 그게 어딘데?”
이때다 싶어 빠르게 답하자 그녀가 천천히 얼굴을 귓가에 붙여왔다.
살며시 허리를 굽히며 그녀의 목소리에 귀를 쫑긋 세우자.
“침대.”
뜨끈한 숨결과 함께 간지러운 목소리가 귓속을 파고들었다.
“우리 신혼여행 온 거잖아요. 그래도 첫날 밤인데.”
세준의 한쪽 입꼬리가 의도치 않게 씰룩였다.
천천히 굽혔던 허리를 곧게 편 세준이 자신감 넘치는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이제는 깍지까지 끼며 그녀의 손을 꼭 잡았다.
“그런 곳에서는 밤을 새워야지.”
“……네?”
“이 오빠만 믿어. 가자.”
“어어!! 천천히 가요!!”
긴 다리를 쭉 뻗어 나아가는 그를 따라 지유의 몸이 끌려갔다.
참지 못하고 그녀가 웃음을 터트렸다.
뒤에서 들려오는 웃음소리에 세준이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햇살이 사라진 공간이 그녀로 인해 반짝반짝 아름답게 빛난다.
스르륵 번지는 환한 미소와 함께 걸음을 멈춘 그가 그대로 그녀에게로 고개를 숙였다.
사르륵 녹아내릴 것 같은 입맞춤에 설렘이 번지고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그림같이 펼쳐진 아름다운 풍경 속 두 사람은 그 어느 때보다 아름다웠다.
진정한 신혼여행 첫날 밤이 시작되고 있었다.
***
힘겹게 눈을 뜬 지유가 흐릿한 눈으로 주변을 살폈다.
창문으로 빛이 환하게 들어오고 있었다.
“몇 시지?”
지유가 천천히 몸을 돌려 침대 옆 테이블 위에 놓인 핸드폰으로 손을 뻗었다.
“히익. 12시?”
잘못 본 게 아닐까? 지유가 눈을 비비며 다시 시간을 확인했다.
“진짜 12시네.”
지유가 중얼거리듯 말하며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새근새근 숨을 내쉬며 잠들어 있는 세준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시차 때문이 아니었다.
어젯밤 침대 위에서의 그는 그 어느 날보다 뜨겁고 야했다.
가지고 있던 에너지를 다 쏟아냈으니 피곤하지 않을 리가 없었다.
침대에 누운 채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던 지유가 어제 이메일을 확인하지 못한 것이 떠올랐다.
그녀의 손끝이 핸드폰 화면을 가볍게 눌렀다.
“일어났어? 뭐해?”
스르륵 밀려온 손이 그녀의 몸을 품 안으로 끌어당겼다.
“확인할 게 좀 있어서요.”
“확인? 뭔데?”
몽롱한 눈빛을 한 그가 그녀의 손에 들린 핸드폰 화면을 바라보았다.
“작년에도 로비에서 같은 이벤트를 했었어요.”
“무슨 이벤트야?”
“사랑하는 사람에게 편지를 쓰면 1년 후에 이메일로 그 내용을 보내준다고 했었거든요.”
“그래?”
“네. 저는 제 소원을 적어서 저한테 보냈어요.”
소원이라는 말에 세준이 궁금증 가득한 눈동자로 지유를 바라보았다.
“이거예요.”
지유가 핸드폰 화면을 세준의 앞으로 내밀었다.
-지유야. 사랑해.
짧은 문장 위로 떨어져 있던 세준의 시선이 그녀에게로 향했다.
그에게 꼭 보여주고 싶었던 지유였기에, 그의 표정을 천천히 살피며 입술을 움직였다.
“내가 올해 크리스마스 때 가장 듣고 싶은 말이었어요.”
속삭이듯 말한 그녀가 살포시 미소지었다.
“그래서. 행복했어?”
조금 더 그녀를 끌어당긴 세준이 그녀의 입술 위로 짧게 키스했다.
“네. 어제 밤새도록 들어서. 너무 행복했어요.”
그녀의 이마 위로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넘긴 그가 이마 위에 다시 부드럽게 키스했다.
“그때는 내가 이렇게 행복할 줄 몰랐어요. 그래서 더 행복해요.”
“앞으로 더 행복할 거야.”
바짝 맞닿은 그녀의 몸을 더욱 꼭 끌어안았다.
“근데. 나한테 듣고 싶었던 말 맞지?”
고개를 번쩍 들며 묻는 그의 가슴을 지유가 아프지 않게 내리쳤다.
“농담이야. 농담.”
촉 촉 촉. 끊임없이 보이는 이곳저곳에 키스하는 세준의 행동에 지유가 웃으며 몸을 비틀었다.
손끝에 닿은 부드러운 살결을 쓸어올리다 보니, 잠시 잠잠해졌던 욕망이 스르르 고개를 들었다.
“오늘 하루종일 이러고 있을까?”
사심이 가득한 목소리에.
“아니요. 이제 일어나야죠.”
그녀가 칼같이 답했다.
“계속 사랑한다고 얘기해 줄게.”
“나중에. 지금은 어제 많이 들어서 괜찮아요.”
……소원이라면서.
어쩐지 매정하게 느껴지는 그녀를 바라보며 세준이 눈매를 좁혔다.
“계획 없다면서.”
“타임스퀘어도 또 가봐야 하고. 록펠러 타워 앞에서 오늘도 크리스마스 행사 있대요. 어제 직원한테 물어봤어요. 거기 꼭 가야겠어요.”
없다면서 자신의 계획을 하나씩 드러내는 그녀의 모습에 그가 못 말리겠다는 듯 웃었다.
“준비하고 나가자.”
욕망이 더 번지기 전에 이곳을 빠져나가야 했기에, 세준이 재빨리 몸을 일으켰다.
...많은 인파로 가득한 타임스퀘어는 다시 봐도 화려하고 아름다웠다.
지유가 원하는 대로 손을 꼭 잡은 채 그녀가 홀로 걸었던 거리를 함께 걸었다.
한결같이 미소가 떠나지 않는 그녀를 바라보는 것만으로 세준은 그저 행복했다.
뉴욕의 밤이 찾아오고, 도시는 더욱 화려한 불빛으로 아름답게 빛났다.
저녁을 먹고 록펠러 타워 앞으로 향했다.
다시 봐도 감탄사가 흘러나오는 커다랗고 화려한 트리.
트리 앞 스케이트장은 오늘도 가족들과 연인들이 가득했다.
스케이트 장이 잘 보이는 곳에 두 사람이 자리 잡았다.
“행사 곧 시작하겠지?”
주변으로 조금씩 모이는 사람들을 바라보며 지유가 고개를 끄덕였다.
“춥지 않아?”
장갑을 꼈지만, 오랜 시간 돌아다니다 보니 손이 꽁꽁 얼어있었다.
“커피라도 사 와야겠다.”
“괜찮아요.”
“아니야. 이 앞에 있더라. 금방 올게. 어디 가지 말고 있어.”
세준이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그가 자리를 비운 사이 스케이트 장 안의 사람들이 하나둘 사라졌다.
“어. 행사 시작하는 건가?”
지유가 빠르게 그가 걸어간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조금 후 스케이트 장 안으로 화려한 옷을 입은 사람들이 공연할 준비를 시작했다.
그리고 금세 공연이 시작되었다.
커다란 음악 소리와 함께 사람들의 환호와 박수 소리가 주변을 가득 채웠다.
지이이잉. 지이이잉.
주머니 속에서 느껴지는 진동에 지유가 재빨리 핸드폰을 꺼냈다.
세준의 전화였다.
“네. 오빠.”
-줄이 길어서 아직 대기 중인데. 공연 시작했지? 소리 들린다.
“네. 시작했어요. 빨리 와요.”
-앞에 아직 대기가 좀 있는데.
“그냥 와요. 공연 같이 봐야지.”
-알았어. 갈게.
통화를 마친 지유가 조금은 편안해진 마음으로 공연을 바라보았다.
시선을 빼앗는 화려한 무대가 끝이 나고, 작년과 마찬가지로 예쁜 드레스를 입은 가수가 무대 중앙에 자리 잡았다.
주변을 천천히 살핀 가수가 마이크를 입으로 가져갔다.
“사랑을 말하기 가장 좋은 날.”
그녀의 목소리에 지유가 살며시 눈매를 키웠다.
서로를 꼭 끌어안은 연인들을 바라보며 그녀가 1년 전과 같은 멘트를 이어갔다.
“마법처럼 당신의 사랑이 전해지기도 하는 날이죠.”
지그시 무대를 바라보며 지유가 부드럽게 미소지었다.
“제 노래가 끝이 나면. 사랑하는 사람에게 키스해주세요.”
달콤하게 속삭이는 목소리는 오늘도 가슴을 뭉클하게 파고들었다.
“크리스마스니까요.”
아직 노래가 시작되지도 않았는데. 지나간 기억이 그녀를 찾아왔다.
낯선 곳에 서서 그를 기다리며 가슴 두근거렸던 시간.
잔잔하게 울리는 목소리에 눈물이 날 것만 같았던 그때의 기분.
그리고 용기 내 그에게 키스했을 때의 설렘.
기억을 아련히 담은 눈빛을 한 채 흘러나오는 아름다운 선율을 가만히 귀에 담았다.
눈앞에 반짝이는 수많은 불빛과 가슴을 설레게 만드는 아름다운 목소리에 그 날처럼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살포시 미소를 머금은 그녀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그 날처럼.
사랑을 속삭이는 연인. 그리고 행복하게 웃고 있는 사람들 사이에 그가 있었다.
시간이 멈춘 것 같았던 공간.
그를 바라보며 그때는 우리가 사랑했던 시간을 떠올렸었다.
하지만 이제는 우리가 사랑할 시간을 떠올린다.
마법처럼 사랑이 전해지기도 하는 날.
우리가 사랑에 빠졌던 순간을 기억하고 있듯이.
우리는 사랑하는 이 순간 또한 잊지 않을 것이다.
한 걸음. 한 걸음.
눈을 맞추며 자신을 향해 다가온 그가 걸음을 멈추었다.
시간이 지나면.
이렇게 마주하고 있는 순간을 떠올리며 우리는 사랑을 속삭일 것이다.
노래가 끝이 나고, 흘러온 시간 속 우리의 모습을 떠올리며 말없이 그를 바라보았다.
이제는 그를 볼 때마다 저절로 번지는 미소를 머금은 채 그녀가 천천히 입술을 움직였다.
“선배. 키스해도 돼요?”
입술 위로 예쁜 미소가 번지고, 맑은 눈동자가 주변의 아름다운 빛을 담은 채 반짝였다.
1년 전 그날.
사랑을 말해주지 않더라도, 우리가 기억하는 순간을 그가 떠올렸으면 했지만.
이제는 시간이 흐른 뒤에 사랑을 말하는 지금의 순간을 떠올렸으면 한다.
“얼마든지.”
두 팔을 벌리며 해사하게 웃는 그의 모습에 지유가 환한 미소를 지었다.
“사랑해요.”
속삭인 작은 입술이 미소를 머금은 채 다가가자, 그가 기다렸다는 듯 고개를 숙여 부드럽게 입술을 감았다.
홀로 아픈 가슴을 끌어안고 눈물 흘렸던 순간도.
문득 차오른 그리움에 밤을 지새웠던 순간도.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당신을 떠나보내야 했던 순간도.
이제는 원망하지 않기로 했다.
우리가 사랑하는 지금.
그리고 사랑할 수많은 날에 비하면 고작인 시간임을 우리는 알고 있기 때문이다.
-고작 두 번째 결혼(F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