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3화 (13/17)

시계 초침 돌아가는 소리가 무심하게 아파트 안을 울렸다. 팀과 미치도록 매운 카레를 먹고는 끊임없이 눈물을 흘리며 데이슨을 저주한 지 한 시간, 금발의 형사는 자신의 낡은 아파트 소파에 뚱한 얼굴로 앉아 무언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팔짱을 끼고 다리를 꼰 폼이 그다지 안락해 보이지는 않았다. 발로 바닥을 소리 나게 탁, 탁, 두드리던 쥬드의 귀에 익숙한 울림이 포착되었을 때, 쥬드는 별 망설임도 없이 휴대폰을 열고 퉁명스럽게 뱉었다. 

“너 뭐냐? 왜 뒷조사야.” 

[반응이 격하네요. 전 그냥 메리와 잠시 이야기해본 것뿐이에요. 화낼 것 없어요.] 

“게다가 뭐, 조안 넬비스? 그 유치한 아나그램(anagram: 단어 혹은 구절의 알파벳을 재배열하여 또 다른 단어나 구절을 만들어 내는 것)은 또 뭐야. 무슨 고전 추리소설 등장인물이라도 된 줄 알아?” 

[이런, 이런. 진정해요, 쥬드. 정말 아무 폐도 끼치지 않았어요. 당신 과거를 조사해서 당신의 약점을 잡을 생각 따위가 아니었다는 건 당신이 가장 잘 알 텐데요. 그런 걸 설명할 만큼 나에 대해 모르지는 않잖아요.] 

여전히 고운 눈길은 아니었지만 쥬드는 일단 입을 다물었다. 그가 자신을 위협하려는 의도로 메리를 찾아간 것이 아니라는 것, 당연히 모르지 않았다. 하지만 그게 훨씬 더 골치 아프단 말이야. 차라리 협박하려고 찾아가는 거였다면 팀에게 전화해서 사건 접수나 하면 그만이지만. 쥬드는 나오는 한숨을 참으려고 노력하지 않았다. 휴대폰 너머에서 메리가 밝다고 평가했던 웃음이 흘러나왔다. 

[몇 가지 이야기를 들었어요.] 

“아아, 그러세요. 그래서 결론은?” 

[난 역시 당신이 좋아요.] 

간단한 감상이었고, 쥬드는 탁 맥이 풀리고 말았다. 

“우와, 암울한 결론인걸.” 

[아하핫, 그래요? 아, 그리고 아마 당신도 기억하지 못할 것 같은 이야기도 들었는데 말이죠.] 

“나도 기억하지 못할 이야기? 뭐야, 그게. 나라고 거기서 일을 전부 다 기억하는 건 아니라고. 어떤 건데?” 

[혹시 제니와 토비라는 이름 알아요?] 

제니와 토비? 쥬드가 의아하게 눈썹을 찡그렸다. 당장 떠오르는 것이 없었고, 쥬드는 내키지 않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모르겠는데, 그건 왜?” 

[언젠가 잠꼬대하면서 부른 이름이라던데요. 메리 선생님이 물어도 모르는 이름이라고 했다면서요? 선생님이 기억하고 있더라구요.] 

“그래.......? 난 기억나는 게 없는데. 기억력도 좋으시네, 이제 연세도 꽤 있으실 텐데.” 

[그래도 아직 정정하고 좋은 분이에요. 굉장히 많이 걱정하셨어요, 여러모로.] 

쥬드의 얼굴에 쓴웃음이 떠올랐다. 잠시 입매를 올려 웃는 것 같지 않게 웃던 쥬드는 탁 한숨을 쉬면서 뒷머리를 헤집었다. 

“뭐, 그렇지. 좋은 분이지.......” 

[어때요, 이번 30주년 행사 사흘 뒤에 있다면서요? 하루 사정 얘기하고 와 보는 건?] 

쥬드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선생님의 전화가 있었다고는 해도 갈 마음도 이유도 찾을 수 없었다. 가 봐야 이제는 대하기 어색할 정도로 커버린 친구들이나 몇 보게 될 것이고, 역시 어색한 인사 몇 마디 나누다가 근황을 왁자하게 떠들면서 맥주나 한 잔 하게 되겠지. 그다지 자발적으로 끼고 싶은 상황은 아니었다. 

“아니, 됐어. 별로 안 내켜.” 

[-정말 올 마음 없어요?] 

앨빈의 목소리에는 단순한 물음 이상의 것이 섞여 있었다. 뭐지, 이 느낌은? 쥬드는 의심스럽게 미간을 좁히면서 휴대폰을 다른 손으로 바꿔 들었다. 

“별로 없다니까. 왜?” 

[나는 갈 마음이 있거든요.] 

간결한 대답에 쥬드는 잠시 앉은 자세 그대로 굳었다. 쥬드가 적당한 말을 생각해 다시 입을 열기도 전에 앨빈의 차분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물론, 당신이 온다면.] 

“......그러니까, 너.......사람들 꽤 모일 그 자리에.......오겠다는 거냐?” 

[이런, 나에게도 그들에게도 위험한 짓은 하지 않아요. 당신에게는 더더욱. 그러니 걱정하지 않아도 돼요.] 

“거길 왜 오겠다는 건데? 웨인벡 고아원이 너한테 무슨 의미가 있어서?” 

약간의 당혹이 섞인 목소리에 돌아온 것은 웃음 섞인 목소리였다. 

[모른다고 하지 말아요. 그 고아원이 아니라 당신에게 의미가 있는 게 당연하잖아요.] 

“그건.......” 

[전날 다시 전화할게요, 그 때 대답해줘도 돼요. 부담가질 필요는 없다.......고 말하고 싶지만, 글쎄요. 나는 당신이 왔으면 좋겠다는 걸 부인할 수는 없군요. 그것도 꽤 절실하게.] 

고요한 목소리는 잠시 간극을 두었다. 잠깐의 정적이 찾아들었다. 쥬드가 눈을 감고 희미하게 저릿한 관자놀이를 손으로 누르기 직전, 평소와 달리 조금 열이 배인 목소리가 수화기 너머에서 낮고 짧게 새어나왔다. 

[-보고 싶어요.] 

갈 수 있을 확률은 아마도 낮을 거라고 대답하려던 쥬드가 말을 삼켰다. 도망칠 길을 찾는 것처럼 이리저리 아파트 안을 돌아다니던 시선이 이내 아래를 보고 고정되었을 때, 작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아직은, 확답은, 못해.” 

[네, 이틀 뒤에 물어볼 테니까. 그럼, 그 때 다시 통화해요. 잘 자요, 이만 끊을게요.] 

철컥, 뚜-뚜-. 

전화로 하는 대화의 종말을 알리는 소리가 건조하게 귀를 때렸다. 잠깐 동안 휴대폰을 귀에서 떼지 못하고 멍하게 아래를 바라보던 쥬드는, 곧 짙은 한숨과 함께 휴대폰을 테이블 위에 내던지듯 올려놓았다. 사흘 뒤의 웨인벡 고아원 30주년 기념행사. 갈 생각 따위는 애초에 눈곱만치도 없었다. 

“젠장.......” 

쥬드는 무엇을 향한 욕설인지 스스로도 모를 말을 뱉으면서 소파에 길게 몸을 눕혔다. 쿠션에 머리를 대고 팔을 들어 형광등 불빛을 가리니 조금 편안해졌다. 잠시 숨과 감정을 동시에 고르던 쥬드는 방금 전 들었던 이름을 작게 읊조렸다. 

“......제니와 토비, 라.......” 

눈 안쪽이 희미하게 쑤셨다. 당장 떠오르지 않는 이름이었지만 이상하게도 기분만이 묘하게 나빠졌다. 어릴 때 나를 괴롭힌 골목대장들 이름 아니야? 실없는 생각에 한 번 픽 웃고, 쥬드는 다시 길게 숨을 내쉬었다. 

-보고 싶어요. 

몸 깊숙한 곳에서 이름붙일 수 없는 저림이 둔하게 울려나왔다. 보고 싶다니, 그게 범죄자가 형사에게 할 말이던가. 그것도 자신을 잡아넣은 형사에게. 

하지만 당장 No, 라고 대답하지 못했잖아. 스스로 가진 의문에 떠오른 대답은 그다지 희망적이지 않았다. 슬쩍 팔을 들어 휴대폰을 바라본 쥬드의 얼굴은 밝지 않았다. 방금 나눴던 대화뿐 아니라 지금 아파트 불을 끄기 위해 일어나기가 너무나 귀찮다는 것이 별로 즐겁게 다가오지 않은 탓이었다. 

결국 불을 끄지 않은 채 소파에서 잠든 그날 밤, 쥬드는 내용이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 악몽 때문에 밤이 모두 지나가는 동안 네 번씩이나 소스라치며 일어나야 했다. 

        *        *        *

추운 날이었다. 뿌연 입김이 간헐적인 말풍선처럼 사람들의 입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한가로운 걸음으로 걷던 쥬드는 조금 발의 속도를 높였다. 

조금 더 따뜻하게 입고 올 걸 그랬나. 쥬드는 입속으로 투덜거리다가 곧 눈앞에 차근차근 펼쳐지는 낯익고도 생소한 거리의 풍경에 눈살을 가볍게 찌푸렸다. 이 근처의 빵집이 사라진 것 같은데. 저기에 있던 서점도 어디로 옮겼는지 카페로 바뀌어 있고. 굳이 꺼내려 하지 않았던 유년의 이미지들이 머릿속에 반사적으로 착착 떠올랐다. 

그리 유쾌한 일은 아니었다. 

“......하-저쪽인가.......” 

주머니에 양손을 푹 찔러 넣고 걷던 금발의 형사는, 주위를 살피기 위해 잠깐 걸음을 늦추고 두리번거렸다. 고아원을 나온 지 꽤 되었다고는 해도 아직 방향마저 잊을 정도로 기억의 색이 바래지지는 않았다. 곧 쥬드의 시야에 익숙한 녹색 지붕이 들어왔다. 잠깐 그 지붕을 표정 없는 얼굴로 바라보다가, 쥬드는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나, 이거 후회하지 않을 수 있을까나.......” 

피식 웃듯이 말한 쥬드는 곧 짜증스럽게 손을 뻗어 뒷머리를 헤집었다. 후회하면 어쩔 거야, 이미 직장에 말까지 다 해놓고 나왔는데. 하품을 한 번 크게 한 금발의 남자는 조금 붉어진 눈가를 쓱 훔치고 녹색 지붕의 고아원을 향했다. 

‘웨인벡 고아원 설립 30주년을 축하합니다.’ 쥬드는 고아원 입구 앞에서 고개를 들어 울긋불긋한 글자로 쓰인 현수막을 바라보았다. 고아원 아이들에게 쓰게 시키기라도 했는지 글씨는 조금씩 삐뚤거렸다. 추운 날씨 속에 조금 을씨년스럽게 흔들리는 원색의 풍선들과 현수막을 가만히 보던 쥬드는 곧 짧게 한숨짓고 고아원 앞마당으로 들어섰다. 밖에는 몇 명의 사람들이 오가며 분주하게 뭔가를 옮기고 있었지만 그들은 쥬드에게 크게 신경 쓰는 눈치가 아니었다. 행사 도우미들이라도 되는 걸까. 그들을 힐끗 일별한 쥬드는, 천천히 걸음을 옮겨 닫힌 문 앞으로 다가갔다. 안에서 희미하게 왁자한 소리가 들려왔다. 이미 안에 모일 사람은 대강 모인 모양이었다. 문을 두드리려던 손은 잠시 주저했다. 

“......쳇.” 

짧게 못마땅한 소리를 낸 쥬드는 곧 망설임 없이 손을 치켜들었다. 오래된 나무문을 두들기기 위해 가볍게 쥔 주먹을 내리치려는 순간, 갑자기 쥬드의 앞에서 벌컥 문이 열렸다. 

“꺅!” 

갑작스럽게 쥬드와 마주친 여자가 작게 비명을 지르며 물러났다. 역시 조금 놀란 쥬드가 물러난 그녀를 멀뚱멀뚱 바라보는데, 뒤로 물러났던 여자는 이내 조심스럽게 다시 문간으로 다가왔다. 긴 갈색 머리를 뒤로 묶은 아담한 체구의 여인이었다. 조금 색이 바랜 보라색 정장을 차려입은 그녀는 오래된 책을 뒤지는 사람처럼 애매한 얼굴을 하고 쥬드를 유심히 바라보았다. 어색한 공기가 몇 초간 지속되는 것에 조금 답답해진 쥬드가 들어가게 좀 비켜 주시면 안 되겠냐고 말하려던 때, 여자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입을 벌렸다. 덩달아 쥬드의 눈까지 동그래졌다. 목소리는 경악 비슷한 것에 차 있었다. 

“이게 누구야, 쥬드! 쥬드잖아! 쥬드 맞지?” 

“에? 예, 그런데요.” 

“나 케이트야, 케이트! 케이트 하트만! 기억 못 해? 너랑 자주 놀았잖아. 벌써 10년도 넘은 일이긴 하지만. 왜, 잭이랑 걔들이 항상 키티, 키티 하고 놀렸던 여자애, 기억 안 나?” 

잠시 고개를 기웃하던 쥬드의 얼굴에도 곧 이해의 빛이 번졌다. 키티, 케이트 하트만. 예전에는 그리 길지 않았던 갈색 머리를 양갈래로 묶고 다닌 여자아이였다. 약간 우울한 인상을 하고 있기는 했지만 전반적으로 얌전하고 순한 아이였기 때문에 고아원 선생님들에게 꽤 사랑받았던 것 같기도 했다. 쥬드가 “아, 케이트!” 하고 외치며 웃자 그녀는 훌쩍 큰 어른의 모습으로 쥬드를 향해 환하게 미소했다. 

“응, 정말 오랜만이다, 이게 정말 얼마만이야? 그 동안 어떻게 지냈어? 연락하려고 해도 원장 선생님도 네 번호 모르고. 죽었나 살았나 걱정했잖아.” 

“응, 뭐 그럭저럭.” 

“잠깐만, 딴 애들한테도 너 왔다고 해야지. 불편해할 거 없어, 거의 다 네가 아는 사람들만 왔으니까. 여기! 잠깐 여기들 봐!” 

짜랑, 맑은 외침이 울렸다. 파티를 위해서인지 가구들을 모두 옮겨 널찍해진 1층에 시끌시끌 모여 있던 수십의 어른과 아이들이 일순 말을 멈추고 케이트 쪽을 바라보았다. 

“여기 봐, 누가 왔는지 보라니까?” 

“누구.......어머, 세상에, 쥬드잖아?” 

“뭐, 쥬드?” 

“우와-살아 있었네!” 

여기저기서 쥬드의 이름이 터져 나왔다. 반갑고도 놀라운 목소리들 틈으로 반백의 중년 부인이 황황히 걸어 나왔다. 흐릿해진 눈동자에는 한가득 눈물이 고여 있었다. 

“오, 쥬드! 쥬드! 대체 얼마만이냐, 어디, 잘 지냈는지 얼굴 한 번 보자.” 

“아, 하하, 메리 선생님. 건강해 보이네요. 저 잘 지내요, 총 들고 뛰어다니다 온 거긴 하지만 말이죠.” 

“얘도 참. 그래, 어서 들어와라. 차린 건 별로 없지만 오랜만에 만난 친구들이랑 얘기라도 재미있게 하다 가거라. 나는 지금 아이들 때문에 조금 바쁘니 좀 있다가 만나서 얘기하자. 자, 어서 들어와.” 

메리가 쥬드의 어깨를 쓸며 안쪽으로 당겼다. 바깥과 달리 따뜻한 안의 공기는 여러 음식 냄새로 가득 차 있었다. 메리가 차린 것이 없다고 말하는 것에 비해서 고아원 1층에 차려진 내부 장식은 꽤나 화려했다. 뷔페라도 부른 것 같은 음식들이었고, 몇 명의 사람들이 바이올린까지 연주하고 있었다. 잠시 그 광경을 생소하게 바라보는 쥬드의 옆으로 케이트가 얼른 다가왔다. 

“왜, 놀랐어? 생각보다 꽤 괜찮지?” 

“응? 아, 그렇네. 누가 돈 좀 댔나 봐?” 

“으응. 로지가 좀 많이 냈다나 봐. 이번 행사도 사실 로지가 이 고아원에 돈 기부하면서 치르는 부록 행사 같은 거래.” 

“로지? 로지 맥네일? 그 항상 이상한 책 보면서 다니던 애?” 

케이트가 고개를 끄덕였다. 웃는 얼굴이었지만 그다지 달가운 기색은 아니었다. 

“응, 놀랍지? 자수성가했대. 사업가로 대변신해서 지금 매출도 꽤 된다더라. 저쪽에서 이 이 고아원 출신 검사 하나랑 얘기하는 것 같던데.” 

“그래?” 

“여-쥬드! 간만이다, 응? 난 중학교 이후로 너 얼굴 본 기억이 없는데.” 

무성의하게 고개를 끄덕끄덕하던 쥬드의 귀에 걸쭉한 목소리가 날아들었다. 퍼뜩 고개를 돌리자 떡 벌어진 체격의 남자가 성큼성큼 이편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잠시 눈을 가늘게 뜨고 기억을 뒤지던 쥬드의 입에서 곧 하나의 이름이 흘러나왔다. 

“.......잭? 잭 로이튼?” 

“그래, 임마. 짜식, 그 동안 모임이란 모임엔 코빼기도 안 비치더니 이번엔 무슨 바람이 불어서 왔냐? 난 또 어릴 때 내가 하도 괴롭혀서 나오기 싫은 줄 알았지.” 

거칠었지만 친근한 구석이 있는 목소리였다. 잭이 큼직한 주먹을 내밀어 쥬드의 어깨를 툭 쳤다. 그 어깨를 마주 세지 않게 치면서 쥬드는 씩 웃었다. 

“이젠 네가 괴롭히면 내가 잡아갈 수 있게 돼서 왔다, 왜?” 

“응? 무슨 소리야, 잡아갈 수 있게 되다니? 무슨 일 하는데? 혹시 너.......경찰?” 

“빙고. 뉴욕 경찰서에 근무하는 중. 지금도 뭐빠지게 뛰어다니다 왔다는 말씀.” 

케이트와 잭의 얼굴에 놀라움의 빛이 떠올랐다. 서로를 멍하니 바라보던 그들은 곧 헛웃음을 터뜨리며 쥬드에게 시선을 돌렸다. 

“정말이야? 안 어울려!” 

“엥? 뭐야, 케이트, 안 어울린다니. 나 상처받아.” 

“자, 잠깐, 잠깐. 그럼 얼마 전에 앨빈 존스 잡았다고 신문에 이름 떴던 쥬드라는 형사가 설마 너였어?” 

쥬드가 어깨를 으쓱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잡았다가 놓친’ 이라는 표현이 맞겠지만. 

“응, 뭐 일단은. 내가 싫다고 해서 사진은 못 실었지만, 그렇게 됐어.” 

“세상에, 위화감 들어!” 

벌린 입을 손으로 가리기까지 하는 케이트를 영문 모를 눈으로 바라보는 쥬드의 옆에서 잭이 키득거리며 웃었다. 

“우리 부인 말이 맞아, 쥬드. 넌 경찰이 단속하면 무지하게 귀찮아할 인간형으로 보이지, 성실하게 경찰 옷 입고 나쁜 놈들 쫓아다닐 상으로 보이진 않는단 말야.” 

“어, 부인?” 

어리둥절한 쥬드의 앞에서, 잭과 케이트가 조금 쑥스럽게 웃으며 서로에게 가까이 다가붙었다. 잭이 자신보다 머리 한 개 반은 작은 케이트의 어깨를 감싸 안으며 활짝 웃었다. 어린 시절 고아원 골목대장 격의 악동었던 남자라고는 생각하기 힘들 정도로 부드러운 웃음이었다. 걸걸한 목소리는 누그러져 있었다. 

“응, 우리 결혼했어. 이제 이 년쯤 됐어.” 

“같은 중학교에 같은 고등학교까지 다니는 동안 사귀게 돼서.......헷, 이제 나 케이트 로이튼이야. 하트만이 아니라.” 

“아아, 그렇구나. 축하해, 많이 늦었지만.” 

“-쥬드? 쥬드 그린?” 

약간 얼굴을 붉힌 부부가 고맙다고 인사하는 것과 동시에, 쥬드의 뒤편에서 날카롭게 재단된 목소리가 울렸다. 케이트와 잭의 얼굴이 순간 살짝 굳는 것을 확인하고, 쥬드는 고개를 돌렸다. 키가 껑충하니 큰 다부진 몸의 남자가 왜소한 체구의 남자와 함께 쥬드 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쥬드의 얼굴에 의도 없는 웃음이 떠올랐다. 

“아, 로지. 라일도 있네? 같이 일하나 봐?” 

“아, 안녕, 쥬드.” 

얇은 금테 안경을 낀 신경질적인 인상의 남자가 어색하게 한 번 웃었다. 로지는 한쪽 입매를 올려 비식 웃으며 라일을 슬쩍 돌아보고 입을 열었다. 

“음. 어쩌다 보니 라일이 도와주고 있지.......그나저나, 너 신문에 나온 거 봤었어. 앨빈 존스를 잡았었다며?” 

“뭐. 놓쳤지만.” 

말쑥한 양복 소매를 만지작거리며, 쥬드의 바로 앞에 멈춰선 로지는 씩 웃었다. 계산적인 웃음이었고, 그는 곧 쥬드의 어깨 근처를 토닥토닥 두드리며 은근한 어조로 건넸다. 

“그래, 그래도 큰 일 했어. 어때, 이번 우리 회사 큰 계약 건 하나 체결해서 축하 파티가 있을 예정인데 와주지 않을래? 앨빈 존스를 잡았던 형사가 온다고 하면 상대 회사 사람들이나 우리 쪽 사람들이나 반갑게 맞아줄 거고.” 

그리고 나를 데려온 네 이름도 알려질 테고, 그 회사의 축하 파티는 조금 더 유명해질 테고? 속으로 짧게 중얼거린 쥬드는 곧 모호하게 웃으며 고개를 갸웃했다. 

“글쎄, 봐야 알겠는데. 앨빈 존스 잡았다는 것도 뭐, 순전히 운이었고. 나 아직 그리 높은 직급도 아니고 해서, 매일매일 바쁘게 뛰는 게 일이라서 말이지. 뉴욕 범죄율 잘 알잖아.” 

“그래도 한 번 생각해봐 줘. 자, 여기 내 명함. 올 마음 있으면 언제든지 연락하고.” 

쥬드의 옷 주머니에 얄팍한 명함 하나를 끼워 넣은 로지가 웃음을 지우지 않은 채 쥬드의 등을 친근하게 툭툭 쳤다. 

“별로 준비한 건 없지만 천천히 있다 가. 그럼 난 만나볼 사람이 있어서 그만.” 

“아, 응. 나중에 봐.” 

“라일, 그 사람들 명단 좀 다시 확인해.” 

“아, 네.” 

바쁘게 멀어져 가는 그 뒷모습을 바라보던 쥬드의 귓가로 그리 곱지 않은 투의 목소리가 들렸다. 잭이 옆 테이블에 거칠게 칵테일 잔을 내려놓으며 볼멘소리를 뱉어냈다. 

“젠장, 저놈만 보면 배알이 꼴려요, 배알이.” 

“잭, 그만 해. 쥬드도 있는데......” 

“왜, 쥬드가 있으면 뭐 어때서? 야, 쥬드. 웬만하면 저놈하곤 상종하지 마라. 이 고아원에서 제놈이 제일 성공한 사람이라고 아주 고개에 힘이 빳빳하게 들어갔다니까. 웃기지도 않아. 다 같은 고아원 출신에 친하게 지내면 됐지 이젠 아주 사람도 가려가며 상대하려 들어요.” 

“잭, 그만하라니까.” 

“이번 30주년 축하 파티니 뭐니 하고 열린 것도 다 저놈이 자기 자선사업가인 양 주위에 생색내려고 그런 거라는 소문 파다해. 자기 회사 사람들한테 잘 보이고 싶다는 거지. 그래서 지금 여기 고아원이랑은 상관도 없는 회사 놈들 몇몇 와 있는 거 알아? 내 참, 기가 막혀서. 여기가 무슨 자기 승진하려고 써먹는 정치판이냐?” 

“잭.” 

케이트가 잭의 팔을 잡아끌었다. 뿔난 눈으로 로지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잭은 곧 탁 한숨을 쉬며 팔을 잡은 케이트의 손을 마주잡았다. 아내를 바라보는 그의 눈이 곧 부드럽게 휘어지며 체념조의 웃음을 그렸다. 

“그래, 뭐 이왕 온 거. 좋게좋게 생각하지. 핫, 이렇게 죽은 줄 알았던 쥬드 얼굴 다시 본 것만도 어디야? 즐기다 가야지, 안 그래?” 

“응, 잭. 얼굴 붉히지 말고 있자. 로지가 잘 살면 그걸로 됐잖아. 응? 우린 우리, 로지는 로지. 쥬드, 신경 쓰지 말고 편하게 있어. 아, 혹시 같이 온다거나 하는 사람은 없었어? 꼭 본인만 아니라 친구나 연인이랑 같이 와도 된다고 초대장에 적혀 있었는데.” 

쥬드의 얼굴에 약간 쓴 기운이 배어났다. 어정쩡하게 어깨를 으쓱하는 쥬드를 바라보는 케이트의 시선은 의문에 차 있었다. 그 애매한 태도는 뭐야?-하고 묻는 그녀의 시선에 쥬드가 대충 대답하려는 찰나, 조용히 문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찬바람이 순간 선뜩하게 뒷목을 휘감았다. 문간을 보지 않고도 조용한 발소리의 주인이 누구인지 짐작하는 것은 쥬드에게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었고, 그래서 쥬드는 조용히 한숨을 쉬었다. 

곧 고개를 돌린 시선이 옅은 청회색 눈동자와 마주쳤다. 옅은 갈색 머리칼에 뿔테 안경을 쓴 지적인 인상의 남자는 반가운 웃음과 함께 손을 들었다. 

“-아, 쥬드. 미안해요, 조금 늦었죠?” 

케이트와 잭의 시선이 문간으로 돌아갔다. 쥬드가 쯧, 혀를 차며 이쪽으로 다가오는 그를 향해 툭 무심한 어조로 던졌다. 

“꼭 올 필요 없었는데.” 

“무슨 소리에요, 와도 된다고 한 건 쥬드잖아요? 원장 선생님하고도 얘기했었는데, 와 봐야죠, 안 그래도 비번이고. 아, 이 분들은 친구?” 

“에? 아, 네. 케이트 로이튼이에요. 쥬드의.......” 

“직장 동료에요. 파트너라고 하면 되겠네요.” 

내 파트너는 진갈색 머리의 마음 좋은 나이스 가이지, 이런 변신한 여우같은 녀석이 아니란 말이야. 속으로 잠깐 툴툴거리는 쥬드의 속을 알 리 없었던 잭이 반갑게 웃으며 그에게 악수를 청했다. 

“야, 이거 쥬드랑 수준 차이 나 보이는 분이 파트너네요. 어이, 쥬드. 어떻게 된 거야?” 

“뭐어야, 수준 차이라니.” 

“아니, 무슨 의대나 로스쿨 나온 것 같은 사람이 네 파트너라고 하니까 그렇지. 이름이......?” 

“조안, 조안 넬비스라고 합니다. 그냥 조안이라고 하면 돼요.” 

“예, 반갑습니다. 잭 로이튼, 어릴 때 쥬드 무지하게 괴롭혔던 녀석인데, 이 녀석 무슨 외상후 증후군이나 트라우마 같은 거 없어요?” 

“재애애액.” 

쥬드가 팔꿈치로 잭의 옆구리를 푹 찍었다. 장난스럽게 소리 내어 웃는 잭을 향해 쥬드가 마주 웃으며 말했다. 

“머리 좀 맞고 놀림당하는 걸로 외상 후 증후군 올 정도면 못 견딜 생활 하고 있으니 염려 마시지. 매일 피칠 한 현장 뛰어다니는데 그런 유리심장으로 어떻게 버텨?” 

“아아, 그랬지. 이거 원, 앞으론 이 녀석 앞에서 욕도 제대로 못하겠네.” 

“쥬드.” 

조용한 목소리가 이름을 불렀다. 퍼뜩 돌아본 시선 끝에는 어쩐지 조금 초조한 기색의 얼굴이 있었다. -초조한 기색? 낯선 것이었다. 쥬드의 얼굴에서 조금 웃음이 사라졌다. 연갈색 머리의 청년은 쥬드에게 몸을 가까이 기울여 낮게-그러나 잭과 케이트에게는 분명히 들릴 정도의 목소리로-소근거렸다. 

“잠깐 좀 볼래요? 어제 우리가 맡았던 케이스, 새로운 사실 나온 게 좀 있어서. 여기선 좀 그런데.” 

“어? 아, 어.” 

“이런, 여기 와서까지 일이야? 큰일이네.” 

잭이 안쓰러운 듯 얼굴을 찌푸렸다. 조안이 빙긋 미소했다. 

“죄송해요, 워낙 뉴욕 경찰이란 게 눈코 뜰 새 없이 바빠서요. 요즘 이직률 계속 높아지고 있는 게 NYPD잖아요?” 

“아니, 뭐라고 하는 게 아니라요. 아, 조용히 얘기할 곳 필요하면 2층에 가 보지? 애들도 여기 내려와 있고 하니까 사람 거의 없을 텐데. 거기 있는 작은 응접실도 비어 있을걸?” 

“응, 아무래도 피투성이 얘기를 파티 자리에서 나누기도 뭣하니까. 잠깐 다녀올게.” 

짧은 시선이 공중에서 마주쳤다. 청회색 눈동자가 웃는 듯 마는 듯 슬쩍 휘어졌다. 쥬드는 잠깐 들었던 잔을 테이블에 올려놓고 천천히 2층 계단을 향했다. 

2층은 조용했다. 아래층의 소리가 미약하게 들려오기는 했지만 그뿐이었다. 끼익, 끼익. 발이 오랜 목조 건물의 복도를 밟을 때마다 미약한 삐걱거림이 귀를 자극했다. 조그마한 응접실에 들어가기 전, 길고 구불구불한 복도의 끝에서 쥬드는 발을 멈추고 돌아섰다. 세 걸음쯤 뒤에서 멈춘 앨빈은 희뿌옇게 들어오는 햇빛 속에 서 있었다. 차분한 울림의 목소리가 먼저 울렸다. 

“-오랜만이네요.” 

“그러네.” 

“고마워요, 와 줘서.” 

쥬드는 조금 못마땅하게 시선을 돌렸다. 어젯밤, 약속대로 휴대폰은 어김없이 울렸고 전화를 받은 쥬드가 토한 말은 간단했다. 

“갈 거다.” 그 한 마디만 하고 툭 휴대폰을 닫았지만 전화는 다시 걸려오지 않았다. 

앨빈이 웃었다. 1층에서의 웃음과는 사뭇 다른 표정이었다. 

“왜 와 줄 생각이 들었냐고 물으면-.” 

“-화낼 거다.” 

“그렇겠죠.” 

가벼운 웃음이 공기를 울렸다. 앨빈이 한 걸음 다가왔다. 움찔, 쥬드가 몸을 물렸다. 발이 잠시 멎었다. 목소리는 여전히 부드러웠다. 

“반갑다고 안아도 화낼 건가요?” 

대답은 나오지 않았다. 가만히 입을 다문 무표정한 얼굴을 뭐라고 받아들였는지, 앨빈은 천천히 발을 옮겨 쥬드의 앞에 섰다. 답지 않게 긴장한 것처럼 딱딱한 동작으로 올라온 팔이 조금은 성급할 정도로 쥬드를 끌어안았다. 알 수 없는 비누인지 샴푸 냄새 같은 것이 가볍게 코를 스쳤다. 희미한 한숨 비슷한 호흡이 터져 나왔다. 목덜미를 간질이는 연갈색 머리는 분명 가발일 테지. 아니, 염색일까? 귓가로 조근조근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편지, 전화, 소식, 가끔 현장에서 엇갈리는 것.......그것만으로도 충분했는데. 그것으로 잠재울 수 있을 정도의 감정이라고 생각했는데. 실제로도 오랫동안 그랬는데. 떨어져 있어도, 떠올리는 것만으로 갈증이 사라졌었는데.” 

“그런데.” 

“이젠 그게 수월하게 되지 않아요. 간만에 얼굴 맞대는 게 이렇게 반가울 줄은 몰랐어요. 난감하네요.......이런 건 처음이라서.” 

“첫사랑은 안 이루어진댄다. 세상에, 다행이지 뭐냐.” 

앨빈이 짧게 웃었다. 안은 손은 금방 떨어지지 않았다. 지금 전해지는 온기가 옷감에서 나오는 것인지 몸에서 나오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별 굴곡 없는 목소리가 쥬드의 입술 사이로 새어나왔다. 

“그 난감함이라는 게 심각해지면, 나를 죽일 수도 있을 것 같냐?” 

잠깐 말이 없었다. 잠시 뒤 흘러나온 앨빈의 목소리 역시 평탄했다. 

“지금으로선 아닐 거라고 생각해요.” 

“앞으로 어떻게 될지 확신은 못하겠다?” 

“그건 쥬드도 마찬가지잖아요? 미래의 지도를 모두 그려 놓고 생활하는 사람은 드문 법이죠. 그린다 해도 그 길만 따라간다는 보장을 시간이 해 주던가요.” 

목소리는 희미한 웃음을 품고 있었다. 쥬드는 이내 픽 웃고 말았다. 

“그래, 그렇긴 하다.” 

“오늘 왜 와줬어요?” 

허를 찌르는 질문이 여상스럽게 날아들었다. 조금 노곤한 기분으로 눈을 감으면서, 쥬드는 지나가는 투로 대답했다. 

“모르겠다. 나는 내가 하는 행동에 이유의 지도를 모두 그려 놓고 행동하는 사람은 아니거든.” 

“나 때문이었어요?” 

“......그리고 나는 악취미적인 질문으로 용의자 아닌 사람을 괴롭히는 취미를 가진 사람도 아니지. 이럴 거면 떨어져.” 

어깨를 꾹 밀어내는 손길에 명랑한 웃음이 터져 나왔다. 장난치는 것처럼 더 꽉 쥬드의 등이며 어깨를 끌어안던 앨빈이 나른한 기색이 배인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들어가서 얘기할까요? 응접실, 비어 있다고 했잖아요.” 

“싫어.” 

단호한 목소리가 앨빈의 말꼬리를 자를 것처럼 격하게 튀어나왔다. 앨빈이 문득 고개를 들어 쥬드를 바라보았다. 쥬드는 조금 찡그린 얼굴로 천장을 향했다. 

“왜 그래요? 무슨 일이 있었어요?” 

“아니, 응접실은 싫어.” 

“왜요, 여기서 무슨 일이라도 있었어요? 그 잭이라는 사람한테 괴롭힘 당했던 곳이 여기에요?” 

“아니.......그것보다는, 여기 있는 게 좀.” 

말이 조금 머뭇거렸다. 앨빈의 눈이 대답을 요구하고 있었다. 몇 번 쳇쳇거리며 발굽을 딱딱 바닥에 두드리던 쥬드는 곧 체념의 한숨을 길게 쉬며 말했다. 

“여기 있는 벽난로가 싫어.” 

“벽난로요?” 

“응. 여기 큰 벽난로가 하나 있는데, 그것만 보면 기분이 나빠진단 말이야. 그래서 여기 지낼 때도 응접실 근처엔 되도록 안 갔어. 놀림 받기 싫어서 애들한텐 말한 적 없지만.” 

“저런, 벽난로에서 괴물이 튀어나올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던 건 아니죠?” 

“모르겠어.” 

농담처럼 건넨 말에 쥬드의 얼굴이 심각하게 찌푸려지자 앨빈의 얼굴에서 미소가 조금 옅어졌다. 쥬드의 눈은 먼 산을 보는 것처럼 조금 초점이 흩어져 있었다. 

“모르겠어.......유령인지 도깨빈지 귀신인지. 뭔가 안 좋은 게 나와 버릴 것 같았어. 이 고아원에서 제일 싫어했던 장소가 응접실 벽난로 옆이었어.” 

“.......그래요? 이유, 생각해 본 적은 없어요?” 

“그냥 다가가지 않았지. 불에 다가가 봤자 데기밖에 더 하겠냐. 어릴 때 벽난로 근처에서 무슨 사고라도 있었나 보다 했지.” 

쥬드가 어깨를 으쓱하는데, 아래에서 누군가가 계단을 밟고 올라오는 소리가 들렸다. 끼익, 끼익, 조금씩 가까워지는 발소리에 쥬드가 얼른 앨빈의 팔을 풀었다. 잠시 뒤 저편 복도 모퉁이로 나타난 인영에 쥬드는 풀썩 웃었다. 줄무늬 들어간 검은 양복을 말끔하게 차려 입은 남자는 이 파티의 주최자였다. 

“로지, 무슨 일이야?” 

“아아, 잠시 응접실에서 라일과 일로 할 이야기가 있어서. 옆의 분은.......?” 

“아, 동료야, 직장 동료. 조안 넬비스. 조안, 저쪽은 로지 맥네일. 그 옆은 라일 트레이스. 로지가 오늘 파티 자금 대부분을 대 준 친구.” 

“안녕하세요, 그냥 조안이라고 부르면 됩니다.” 

“아, 예. 처음 뵙겠습니다. 2층엔 어쩐 일로? 아래에서 즐기지 않고.” 

“잠깐 우리도 일로 할 얘기가 있어서 왔었어. 자, 그럼 우린 내려갈 테니까 할 얘기들 해.” 

얇은 금테 안경의 왜소한 남자, 라일이 굽신거리듯 앨빈에게 고개 숙여 인사했다. 꼬이는 일이 있었는지 좁은 이마는 땀으로 번쩍거리고 있었다. 입술을 자꾸 핥으며 손바닥을 비비는 모양이 그리 편안해 보이지는 않았다. 로지의 얼굴 역시 딱딱하게 굳어 깊은 주름이 패여 있었다. 이 나이부터 미간에 주름 생기면 늙어서 고생일 텐데. 속내로만 짧게 중얼거린 쥬드는 곧 그들을 지나쳐 1층으로 내려왔다. 등 뒤에서 따라오는 앨빈이, 조용히 입매를 올려 조롱하듯 웃는 것을 언뜻 본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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