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27 12 . 하인드 팩토리 버레드 증후군 . =========================
....여기는 어디냐. 아. 병원이네.
"이상이 없다는게 어떻게 된겁니까!! 벌써 내가 본것만 두번째인데!!"
확실히 자주 기절하는게 좋은 현상은 아니지. 다만...
"머리울려, 짖지마."
내 두통의 원인인 네가 걱정해주면 가증 그 자체인데...?
"아! 일어났어?"
얼른 다가와서 내 이마에 손을 올리고 안색을 살피는 낮선 표정을 보니 또다시 토기가 치밀었다.
"CT라도 한번 찍을까?"
"...뭔. 됐어. 멀쩡해."
"뭐가!!"
'진짜 웃겼어, 서유성.'
"....집에 갈래."
"뭐가 멀쩡한데!! 너 기절한게 이게 몇번째인지 알아!?"
"두번째."
"그걸 아는 녀석이 그래!?"
응, 그래.
사실대로라면 별로 상관 없거든. 얼른 집에가서 쉬고싶어.
"지금은 집에 갈래."
"너 입원해야.."
니 옆에 있으면 자꾸 소리가 들려서 미치겠거든? 제발 좀 놔줘.
자리에 일어나서 벗겨둔 구두를 찾아 신자, 내 팔을 잡아 도로 앉힌다.
"입원 수속 밟을게."
인상을 찡그리고 팔을 뿌리쳤다.
"무슨 자격으로? 지금 나 가장 피곤하게 하는게 너야. 좀 둬 줄래?"
"....."
"미안. 간다."
굽이 높은 구두라 불편했지만, 나는 비틀거리면서 걸음을 옮겼다. 가방 안에 들어있는 핸드폰으로 하영이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드물게도 받지 않았다. 아무래도 추석 이후에 가족들끼리 어디를 간 모양이다. 하긴. 오늘은 미용실가서 머리 감았다.
집에서 가까운 큰 병원이 아니라 도시 외곽쪽에 있는 대학로 근처 병원이었다. 아.. 버스타고도 집까지 40분은 걸리겠는데.
선배한테 부탁할까. 하지만 지금은 주무실텐데.. 택시를 잡아탈까.
....걸어갈까. 아니 아무리 귀찮음을 느껴도 이건 아니다. 그 거리를 걸어가다니 미친짓이었다.
버스정류장으로 천천히 걸어가 노선을 살폈다. 한번에 가는것도 없네.. 하는 수 없지. 피곤하다.
버스정류장의 의자에 앉아 등의 유리에 몸을 기댔다. 영혼이 여기 없는것 같았다.
윤구는 침대 가운데 앉아 가부좌를 틀고 명상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무언가 떠오르는게 없었다. 어제부터 꼼꼼히 시도해 봤지만.. 도저히 떠오르지 않았다.
뒷조사 보고서를 받아들었지만. 영 나오는건 없다. 특히 중학생의 조사 보고서는 완전히 백지였다. 왜?
이 보고서는 별로 본적도 없는 자신의 비서와, 형 이외에는 누구도 거치지 않는다. 그런데 정보가 손봐져 있다는건..
윤구는 충전기에 뽑힌 핸드폰을 들었다.
"형, 나야. 지금 바빠? ...아니. 이따 이야기좀 했으면 해서. 저녁때 회사로 갈게, 응."
"....아. 피곤해."
사흘정도 날 샌 느낌이었다. 얼른 집에 가서 씻고 자야지. 낮 시간이라 주인이도 자고 있을거고.. 팔이랑 손은 언제 낫는담. ...응?
집 앞에 낮선 사람이 있어서 고개를 갸웃거렸다. 여기서 산지가 5년인데 별로 본적도 없는 사람이라니. 이사 왔나? 하지만 그렇다고 볼 순 없었다.
메이커는 아니지만 고급스러운 원피스와, 구두, 거기에 비싼 가방. 그리고 향수까지. 반묶음의 머리. 딱 봐도 잘 사는집 아가씨가 이런 원룸, 투룸단지에?
명품에 미친 여자라고 보기에는 얼굴색이 반딱반딱했다.
"아! 혹시 서 유성씨..?"
어라..? 나를 알아?
"아. 네. 누구.. 시죠?"
"만나뵙게되어서 반갑습니다. 강 연화라고 해요."
진 세현. 27살의 칵테일 바의 젊은 사장님은 영혼이 나간 얼굴로 무릎을 꿇고 있었다.
"아유! 여자친구는 없어?"
"얼굴 멀끔한데."
"삼촌!!! 나 저거 가져도 돼?"
"에이, 설마! 잘생기고, 능력도 있는데!! 헤어진거겠지!"
아침부터 자신의 방에 쳐들어온 친척들에, 그는 절망하고 있었다. 그리고 결국 그는 도망을 선택했다.
"어머 애! 어딜 가니!!"
"호호호 냅 둬요! 자자 얘들아 우리도 나가자."
"으응? 엄마! 나 저거... 나 저 아이언맨 마우스 가지고싶어."
"안 돼. 집에 비슷한거 많이 있잖니? 그리고 삼촌거니까, 삼촌한테 허락을 받아야지."
"그건 스파이더맨.. 으응.."
"그런데 올케는 어떤거 같애요?"
"반응 보니까. 여자는 있는거 같은데? 그러니까 맞선도 싫다고 거절했겠지."
"얼마나 참한 아가씨일려나."
"어휴! 난 저 우리집 공식 애물단지만 데려가준다면, 누구든 좋은데."
"기왕이면 참한 아가씨가 좋지요."
"난 좀 독한 아가씨가 좋은데."
"으응?"
세현은 담배를 물고 핸드폰을 뒤적였다. 추석은 다 지나갔다. 지금은 대체공휴일. 하지만.. 만날 사람이 없다. 사교성이 나쁜건 아닌데.. 명절 직후에 쳐들어갈만큼 친한사람은 또 드물었다.
핸드폰을 뒤적이다 어느 한 지점에서 손이 멈추었다. 서유성. 후배님이었다.
'담배는 끊으시죠.'
'왜?'
'솔직히 말하자면 완전 똥내나요.'
처음부터 돌직구를 날리는것이 심상치 않다고 느꼈다. 종종 건방지다고 싫어하는 이들도 있었지만. 그녀의 성격인걸 알게 된 이후로는 다들 개의치 않게 되었다. 그중에서도 특히 친근감을 가지고 다가간 이들이 있었지만.. 대부분 쿨하게 쳐냈다. 하도 궁금해서, 그 행동에 대해 물어봤다.
'왜 일부러 벽을 세우는거야?'
'그거 자의식 과잉인데요. 그냥 내가 사람 좀 귀찮은게 무슨 대수라고.. 뭐 됐고, 저는 세상 혼자 살테니까 그냥 신경쓰지 말아줄래요? 그거 다 가식으로밖에 안보여서요. 남자라는건 죄다 더럽고 유치하고 뻔뻔한 생물이지 않나요? 왜요? 누구랑 내기했는데요?'
'....뭐?'
'얼마 걸었어요? 며칠이나 걸려서 저 꼬실지? 그것도 아니면 뭐, 가지고 놀기? 어차피 나중엔 다 비웃을게 뻔한데...'
가시를 잔뜩 세운 고슴도치처럼 사람의 접근을 절대 허용하지 않는 말에, 조금 당황했었다.
'너야말로 자의식 과잉이야. 나는 그런거 한 적 없어.'
'제 알바 아니죠. 했든 안했든, 저는 저에게 접근하는 사람. 특히 남자는 다 그렇게 볼겁니다. 제가 그렇게 보겠다는데 선배가 무슨 권리로 내 생각을. 내 관점을 바꿀거죠?'
'.....'
'다시는 말 걸지 말아주세요. 그 어떤 행사에도 참가하지 않을 테니. 조별과제같은거는 그냥 제 이름 빼라고 하세요. 참가 안합니다.'
정이 뚝뚝 떨어지는 어투로 자신의 할말만 하고 가버리는 그 뒷모습이 왠지 짠한 느낌이 들어 이상했다. 영문 모를 폭언에 무시, 경멸이었지만 왠지 그 모습은 짠하다 못해. 쓸쓸하고 외로워 보였다.
그게 싫어서 가까워지려고 한건데. 왠지 그 모습이 싫어서. 왠지 외로운 모습이 어울리지 않아서.
웃을 때, 정말 보기 좋았는데. 나에게 반하게 만들려고 했는데. 내가 먼저 반해버렸다. 사랑이라는것을 무가치한 감정이라고 말하는 후배님에게 사랑한다고 말했다간 벽이 세워질까 두려워서 말하지도 못했다.
하지만 눈치빠른 후배님이니 이미 알고 있겠지.. 내 감정 정도는. 후배님은 내가 먼저 말하지 않는 이상 내버려 둘 모양이었다.
'감정은 스스로의 것 입니다. 제가 남자를 경멸하는것도, 혐오하는것도 제 사정인것 처럼요. 그러니까 제 감정은 내버려 두세요. 참견 귀찮아요.'
쓸쓸하면서도 멋지다고 생각했다. 누구도 필요하지 않다고 하는 그 홀로 선 모습이. 하지만 내가 알게 된 후배님에게 직접 들은 과거는 할말을 잃게 했다.
남에게 보이기 위해. 귀찮아서. 다 싫어서가 아니었다. 그 쓸쓸하고 슬픈 모습은. 그것은 자신을 지키기 위해 만들어진 모습이었다.
원하지 않아도, 자신이 상처받지 않기 위해서 그렇게 벽을 세우고 거부하는 것이다. 그 벽 밖의 사람이 자신에게 어떠한 해를 가하던. '어차피 너는 내 사람이 아니니까' 라고 혼자 정리 해버리며, 문을 닫아버린다.
외롭고 슬픈 사람이었다. 불쌍하다고 말하기엔 그녀의 자존심이 드높았다.
손가락이 핸드폰 위를 맴돌았다. 전화.. 해볼까?
아냐, 일단은 문자를 보내보자. 뭔가 바쁜 일이 있을지도 모르니까.
-뭐해? 바빠?
담배를 끄고, 한쪽의 쓰레기통에 담배를 버린 다음 답장을 기다렸다.
문든 손에 남은 담배연기가 거슬려 손을 털었다. 조금은 즐거운 기다림이었다.
-아, 선배.
짧은 답장이 왔다. 그리고 그 직후.
-바쁘진 않은데 일이 있어서요, 무슨 일 있나요?
바쁘진 않은데 일이 있다?
그러고보니까 전에 무슨 스토커한테 시달린다고 들었는데.. 내가직접 보기도 했고.. 언제부터인가 그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 설마 진짜 무슨 일 있는건가?
불안감이 확 밀려와서 얼른 전화를 걸었다.
"어디야?"
-어, 일단은 집 근처인데..
"갈게, 기다려."
걱정 반. 보고싶은 마음이 반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