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36 13 . 에듐 퍼리먼 증후군 =========================
아침, 일찍 문 앞의 택배함을 확인해 보니, 주문했던 스턴건이 도착해 있었다. 이따 나가기 전에 경찰서에 등록해서 신고를 해 두고, 일단은.. 좀 씼자.
그런데 생각하면 하니까 또 열받네. 추석 전에 주문했는데, 전국을 빙빙 돌다가 이제 도착하다니. 그래도 제때 도착했으니까 다행이지만..
"늦었지?"
"아냐."
아니긴. 일부러 약속시간 30분이나 지나고 왔는데.
"아침이라 손님이 없네."
"그러게."
그러게는 무슨 그러게야, 내가 어제 미리 말해서 전세냈다. 등신놈아.
나는 환하게 웃었다. 내 낮선 반응에 승우는 내 안색을 살폈지만 나는 개의치 않았다. 확실히 단 둘이라는 상황이었다면, 나는 두려움에 떨었을거다, 하지만 내 가방 안에는 굵은 소금을 잔뜩 넣은 소금물과, 스턴건. 그리고 카운터에는 위법행위나 기물파손이 일어나지 않는 이상 방관을 해달라고 부탁한 알바생이 있었다.
단 둘이 아니라면 무섭지 않아.
"주문 하시겠습니까?"
"아이스 아메리카노."
"아이스티, 복숭아 맛으로요."
주문한 음료가 나오는 동안, 나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그래. 보자고 한 이유가 뭐야?"
나는 피식 웃으며 팔짱을 끼고 다리를 꼬았다.
"용건은 내가 아니라 니가 있는거겠지. 나야 자리를 마련해 준것 뿐이고. 그래서 내 집 앞에 찾아온거 아니야?"
"피해다닌것 치고는 당당한 태도네."
"너야말로, 고개가 너무 빳빳한데, 깁스 했니?"
"......"
승우는 한숨을 쉬며 주저하다 말했다.
"...내 친구한테서 떨어져."
"참 대단한 우정 납셨다. 그치? 오오, 나무라는거 아니야. 너무 걱정하지 말고 계속 더 지껄여 봐. 들어줄테니까."
그러기 위해 이 비싼 자리를 마련한 거고.
"....내가 할 말은 그것뿐이야. 내 친구에게서 떨어져."
"다른 할 말은 없는거야?"
"사과라도 하기를 바란거냐?"
"그래."
참 속물적이고, 참 비참하다고 할 지 몰랐다.
확실히 나는 그에게서 사과를 '구걸' 하고 있었으니까.
참 웃기지? 사과하겠다는 사람은 없는데, 잘못을 빌겠다는 이는 그 어디에도 없는데.
제발 잘못을 빌고, 사과한마디 해달라고 하는 사람은 있으니까. 나는 너희들 앞에만 서면 구걸을 해.
'좋아해. 너, 널.. 좋아해..'
애정을.
'제발. 제발 그만 때려... 아파..'
구원을.
'내가 뭘 잘못한거죠, 내가 왜 이렇게 되어야 했던거죠, 왜. 제발.. 나한테 한마디만 해줘요.'
그 단 한마디의 말을 구걸하지. 세상에 그 어떤 거지도 이보다 비참할 순 없을거야. 단 한푼의 가치도 없는 그 말을 구걸해야 살아남을 수 있다니. 나 너무 불쌍하지 않니?
그러니까 제발. 내가 원하는 그 한마디의 말을 해 줘. 그러면.. 나도 내 아픔을 덜어낼 수 있을테니까.
"서유성."
평소, 꽤나 높은 톤이던 그 목소리와는 다르게. 아주 차분하고 낮게 가라앉은 소리.
'아, 이 더러운년.'
'이 쓰레기년.'
오빠와, 내 앞의 이놈이. 항상 나에게 손찌검을 할 때 났던 그 톤이었다. 확실히 오금이 저려올만큼 무서웠지만 나는 이내 평정을 찾았다.
"용서를 빈다는건 말이야. 자신의 행동에 후회가 있을때 하는 행동이야. 그리고 그 후회라는건.."
승우는 천천히 앞에 놓인 커피를 마시며 말했다.
"다시 한 번, 그 순간으로 돌아갔을때. 같은 짓은 하지 않겠다는 생각이 있어야 하는거고."
푸욱, 푸욱, 아주 날카로운 말이 내 가슴을 갈랐다. 아. 상처받을 마음이 남아있었구나 나. 새삼 그들이 내 안에서 쓰레기였다는 사실을을 깨닫게 되는 순간이었다. 어이가 없었다.
이들로 나는 더이상 상처받지 않기로 했다. 귀를 닫고, 입을 닫고, 마음을 닫아버리기로 했다. 그런데도 나는 상처.. 받아버렸어
"그러니까 너는 그 순간으로 돌아간다 해도, 또 나를... 때리고, 내가 살지 못하게 괴롭히겠다는.. 거 구나."
왼쪽 손목에 감긴 밴드를 만지작거렸다. 이 아래에... 넌. 너희들이 나에게 남긴 영원히 지울수 없는 자국이 있어. 그런데도, 너는 후회하지 않겠다는거구나. 만약, 이 자국을 보이며, 그를 다그치고, 내가 네 친구를 어떻게 부술지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 계획을 말한다면, 너는 나에게 용서를 빌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해서 용서를 받아낸다면, 그것은 내 앞의 빌어먹을 녀석이.. 진짜 자신의 잘못을 참회해서 하는 말이 아닐것이다. 내가 너무 거창한걸 바라는걸까. 내가 너무 힘든걸 바라는걸까. 단 한마디. 단 하나를 바라는건데.
진심으로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는 사죄의 단 한마디. 그게 그렇게 힘드니..?
"그래."
내 안의 무언가가 무너져 내리는 기분이 들었다. 아.. 그래. 나는 벽에 대고 외치고 있는거였어. 제발 나좀 봐 줘, 너희들 때문에 이렇게 부서져버린 나를 봐 줘.
눈가가 시큰거렸다. 나는 쓸모없는 기회를 주고 있었다. 기억도 못하는 단 한명을 제외하고는 나는 모든 답을 들었다.
기억도 못하는 이에게, 기회를 주고, 용서를 빌라고 한 들, 의미가 있을까.
나는 포기하기로 했다. 그들에 대한 용서를. 나의 짐을 덜어낼 마지막 기회를. 내려놓자. 포기하자. 나 스스로 그 마지막 기회를 버리기로 했다.
"축하해. 너희들이 이겼어. 너희들은 더이상. 나에게 사과하지 않아도 돼. 미안해하지 않아도 될거야. 나 또한 듣지 않을거고, 하지만... 그 대가는 결코 싸지 않을거야."
나는 계산서를 들고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알았어. 내가 얼마나 쓸모없는짓을 하고 있었는지 알았어. 단 한마디를 바랬는데.. 정말 의미 없는거였구나. 그거.."
나는 세상에서 가장.. 의미 없는 짓을 하고 있었어.
승우는 승우대로 불안한 느낌이 들었다. 지금 뒤돌아서 나가는 저 등을 잡아야 할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언젠가 보았던 등이었다. 비참하게 이곳저곳 맞아서, 얼룩진 등. 그러면서도 무언가 단 하나 희망을 버리지 않은 이상한 눈. 졸업하는 그 날까지 품고있었던 그 희망이 부서진걸 봤다.
학교의 옆, 작은 골목길 안쪽, 이제는 헤어질 교복을 입고, 지나가는 녀석의 어꺠를 잡아, 억지로 돌렸다.
모든게 망가져버린, 모든걸 포기한 눈, 그 어떤 의욕도 없는, 희망을 버린 눈. 그 날, 승우는 처음으로 깨달았다.
세상에 망가트려도 되는 사람은 없다는걸. 잘못을 빌어야 했다는걸.
하지만 너무 늦었다는걸.
어깨를 잡힌 손을 힘 없이 치워내고, 가던 길을 가는 그 발길을 잡을 수 없었다.
자신은.. 뭘 어떻게 해야 할 지, 조금도 알지 못했다. 느껴진 감정은 단 하나.
잡힌 손 끝에 남은 수치심. 쥐구멍이 있다면 그 안에 들어가서 숨고싶을 정도의 강렬하디 강렬한 수치심이었다.
그 수치심은 지금도 남아있었다. 뒤돌아서 사라지는 그 모습에, 잊고있었던 그 감정이 바닥에서부터 기어올라와 승우의 전신을 휘감았다.
이제는 안다.
뭘 어떻게 해야 할 지, 유성이 바라는것이 무엇인지 안다.
하지만 그걸 하고싶지 않았다. 할 수 없었다.
처음엔 돈이었지만. 이제는 아니었다. 구를 진짜 친구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돈을 받아도 쓰지 않았다. 그저 무시했다.
자신이 사과하고 빌어야 한다면.. 구와 친구가 되었던 그 행동마저도 잘못했다고 빌어야 할 것 같아서. 승우는 끝내 그 멀어지는 등을 잡지 않았다.
아마 자신은 이 순간을 평생 후회할 것이다. 돌이킬 수 없음을 후회하겠지. 후회하지 않는다는 말을 밷었던것도 후회하겠지.
하지만 승우가 잡아야 한다는 생각이 들어서, 자신을 휘감는 수치심을 떨쳐낼때까지. 그 뒷모습은 남아있지 않았다.
자신의 손에 쥐어진건, 단 한장의 계산서 뿐.
"...미안하다."
승우는 그 계산서를 쥐고 엎드려 듣는 사람이 없는 사죄를 했다. 모든게 자신의 잘못 같았다.
"...내가 잘못했어. 미안해.. 서유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