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50 15 . 자이가르닉 증후군 =========================
사각사각.
머리카락이 가위질로 잘려나갔다. 아. 거의 반년만의 미용실이다. 너무 안와서 그런지 머리끝이 죄다 상해 있었다. 머리카락의 숱과 끝에만 가볍게 치는 가벼운 커팅임에도...
"좀 저리가."
"괜찮은거지? 진짜지?"
이 미친놈이. 머리카락 자른다고 신경까지 건드리는줄 아나.
"막 아프게 하면 말해야 해?"
미친놈아, 머리카락에는 신경이 없다!!! 그러니까 저리좀 가!! 사람 쪽팔리게 하지 말고...!
내 축객령에 그제서야 의자쪽으로 갔지만.. 시선은 여전히 여기에 닿아있다. 정확히는 가위질하는 미용사의 손에.
가위날로 다치게 할까 신경쓰이는 모양이다. 세상에 이런 걱정등신새끼를 봤나. 미용사분이 왜 나를 다치게 하겠어. 아이구야...
"남자친구분이 걱정이 많으신가봐요."
"남자친구 아닌데..."
"그럼 형제?"
세상에나. 방금 완전 미친소리 들었...!
내 표정이 순식간에 썩어들어가자, 미용사분이 머쓱한 표정으로 머리를 자르는것에 집중했다. 그냥 입 다물어주셔서 감사해요.
저것과 형제라니. 내가 들어본 헛소리중에서 베스트 2위다 2위.
"....어디 다친데는 없지?"
"...안다쳤어. 미용실에 와서 몸 걱정하는게 더 웃기거든?"
"그렇지만.."
네 안의 내 이미지가 조금 궁금해지려는 중이거든. 미용실 와서 가위에 베여죽으면 그게 더 웃겨 멍청아...
"봐봐."
샴푸까지 마친 덕에, 머릿결은 촉촉했고, 좋은 냄새도 났다. 윤구가 내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만진다.
"...되게 좋네.."
"그렇지?"
"...아니."
"응?"
뭐야, 별로야?
"그냥. 자연스럽게 이러는게 좋.. 아니야! 아니. 아무것도.."
혼자 좋아하다, 혼자 말하더니 혼자 저러네, 저거 괜찮은걸까. 상담 받아봐야 하는거 아닐까. 뭐 내 알바 아니지만..
"이제 뭐 하지?"
"넌 평소에 뭐하고 놀아?"
"클럽가거나, 클럽가거나, 클럽가거나..?"
너한테 물어본 내가 멍청이다. 내 잘못이 크다.
"이 시간에 클럽가는것도 웃기지 않니? 아직 오후 두시야."
"....으음."
"그럼 저기가자."
"오락실?"
"응."
"하긴.. 너 게임하는거 좋아했지. 그런데 넌 피시방을 더 자주 다니지 않았어?"
...또야. 이녀석은 방금 자신이 기억하지 못하는 과거에서 나를 끌어냈다. 내가 말한적 없는 사실이 입에서 튀어나왔지만 나는 웃으면서 대꾸했다.
"요즘에는 오락실이 꿀이지. 오락실 너무 없으니까 말이야."
"하긴.. 나도 중학생 이후로는 처음인데."
짤랑. 환전기계에 지폐를 밀어넣자, 동전으로 교환되어 나왔다. 500원짜리 동전들을 챙겨들고, 가장 자주하는 게임기 앞에 섰다. 섬뜩한 좀비, 남녀가 도망치는 그림이 그려져 있다.
"하우스 오브 데드... 이거 해?"
"응."
기관단총 모양의 키를 들고, 방아쇠를 눌러보고 살짝 흔들어 보았다.
"어떻게 하는거야?"
"꾹 누르고 있으면 자동으로 연사되고, 흔들면 장전. 총구 옆에 회색 버튼 누르면 폭탄 발사."
"...익숙해보인다?"
"재밌거든, 이거."
"자주 해?"
"오락실 오면 한번 이상은?"
윤구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래봐야 내가 더 잘할테니. 이래뵈도 군대도 다녀온..
-우어어어어!! 크어어!!
"헉!"
-타앙!!
생각보다 리얼한 모양새에, 윤구가 숨을 삼키자, 옆에서 총소리가 들려온다.
"뭐야? 처음 해봐?"
".....어, 어..!"
"이거 난이도 높은데. 뭐 일단 어떻게든 되겠지."
투두두두- 찰칵. 두두두두두.
이미 제 몫의 동전을 다 쓴 윤구는 옆에 앉아서 유성이 하는걸 구경하고 있었다. 500원짜리 동전을 두개 넣고, 양 손에 총을 하나씩 잡고 조작하는 모습은 마치.. 영화속 주인공처럼 멋졌다.
양손으로 조작하는게 익숙해보인다. 아마, 놀러오면 한번씩 했다는게 이런 의미일지도.
게다가 표정이 상당히 즐거워 보인다. 좀비를 학살하는... 화면을 가득 덮은 좀비들을 순서대로 쏴죽이는 모습이란. 예상외로 그림같은 모습이다.
게다가 나 말고도 지나가는 다른 사람들도 구경하고 있었다.
"와, 저기까지.."
대단한걸까.
"앗."
"어."
조작은 한사람이었지만, 플레이어블 캐릭터는 둘이었기에 한쪽이 먼저 죽고 말았고, 그와 동시에 게임의 균형이 깨져, 순식간에 게임오버 되고 말았다.
"아.. 꽤 많이 갔는데."
"고생했어. 팔 아프진 않고?
"왼쪽은 괜찮아."
...그 말은 오른쪽은 괜찮지 않다는 뜻. 확실히 깁스 풀은지 아직 한달도 안되었으니까. 오른팔이 가늘게 떨리는게 보였다.
"괜찮아?"
"응."
바닥에 놓아둔 가방을 들다 떨어트리는걸 본 윤구가 얼른 그 가방을 받아들고, 한쪽에 비치된 의자에 유성을 앉혔다.
"좀 쉬는게 좋겠어. 힘들면 그만하지. 왜 계속하고 그래."
"원래 게임은 힘들어도 계속 하는거야."
"...왜?"
"재미있으니까. 어려워야 제 맛 아니야?"
아 그래...
"그럼 저런것도 잘해?"
윤구가 가르킨 방향에는 조이스틱으로 조작하는 오락실의 꽃이라 할 수 있는 게임기들이 있었다. '강철주먹.' 이라거나.. '거리의 싸움꾼.' 등등.. 못하는건 아닌데.. 하면 성격버리기 딱 좋은 게임들이라.. 대전 상대방의 플레이 성향에 따라 내 성격의 바닥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게임이랄까.
"잘 못해."
"그래? 하긴.. 팔도 안좋으니까.. 다음에 와서 할까?"
은근슬쩍, 다음에 올 여지를 만들어두는 모습이 웃겼지만 나는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인형뽑기 할래.."
확실히 저거 재미있긴 한데.. 저 집게 내 새끼손가락보다 약하단 말이지..
"별로 하고싶지는 않은데. 한다고 하면 옆에서 구경은 할래."
"그래? 뭐 가지고 싶은 인형 있어?"
...내가 초딩도 아니고 인형 갖고싶을 나이는 지났...
"저거, 저거 뽑아줘. 저 큰 고양이 인형."
윤구는 귀엽게 올려다보는, 유성의 모습에 조금 당황했다. 경계심과 거부감, 깊은곳에 숨겨진 혐오감 대신, 기대감으로 반짝이는 표정을 보니, 할 말이 떠오르지 않는것이다.
사실 인형이나 좋아한다고 살짝 놀려줄 생각이었는데, 저 표정을 보니까 할 말이 없어졌다.
"어. 응.. 뽑아줄게."
유성은 주인님을 닮은 노란색이 예쁜 고양이 인형에 시선을 빼앗겼다. 인형뽑기 게임은 영 소질이 없어서, 한 4만원쯤 쓰지 않으면 한개도 뽑지 못했다. 게다가 저렁게 큰 인형은... 10만원을 써도 못 뽑을것 같았다.
"힘내."
"어?"
"뽑아야해."
진짜 갖고싶구나.. 윤구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지구를 갖고싶은것도 아니고, 인형뽑기 기계 안에 있는 얄미운 표정의 노란 고양이 인형이 갖고싶다는데. 뽑아주지 못할게 뭐가 있을까. 보기만 해도 저런 표정인데.
가지게 된다면 더 기뻐하겠지.
"....안 닮았어."
결국 인형뽑기에 돈을 있는대로 날리고, 화가 난 윤구가 그 기계를 때려 부수기 전에, 그를 이끌고, 밖으로 나왔다. 닮은 인형을 찾아 곳곳의 가게를 돌아다니고 있었다.
"인형뽑기에 얼마 넣었었지?"
"25..만원. 차라리 기계를 사서 열어버릴걸 그랬나.."
아니, 그 인형이면 되거든, 무슨 기계를 사. 이런 브루주아 같으니.
"기다려봐, 내가 닮은거 꼭 찾아줄게. 누렇고 얄밉게 생긴 인형 맞지?"
"....노랗고 귀엽게 생긴 인형이거든?"
"그게!?"
"너 눈 삐었니?! 엄청 귀엽잖아!!"
"완전 못났거든!!"
"뭐!? 이게 우리 주인님 닮은 고양이 인형을 욕해?! 냥덕을 모독하다니!!"
"......."
아 맞다. 냥덕이었지.
"못났는데 귀여워."
얼른 꼬리를 내린 윤구가 순순히 말했다.
"못나다니! 니가 눈이 삔거야! 그냥 예쁨으로는 세계! 아니!! 우주를 정복할 수 있거든!!"
"그런... 가?"
"그런거야!!"
묘하게 타협이 없는 유성을 보고, 윤구는 고개를 끄덕였다. 우주를 지배하는 고양이라니. 그것도 달려들어서 자신의 바짓단을 찢으려 한 고양이가 우주를 지배하다니.
무슨일이 있어도 그건 막아야겠다는 이상한 다짐을 했다.
결국에는 원하는 인형을 찾아낼 수 있었다. 내 품에 안긴 그 인형이 너무나도 만족스러웠다. 조금 놀라운 점이라면..
삐익!
강아지 장난감처럼, 배를 누르니까 삑삑거리는 소리가 난다는 것이었다.
인형을 사느라 상당히 늦은 시간이 되어 있었다.
"...저녁 먹을래?"
"으음.. 아냐, 피곤해서 집에 갈래."
진짜 인형 찾아서 가게만 열군데는 돌아다닌것 같거든. 발도 아프고, 피곤하단다.
"그럼 타. 바래다줄게."
평소처럼 버스를 타네, 택시를 타네, 실랑이를 벌일 기운도 없어서 순순히 내 몸통보다 조금 작은 인형을 끌어안고 차에 탔다.
"바래다 줘서 고마워."
"저기."
"응."
돌아서 올라가려다 부르는 소리에 가만히 윤구를 보았다. 왜 부르니. 나 피곤하단다.
"...왜 갑자기 그래?"
"어?"
"...아무것도 아니야. 잘 들어가서 쉬어."
"응."
캐물을 기운도, 대꾸할 힘도 없어서 조용히 대답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돌아설 때, 윤구의 표정이 왠지 좋지 못했던것 같은데..
"주인님! 나왔어요.."
냐아아..?
나를 보고 기분좋게 울어대던 주인님이, 내 품에 안긴 인형을 보고 털을 부풀리고 경계를 한다. 왜. 왜그래...
냐아아앙!! 냐아앙!!
헉, 주인님. 저녁에 울면 안돼..!
니이야아아앙!!!!
부우욱!!
"으아아아악!! 내, 내 인형!!"
윤구는 회장실의 푹신해보이는 쇼파에 앉아서 윤현을 노려보고 있었다.
"...뭐 했지."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는데, 오랜만에 왔으니까 저녁이라도 들지 않.."
"필요 없고, 뭐 했어?"
"뭘 말하는지 모르겠다, 윤구야."
"서유성."
"...."
"했구나."
"윤구야."
쾅!!
윤구는 인상을 찡그리고 탁자를 걷어찼다.
"유성이 건드리지 마. 제발 좀."
"....."
"그냥 둬!! 그냥.. 내 곁에 있게 두라고."
"그러기 위해 한거야."
윤현은 더는 숨기지 않았다. 하지만 윤구는 인상을 찡그렸다.
"그렇지만 형이 억지로 붙들어두면.. 그 얘 마음은 어디로 가야 하는데?"
"......"
"형. 나는 잘못을 저질렀어."
"아니."
"나는 죗값을 치뤄야 해."
"윤구야."
윤현의 부름에도 윤구는 제 할말을 밷어냈다.
"유성이가, 나한테 심판을 내려주기를 기다릴거야."
"너 전부 알고..!"
윤구는 슬프게 웃으며 말했다. 그 미소는 모든것을 포기한 처연하고 슬픈 미소였다.
"당연하지. 모를리가 없잖아. 비록.. 기억하지 못하는건 어쩔 수 없지만. 유성이가 전부 말하고, 나한테 모든 복수를 끝마치게 된다면. 그러면.."
"윤구야. 그 여자는 너에게 항상 '최악의 한수'를 두게 유도하고 있어. 이미 모든걸 알았으니까, 네 감정도 멈춰버리면.."
"그런게 가능하면 여기까지 오지도 않았어. 내가 선택할 수 있는건 하나뿐이잖아."
모든 죄를 듣고, 모든것을 용서받고,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거야.
"그것 하나 뿐이잖아... 그러니까 형. 방해하지 말아줘. 그냥. 그냥 둬."
"....아니."
"형!"
"그렇게는 못해. 네가 또 망가질걸 두눈뜨고 지켜보라고? 모든걸 다 알면서도?"
"형!!"
윤구가 다그쳤지만, 윤현은 표정없이, 동생을 보고 있었다.
"건드리면 절대 형을 용서하지 않아."
"......"
"...나랑 형으로 인해 그렇게 망가졌어. 그런데도, 그렇게 망가트려서 짓밟고 싶어?"
"그래서 네가 무사하다면."
"그러면 내가 무사할거라고 왜 장담하는거야. 난 이미 걔 없이는 못살겠는데."
"없어도 살아져. 어떻게든 살아지더라."
"형. 그건 형이고. 나는.. 원하는건 온전하게 가져야해. 그게 사람이든 도구던. 만약 형의 압박으로 내가 유성이를 손에 넣으면, 그게 온전한걸까?"
"...."
"마음 한자락도 손에 쥐지 못한채, 손에 넣으면 그게 좋은걸까?"
말없이 자신을 보는 윤현에게, 윤구는 조용히 말했다.
"형, 나는 그 미움을 감당할 자신이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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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자가 먹고싶습니다! 피자를 사러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