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58 16 . 카프카 콤플렉스 =========================
약국의 내부는 선선했다. 환기를 해두려고 열어둔 유리문 너머에서 차가운 바람이 들어왔다. 10월의 마지막주 답게 찬 바람이었다.
그렇게 윤구가 가고, 3일이라는 시간이 지났지만 평소처럼 앞에서 얼쩡대기는 커녕, 문자 한 통 오지 않았다. 평소라면 계획에 차질이 생긴게 아닐까, 초조한 마음이 들었겠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다 부질없게 느껴졌다, 포기하고싶은 마음도 들었던 것 같다. 나는 뭘 어떻게 하고 싶은거지? 내 마음을 알 수 없어.
점심시간은 한가했다, 약국의 차가운 바람이 들어오는 문을 닫고 제자리로 돌아와 앉아서 팔을 괴려고 움직이자, 오랜만에 입는 하얀가운이 쓸려 사각거리는 소리가 났다. 그 소리를 무시하고 조용히 눈을 감고 생각에 잠겼다.
내 감정을, 내 생각을 정리해보자, 3일이나 혼란스러웠으면 충분하다. 내 마음에 질문을 던져보았다.
....고작 너의 그 비참함에, 너의 그 표정에 내가 너를 용서한걸까?
그건 아니다. 나는 아직도 네가 미워.
그럼 내가 그녀석을 좋아하는걸까?
그것 또한 아니야. 하지만 이제 예전처럼 극렬하게 혐오스럽지는 않아.
왜?
그 기분 좋은 단맛이. 어깨에 닿았던 그 손이 위로가 되어줬으니까.
왜 하필, 왜 하필 너야.
네가 아니었다면, 네가 아니었다면 이렇게 혼란스럽지 않았을텐데.
너 때문에, 너로 인해 내 인생이 미친듯이 고독했는데. 너는 다 잊고 그렇게 평온해?
입술을 깨물고, 눈을 감았다. 두 손으로 귀를 막고 엎드렸다. 기이한, 극렬한 두통이 관자놀이를 눌러버렸다. 아프고 아프다. 괴롭고 괴롭다. 이것은 약을 먹어도 사라지지 않는 두통이었다.
"...짜증나."
오늘따라 지친다. 아니. 요 며칠 계속되는 피로감이었다.
삑. 작은 전자음에, 한 손으로 이마를 짓누르며 핸드폰을 들었다. 문자음이 울린것이다.
-언니, 뭐해요?
"......"
-그냥 있어. 너는?
-언니! 제 안부 물어본 건가요? 저도 그냥 있지요, 오랜만에 언니 생각도 나고, 지금 만나서 놀지 않을래요?
-미안, 나도 이제 나도 약국 열어야지.
-아. 그럼 주말에?
-당분간은 좀 쉬고싶어.
-출근하면서 쉬고싶다는건 뭐에요?
그러네. 앞뒤가 맞지 않네. 나 왜 이런담.
-그래도 지금은 누구를 만난다거나 하고싶지 않아. 그냥 그게 쉬는거야.
-알았어요. 그럼 다음에 한번 만나고 싶어지면 연락 주셔야 해요?
그렇다고 해도 딱히 너랑 만나고싶을것 같진 않을것 같지만.
대답하지 않고 핸드폰을 내려놓은 다음, 냉동실에 넣어둔 얼음을 꺼내, 선반 구석에 던져둔 얼음주머니 안에 얼음을 털어넣고, 안경을 벗은 다음 머리에 얹었다. 차가움에 두통이 가라앉는게 느껴졌다.
덜그럭. 얼음끼리 둔탁한 듯, 맑은 듯. 부딪히는 소리를 내며 가라앉았다. 이마에만 얹어졌던 그 얼음주머니는 퍼지면서 내 눈까지 덮었고, 나는 그걸 치울 생각도 하지 못하고, 등받이에 완전히 기대, 상체를 뒤로 젖혔다.
"...퇴근하고싶다."
짤랑.
"어서오. ...유성아."
"선배. 잘 있었어요?"
차각차각차각, 칵테일을 섞는, 플레어를 시연하는 선배의 모습은 꽤나 멋있었다. 손재주도 좋은편이고, 신경도 예민하고. 기술도 나쁘지 않았지만, 선배처럼 저렇게 현란하게 플레어를 시연할 순 없었다.
애초에 나는 바텐더가 아니라, 약사니까. 하지만 저렇게 화려하게 섞는걸 보면 한번 해보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왜 그렇게 봐?"
"멋있어서요."
"쿨럭!"
땡그렁! 선배가 흔들던 바틀이 떨어지고 말았다.
"우리 후배님, 새삼 반했나봐?"
"그런가봐요, 나 선배한테 반했나?"
".....그런 말 함부로 하는거 아니야. 후배님은 악의없이 하는거여도."
가게 안에는 나 말고도 손님들이 제법 있었다.
"...오해 해버리니까."
"말했잖아요."
"응?"
"나 선배 꽤 좋아한다구요."
"...."
"물론 선배가 생각하는거랑은 다른 의미일지도 몰라요. 그런데, 잘 모르겠어요. 이러다 선배가 나한테 품은 감정이 될지. 아니면 그러다 말지."
선배는 한숨을 한번 쉬고 유려한 모양의 잔에, 떨어트린것을 주워서 한쪽에 두고, 다른것을 새로 만들어 칵테일을 부어주었다. 연두색의 단맛이 감도는 칵테일이었다.
"오늘은 조금 알콜이 있는건데. 괜찮겠어?"
"뭐, 한잔 하고싶었으니까요. 그런데 선배."
"응?"
"...누가 선배한테 잘못을 저지르면, 선배는 어떻게 해야 용서할 수 있어요? 아니.."
"응?"
"선배는 용서할 수 있어요?"
선배는 과일을 깎으며 나른하게 말했다.
"어떤 잘못이느냐에 따라 다르지 않을.. 까?"
"그런가요?"
"응. 나는 몰라도 후배님은.. 한번 싫은 사람은 특별한 일이 없는 이상 죽을때까지 싫어하는 스타일이잖아."
"그건 그렇죠."
"그래서 내가 후배님한테 미움받지 않으려고 얼마나 노력했는지 알아?"
"그런가요? 잘 모르겠지만.."
세현은 입술을 비죽이며 투덜거렸다.
"하여튼 이렇게 고생했는데 알아주지도 않고, 우리 후배님 너무 매정하고 둔하네."
"죄송하네요. 매정하고 둔한 여자라."
"그래도 좋지만."
윽.
"...이런 기습공격은 완전 치사하거든요!"
"뭐가, 어차피 후배님은 나한테 감정 없으니까 아무렇지도 않."
선배는 투명한 유리잔을 닦다 손을 멈추고, 고개를 들고 나를 빤히 보았다. 처음 보는, 설레는듯 하면서도 놀라는듯한 표정.
"....후배님, 너 설마."
왠지 얼굴이 화끈거리는 느낌이 들었다. 이건 술 때문이야. 술이야! 술 탓인거야...! 그러니까..
"말 했잖아요."
"....."
"내가 생각보다 선배 많이 좋아하는것 같다구요."
...말 해놓고 왜이렇게 부끄럽냐.
"...그거 그냥 분위기에 취해서 한 말이 아니었어?"
나를 어떻게 보고 있는겁니까, 일단 그거 아닙니다만.
"후배님 성격 상당히 충동적인거 아니까 하는 말인데, 진짜야 지금 그 말?"
"네."
"한때의 충동 그런거 아니고?"
"아닙니다만."
"......"
쨍그랑. 선배가 닦던 유리잔을 떨어트리고,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린 다으 쭈그리고 앉아, 내 시야에서 사라졌다. 나도 나대로 선배가 있는 방향에서 등을 돌렸다. 아.. 내가 지금 무슨말을 한거지. 완전 창피..
아.
뒤쪽의 좌석에 앉은 남자 손님이랑 눈이 마주쳤다. 왠지 히죽 웃는게 설마...
"사겨라!!"
"고백이다!! 와아!!"
다 들었구나!!!!! 젠장! 이제 쪽팔려서 이 가게 다시는 못 와!!!
집으로 돌아가는 길, 나는 미처 집에 도착하기도 전, 어지러운 느낌에 전봇대를 잡고 거기에 이마를 갖다댔다. 차가운 느낌이 들면서 정신이 든다. 그리고, 뒤늦게 아까보다 더 강력항 창피함이 밀려온다.
"....아아악!! 완전 창피해!! 으아앙!! 내일부터 선배 얼굴을 어떻게 보냐고!!!"
삑. 건조한 문자음이 들렸다. 설마.
"....불길한데."
-잘 들어갔어?
".....선배."
이거 생각보다 많이 더 부끄럽다. 그런데 명치 끝이 간질거리면서 기분이 좋아져서 또..
그리고 그와 동시에 자꾸 한사람이 더 생각이 난다.
내 첫사랑이자. 내 복수 대상이자. 내 증오의 대상인 그녀석.
...어디 떠올릴 사람이 없어서 선배랑 그 둘을 동시에 떠올린담. 나도 멍청이지. 어딜 선배랑.. 그런놈을,..
"안녕."
"....."
"술 냄새 나는데. 한잔 한거야?"
헛것이 보이나봐, 세상에.
지금 되게 간질거리고 기분이 좋은데. 순식간에 추락하는 느낌이 든다.
"...어디 아파?"
이마에 손이 닿았다.
"....."
"서유성?"
"생각해보면 말이야.."
"응?"
"참 웃겨."
"뭐가?"
"이 동갑들 둘 다. 나한테 사랑을 바라는게 말이야. 하 정말, 내가 술이 덜 깼나보다. 헛게 다 보이고."
"헛거 아니야."
"아 그래?"
조금 걸음이 비틀거렸다. 아무래도 술이 조금 강했던걸까. 나도 모르게 내 주량을 초과해서 마셔버린 모양이다.
"잡아."
"아... 안해줘도 되는데. 그냥 혼자 기분 좋게 가면 될 것 같은데.."
"굽도 높은 거 신었는데, 술도 마시기까지 하고, 맨정신으로 걸어갈 수 있겠어?"
으응.. 그러네.
평소라면 윤구에세 몸을 맏기는 불쾌한 짓은 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녀석의 호감을 더 사둬야 할 필요가 있었다. 얼마전에 상처주기도 했으니까. 이정도는 해 줘도 괜찮겠지. 사실대로라면 술에 취해서 벌어진 가벼운 충동이었다.
오빠한테 얻어 터졌던 발목, 간신히 다 나았는데, 또 삐고싶지는 않았던 마음이 맻힌 충동..
"잘 서봐."
"으응."
윤구에게 잡힌 팔에 기대는 느낌으로 서서 천천히 걸었다. 집으로 들어가는 골목길은 조금은 울퉁불퉁한 길이었기에 어찌보면, 녀석의 도움을 받는다는건 잘한 생각일지도 몰랐다.
"기분 좋아보인다."
"응. 조금 좋네."
내 옆에 너만 아니었어도.
"...나는 사흘동안."
사흘동안?
"...네 생각이 자꾸 나서, 계속.. 그래서 미쳐버릴것 같았는데. 뻔뻔하게 찾아왔다고 따귀라도 맞을 거 생각하고 왔는데.."
내가 왜 너를 때려?
"그런데 지금이 더 비참해. 내가 안중에도 없다는걸.. 알게 되니까 더 그래."
"무슨소리야. 내가 널 얼마나 생각하는데."
어떻게 부수지? 어떻게 망가트리지. 어떻게 상처주지. 어떻게 해야 나만큼이나 네가 힘들어할지. 어떻게 해야 그 빌어먹을 대가리 속에 내 생각으로 가득찰지.
아니.. 마지막건 이미 이루었나. 그런데.
얼마전에 그 일 때문일까. 예전만큼 밉지가 않아. 아니, 아직 너를 이렇게 증오하는데, 증오하는데.. 이전보다 더, 그 전보다 더, 그 격렬함이 사라져 버렸다.
밉지 않은것은 아니다. 여전히 미워.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서 분을 삭히지 못해 밤을 눈물로 지샐만큼 증오스러워. 하지만 이전처럼 강렬하지는 않았다. 악몽의 횟수도 줄어버렸다.
어떤 의미에서는 잘 된 일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건 아니었다.
내가 녀석에게 복수를 마치지도 못한 형태로.
녀석이 나에게 용서를 빌지도 않고, 내가 용서도 하지 않은 형태로.
어쩌지. 내 계획에서, 생각조차 하지 않은 일이 벌어졌다. 녀석을 보고도 부정적 감정이 끌어올려지지 않았다. 여전히 미운데, 예전처럼 이 두 손으로 네 목을 졸라버릴만큼 밉지가 않아.
이렇게 애매하게.. 혐오, 증오, 미움, 그리고 아주 미약한 두려움이 많이 식어버렸어. 익숙함이라는 형태로 말이다.
내 옆에 기댄 이 몸이, 전만큼 혐오스럽지가 않았다. 자괴감이 눈 앞을 새카맣게 가려버렸다. 이런 내가 미웠다.
============================ 작품 후기 ============================
조금은 애매한 일이 있어서 분량을 미처 채우지 못하였기에 늦고 말았습니다.
날씨가 많이 추워졌네요 감기 걸리지 않게 조심하세요! 전 한번 걸렸다 나았으니 감기 걸리지는 않을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