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70 18 . 에드하임 체스터 =========================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들었다. 기뻤다. 하지만 그만큼 기분이 좋지 않았다. 내 앞의 이 사람이 내미는 사랑이라는건 내가 절대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다.
굳이 네가 아닌 다른 사람이 나에게 마음을 내밀어도, 받을 수 없다. 그런데, 네가 내밀어도 내가 받을 수 있을까?
식전주로 한모금 마셨던 투명한 와인의 맛이 생각이 나지 않았다. 다만 목으로 넘어가던 그 맛이 조금 부드러웠던것이 기억났다.
아무래도 좋다. 일단 지금 필요한건... 지금의 상황이 아니었다. 저 멍청한 녀석이. ...사랑이라는 게임의 판돈을 어디까지 지불할 수 있느냐가 문제인거지.
과거의 너는 가볍다못해 아주 중력이 없는 녀석이었으니까.
"조금, 예전 생각이 나는 것 같아."
등받이에 기대 앉으며, 과거를 기억하는 목소리로 중얼거리듯 말했다. 고백에 대한 대답이 아니라 조금은 마음에 들지 않는 듯, 미간이 살짝 일그러진게 눈에 들어와, 시선을 돌렸다. 야경이 반짝거렸다.
"좋아해. 사랑해. 라.."
"....."
시선이 내 얼굴에 닿아있는것이 느껴졌다.
내 얼굴에 닿은 시선은, 그저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잠자코 듣고 있었다. 내가 가장 바라던 얼굴이었다. 누군가는, 누군가 하나만큼은 내 말을 들어주기를. 그게 너였으면 좋겠다고.
그런데 아니었어. 너도 결국 다르지 않더라.
"습자지보다 얇은 네 사랑이, 나에게 어디까지 할 수 있는지 궁금하네."
"얇.. 다니. 얇지 않아."
단호한 부정의 말. 나는 비웃으며 속으로 그 갖잖은 말에 대답했다. 그건 니 생각이고.
"나도, 그런 말을 들은적 있어."
'좋아해 서유성.'
'사랑해, 서유성.'
"나는 상대방에게 내가 줄 수 있는것을 전부 줬어. 남아있던 한 줌 조차 못 된 마음을 전부 줘버렸어. 아마 상대가 원했다면, 나는 몸도 내 줬을거야."
이제는 내 말에 대놓고 인상이 찡그려진다. 질투. 왜 질투하는거지. 어차피 네 사랑의 두께는 얇을텐데. 자기 자신인지도 모르는, 과거의 너였던 타인에게 왜 질투를 품는거지?
"원한다면 나는 목숨도 내어줄 수 있어. 그럼 너는?"
"뭐?"
"나한테 사랑한다고 했지?"
그 말은 다른 방식으로 풀어보자면, 나에게 사랑받고 싶다는 말.
"나한테 사랑받기 위해서라면, 너는 어디까지 내어줄 수 있어?"
"나는..."
"가족을 버릴수 있어? 친구는?"
"..."
"나는 영혼까지 버릴수 있어. 아니. 있었지."
"지금은?"
"글쎄, 어떨까?"
애매하게 웃어보이자, 윤구는 무언가를 생각하는듯한 모습이 되었다. 그 모습을 보고 있으니 내 앞에는 어느 새, 따뜻하게 데워진 생선이 올라와 있었다. 고민하는 그 얼굴 앞에서, 나는 따뜻해진 식사를 깨끗하게 비웠다.
이상하게 기분이 썩 나쁘지 않았다. 속에 있는 무언가를 털어놓은 느낌이었다.
"...춥다."
차에서 내린 나는 작게 중얼거렸다. 겨울이 성큼 다가온 모양이다. 오늘이 10월의 마지막 날이었다. 옷장 안에서 겨울옷을 찾아봐야겠다.
"겨울 별로 안 좋아해?"
"아니."
겨울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계절이었다. 새벽에 눈이라도 내리면 마치 모든 소리가 눈에 파묻힌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아무도 없는 그 느낌. 그 안에서 나는 세상에서 제일 행복하니까.
내 세상엔 아무도 없으니까. 나 이외에는 행복을 논할수도, 불행을 이야기 할 수도 없으니까.
"꽤 좋아해."
"그래?"
"응. 겨울바다를 보는것도. 집에 앉아서 눈을 보는것도, 꽤 좋아해."
"그래, 그러고 보니까, 겨울 좋아한다고 들은것 같아."
"...그래. 그럼 나 들어간다."
인상을 찡그리고, 주황색 가로등이 비춰진 건물 앞에 서서 익숙하게 비밀번호를 눌렀다.
"저기."
아 또 왜. 술 많이 들어가서 나른하거든. 좀 들어가자. 응?
"....대답. 들려 줄 거지?"
무슨 대답? 나른한 느낌에 머리가 잘 굴러가지 않았지만, 답은 금방 나왔다. 무슨 대답인지 되물어보지 않아도 뻔했다.
너는 나를 좋아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내가 그것에 대해 들려줄 이유는 없다.
"나중에."
"나중에?"
"응, 생각해 보고."
"..."
"이런건 신중한게 좋아."
책상 앞에 새하얀 종이를 펼쳤다. 가운데에 단 한글자를 적었다.
'나.'
동그라미를 지익지익 그려서 그 단어를 감싸고, 주변에 다른 이름들을 적어내렸다.
강 윤현.
홍 승우.
강 윤구.
오빠.
진 세현.
유 하영.
하지만 이내, 오빠라고 적은 단어에는 줄을 그어서 검게 지워버렸다. 이쪽은 이미 볼 장, 다 봤고.
일단 관계들을 풀어보자. 오빠는 볼일 다 봤으니까 배제해도 좋고, 승우..의 복수는 제일 나중에 가까울거고. 윤현도 마찬가지.
아.. 계획을 완전히 잘못 짰나. 이거 소거법으로 남는 순서상, 윤구가 제일 먼저인데...
맛있는걸 제일 먼저 먹는게 내 버릇이고 습관이라지만. 이번에는 경우가 다르다. 내가 굳이 먼저 먹지 않아도 뺏아먹을 사람따위 없다. 그러니까 조금만 여유있게 먹었으면 하는데..
뭐. 여태까지 해 왔던 방식을 억지로 바꾸는것도 어색하고, 괜히 바꿨다가 이도저도 못하는 상태가 될 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그냥 하던대로 하자. 조금.. 아니, 많이 아쉽지만.
순서는 오빠, 윤구, 승우, 윤현.
하지만 솔직히 윤구 이외에는 어찌되든 좋았다. 오빠는 어쩔수 없이 제일 처음이어야 했다. 우리 '착하디 착한' 오빠의 엿같은 희생으로, 복수의 비석이 세워졌으니까. 나중에 교도소 쪽으로 절 두번 하자.
윤구... 아.. 정말 제일 마지막으로 미루고 싶은데. 아니 솔직히 내 계획대로 흘러가면 순서에는 크게 의미가 없었다. 어차치 누구든 무사하지 못할테니까.
솔직히 계획이라고 해봐야 별거 없었다. 나를 좋아하게 된 윤구의 앞에서 모든 사실을 고백하고, 네가 언젠가 나에게 했던 것 처럼 나도 네 마음을 가지고 놀았음을 말한다.
상처받은 네가 또 다시 다른 사람에게 마음을 열 수 있을까? 가족관계도 누나를 제외하면 썩 좋지 못하다고 했다.
마음에 들어온 사람이 모든것을 망가트르면 그 마음이 다시는 열리지 않을테지.
나쁘지는 않지만 마음에는 들지 않던 계획이었다. 이 복수는 윤현과, 윤구에게만 복수할수 있는거였으니까.
하지만 결말을 아주 조금 비틀어버림으로서, 승우에게도 돌려줄 수 있게 되었다.
참 우습다. 나는 둔하고, 둔해서.. 이렇게 될 수 있을거라 예상치 못했는데. 결말을 비틀어버림으로서, 모든 일이 달라졌다.
강 윤현씨? 당신의 협박 덕분에 나는 결말을 비틀어버리는 방법을 알아냈어.
홍 승우, 내 동창아. 네 같잖은 사과덕분에, 나는 그 비틀린 결말을 실행할 결심이 섰어.
세상 참 좋아. 이렇게 더불어 사는 느낌이라니. 아.. 흐뭇한걸? 단군 할아버지, 당신이 시초가 된 이 땅은 제법 살 만 해요. 엿 같지만. 아! 이야기가 옆으로 새고 말았다.
지익지익, 종이 위엔 화살표가 그려졌다. 윤현이게서 시작된 화살표의 끝은 나에게, 승우에게서 시작된 화살표의 끝도 나에게 향해 있었다.
나에게서 시작된 화살표의 끝은 윤구에게 향해 있었다. 그리고 윤구의 이름 아래 작은 글자를 적었다.
'사랑? 애정? 소유욕?'
어느쪽일까. 가장 이용하기 쉬운건 1번. 2번이 소유욕이고. 가장 최악인 감정이 애정이었다.
애정이라면 확실히 사랑으로 발전할 가능성이 있었다. 나도 처음에는 비슷했다. 하지만 계획이 앞당겨진 지금. 지금은 곤란했다.
나에게 좋은 말을 해주는 그, 유일하게 나를 좋아해주는 상대에 대한 의문은 길게 가지 못하고, 애정으로. 그것이 사랑으로 바뀌었다.
지옥같은 마굴에서, 유일하게 나를 살게 하는 사람이었으니까.
너는 얼마나 버틸까? 믿을사람 하나 없는 네 세상에서. 나만큼 아팠으면 좋겠다.
"아이 씨."
냉장고를 열어보니, 음료수가 떨어졌다. 아.. 달콤한 청포도맛에, 코코넛 젤리가 들어간, 완벽한 내 취향인 음료수. 상당히 멀리 떨어진 가게에서만 팔기 때문에 사러 가는게 번거로웠다.
나갈까, 말까. 조금 귀찮았다. 하지만 집안 꼴을 보니 나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옷장 정리를 위해 상자와 서랍에 넣어뒀던 겨울옷들을 죄다 끄집어낸 상태.
쇼파 위에 올려둔 드라이 보낼 옷들의 위에는, 주인님이 몸을 둥글게 말고 자고있었고, 내 방의 침대 위에는 가을 옷들이. 방바닥에는 스웨터와, 두툼한 티셔츠와 장갑 목도리, 모자 등등. 정리 언제 하지. 퍽퍽한 광경이다.
조금, 아니. 도피하고 싶은 마음도 강한것 같고, 시간은...
저녁 11시. 아직 술기운도 덜 가셨고. 편의점이니까 문 닫을 걱정은 없지만.. 어쩔까. 지금 다녀올까.
시간도 늦었는데 일단은 마저 치우고 자자.
사실대로 말하자면 도망치고 싶었지만, 그래봐야 이걸 치울 사람은 나 이외에는 없었다. 도망쳐봐야 내가 할 일의 양은 변하지 않을테지.
가을 옷들을 차곡차곡 개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이 또한 지나가리라.
============================ 작품 후기 ============================
팍팍 올려봅니다! 사실 비축분이 떨어져 가고 있습니다만.
하지만 벼랑 끝 연재가 익숙해진 저는 그저 이 상황이 만족스럽네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