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90 22 . 뮌하우젠 =========================
"이게 뭐야."
뭐긴 사람이지.
"더 따뜻하게 입고 와야지. 바닷가라 춥단 말이야."
지금도 따뜻한 것 같은데.
"치마는 춥지 않겠어?"
교복도 아니고, 충분히 따뜻하니까 신경 안써줬으면.
"괜찮아."
목도리에, 언젠가 하영이에게 선물받은 벙어리장갑. 따뜻한 야상에 무릎 위까지 오는 치마.
"근데 왜 치마야?"
"걷기 편하니까."
".....추운데 물에 들어가려고?"
발 정도는 담그고 싶었는데..
"안 돼?"
"안 돼!!"
차 안, 도로를 따라 달리는 조수석에 조용히 앉아서 스쳐지나가는 하얀 차선들을 보았다.
얼마 전, 아버지의 산소에 다녀왔던게 생각이 났다.
눈을 느릿하게 깜박거리다가 아예 감으며, 그 날의 기억을 떠올렸다.
기억을 되짚었다. 이 외길을 따라 올라가면. 두개의 무덤이 있다. 하나는 친할머니의 것. 그리고 조금 떨어진곳에, 아버지의 것.
"아. 찾았다."
깔끔히 벌초까지 마쳐져 있었다. 애초에 내가 할 마음따위 없었지만서도.
아버지의 묘 앞에 사과와, 배를 놓고. 사 온 담배에 불을 붙여 무덤 앞에 거꾸로 꽃은다음 나도 한 대 물었다.
"오랜만에 와서 담배 핀다고 뭐라고 하지 말아요, 아버지."
나도 7년만에 피는거니까요. 아, 그러고보니까, 아버지 담배는 이거 아니었던 것 같은데. 뭐 어때.
"잘 지내셨습니까."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언젠가, 엄마의 무덤처럼.
차가운 바람이 내 얼굴을 훑었다.
"아버지, 저한테 왜 그러셨습니까."
확실히 나는 아버지의 기준에서는 한참을 미치지 못하는 딸.
아버지의 울타리에서 벗어난 어리석은 딸이었을지 모릅니다.
"여기까지 힘들게 왔는데, 할 말은 없네요."
이미 아버지의 영정 앞에서 모든 말을 마쳤으니. 여기 왔다고 해서 다른 말이 더 있을리는 없다.
사정을 모르는 사람들은 나를 패륜아라 손가락질 했다. 욕을 했다. 사소한 괴롭힘을 가라기도 했다. 하지만 나는 굴하지 않았다. 아니. 그러기도 귀찮았다.
뭘 안다고 지껄여?
뭘 안다고 행동해?
귀찮아.
당신들을 상대하는것도, 있지도 앟은 유대감을 끌어올려 억지로 눈물을 쥐어짜야 하는것도.
물론 나에게 있어서 아버지가 처음부터 일방통행인 분은 아니었다.
'아빠, 라면 맛있다.'
'그러니?'
'응. 아빠랑 낚시 와서 먹는 라면이 최고!'
음.. 확실히. 그 때 먹은 라면이 내 최고의 라면이다. 아버지를 미워하는 지금도 그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딸, 잘 봐, 풀을 이렇게 꺾어서, 여기를 당기면.'
'와아!!'
'물수제비는 납작한 돌을 골라서, 카드를 날리듯이, 검지손가락으로 감싸고 던지는거야.'
'우와아!!'
"싫은 사람은 아니었어요."
내가 죽어가기 전 까진.
"그러니까.."
차라리 나한테 따뜻하게 대해주지 말지 그랬어요. 잔인한 아버지.
아버지가 엄마처럼 아예 나를 끊어내고 완전하게 벽을 세워버렸다면, 나는 기대하지 않을 수 있었을텐데. 그런 기분나쁜 희망고문에 매달려, 아버지의 기대에 부흥하기 위해 애쓰지 않았을텐데.
차라리 좀 더, 아버지를 빨리 포기했다면. 내가 조금 더 나아졌을까?
아냐, 일어났을지 모르는, 지나간 일에는 신경쓰지 말자. 내가 살고 있는건 지금이니까. 떠올리지 말자.
만약에 일어났을지도 모르는 일 따위는..
엄마랑 아빠는 사이가 좋고. 오빠랑 나는 여느 남매들처럼 싸우기도 하지만 그래도 일방적인 관계는 아니며.
숨 쉬고, 웃을 수 있는 그런 집이었을지도 모르는. 아픈 상상.
"...왜 그래?"
끼익. 휴게소에서 차가 멈추었다. 눈을 깜빡거렸다, 시야가 흐린 느낌이 들었다.
"어디 아파? 왜 울어?"
"....안 울어."
울지 않았다. 그냥 눈물이 조금 고여있을 뿐이다.
"...그냥, 다른 생각이 나서 그래."
"그래? 뭐 좀 먹을래? 아니면 찬바람이라도 좀 쐴 거야?"
"그럴게. 조금만 있다 가자."
하늘이 흐릿한게, 지금 당장에라도 눈이 올 것 같았다.
아아, 좋은 날씨다.
"도착했어."
이 집 설계한 놈, 앞으로 나와. 세상에. 바닷가 근처에 집을 짓다니. 미친거 아닐까.
"이거 괜찮아? 날씨라도 나쁘면..."
"관리인이 알아서 하겠지."
야이 씨, 그래, 너 돈 많다.
"경치 좋지?"
좋긴 하네. 그건 인정. 확실히 좋다.
새하얀 모래사장. 그리고 조금 떨어진 땅이 단단한곳에 지어진 1층짜리 별장. 굳이 바다까지 나와서 이런곳을 써야하나 싶지만..
"응? 차가?"
윤구는 내려있는데 누군가가 운전석에 타서 멋대로 움직인다.
"아, 별장관리인이야. 따로 연락하면 올거야."
그래?
짐을 내려놓고 안을 둘러봤다.
별장의 모양은 'ㅁ'자 모양이었다. 가운데가 뚫려 있고, 그 가운데에는 작은 연못이 있었다. 지금 당장 청개구리라도 튀어나올것 같다.
"웬 정원..?"
"아. 형의 취향."
마음에 안들어.
"그래서 그런지 마음에는 안들더라."
엇, 비슷한 생각.
거실 벽에는 텔레비전이 달려있고, 벽난로라는 아날로그틱한것도 달려 있었다. 왠지 이 벽난로, 새거같은데..?
"아, 이번에 새로 증축했어."
"...."
젠장. 솔직히 말하면, 이 별장 매우 마음에 들었다. 내 드림하우스를 별장으로 쓰다니. 부럽다.
여기엔 뭐가 있으려나.. 복도가 좁아서 그런지 대부분의 문이 미닫이였기에, 부드럽게 옆으로 밀자, 한쪽 벽이 커텐으로 가려진 방이 보였다. 조금 어두웠지만 문 옆의 스위치를 켜자...
"어."
어어...
"와아아!!"
한쪽 벽을 차지한 커다한 텔레비젼과, 콘솔. 그리고 게임 디스크. 게다가 대부분이 최신형이었다. 피규어같은건 제쳐두고...
"만화책도 있네. 앗! 이건 어릴적에 보던거다."
"네, 네가 게임기라던가.. 엄청 좋아하니까. 준비도 해 놨어."
"...이런 센스 없는놈! 아니, 센스있나?"
"억! 왜?!"
여기까지 와서 이렇게 해 놓으면 내가 잘도 바다 보러 나가겠다!!
"아아아, 젠장.. 너무 좋아!!"
드물게 나른하게 풀린 목소리에 윤구가 눈을 깜빡거렸고, 나는 콘솔 기계들을 하나하나 조작해 보았다. 앗.. 전원이 연결되어 있지는 않네? 이정도야 금방이지.
맞는 선들을 찾아 게임기에 연결하고 전원을 켜자, 게임기가 동작되는 소리가 부드럽게 난다.
"너무 좋아!!"
"....명품도 아니고, 보석도 아니고. 돈도 아닌데.. 그렇게 좋아?"
"하, 씨..! 당연하지!! 너 진성 덕후를 뭘로 보는거니!? 아, 미친 이게 있단 말이야!? 아.. 달려야 하잖아!!"
"달려? 밖에 나갈래?"
응, 그거 아니야. 방 안을 둘러보니, 쿠션으 부드러운 게이밍용 의자랑, 난방용 팬이 달린 의자의 높이에 딱 맞는 테이블도 있었다.
"짐 풀어야 하지 않아?"
"몰라 나중에."
헉.
"나, 나중에 해도 되니까, 응? 조금만 더 둘러보자."
나중에? 아.
...젠장 놀러왔지만 놀러온게 아닌데. 순간 정신이 나갔다. 아.. 너무 탐스러워서 그만.
"하.. 행복했다. 나중에 해야지.."
"필요하면 가져가도 돼."
"...진심으로 하는 말?"
"나, 저런거 잘 안해."
세상에, 저런거라니. 인생의 진리를 저런거라니!
"너는 센스없는놈이야!!"
"아니, 왜!!"
거실의 바로 옆에는 예쁜 방이 있었다. 2인용 침.. 대?
설마 여기서 같이 자야한다는건 아니겠지? 아까 앉은 게이밍용 체어 완전 안락하던데, 정 안된다면 거기서 자야겠다. 일단 가방은 여기에 두자, 설마 이 넓은 집에 침대가 이거 하나뿐이겠어?
이 집 설계한놈 나와. 아 아까전에도 이 생각 한 것 같은데.
침대가 진짜 하나뿐인거야...? 뭐야, 이 철저하게 1인용인 별장은!! 욕실은 두개니까 다행이지만서도..
냉장고의 재료도 2인분씩 3일치나 있고. ...3일?
"3일?! 너랑 3일씩이나 여기에 쳐박혀 있어야 한다고?!"
"엉? 아니야. 1박 아니야?"
1박. 이건 각오했던 거니까, 상관 없긴 한데...
"그럼 이게 왜 3일치인데?"
".....응?"
디링링링링- 디링링링.
"내꺼 아니야."
난 진동이거든.
"...아, 내꺼다."
-동생.
"어, 형."
앗. 조용해서 다 들리네.
-별장관리인 분에게 3일 휴가 줬다.
뭐?
"어?"
-잘 놀다오도록.
"........"
왜 슬픈 예감은 틀린적이 없지? 아니.. 나름 잘 된걸지도 몰라, 좀 짜증나긴 하지만 나중을 위해서는 지금 이 상황이 잘 된걸 수도 있다.
그런데 왜 속았다는 기분이 들고 속에서 뭔가 부글부글 끓는 느낌이지? 왜 빡치는거지?
============================ 작품 후기 ============================
낄낄.. 요즘은 힐링이 필요하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