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화
-리빌드 (6)
화창한 인사동 아침에 온몸이 젖은 채 휴대폰을 들고 안절부절못하는 내 모습을 행인들이 힐긋 보며 지나갔다.
아직 자는 걸까?
-어머? 아침 일찍 무슨 일이세요?
다짜고짜 말했다.
“채수진 씨. 당신이 필요합니다.”
-네?
포션을 마시고 인사동 거리 모울 입구 앞 돌 벤치에 걸터앉았다. 그리고 휴대폰이 울리자 다급하게 그녀의 위치부터 물었다.
“어디쯤입니까?”
-말씀하신 곳으로 왔는…….
그녀의 목소리가 가까웠다. 고개를 들어 보니 채수진이 멍하게 보며 말했다.
“지완 씨?”
그녀가 걱정스럽게 물었다.
“꼴이 왜 이래요? 대체 무슨 일이…….”
“지금부터 보는 것들 비밀로 해 주실 수 있습니까? 아니, 그렇게 해 주세요.”
“네? 그게 무슨…….”
그녀의 손을 잡고 다짜고짜 인사동 모울로 들어가 베를린 모울로 다시 향했다.
* * *
채수진과 함께 라우에른 던전으로 들어서자 그곳은 여전히 비가 내리고 있었다.
그녀가 말했다.
“세상에, 이런 곳이……. 지완 씨 정체가 뭔가요?”
그녀의 물음에 말없이 걸어갔다. 조금 더 가자 로렐라이가 보였다.
다행이다. 아직 소멸하지 않았다.
로렐라이가 힘없이 말했다.
“야, 약속. 지, 지킨 것 맞지?”
채수진이 소스라치며 말했다.
“마, 마수?”
그녀의 목소리에 로렐라이가 독일어로 말했다.
“로렐라이, 비겁한 마수…….”
그녀는 로렐라이의 말이 마수의 언어로 들렸는지 뒷걸음질 쳤다.
채수진을 보며 말했다.
“치료할 수 있겠습니까?”
그녀가 내 얼굴을 멍하게 봤다.
“치료 가능하냐고요!”
그녀가 고개를 흔들며 말했다.
“아무리 지완 씨라도 이건 안 돼요!”
“그새 공무원 물 먹었다고 이러는 겁니까?”
마수를 살리라니, 내가 생각해도 억지다.
29살이던 이지완은 이런 선택은 할 리 없는데……. 회귀하고부터 감정 기복이 잦아졌다.
“그게 아니라…….”
“당장 치료하라고요.”
채수진이 로렐라이를 바라봤다.
이미 상당 시간 흘렀다. 조금 더 지나면…….
그때였다.
로렐라이의 몸에서 서서히 빛이 일었다.
아, 마수가 사라지는 전조다.
허무한 표정을 지으며 돌아서려는 순간 채수진이 팔을 걷어붙이고 로렐라이의 가슴에 손을 얹었다.
그녀가 힐을 시작하자 손에서 푸른빛이 감돌았다.
하지만 로렐라이의 소멸 시간만 늦추는 듯했다. 힘에 부친 듯 채수진이 말했다.
“더 이상은 무리예요…….”
채수진의 어깨에 손을 얹고 말했다.
“집중하세요. 채수진 씨.”
이게 통하길 빌 뿐이다.
“컨트롤 C 신체 강화”
[신체 강화를 복사했습니다.]
“컨트롤 V 채수진.”
[3, 2, 1. 설치 완료.]
할 수 있는 건 다 했다.
그 순간 그녀의 몸 전체에서 초록빛 오라가 일렁거렸다. 아마도 그녀의 고유능력 ‘여왕의 권능’이 발동된 듯했다.
로렐라이의 빛이 잦아들더니 서서히 상처가 아물기 시작했다.
그제야 바닥에 주저앉아 그들을 보며 허탈하게 웃고 말았다.
우린 베를린 모울 테이블에 앉았다. 그녀가 잠들어 있는 로렐라이를 보며 내게 물었다.
“이제 어떻게 하실 건가요?”
“뭘 말이죠?”
“마수를 살렸다고요. 그리고 여긴 대체 어딘가요?”
그녀에게 간략하게 설명했다.
말이 끝나자 그녀가 한숨을 쉬었다.
전대미문의 사건이다. 인간 힐러에게 마수를 살려내라니.
이성보다 감정이 앞선 행동이었다.
사고를 치고 현타가 오자 자기 합리화를 머릿속으로 해댔다. 로렐라이면 웬만한 인간보다 베를린 모울을 관리하기 더 나을 것이다.
게다가 이곳을 내 전용 던전 출입으로 삼는 것도 나쁘지 않다.
그래, 그렇게 생각하자.
“이지완 씨는 참견하기 좋아하는 성격 같아요.”
“칭찬이 아니군요.”
“아니요. 칭찬이에요. 제가 이렇게 있을 수 있는 것도 지완 씨 덕분이거든요.”
그녀의 듣기 좋은 말보다 베를린 모울을 정리할 생각이 앞섰다.
일부러 그녀에게 물었다.
“가 보셔야 하지 않나요?”
그녀가 휴대폰을 봤다.
“여긴 던전과 마찬가지로 휴대폰이 작동 안 할 겁니다.”
그녀가 일어나며 말했다.
“그러네요. 그럼, 이만 가 볼게요.”
“오늘 이곳에서 봤던 건…….”
“무슨 말인지 알아요. 그보다, 부탁드려도 될까요?”
“말해 보세요.”
“저도 모울에 가끔 올 수 있을까요?”
의외였다. 힐러가 와 준다면 크게 도움 될 게 많을 것이다. 그녀와의 연결 고리가 더욱 공고해질 테니까.
“생각해 보겠습니다.”
하지만 그녀는 관리국 소속이다.
조심해서 나쁠 것 없다.
“그래요. 참, 문 부장님께서 전화 달라셨어요.”
“아저씨가요?”
* * *
채수진과 함께 베를린 모울에서 인사동 모울로 돌아왔다. 그리고 모울 외부로 나가 그녀를 배웅했다.
그녀의 뒷모습을 보며 휴대폰을 들어 통화 버튼을 눌렀다.
“찾으셨다고요.”
문창표가 툴툴거렸다.
-너 휴대폰 폼으로 들고 다니지?
“바빠서 그렇죠. 무슨 일이십니까?”
그가 뜸 들이다 말했다.
-지완아, 밥 한번 먹자. 오늘 어때?
“싫습니다.”
-왜!
“아저씨가 그렇게 말할 때는 뭔가 있으니까요.”
-하하하. 사회생활 시작하더니 너구리가 됐구나. 그런데 지완아 채수진 씨 문제다.
채수진? 그녀는 조금 전까지도 아무 말 없었는데.
“그게 저하고 무슨 상관입니까?”
-휴, 상관이 있어서 그래. 문자로 장소 알려 줄 테니 꼭 좀 와. 끊는다.
“잠시만요.”
-왜?
“혹시, 보스가 여럿인 던전이 있습니까?”
문창표가 말했다.
-지금까지 그런 던전은 없었는데.
“그럼 보스가 던전을 탈출한 사례는요?”
-네가 각성했던 잠실야구장. 거기서 그랬지. 그때만 생각하면 오금이 저린다.
“그건, 보스만 나왔다기보다 마수가 쏟아져 나온 거잖아요.”
-던전 브레이크니까.
익히 알고 있다. 보스는 브레이크 때만 던전에서 나올 수 있는 게 상식이었다.
다만 던전 브레이크였다면 그 삼 기사가 예전에 튀어나왔어야 말이 된다.
그렇다면 로렐라이는 이레귤러다.
혹시 이다도 몰랐던 능력 덕분에 로렐라이가 던전에서 빠져나왔을까?
이때, 문창표가 말했다.
-너 대학원 갔냐?
“네? 대학원을 왜 가요?”
-방송국 취직했단 녀석이 매번 던전 정보를 물어봐서 그러지.
“돈이 썩어납니까? 그딴 던전 학과를 다니게요?”
-크크크, 그럼 채수진 힐러는 돈이 썩어나서 대학원에 들어갔구먼.
채수진 씨도 열심히 지내는구나.
괜히 흐뭇하네.
“말이 그렇다는 거죠. 끊습니다.”
-그래, 문자 바로 보내마.
전화를 끊자 바로 문자가 들어왔다. 그는 여전히 성격이 급하다.
바로 문자를 열어 봤다.
호텔신라? 이 아저씨 뭐 하잔 거야?
* * *
베를린 모울에 돌아오자마자 2번째 문을 통해 던전에 들어갔다.
“감정.”
감정 능력으로 주변을 돌아봤다.
이지완 가라사대, 같은 능력도 응용력이 따라 줘야 한다.
대학교 때 후배가 내게 물어봤다.
‘선배가 툴 다루는 거 보면 책하고 다르네요?’
당연하다. 같은 연필도 누군 글만 쓰고 어떤 이는 가려운 등을 긁을 수도 있다.
그때였다.
[던전 만능 키.]
아우 씨! 하필 호수 한가운데 정보창이 떴다.
이다 할머니! 좀 가까이 던지지.
일단 그녀의 유골을 수습해 호수 옆에 묻었다. 그리고 신체 강화를 이용해 호수에 들어가 곡괭이를 찾아왔다.
물에 빠진 생쥐 꼴로 던전 구멍을 빠져나오자.
“왜 로렐라이 살린 거야?”
앞을 보니 그녀가 깨어나 있었다. 로렐라이는 곡괭이를 보며 말했다.
“구멍을 메꾸려면 로렐라이 소멸…….”
그녀의 말을 끊었다.
“쓸데없는 소리. 라우에른 던전은 네게 양도받아 처리할 거야.”
“그게 무슨?”
손을 내밀며 로렐라이에게 말했다.
“손 줘 봐.”
그녀가 손을 내밀었다. 그녀의 손을 잡고 말했다.
“맹주의 대리인.”
[라우렐라 던전 보스직을 수락하겠습니까? Y / N.]
“로렐라이. 던전 보스 그만둘 거지?”
그녀가 잠시 망설이다 고개를 끄덕였다.
“예스.”
[라우렐라 던전 보스가 이지완으로 변경됐습니다.]
또다시 말했다.
“던전 보스 사임.”
[던전 보스직을 사임하시겠습니까? Y / N.]
“예스.”
[라우렐라 던전이 주인 없는 던전으로 바뀝니다.]
순간 보물 상자가 나타났다.
대박! 클리어했단 거잖아.
그녀의 손을 놓고 곡괭이를 들었다.
로렐라이는 푸른 호수가 비치는 구멍을 바라봤다.
곡괭이를 들어 구멍을 찔렀다. 그 순간 구멍이 서서히 메꿔졌다.
로렐라이가 울먹이며 중얼거렸다.
“안녕, 이다.”
종족: 요정 (로렐라이)
등급: B+
고유능력: 던전 감지, 망자의 축복.
HP: 4900
MP: 8200
그녀를 보자 감정이 다시 떴다.
어째서?
가만, 종족명이……. 요정? 요정이라고!
이제는 마수가 아니란 거잖아.
그런데 능력치에 비해 등급이 B밖에 안 되네?
그러다 그녀의 고유능력 망자의 축복을 보고 나도 모르게 미소가 지어졌다.
억측일지 모르지만.
죽은 이다가 로렐라이를 위해 스킬을 바꿔 준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던전 감지는 뭔지 잘 모르겠다.
그녀를 베를린 모울 지배인으로 선택했다. 그리고 한동안은 이다의 모습으로 지낼 것을 당부했다.
모울 사람들에게 사실을 밝혀 봤자 혼란스러울 것이다. 그보다 로렐라이가 본모습으로 활동하기엔 미모가 너무 눈에 띈다.
골치 아픈 건 딱 질색이다.
이로써 모울 지배인들이 정리됐다.
그녀는 이제 마수가 아니다. 난 최초로 요정을 만난 사람이 됐다.
이다와 사이좋은 승현이를 베를린 부지배인으로 보내야겠다.
여담이지만 로렐라이는 글을 읽을 줄 몰랐다. 그래서 사람이 오면 눈이 안 좋단 핑계를 댔다고 한다.
집으로 돌아가 쉬고 싶은데…….
휴, 호텔신라에 가야 하겠지?
요즘 너무 무리하는 것 같은데.
* * *
마상택은 자신의 전무실 벽걸이 TV를 보며 표정이 굳었다.
TV에는 누군가 휴대폰으로 촬영한 한명국 박사 연구실이 비쳤다. 곧이어 웅 소리를 내며 마석 동력기가 간헐적으로 돌아갔다.
마상택이 중얼거렸다.
“벌써 저 정도까지 진행했다고? 빨리 놈들에게서 가져와야 하는데…….”
이때, 내선 전화가 울렸다.
“뭐야?”
“박영석이란 분이 찾아오셨습니다.”
마상택의 얼굴이 순간 구겨졌다.
“후, 들어오라 해.”
문이 열리고 박영석이 들어왔다.
그는 들어오자마자 마상택에게 90도 인사를 했다.
“선배님! 그간 평안하셨습니까.”
박영석이 고개를 들자 그의 머리 옆으로 도자기가 날아들었다.
와장창!
“서, 선배님?”
“개념 없는 새끼. 여길 찾아오면 어쩌잔 거야!”
“저, 저는 급한 마음에…….”
“돈이 급해서 왔겠지.”
마상택의 말에 박영석은 얼른 무릎 꿇으며 말했다.
“저 좀 살려 주십시오.”
“적당히 해 먹었어야지! 15억?”
“죄송합니다. 한명국이 일주일 내로 총 37억을 뱉으면 고소는 취하하겠다 해서.”
“뭐? 박사나 되는 놈 셈법이 왜 그 모양이야?”
“제가 조달청에 뿌린 돈, 그리고 8억은 최태원 선배 주머니에 들어갔거든요. 그 총합이 37억 조금 넘습니다.”
마상택은 물을 따라 마시고 박영석을 보며 물었다.
“최태원은 아직도 연락 안 돼?”
“네, 완전히 잠수 탄 거 같습니다.”
마상택은 TV를 가리키며 말했다.
“저기 삐쩍 마른 외국 놈은 뭐야?”
“커크라는 놈인데, 한명국 지인이 잠시 데려온 사람입니다.”
“그게 다야?”
“죄송합니다.”
마상택이 내선을 눌러 누군가를 호출했다. 곧이어 깔끔한 정장 차림의 남자가 전무실로 들어서자 마상택이 다짜고짜 물었다.
“임 실장. 저 외국인, 알아봤지?”
“이름은 커크 기네스. 올해 나이 24살 F급 각성자. 미국 샌프란시스코 트레저 아일랜드 거주. 학력은 고등학교까지입니다.”
박영석이 황당한 듯 말했다.
“고, 고등학교? 그게 말이 된다 생각해요?”
마상택이 물었다.
“그래서 직업은?”
“1년 전부터 유튜버를 시작한 것 같은데, 최근 업로드가 없는 거로 봐선 그것도 접은 것 같습니다.”
마상택은 멍하게 임 실장 말을 듣다가 허탈하게 웃었다.
“서, 선배님?”
“야, 박영석이. 마석 발전기 그거. 아무나 만들 수 있는 거 아냐?”
박영석은 손사래 치며 말했다.
“절대 아닙니다! 난다 긴다 하는 저희가 4년간 매달린 겁니다.”
“석박사도 못 하던 걸 고졸이 1시간 손댔더니 작동했다? 그럼 난 이놈만 모셔 오면 되겠네?”
임 실장이 말했다.
“이상한 점이 있습니다.”
“뭔데?”
“커크 기네스는 단 한 번도 우리나라에 방문한 기록이 없습니다.”
“그건 또 뭔 소리야!”
“심지어 해외여행 기록 자체가 없습니다.”
마상택이 말없이 TV에 비친 커크를 뚫어져라 봤다.
“임 실장. 이놈 각성자라 했지?”
“네.”
“이놈 봐라. 뭔가 재미진 냄새가 풀풀 나는데?”
그때, 박영석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선배님. 저 좀 살려 주십시오.”
마상택은 미소 지으며 말했다.
“능력도 없어, 정보력도 후져, 돈만 보면 환장해. 아주 삼박자가 절묘해.”
“죄, 죄송합니다. 한 번만 살려 주시면 견마지로(犬馬之勞)하는 마음으로…….”
“어이, 우리 후배님 본인 똥은 직접 닦으세요. 밤길에 뒈지기 싫으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