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화
-망연자실(茫然自失) (6)
* * *
크윽.
말은 그렇게 했지만, 그냥 내 힘으로 고칠 걸 그랬다.
뚫린 배의 격통이 너무 심하다.
잠시 후 문 열리는 소리와 함께 다급한 말소리가 들렸다.
“상태가 어떤가요?”
아, 채수진이구나.
곧이어 의료진의 말이 내게도 들렸다.
“일단 생명에 지장은 없지만, 장기 손상이 우려됩니다.”
그녀의 발소리가 들리고 내게 다가오자 나는 고통을 참으며 말했다.
“나도 천억짜리 치료 좀 받아 봅시다.”
“지금 농담이 나와요!”
뒤편에서 한서린의 다소 격양된 목소리가 들렸다.
“김규석 씨 제정신이랍니까?”
문창표가 한숨을 내쉬었다.
“페널티를 먹일 생각이네.”
“이게 페널티로 끝날 상황인가요?”
나는 그들에게 들리게 말했다.
“저 좀 치료받게 나가시죠.”
문창표가 내게 다가와 말했다.
“너, 솔직히 말해 봐.”
“뭐가요?”
“아까 충분히 피할 수 있었지?”
눈을 홉뜨고 있는 것이, 거짓 판별을 쓰고 있는 모양이었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럴 땐 가만히 있는 편이 나으니까.
채수진이 팔을 걷어붙이며 말했다.
“재생 치료 시작하겠습니다.”
의료진이 뒤로 물러나자 문창표도 할 수 없이 그들을 따라 물러났다.
채수진이 뚫린 배 위로 손을 얹더니 눈을 감고 집중하자 그녀의 손 주변으로 초록빛이 감돌았다.
그녀의 손길이 내 배에 닿자 따스함과 더불어 급격한 피로감이 찾아 들었다.
그렇구나. 채수진의 재생 능력은 내 몸에 있는 에너지도 가져다 쓰는 거구나.
나는 그녀를 올려다봤다.
이름: 채수진
등급: A+
고유능력: 성스러운 빛, 여왕의 권능, 다산의 축복. 신체강화
HP: 24210
MP: 44150
와! 뭐냐?
어쩌면 그녀가 세계에서 첫 번째 S등급 힐러가 될지도 모르겠다.
세상 불공평하네. 누군 죽어라 싸워서 버전 업 해도 등급 표시도 안 뜨는데. 물론 그녀가 S등급이 된다고 해서 던전을 돌거나 마수를 때려잡을 일은 없겠지.
그녀의 손에서 초록빛이 서서히 잦아듦과 동시에 배의 고통 또한 사그라들며 상처는 말끔히 아물었다.
그렇게 순식간에 재생 치료가 끝났다. 불과 걸린 시간은 10분 남짓이었다. 그녀가 일어나자 힐러 한 명이 포션을 들고 왔다.
내가 일어나 받으려 하자 문창표가 말했다.
“그거 채수진 힐러님 거다.”
“네? 저는요?”
“넌 사서 마셔!”
“와! 자그마치 천억 원인데 서비스가 너무 박한 거 아닙니까?”
채수진이 내게 포션을 건네며 말했다.
“제 거 드세요.”
“말이 그렇단 거죠.”
그렇게 나오면 내가 뭐가 되나. 사람이 너무 진중해서 탈이다.
속으로 투덜거리고 있는데, 대뜸 문창표가 내게 말했다.
“사무실에서 보자.”
* * *
나는 문창표의 사무실에서 와이셔츠를 갈아입었다. 뚫렸던 배를 만져 보며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채수진의 재생이 대단한 건 알았지만 이 정도일 줄은.
그나저나 천억이 이렇게 쓰기 쉬운 거였구나.
이때, 문창표가 내게 말했다.
“앉아라.”
내가 자리에 앉자 그는 내 눈을 뚫어져라 봤다. 나는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그렇게 능력을 안 쓰셔도 됩니다.”
“몸에 밴 습관이다. 그보다 왜 안 피했냐?”
“피하긴 했지만, 김규석의 능력이 제 생각 이상이었습니다.”
“나는 현재 의문투성이다.”
“저도 그렇습니다. 등급이 뜨지 않을 거라곤 상상도 못 했거든요,”
그가 나를 보며 말했다.
“그래서 말이다.”
“싫습니다.”
“말이나 듣고 거절해, 인마!”
“안 들어도 뻔하지 않습니까?”
그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때도 그의 말을 들었다가 6년간 관리국을 드나들었다. 물론 내 말을 유일하게 믿어 준 그가 고맙지만.
정적이 흐르는 동안 애꿎은 시계 초침만 들렸다. 그리고 문창표가 먼저 입을 열었다.
“B급 던전까지 출입 허가 어떠냐?”
“A등급까지 해 주세요.”
“녀석아, 이것도 널 생각해서 말하는 거다. 게다가 넌 현재 벌금이며 살인 혐의까지 복잡한 상황이란 말이야.”
“전격 사용 능력자는 소영삼 씨지 않습니까? 저는 무능력자로 판정 났고요.”
“그 건은 그렇다 치는데. 네가 매입한 던전은 문제가 다르잖아.”
“저는 무능으로 판정 났으니 부정 등록자도 아니죠.”
“등급이 안 나왔어도 신체적인 능력은 B급 이상이잖아!”
“법상으론 전 부정을 저지른 것 없습니다.”
“알았다. 알았어.”
그가 미간을 손으로 주물렀다.
꼬박꼬박 말대꾸 하는 나 때문이겠지. 나는 슬며시 말했다.
“그럼, 제가 관리국에 협조하는 대신 던전 등급은 서서히 완화해 주세요.”
문창표는 내가 한 발짝 물러서자 마지못해 답했다.
“후, 그래. 그러자. 그전에 살인 혐의는 어쩔 셈이냐?”
“제가 왜 그런 일을 벌였다고 하는 건지 참 궁금하네요.”
“그걸 왜 내게 물어?”
“말이 그렇단 겁니다.”
나는 빤히 문창표를 봤다. 그가 내 표정을 보며 물었다.
“할 말 있는가 보다?”
나는 조심스럽게 말했다.
“제가 감정 능력이 있다면 믿으시겠습니까?”
그는 내 눈을 똑바로 주시하다가 속이 터지는지 관자놀이를 양손으로 문질러 댔다.
“거짓이 아닌 것은 안다만. 감정사들이 너는 능력이 없다고 하니, 이거 참.”
그가 다시 나를 보며 물었다.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뭐냐?”
“갑자기 능력이 사라진 헌터가 있습니까?”
그는 흠칫거리며 나를 봤다. 그걸 어떻게 알고 있느냐는 표정이었다.
“아저씨 표정을 보니 있나 보군요.”
“그걸, 어디서 알아냈냐?”
나는 얼버무리며 답했다.
“확실하지 않으니 말을 아끼겠습니다.”
“뭐가 확실하지 않다는 거야?”
“조금 더 확인해야 알 것 같거든요.”
그가 심드렁하게 말했다.
“사람 궁금하게 만들어 놓고 쏙 빠져나가기냐?”
“네. 흐흐흐.”
그가 내게 손을 내밀었다.
“뭡니까?”
“각성자 등록증 새로 발급받아야지.”
“왜요? 등급도 그대론데.”
“번외에서 규격 외로 수정해야지.”
그의 말에 순간 마음이 동요됐다. 나는 지갑에서 등록증을 꺼내 봤다.
등급을 고칠 수 있다. 그토록 바랐던 등급은 아니지만, 규격 외란 말도 듣기 좋다.
그런데 망설여졌다.
몇 달 전 커크가 결정을 못 할 때 한명국이 해결했던 방법을 떠올렸다.
차분하게 눈을 감았다. 잠시 후 눈을 뜨고 등록증에 적혀 있는 번외를 내려다봤다.
나는 피식 웃으며 지갑에 등록증을 다시 넣었다.
“번외로 두시죠.”
“왜?”
“규격 외나 번외나 어차피 말장난이잖아요.”
그가 나를 빤히 쳐다봤다. 나는 빙긋 웃으며 말했다.
“저는 번외란 말이 좋습니다.”
어차피 난 번외가 맞다. 그가 피식 웃었다.
그때였다.
똑똑.
문창표의 사무실에 직원이 들어왔다.
“무슨 일이야?”
직원이 말을 꺼내기도 전에 낯선 남자들이 들어와 신분증을 내밀며 말했다.
“이지완 씨. 당신을 최태원 살해 혐의로 긴급 체포합니다.”
나는 그들을 빤히 쳐다봤다. 그리고 문창표를 보며 말했다.
“김규석, 어지간히 열받았나 보네요.”
검찰이 내 말에 흠칫했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그들에게 손을 내밀었다.
휴, 세상 참 더럽다.
* * *
경찰서 내부가 보였다.
형사들이 각자의 책상에 앉아 업무를 보고 있었다. 곧이어 이지완의 아버지 이상수가 헐레벌떡 뛰어 들어와 누군가를 찾듯 이리저리 둘러보자 형사 한 명이 고갤 들어 그에게 물었다.
“혹시, 이상수 씨 되십니까?”
그는 형사에게 다짜고짜 물었다.
“어디 있습니까?”
형사가 볼펜 머리를 딸각대며 말했다.
“고소도 취하했는데 이상수 씨가 올 때까지 가지 않겠다고 하더군요.”
“그 친구, 괜찮은 겁니까?”
“따라오시죠.”
이상수는 형사를 따라 형사계에서 나왔다. 복도를 걷다 보니 대기실 명패가 보였다.
형사가 문을 열자 이상수는 얼른 대기실에 들어섰다.
예전의 깔끔한 모습은 온데간데없는 초라한 행색의 최태원이 테이블에 놓인 국밥을 바라보며 우두커니 앉아 있었다.
이상수가 그에게 달려가며 외쳤다.
“태원이 이 친구야!”
최태원은 그를 보자 반가운 표정을 짓더니 다시 고개를 숙였다.
이상수가 맞은편에 앉았다.
짧은 침묵이 흐르고, 최태원이 먼저 입을 뗐다.
“고소를 취하했을 줄 몰랐습니다.”
이상수는 묵묵히 최태원의 말을 들었다. 최태원이 떨리는 목소리로 이상수에게 물었다.
“왜, 그러셨습니까?”
이상수는 물끄러미 그를 보다가 말문을 열었다.
“자네에게 화가 났었네.”
그의 말에 최태원이 고개를 푹 숙였다. 이상수가 다시 말했다.
“그리고 나 자신에게도.”
최태원이 놀라며 이상수를 봤다. 그는 최태원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온갖 궂은일은 자네가 도맡았지. 그만큼 난 깨끗했고 자넨 때가 탔지.”
“당, 당치도 않습니다.”
“17년 전 자네는 순진하고 때 타지 않았으니까.”
최태원은 예상치 못한 그의 말에 순간 목이 멨다. 이상수가 빙긋 웃으며 말했다.
“일신 그룹을 물 먹일 아이디어, 자네가 내 아들에게 알려 줬다지?”
“별거 아니었습니다.”
“별거 아니긴. 덕분에 오늘 아침에 시원하게 한 방 먹였네.”
“그러셨군요.”
“돌아오게.”
“…….”
“지완이에게 들었네. 아이 문제가 있다고?”
“형님께 그 말을 들으니 새삼 부끄럽군요.”
“당연히 부끄러운 일이지.”
“나가는 대로 관리국에 각성자 자진 신고를 하려 합니다.”
“그리고?”
“가족 관계를 정리할 겁니다.”
“그래…….”
“주연이와 정리가 쉽진 않겠지만요.”
이상수가 무언가 말을 하려다 한숨을 쉬며 입을 다물었다.
최태원이 어렵게 말을 꺼냈다.
“……형님이 용서해 주시면 조용히 들어와 쥐 죽은 듯이 살겠습니다.”
“그건 안 될 것 같네.”
“예?”
“자네가 세상을 떠들썩하게 해 줘야 해서 말이지.”
최태원은 난감해하며 이상수를 봤다.
* * *
살다 보니 검찰청이란 곳도 와 보고.
이때, 계장이란 남자가 문을 열자 나는 방으로 들어서며 내부를 둘러봤다.
조사실이 이렇게 생겼구나.
가운데 덩그렇게 테이블과 노트북 그리고 녹화 카메라가 보였다.
다행히 영화처럼 어둡고 살벌해 보이진 않네.
고개를 돌려 보니 유리창이 보였다. 아마도 저 너머에 날 잡아먹으려는 놈들이 있겠지.
“신체우월.”
신경을 곤두세우자 옆방에 인기척이 들렸다. 더욱 신경 써서 들어 보니 심장 소리가 들렸다.
두근, 두근, 두근.
저편에 3명이 있구나. 김규석의 예비 매형, 이인화 차장 검사도 있으려나?
이때 내 앞에 있던 수사관이 말했다.
“이지완 씨. 거기 앉으세요.”
나는 말없이 의자에 앉았다.
수사관의 질문 공세가 4시간 정도 지났다. 솔직하게 던전 레이드보다 더 피곤했다.
나는 눈앞에 있는 메모장을 들여다봤다.
그와 나의 대화가 토씨 하나까지 내 OS 메모장에 적혀 있었다. 이런 메모 기능은 정말 좋네.
메모장을 보며 깨달은 것이 있다.
수사관의 질의 형식만 살짝 바뀐, 유도 신문인 듯한 반복된 질문.
그들이 내게 원하는 핵심이었다.
그들이 원하는 것은, 내가 최태원을 죽였어야 한단 거다.
잠시 후 내 앞에 앉아 있던 검사가 유리창을 힐긋 보며 말했다.
“녹화 잠시 끊겠습니다.”
나는 그를 보며 말했다.
“그냥 두시죠?”
하지만 검사의 말에 녹화가 중단된 듯했다. 왜냐면 그가 나를 쏘아보며 어이없는 말을 했기 때문이다.
“혐의 인정하고 선처받지?”
나는 그를 물끄러미 보며 물었다.
“그 대가로 얼마 드셨습니까?”
“어린놈의 자식이 건방지게!”
나는 유리창을 노려보며 말했다.
“이인화 당신, 지금 실수하는 거야.”
순간 내 귀에 누군가의 심장이 급히 뛰는 것을 감지했다.
“김규석이가 OW를 집어삼키게 도와 달라던가요?”
유리창 저편에서 남자의 목소리가 내 귀에 들렸다.
“증거 다 메이드 됐나?”
“네, 한길 직원들 증언과 최태원이 행방불명될 당시 이지완의 행적. 그리고 이지완은 방송국을 퇴사하고 주변엔 다니는 것으로 위장했더군요.”
나는 그들의 말을 들으며 긴장했다. 남자의 말이 또다시 들렸다.
“이지완이의 휴대폰 위치 정보가 매번 인사동에서 사라졌습니다.”
혹시라도 모울에 대해 그들이 알까 봐 순간 머릿속이 아찔했다.
이때, 이인화인 듯한 남자의 목소리가 유리창 너머로 들렸다.
“일단 구속 수사로 돌리고 인사동 일대 CCTV 카메라 다 뒤져.”
“네? 그래도 도주 의사도 없는……. 아, 알겠습니다.”
안 봐도 이인화가 부하 놈을 눌렀단 걸 알 수 있었다.
그보다 큰일이다.
모울에선 통신 장비가 비활성화된다. 놈들이 모울의 정체에 접근하는 건 아닐까?
나는 잠시 눈을 감았다.
일단 침착하게 생각해 보자.
모울은 내가 지배자다. 놈들이 모울을 알아도 내게서 뺐을 수 없다.
중요한 건 이들은 내가 살인자가 되면 만사 오케이다.
그래, 이들이 나에게 누명을 씌우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최태원을 찾아 설득했었다. 그리고 이인화와 김규석을 한꺼번에 엿 먹이기 위해 순순히 여기까지 끌려왔다.
지금쯤이면 최태원도 아버지를 만났을 것이다.
나는 눈을 뜨고 유리창을 보며 말했다.
“이인화 씨. 경고하는데, 당신 그 자리 날아가는 수가 있습니다.”
그의 심장이 또다시 급하게 뛰었다. 나는 내 앞에 앉아 있는 검사를 노려봤다.
지금부터 이놈들은 내 손바닥 위에서 헛된 꿈을 꾸게 될 것이다. 김규석이 우리 OW 공장에서 내게 당했던 그때처럼.
자, 쇼타임이다.
“정신공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