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화
-던전 너머로 (3)
한참이 지나고 나는 안정을 찾을 수 있었다. 한미소가 얼굴이 피범벅인 채로 내게 말했다.
“남자가 그런 거로 쫄아서 되겠어요?”
“휴, 한번 당해 보십시오. 얼마나 두려운지. 내가 아픈 건 상관없는데 남이 그러니까…….”
조금 전 그녀를 떠올리자 또다시 내 머릿속이 붕 뜨는 듯했다.
“의외로 착하시군요.”
“그 의외란 말은 빼 주시죠. 저 매우 착한 놈입니다.”
한미소 말로는 내가 과호흡 증세를 보였던 모양이다. 그리고 OS 능력이 거부당한 것도 처음이었다. 그래서 더욱 당황스러웠다.
“그래서 그놈 이름이 뭐라고요?”
“벌머 크랙널이라더군요.”
“사람 이름 같네요. 그놈이 내게 저주를 건 장본인이겠네요.”
“그 저주 덕분에 아드님을 얻으신 건 아이러니하군요.”
“……그렇네요.”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그 보스 추적하는 방법 좀 알려 주시죠.”
“그렇게 호되게 당하고요?”
“그래서 용서가 안 됩니다.”
그녀의 얼굴을 보다가 눈살을 찌푸렸다.
“얼굴에 묻은 피, 어떻게 안 됩니까?”
“여긴 물도 없는데요?”
“인벤토리.”
[인벤토리입니다.]
생수 한 병을 꺼내 그녀에게 건넸다. 그녀가 대충 물로 얼굴을 헹구더니 옷으로 닦으며 말했다.
“일단 자리에 앉아 보세요.”
바닥에 한쪽 무릎을 대고 앉자 한미소가 차분하게 말했다. 아마도 조금 전 내 모습에 그녀 역시 다소 당황했던 것 같다.
이런 추태를 보일 줄이야.
“눈을 감고 누군가를 부른다는 이미지를 만드세요.”
“이미지요?”
“흠, 예를 들자면.”
내가 다시 눈을 뜨자 그녀가 골렘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 골렘의 주인을 부른다고 생각해 보죠.”
“막연하게 주인을 부른다고요?”
“길드장이 처음 방문한 집 앞에서 집주인을 부르면 어떨 거 같아요?”
아, 그렇구나.
막연하지만 누군가 응답한다는 가정이구나. 어쩐지 길드원들이 잘 따른다 했더니 그녀는 의외로 설명도 간결하고 잘 이끌어 주는 것 같다.
스르륵 눈을 감고 중얼거렸다.
“콜 스피리츠, 마력 감지.”
우우웅-!
골렘 주인 놈아, 나와라. 어이, 숨어 있지 말고 응답하라고.
반복해서 마음속으로 되뇌었다. 그때 그녀가 내 어깨를 두드렸다.
툭툭.
응? 뭐지?
“눈 떠 보세요.”
그녀의 말에 눈을 뜨자 감탄이 절로 나왔다.
아, 이럴 수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그녀가 내 허리를 툭 치며 말했다.
“가르칠 맛이 나는군요.”
선명한 보랏빛 선이 숲을 향하고 있었다. 말인즉 누군지 모를 놈의 마력이 내 마력의 낚싯줄에 걸려든 것이다.
그녀가 빙긋 웃더니 다시 말했다.
“오늘은 쉬고…….”
“지금 가겠습니다.”
“네? 아무 준비도 없이요?”
씩 웃으며 의기양양한 표정을 지었다.
“제가 인벤토리에 채워 둔 것만 해도 족히 몇십억 원은 될 겁니다.”
“뭘 채웠는데요?”
“음식과 잡다한 것들이죠. 아무리 채워도 계속 들어가서 좋더군요.”
“그, 그걸 몇십억이나 구매했다고요? 제정신인가요?”
그녀에게 한술 더 뜨며 말했다.
“테스트해 봤는데, 인벤토리에 넣은 음식은 그대로 보존되더라구요. 그래서 자장면도 꽤 많이 넣어 뒀습니다. 흐흐흐.”
그녀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럼, 갔다 오겠습니다.”
“부디 조심하세요.”
그녀를 뒤로한 채 보랏빛 선을 따라 걷기 시작했다.
* * *
얼마나 숲을 걸었을까?
졸음이 조금씩 쏟아졌다. 하지만 해가 떨어지지 않았다.
“시계”
어라?
내 체감이 이상해진 걸까?
한참을 걸었건만 겨우 1시간 30분 남짓 지났다고? 아니다. 나는 오랜 시간을 걸었다.
설마, OS 시계가 오류인 걸까?
하늘을 올려다보며 중얼거렸다.
“비행.”
[체공 시간은 5분입니다.]
지면을 박차고 뛰어올랐다.
피웅-!
차르르륵. 챠륵.
나뭇가지에 몸 이곳저곳 긁히며 하늘로 솟구쳤다.
그리고…….
와-!
감탄사가 절로 흘러나왔다. ‘부채’의 능력을 복사하길 잘했다.
이런 순간을 맞이할 줄이야.
나는 하늘에 떠 있었다.
주변을 둘러보자 광활한 나무숲이 펼쳐졌다. 손가락에 살짝 침을 묻혀 바람을 느껴 봤지만, 공기가 딱 멈춘 듯 높은 하늘인데도 불구하고 바람 따윈 불지 않았다.
그리고 숲은 마치 원시 산림이 연상됐다.
이대로 날아간다면?
제한 시간 5분이라도 날아가면 거리는 단축되지 않을까?
그러다 발아래를 보며 한숨이 절로 나왔다. 보랏빛 선이 보이지 않았다.
휴, 걸어서 가야겠네.
촤악-! 촤아악!
검으로 풀과 나무들을 쳐 내며 앞으로 걸어 나갔다.
어린 시절, 할아버지를 따라 숲에 들어갔다. 그땐, 벌레에게 쏘여 짜증 났었는데.
여긴, 식물만 존재했다. 뭔가 허전하고 심심한 느낌이 들었다.
참나, 벌레가 다 그립네.
그때,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들렸다.
더는 OS 시계를 믿지 않기로 했다. 숲에 들어와 숫자를 세어 보았다. 60까지 세었을 때 시계가 1분이 지나지 않았다.
점점 시간이 느리게 가는 듯이.
가다 보니 숲속 공터가 나왔다.
오늘은 여기서 쉬어야겠다. 그런데 장소가 좁은 것 같은데…….
“신체강화, 절대절단.”
두꺼운 나무 기둥을 향해 크게 검을 휘둘러.
촤아아악-! 촤악!
후두두둑 쿵 쾅 꽈당.
검으로 몇 그루의 거대한 나무를 쓰러뜨리자 제법 공터가 넓어졌다.
“인벤토리.”
[인벤토리입니다.]
노숙은 사양이다.
사실 구매한 건 생필품만이 아녔다.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이동식 주택을 불러냈다.
쿵.
공터 중앙에 작은 집이 생겼다.
이동식 주택을 150만 원에 샀다. 정말 운이 좋았다.
2~3천만 원은 하는 게 이동식 주택이다. 이민을 결정한 전 주인이 처치 곤란이라며 가져가라 했다.
그가 운반비를 말하며 자기 친척을 소개하는 그 순간 나는 그 자리에서 인벤토리에 담아 버렸다.
전주인이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던 것 같은데. 흐흐흐.
요걸 이렇게 연결하면. 오케이.
커크가 만들어 준 마석 발전기를 이동식 주택 전기선과 연결했다.
끼익. 딸각.
문을 열고 들어가 전기 스위치를 켜자 실내등이 들어왔다. 냉장고 도는 소리 또한 들렸다.
문명 만세!
물은 아껴야 하니까. 냉동 만두나 먹고 자야겠다.
땡!
전자레인지에 만두를 돌려 먹고 캔 커피를 꺼내 마시며 창밖을 봤다.
한없이 고요했고 적적함마저 들었다.
언젠가 대학교 선배가 혼자만의 시간을 갖고 싶다고 말한 적 있었다. 물론 회귀 전 일이었다.
그는 일찍 결혼한 선배였는데, 이런 말을 했다.
‘결혼해도 외롭더라. 혼자일 땐 그나마 여유라도 있어 좋았는데. 넌 결혼하지 마라.’
텅 빈 집 안을 물끄러미 보며 중얼거렸다.
“이게 혼자만의 여유란 건가?”
젠장, 생각해 보니 악담이다!
혼자 있으면 그저 외로울 뿐이다.
보랏빛 선을 따라온 지 며칠이 지난 걸까?
나야 지금까진 시계 능력 때문에 던전에서 날짜나 시간 개념을 알 수 없는 헌터들의 불편함을 몰랐다. 그런데 겪어 보니 여간 불편한 게 아니다.
푸드득.
깜짝이야! 새였구나. 저렇게 황금빛 깃털을 가진 화려한 새는 처음 봤네.
다시 걷다가 놀라 멈추어 섰다.
“새? 새라고?!”
정신을 차리고 둘러보니 숲속에 잡다한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비로소 숲속 적막이 끝났다.
나직이 중얼거렸다.
“신체우월. 기척 감지.”
이제부턴 긴장해야 한다.
뭐가 나올지 모른다. 어쩌면 숲속 원주민들이 덮쳐 올 수도 있고.
식인종 같은 게 있진 않을까? 과연 언어는? 벌머 크랙널하고 말이 통한 거로 봐서 문제없으려나?
그렇게 별별 생각을 하며 한참을 또다시 걸었다.
[마수 감지.]
마수라고? 하필 처음 만나는 게 마수라니.
멈춰서 검 손잡이를 고쳐 잡고 천천히 둘러봤다. 그러자 나무 사이로 회색 뿔이 달린 새하얀 말이 나를 보고 있었다.
유, 유니콘? 진짜 있었구나.
들뜬 마음에 유니콘에게 조심스럽게 다가갔다.
종족: 키메라
등급: A
고유능력: 숲의 감시자, 흡수.
HP: 35272
MP: 98950
맙소사, 키메라라고?
그 순간 기다란 생명체가 내 앞으로 달려들었다.
쉬이익!
초록뱀이 내 다리를 물었다.
큭!
[포이즌이 발견되었습니다.]
[치료 완료.]
천만다행이다! 다행히 이곳에서도 백신이 듣는구나.
초록뱀이 뒤로 빨려들 듯 물러나기 시작했다. 놈을 쫓아 빠르게 팔을 휘젓자 놈의 머리가 검에 썽컹 잘렸다.
쿠워어어-!
바닥에 뱀 머리가 떨어지자 괴성과 함께 거대한 나무가 힘없이 쓰러졌다. 그리고 키메라가 그르렁거리며 모습을 드러냈다.
놈은 말의 머리에 곰처럼 보이는 몸통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초록색 뱀은 다름 아닌 놈의 꼬리였다.
한미소가 본 건 유니콘이 아닌가? 아니면 내가 운이 없나?
이런. 그녀가 말했던 유니콘 뿔은 파란색. 내 앞의 이놈은 회색이구나.
결론은 내가 재수 없는 거다.
놈은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내며 아래턱을 쩍 벌리며 괴성을 질렀다.
쿠워어어어!
재빨리 검 손잡이를 움켜쥐었다.
놈은 마수백과 사전에 없지만 감정한 대로면 충분히 해볼 만한 상대다.
놈에게 달려들려던 그때 갑자기 주변이 어둑하게 변했다.
등골에서 오싹한 기운을 쏴하고 타고 들었다. 두려움에 천천히 위를 올려다봤다.
그리고…….
딸꾹.
놀란 나머지 딸꾹질이 절로 났다.
딸꾹. 딸꾹.
젠장, 딸꾹질이 멈추지 않는다.
잠깐 숨을 멈췄다. 나를 내려다보는 놈의 심기를 건드리면 안 될 듯했다.
사실 다리가 얼어붙은 것처럼 움직일 수 없다. 처음 히드라와 싸울 때 느꼈던 감정이었다.
키메라 또한 위를 올려다봤다.
쿠워어?
놈이 괴성을 질렀다. 하지만 위협이 아니라 공포 때문 같았다.
역시나 놈이 허겁지겁 도망치듯 내 앞으로 마구 돌진해 왔다.
이 자식아! 왜 내 쪽으로 오냐!
울며 겨자 먹기로 검을 치켜들려던 그때, 키메라가 내 옆을 스치듯 빠르게 지나쳤다.
아악! 날 미끼로 만들었구나!
스르륵.
흡사 드래곤을 닮은 머리가 거대한 입을 쩍 벌리고 나를 집어삼킬 듯이 달려들었다.
다, 당한다! 오자마자 죽는 거냐!!
눈을 질끈 감고 말았다.
터업-!
커다란 덮개 닫히는 듯한 소리가 들렸는데도 아무렇지 않자 감았던 눈을 천천히 떴다.
살아 있다? 어째서?
조심스럽게 고개 돌려 위를 봤다.
거대한 괴물은 머리를 위로 향한 채 빳빳이 긴 몸을 세우고 키메라를 자신의 입 안으로 밀어 넣고 있었다.
그 모습은 마치 뱀이 개구리를 잡아먹는 것과 비슷했다.
텁, 와그작 텁텁.
놈이 입 안에 밀어 넣을 때마다 키메라의 뼈 바스러지는 소리가 흉흉하게 들렸다.
숨죽이고 시선을 뒤로 옮기자 괴물의 기다란 몸통에 붙은 검은 날개가 펄럭댔다.
드, 드래곤?
종족: 날개 달린 뱀(케찰코아틀)
등급: S-
고유능력: #$$^&, #%%*&, #$%$&.
HP: ???????
MP: ???????
이, 이놈이 보스? 오자마자 보스부터 만나면 어쩌잔 거지? 내가 이렇게 재수 없는 놈이었나?
그러다 숲으로 뻗은 보랏빛 선을 봤다. 놈은, 내가 찾는 놈이 아니었다.
꽈드득 꽈득.
뼈가 부서지는 소리에 놈의 불룩한 몸통을 봤다.
케찰코아틀은 기다란 몸을 꿀렁거리며 키메라를 소화하는 듯했다.
인벤토리에 검을 넣고 재빨리 단검을 꺼내 들었다. 어차피 싸운다면 내 손에 익숙한 게 더 좋다.
역시나 케찰코아틀이 나를 내려다봤다. 놈의 안광에서 붉은 기운이 감돌았다.
생각보다 너무 거대하다. 처음 싸워 봤던 히드라는 이놈에 비하면 새끼 뱀이다.
단검을 꽉 쥐며 중얼거렸다.
“신체우월, 무게 반감, 단칼.”
먼저 선공을……. 어?
케찰코아틀이 내 옆을 무심하게 지나기 시작했다.
스르르륵. 촤르르륵.
놈이 움직일 때마다 풀과 나무들의 마찰음이 들렸다.
어찌나 몸이 크고 긴지 한참을 내 옆을 지나쳤다. 그렇게 놈은 나를 무시한 채 숲속으로 자취를 감췄다.
풀썩.
긴장이 풀리자 주저앉고 말았다.
사, 살았다.
단검을 쥐고 있던 손바닥에 땀이 흥건했다.
보스도 아닌 놈이 S등급이라니…….
고개를 돌려 왔던 길을 봤다.
돌아갈까? 던전 너머에 생명체가 있다는 건 증명됐잖아.
그러기엔 멀리 온 것 같은데…….
그 망할 놈의 벌머 크렉널 상판대기도 못 봤잖아.
한미소에게 큰소리 빵빵 쳐 대더니 꼴좋다. 이지완!
조금 전 케찰코아틀 덕분에 현실을 깨닫고 급현타가 밀려들었다.
그러다 숲으로 길게 뻗은 보랏빛 선을 내려다보며 중얼거렸다.
“아까 같은 마수가 지천으로 깔린 건가?”
……잠깐, 뭔가 이상하다. 마수가 마수를 잡아먹는다고?
그런 건 본 적도 들은 적도 없다.
게다가 던전 마수는 인간을 발견하는 즉시 공격한다. 그런데 놈은 자연 속 뱀과 같은 행동을 했다.
혹시, 여기 마수는 불필요한 싸움은 피하는 걸까?
그렇다면, 강한 놈은 일단 피하면 된다. 운 좋게 버전 업되면 그때 가서 맞붙어도 될 거다.
어쩌면 우리 세계에 생기는 던전의 비밀이 풀릴지도 모른다.
결심이 서자 한결 마음이 가벼웠다.
그래, 계속 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