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1화
애증(愛情)과 애정(愛憎)
* * *
마켓템 사무실 밖이 상당히 소란스러웠다.
“놔 봐요. 여기 이지완 이사를 만나러 온 거라고요.”
“아, 글쎄. 내려가서 서류부터 작성하자고요!”
“잠시면 된다고요. 잠시라니까요.”
문을 열자 소란의 주인공은 다름 아닌 한서린. 그녀는 마켓템 경비원과 옥신각신하고 있었다.
역시 한서린이 찾아왔다. 그녀는 아직 자신의 아버지, 한명국을 사랑하고 있다.
애증이라고 하는 게 맞겠지.
그런데 기사 내용을 보니 내가 완전 악덕 오너 같던데. 왕혜선 이 여자, 내게 무슨 악감정이라도 있는 건가?
기사 내용은 이러했다. 한명국의 실수로 큰 계약 몇 개가 불발됐고, 그 책임으로 내가 그를 해임한다고. 그리고 마석 관련 특허권도 모조리 OW 일가로 돌린다는 내용이었다.
아니, 이걸 기사라고 쓰다니……. 이건 법상으로 불가능한데 그걸 곧이곧대로 믿고 내게 찾아온 한서린도 참. 솔직하지 못한 애다.
일단은 태연하게 대응해야겠다.
“왜 이렇게 소란스럽습니까?”
“이사님 죄송합니다. 이 여성분이 막무가내로…….”
경비원의 말을 단박에 끊고 매섭게 말했다.
“그래서 사옥 7층까지 저 여자가 올라왔다? 지금 그걸 핑계라고 말합니까?”
한서린이 당황한 듯 경비원을 감쌌다.
“그게 아니라 지완아, 내가 힘으로 여기까지…….”
그녀의 말을 무시하고 경비를 보며 말했다.
“윤회춘 씨. 오늘까지 정리하시고 퇴사하세요. 직원들이 당신 같은 사람 믿고 어디 무서워서 회사나 다니겠습니까?”
윤회춘 씨 본인은 모르겠지만 나는 웬만한 우리 회사 직원들의 이름을 외우고 다녔다.
회귀 전 나는 어지간해선 이름을 불린 적이 없다. 그저 계약직이었을 뿐이니까. 그래서 나는 우리 직원들 이름을 외우고 부르는 걸 좋아한다.
물론 기억나지 않는 신입사원 같은 경우에는 감정을 이용해 이름을 슬쩍 보기도 한다.
각설하고 윤회춘 씨는 내 말에 절망스러운 듯했다.
“이사님. 한 번만 용서해 주시면 앞으로 이런 일 없도록 하겠습니다!”
한서린이 망연자실하며 내게 말했다.
“지완아, 내가 잘못해서 그런 거라고 이분은 잘못 없어.”
“한서린 씨. 여기는 제가 다니는 직장입니다. 알 만한 분이 ‘지완이’라고요? 직원들이 날 어떻게 보겠습니까?”
그녀는 아무 말도 못 하고 입만 뻐금거렸다.
그때, 민석 선배의 말이 들렸다.
“뭔데 소란스러워?”
“아, 주 이사님.”
그가 한서린을 보며 물었다.
“이분은 누구……?”
조금 심하지만 기사대로면 난 천하에 몹쓸 악당이겠지.
“얼굴 좀 안다고 막무가내로 들어왔지 뭡니까?”
“휴, 이 이사가 유명세를 치르긴 하나 보네."
민석 선배가 윤회춘을 보며 말했다.
“뭐 해요, 내보내지 않고.”
한서린이 부들부들 떨며 나를 노려봤다.
“이런 식으로 내 아빠를 대한 거야?”
“한서린 씨. 회사는 말입니다. 가족이 아니에요. 월급 받은 만큼 일하는 곳이지.”
민석 선배와 마켓템 직원들이 멍하게 나를 봤다.
당연하겠지, 평소의 내 모습과 너무도 동떨어진 행동이니까.
선배가 얼른 나를 데리고 가까이에 있던 육지호 대표실로 들어오며 말했다.
“너 인마, 갑자기 왜 냉혈한 코스프레를 하고 그래?”
“휴, 저라고 좋아서 그런 거 아니니 이해해 주세요. 마켓템 내부는 선배가 알아서 정리해 주시고요.”
육지호가 배를 문지르며 물었다.
“이번엔 또 뭔가요?”
그가 자리에서 일어나 블라인드 틈으로 한서린을 보더니.
“저 여자분, 누구하고 닮았군요.”
“한명국 이사 따님입니다.”
“아, 한 이사님! 그런데 따님분 손은 왜 저렇죠?”
“저 손 때문에 팔자에도 없는 악당이 됐네요.”
“그건 또 무슨 말인데?”
“머리 아프니까 나중에 말하죠.”
그가 손가락으로 딱 소리를 내며 뉴스를 본 듯 내게 말했다.
“아, 아빠가 회사에서 잘린다니까 따지러 왔구나?”
“누가 자른데요? 그리고 그런 뉴스는 잘도 보십니다.”
“아냐?”
“그 지라시를 믿습니까?”
“와! 설마 이번 것도 너냐?”
나 아닙니다! 라고 격하게 소리치고 싶었지만. 그저 웃기만 하자 그가 팔짱을 끼며 물었다.
“너 인마, 어디까지 사악해질 셈인데?”
“이렇게 착한 악마 본 적 있습니까?”
“미친, 악마는 그냥 악마다.”
“모든 기준은 어디서 보냐에 따라 다릅니다.”
“아는 척하기는.”
그녀는 사옥에서 쫓겨났지만 내게 계속해서 문자와 전화를 걸어왔다.
해서 퇴근 후 사옥 앞에서 보자는 문자 하나만 남겨 뒀다.
육지호가 책상에 서류를 보며 땅이 꺼져라 푹 숨을 내쉬었다.
“휴, 이러다 엔터 쪽도 손대게 생겼네요.”
“힘드시죠?”
그가 서류를 흔들어 보였다.
“이도에선 한미소와 미아 호라크를 광고 모델로 원하더군요.”
“아마 이도 길드, 왕성한을 덮기 위한 이미지 광고겠죠.”
강남에 출몰한 던전의 피해가 정리되기 시작했고, 시민들은 당시에 참전하지 않았던 길드와 헌터들을 강하게 비판했다.
이도의 대응은 저런 식으로 크게 공을 세운 우리 길드원을 이용해 이미지 광고로 일반인들의 분노를 꺼뜨려 보려는 듯했다.
그런데 난 이해된다.
왕성한은 과거, 휠체어 신세를 졌던 인물이다. 당연히 무서울 수 있다. 겁먹은 게 죄는 아니잖아.
반면 일신은 길드의 직접적인 참전과 부회장 김규석의 참전이 상당히 호감으로 변했다.
육지호가 흥미로운 표정을 지었다.
“의외는 일신입니다. 차기 마법 휴대폰 광고 모델로 샬롯과 최승현 씨를 발탁했더군요.”
“김규석 부회장이 직접 제안한 거라 솔직히 저도 놀랐습니다.”
사실 김규석이 샬롯에게 크게 관심을 가져서 당황스럽기까지 했다. 그 사람도 취향 참 이상하다.
살롯은 김규석 말만 나오면 짜증을 냈으면서 광고비를 듣더니 바로 찍겠다는 것도 참 어이없긴 했다.
하기야 광고비 5천이면 싼 건 아니다. 그저 각성한 일반인의 광고비로는 비싼 편이었다.
민석 선배가 또다시 내게 시비를 툭 걸었다.
“헌터 일 때려치우고 에이전시나 차리지 그래?”
“한때입니다. 다만…….”
“다만 뭐?”
“물 들어올 때 노는 저어야죠. 흐흐흐.”
육지호가 위장약을 쭉 빨아 먹으며 말했다.
“웃지 마시죠. HBS ‘헌터의 시간’ 협찬만 해도 머리 아플 지경이니까요. 거기 섭외된 헌터들 모두, 저희가 관리해야 하는 상황이라고요.”
현PD의 설득이 통했는지 차석재부터 태우까지 내가 추천했던 모든 사람이 ‘헌터의 시간’에 출현하기로 했다.
그러다 보니 에이전시도 아닌 우리가……. 정확히는 육지호가 저렇게 고생하는 중이다.
“육 대표님, 왜 혼자 떠안는 겁니까? 엔터 부서를 설립하고 사람을 뽑으세요.”
“눈에 차는 사람이 있어야죠.”
하기야 계산이 명확한 육지호 입장에선 엔터 분야는 기묘한 곳일지도 모른다.
알게 모르게 잘 봐 달라는 의미로 명목도 출처도 모르는 돈이 오가는 곳이기도 하니까.
그래도 혼자 이것저것 다 떠안으려는 건 좀…….
괜찮은 인물을 물색해야겠다.
* * *
회사 입구에 나오자 건물 앞 벤치에 한서린이 넋 놓고 앉아 있었다.
그녀의 잘린 왼손을 보니 내 마음이 불편했다. 내가 이 정도인데 한명국은 오죽할까.
제 아빠 속도 모르는 답답한 계집애. 그러면서 내게 찾아와서 따지는 모순.
이 답답이를 어떻게 해야 하나.
“설마 기다린 겁니까?”
“너, 이런 애였어?”
“도통 이해를 못 하겠군요. 한서린 씨, 당신이 뭔데 남의 회사 일에 참견입니까? 상당히 불쾌하군요.”
그녀는 말문이 막혔는지 입만 벙긋거렸다. 그저 웃기만 하고 남 부탁 잘 들어주던 나였으니 그럴 만도 하겠지.
“이게 전부 당신 때문입니다.”
“뭐라고?”
“딸 손모가지가 날아간 건 회사 부대표로서 안타깝게 생각합니다만…….”
나는 뒷말을 살짝 흐렸다가 더욱 그녀를 도발했다.
“그런데 말입니다. 그건 한명국 씨 개인사죠. 어디 고액 연봉자가 그따위로 행동하는지.”
“야! 이지완!”
“이봐요. 한서린 씨! 내 말 아직 안 끝났습니다.”
그녀가 입을 앙다물고 노려봤다.
이 말을 하면 네가 어떤 식으로 나올지 궁금하네.
“무단결근, 일도 하는 둥 마는 둥. 요 며칠 전엔 협력사 미팅도 펑크 냈습니다. 무려 2천억 프로젝트였죠. 내가 이래도 봐줘야 할까요? 저는 오히려 퇴직금도 안 주고 내보내야 직성이 풀리겠는데요.”
그녀가 뜻밖의 말을 했다.
“너, 너도 가족이 있고…….”
“네, 당신과 다른 화목한 가족이 제겐 있죠. 그리고 저는 자기 편할 때만 가족 들먹이는 당신이 이해되지 않습니다.”
“뭐, 뭐라고?”
그녀가 휘청거렸지만, 더 매몰차게 말했다.
“참, 한서린 씨. 관리국에서 처음 만났을 때 기억납니까? 난 남의 집안일에 관심 없다고 제가 얘기했었죠? 그게 뻘소리인 줄 알았나요?”
“그, 그게 이런 뜻이었다고?”
그녀를 무시하듯 말했다.
“뭐, 어찌 되었든 제 아버지 친구분이시라 연구비는 두둑이 쥐여 주고 내보낼 겁니다. 물론 특허 지분은 포기시킬 생각입니다만.”
“그걸 연구한 내 아빠를 네 마음대로 하겠다고?!”
“그럼 못난 딸 대신해서 아들 노릇이라도 해 드려야 합니까? 피 한 방울 안 섞인 남한테요?”
나는 머리를 잠깐 긁적이다 중얼거리듯 그녀 속을 후벼 팠다.
“헌터란 직업이 늘상 부상을 안고 사는데, 딸 손목 하나 날아갔다고 회사 일을 분탕질하다니……. 한명국 씨 멘탈이 그렇게 약해서야.”
“그 입, 닥쳐.”
“아, 그러니 학교에서 연구원들과 손뼉이나 치고 놀았겠군요. 내 아버지가 주는 연구비로 말이죠.”
“너 따위가 뭐라고 내 아빠를 무시해!”
그녀가 손을 뻗으며 외쳤다.
“마리오네트!”
얼른 뒤로 물러났다.
“초인.”
꽈득꽈득.
순간 몸이 뻣뻣해졌다.
그녀는 한 손이지만 분노가 극에 달했는지 온몸의 힘을 쏟아붓는 것 같았다. 하지만…….
난 강해졌고, 그녀는 한없이 약해졌다.
그녀가 또다시 외쳤다.
“압살!”
큭! 이건 좀 아픈데.
“초음속!”
급하게 달려 그녀의 다리를 걸어 바닥에 넘어뜨렸다. 그리고 팔을 꺾으며 말했다.
그녀는 나머지 팔도 부러져도 상관없다는 듯 발악했다.
그런 녀석에게 버럭 소리쳤다.
“그렇게 아버지가 걱정되는 녀석이 아저씨 가슴에 대못질해 대는 거냐! 대체 어느 쪽이 네 모습이야!!”
“……뭐?”
녀석이 힘을 풀고 멍하게 날 올려다봤다.
“너, 너가 뭘 안다고…….”
“한서린! 그만 좀 징징거려! 너 지금 행동 앞뒤가 안 맞잖아! 아저씨를 철저히 미워하고 무시하던 네가 인제 와서 효녀 행세냐고!”
나를 올려다보던 그녀의 눈에서 살짝 눈물이 고이고 있었다.
이 자식, 충격이 큰가 보네.
나도 힘들다. 여기까지 하자…….
“서린아. 이상한 고집 그만 부려라. 친구로서 부탁이다. 아저씨 너 때문에 너무 힘드시다고.”
“……네가 뭘 안다고.”
“아저씨도 너의 엄마 임종 못 지킨 거 후회하신다고! 그러니까 그만 용서해 드려.”
녀석이 바닥에 벌러덩 눕더니 크게 웃다가 또다시 목 놓아 울었다.
길바닥에 앉아 녀석을 지켜봤다.
그래, 마음을 푸는 방식은 각자 다른 거니까.
그런데…….
찰칵찰칵.
찍지 마라! 인간들아!
젠장, 이상한 뉴스가 뜰 것 같은 이 불길한 느낌은 또 뭐지?
그래도 그날 이후 녀석은 재생 치료를 받았다. 나머지는, 부녀가 알아서 하겠지.
그리고 문창표의 강력한 건의로 예외적으로 500억을 할인받았다고 했는데.
난 공무원의 꽉 막힌 셈법을 이해 못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