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8화
-독은 독으로 치료한다 (6)
* * *
화상 통화가 끝나자 왕호우는 생각에 잠겼다.
‘문창표 그자는 절대 빈말을 내뱉지 않는데. 어떤 오만한 놈이 그딴 말도 안 되는 예언을 했단 말인가? 게다가 참가하겠다는 길드가 JW라고? 그곳의 수장이 리천을 박살 냈다고 그랬던 것 같은데…….’
그는 인터폰을 눌렀다.
-네 부장님.
“유가량 과장 불러 주게.”
잠시 후.
왕호우 부장실 문이 열리며 큰 키에 허리가 구부정한 유가량 과장이 들어섰다. 한눈에 봐도 생기라곤 찾아볼 수 없는 모습이었다.
그는 게슴츠레하게 눈을 뜨고 힘없이 입을 열었다.
“부르셨습니까…….”
“서긍은 어떤가?”
“녀석이라면 훈련실에서 트레이닝 중입니다…….”
그의 말에 왕호우의 입꼬리가 실룩샐룩했다.
“얼마나 대단한가. 한 손을 잃고도 저렇게 건재함을 보이니.”
“……오른쪽 다리, 왼팔 그리고 이번에는 왼쪽 손목.”
“하고 싶은 말이 뭔가?”
“서긍의 싸움 방식은 조잡하고 능력에 의지하는 경향이 심합니다.”
“그 힘에 눌린 자네가 할 말은 아닌 듯싶은데?”
“그럼, 서긍을 지원하다 다친 헌터들은 어쩌실 겁니까……?”
“영웅을 지켰으면 되지 않겠나?”
“……그렇군요.”
유가량 과장의 입에서 한숨이 새어 나왔다.
‘억지로 만들어진 SSS등급. 놈을 위해서 희생된 뛰어났던 내 동료들. 그런데 네놈은 서긍만 챙기는구나. 큭큭큭.’
그는 생기 없는 눈으로 또다시 입을 열었다.
“말씀 끝났으면 가 보겠습니다…….”
“혹시, 사흉의 악행에 변화가 있나?”
유가량은 순간 흠칫거리다가.
“늘 똑같습니다…….”
그가 말끝을 흐리는 이유는 늘 마음속으로 뒷말을 했기 때문이다.
‘주 단위로 마수를 때려잡느라 얼마나 많은 헌터들이 다치고 죽었는지 네놈은 전혀 개의치 않겠지만.’
왕호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말인즉 던전엔 별일 없고 문창표는 사기꾼에게 속고 있거나 예언이 잘못된 건 불 보듯 뻔했다.
“흠, 별일 없다는 거군.”
“…….”
“그만 나가 보게. 서긍은 얼마 후 한국으로 보낼 걸세.”
유가량은 돌아서 문손잡이를 잡으며 날카롭게 눈을 떴다.
‘네놈은 최악의 상황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 그곳을 방치한 지 어언 석 달이 넘어섰으니까. 그 잘난 서긍을 한국에 보내고 네놈 혼자 가서 잘 막아 봐라. 내 마지막 선물이니까.’
* * *
김규석의 말이 끝나자 엄혁권은 멍하게 입을 벌렸다.
“네가 그런 표정 짓는 걸 처음 보는데.”
“이지완이 진짜 그렇게 말했다고?”
“설마 내가 농담하겠냐?”
“그 증거 중 하나로 사흉의 악행에 던전 브레이크가 터질 거다?”
“솔직히 말도 안 되지. 중국 당국도 그곳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으니까.”
“…….”
“그런데 혁권아, 만약 이지완의 말대로 된다면 우린 어떻게 해야 하지?”
김규석의 질문에 엄혁권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피식 웃고 말았다.
“차라리 지구에 소행성이 다가오고 있다면 핵이라도 쏘라고 하겠지만. 이건 그런 차원이 아니잖아. 왜 일어나지도 않은 말에 흔들리고 그래?”
김규석은 크게 숨을 들이켜더니 결심을 굳혔다.
“예언이 적중되는 순간 일신 길드 전체를 개편할까 한다.”
“……이지완은 널 끌어들이고 싶은 거다. 잘 판단해야 한다고.”
“내가 볼 때도 그런 것 같더군. 그런데 말이다. 이지완은 절대로 그런 심각한 농담을 할 놈은 아니란 거지.”
조용히 듣고 있던 엄혁권에게 김규석이 허탈하게 말을 이었다.
“이제야 일신이 궤도에 오르는데 이지완이 그런 말을 던질 줄은 몰랐다.”
“이렇게 하자. 믿든 안 믿든 일신 길드가 강해지면 우리로서는 좋은 일. 그러니 이지완이 주는 정보가 있다면 그냥 준비만 해 두자고.”
“……엉뚱한데 힘 빼지 말자.”
“만약 이지완의 말이 사실이면?”
“뭘 일어나지도 않은 일에 그렇게까지.”
그러고는 엄혁권은 잠시 잠깐 상념에 잠기는 듯했다. 그저 묵묵히 김규석을 보던 엄혁권이 안경을 고쳐 쓰고 입을 열었다.
“이지완에게 빚 하나 지어 놓는 것도 나쁘진 않겠네.”
“그건 또 무슨 말인데?”
“내 계획에 반하지만. 문창표가 총장에 올라갈 수 있게 정철호를 끌어내리자.”
“뭣? 그건 안 된다고 이미 했을 텐데?”
“걱정하지 마라. 네 형 김규현은 내버려 두고 할 만한 일이니까. 대신 네가 움직여야 하겠지만.”
“역시 능력을 살아나니까 머리가 빨리빨리 돌아가나 보네.”
엄혁권은 손가락으로 수정을 가리켜 입을 열었다.
“내가 이런 일까지 능력을 사용할 만큼 바보는 아니라고.”
“하하, 하기야 엄혁권이 잔머리가 어디 가냐? 그래서 내가 뭘 어떻게 하면 되냐?”
엄혁권이 가늘게 눈을 뜨고 입을 달싹거렸다.
“지미 고든의 능력.”
그 말을 듣자 김규석의 표정이 잠깐 굳었다. 그러다 이내 엄혁권의 말을 알아들었는지 너털웃음을 짓고 말았다.
“정말 나밖에 못 하는 거군. 증거도 남지 않으니. 넌 역시 최고로 못된 놈이다.”
엄혁권은 그저 피시식 웃었다. 그에겐 최고의 칭찬이었으니까.
잠깐이 정적이 흐르고 김규석이 화제를 돌렸다.
“출소 전까지 일신 길드원들 분석해 줬으면 한다.”
김규석의 말에 엄혁권이 황급히 손을 내저으며 소리쳤다.
“야! 유리창 깨지 말라고!”
“하하하, 내 방식은 아니지만, 교도관에게 부탁해서 서류를 건넸다. 들어가면 받아 볼 수 있게.”
“휴, 너도 변했네.”
엄혁권의 말에 김규석이 체념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자 엄혁권이 눈치껏 화제를 휙 돌려 너스레를 떨었다.
“네가 넣어 주는 영치금 덕에 세상 편하게 지내고 있다.”
“미친. 거기가 편할 리 있겠냐. 소장에게 잘 말해 뒀지만 그래도 조심하는 게 좋을 거다. 이곳은 질 나쁜 각성자들이 많으니까.”
“네 덕분에 정신계 각성자들 공격은 잘 막아내고 있다.”
김규석은 살짝 눈썹을 꿈틀거렸다. 엄혁권을 건드리는 건 자신을 건드리는 것과 마찬가지인데 감히 어떤 미친놈일까 싶었다.
“그런데 이지완이 붙여 준 능력이 안 먹히는 것도 있더라.”
엄혁권의 의외의 말에 김규석은 상념에서 깨며 물었다.
“응? 그게 뭐지?”
“상담사 중 거짓 판별 능력자들에게 안 되더라고. 시험 삼아 거짓말 몇 번 해 봤는데 바로 알더라.”
“그 말은 이지완도 문창표에게는 안 통한다는 말이 되는 건가?”
“그렇지. 그러니 알고 있어라.”
“매번 고맙다.”
“그보다 네 형은 어떻게 지내냐?”
“여전히 허튼짓 중이지만 크게 개의치 않는다. 아버지도 형에게 그다지 기대도 없으시고.”
“나라면 쳐 죽였을 텐데. 너도 참 웃기는 놈이다.”
“죽이고 싶었지.”
“그런데?”
김규석은 답변을 피하고 엉뚱한 질문을 던졌다.
“네 동생은, 면회는 오고?”
“내가 각성자 교도소로 옮기고 녀석이 찾아오긴 했지.”
“안 봐도 난리 났었겠네.”
“출소 후에 일신 길드로 간다고 했더니 다음 날 와서는 던전 관련 서적을 넣어 주고 갔다.”
“그래도 우리 형보다 낫네.”
“그 후론 안 오더라.”
둘은 서로를 빤히 보다가 크게 웃고 말았다.
* * *
방에 들어오자 나도 모르게 침대에 철퍼덕 누웠다.
휴, 얼마 만에 내 방에 들어온 건지 모르겠다.
집으로 오기 전 필리쁘를 만났었다. 호주 관리국 부장 완다 헤밀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아주 재밌는 사실을 알게 됐다. 그녀가 원하는 게 나와의 교류라니.
그걸 필리쁘가 거절하자 그녀는 노골적으로 그의 방문을 까고 있던 거다.
말인즉 왕혜선이 그녀를 만나도 결론은 똑같다.
그렇다면 완다 헤밀턴의 생각이라면 뻔하다.
자신이 뒷배가 돼 줄 테니 뒷돈을 요구할 생각일 것이다. 어찌 된 게 각 나라 관리국들이 하나같이 엉망인 건지.
중국 던전 브레이크 이후 그녀를 직접 만나 봐야겠다.
그건 그렇고 이제 포인트로 업데이트해야 하는데…….
저번 업데이트는 알루 덕분에 쉽게 넘겼다. 게다가 버전 업도 순조롭고. 하지만 이번 업데이트는 괜찮을지 고민이 드는데.
허공을 노려보자 창이 열렸다.
[스토어입니다!]
스토어 창을 보며 또다시 고민에 빠졌다.
무기는 내가 굳이 살 만한 게 없다. 썸머가 있으니까. 썸머가 아니라도 얼마 전 얻은 클라우 솔라스 검도 매우 훌륭하다.
방어구 또한 지금까지 신경 쓰지 않았다. 자가 치유 능력이 있으니까. 그래서 유일하게 기능팩에만 매달렸었는데…….
혹시나 모를 신의 감시를 피하고자 흑막을 사용했더니 스토어에 새로운 카테고리가 생겼다.
혹시나 해서 흑막을 꺼 봤더니 해당 카테고리는 사라졌다.
‘5군주’라는 기묘한 카테고리.
흑막이 인터넷으로 따지면 IP 우회 같은 건가? 그럼 불법 사이트나 어둠의 경로 같은 거잖아.
갈수록 환장 스페셜이다.
알루가 말했던 신의 형제가 거느린 놈들이 5군주라 했다. 그런데 흑막을 얻었더니 이런 카테고리가 생길 줄은 예상 밖이었다.
그래, 눌러나 보자.
뭔지 알아야 판단이 설 테니까.
그렇게 마음먹고 조심스럽게 손을 뻗어 탭을 눌렀는데…….
내 머릿속은 더욱 복잡해졌다.
대체 이런 게 왜 생긴 건지 알다가도 모르겠다.
정신을 차리고 5군주 탭 아래에 생성된 5개의 칸을 읽어봤다.
“태초의 군주. 어둠의 군주, 영혼의 군주, 광기의 군주 그리고 공간의 군주라고?”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방을 서성거리다 보니 문창표가 지금껏 왜 그렇게 우왕좌왕했었는지 이해될 듯했다.
나 또한 심장이 두근거려 진정할 시간이 필요했으니까.
놀라운 건 이들이 다스리는 나라에 방문하는 티켓을 포인트로 구매 가능하다는 거다.
다만 포인트 소모가 상당히 크다.
고작 반나절에 10000P 그리고 하루는 무려 100000P였다.
“계산법이 뭐 이래?”
반나절이면 3시간. 하루는 24시간이니까 그렇다면 총 80000P가 정상인데. 무려 20000P나 더 뜯어가는 계산법이 어딨지?
그러다가 다른 군주들의 티켓을 살펴보니 반나절은 똑같지만, 하루의 가격이 제각각이었다.
뭔가 있는 것 같은데……. 유추해 보자.
우리가 사는 세계도 비행기 가격은 다르다. 그럼 거리 대비 가격이 다르다?
아니다. 반나절의 가격이 균일한 게 설명이 안 된다.
나라마다 돈의 값어치가 다른 것 또한 아니다.
그렇다면 이건 어떨까?
1만 포인트가 반나절 3시간 기준을 잡았을 때 나라마다 하루의 길이가 다르다면?
지구는 24시간이니 8만 포인트. 태초의 군주가 있는 그곳 하루가 30시간이라면? 10만 포인트가 맞아떨어진다.
계산이 잡히자 또 다른 군주가 있던 곳의 가격을 대입해 봤다.
어둠의 군주, 하루 체류비는 14만 포인트, 그렇다면 하루가 42시간?
그렇게 비교하고 살펴보자 각 나라의 하루 시간이 맞아떨어졌다.
휴, 내가 이과가 아니라서 숫자만 나오면 머리가 흔들흔들한다.
그러고 보니 드라이어드 영감이 살던 그곳도 하루가 기묘하게 달랐다. 밤도 짧고 낮은 엄청 길고.
문제는 7세계는 갈 수 없는 반면 이것들은 마치 내게 놀러 오란 듯이 포인트를 받아 처먹는다.
내게 우호적인 걸까? 군주들의 정체가 궁금하긴 하네.
잠시 휴식을 취한 나는 다시금 기능팩을 봤다.
앞으로 남은 기능팩은 총 10개. 그렇다는 뜻은 10개가 내 한계란 말이겠지.
기능팩 포인트도 터무니없다. 하지만 지금 포인트면 30이던 기능팩이 무려 35까지 가능하다.
그럼, 당연히 업데이트하고 힘을 계속 올린 후 5군주의 나라에 가 보는 게 더 유리하다.
지금껏 겪어 본 7세계 왕들은 내가 약하면 그저 가지고 놀려고 들었으니까.
5군주도 별반 다르지는 않을 것이다
[기능팩입니다.]
잠깐만, 전에는 ‘엔키’란 말을 쓰더니 이번엔 그냥 기능팩이라고?
흑막을 끄고 다시 시도해 보자.
[엔키 기능팩입니다.]
이럴 수가, 흑막을 사용하면 더는 꿈을 꾸지 않는 걸까?
흑막을 켜고 기능팩 5개를 구입하자. 상태창이 눈앞에 툭 떴다.
[업데이트 정보가 있습니다.]
[업데이트하시겠습니까? Y/N]
매번 이 상황만 되면 심장에 부담이 온다. 그런다고 안 할 수도 없고.
젠장, 일단 그래도 눕자. 잠들 수도 있으니까.
“예스.”
[업데이트를 시작합니다.]
[모든……. 모, 모든, 시스템 모든.]
어어? 이건 또 뭐냐?
그냥 제발 조용히 지나가자 좀!!
[업데이트가 완료됐습니다.]
끼야호!
나도 모르게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저번 알루 때와 마찬가지로 종료 없이 완료됐다.
한 마디로 더 이상 엿 같은 꿈도 안 꾸고 신의 손에 놀아날 일도 없다.
어떻게 변했는지 살펴보자.
이름: 이지완(중립?)
버전: 13.9.0
3500큐비트(Qubit)
램: -
디스크: -
배터리: 500000%
경험: 기능 팩 35
큐비트란 것도 올랐고 램과 디스크는 여전히 무제한 같고……. 배터리가 무려 5배나 뻥튀기됐다.
이 정도면 포션으로 해결되지 않을 것 같은데.
문제는 내 이름 옆 ‘중립?’이 상당히 불길하다.
다만 흑막을 끄자 중립에서 ‘그의 대리인?’이라고 바뀌긴 했다.
그래, 어차피 벌어진 일.
오늘 해야 할 일은 다 했다.
휴, 호주에 금도 차지해야 하고 문창표도 그렇고……. 요즘 들어 정신적으로 버겁다.
부캐를 사용할 때마다 여러 상황을 동시에 받아들이다 보니 더욱 피곤한 거겠지.
아, 얼마 만에 이렇게 잠드는 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