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8화
-차근차근 (4)
“고개 드세요. 그만하라고요!”
내 외침에도 문창표는 여전히 고개 숙인 상태였다.
망할 아저씨…….
내가 가장 꺼리고 부담스러워하는 행동을 서슴없이 하다니. 작정했구나.
하지만 여기서 섣불리 결정할 나도 아니다. 아무리 그의 부탁이라도…….
솔직히 사람들의 마음속 말을 알아듣는 차석재의 능력이 떠올랐다.
만에 하나 다른 마음을 품고 있는 자를 걸러낼 수 있으니까.
그전에 내 사람도 아닌 완벽한 타인에게 능력을 퍼주고 싶진 않다. 부득이한 상황이 아니라면.
내 능력에 대해 알고 있는 길드원 몇 명과 상의해 보는 게 좋을 것 같다.
미아는 듣자마자 반대할 것이다.
전에도 내 능력을 아무에게나 붙여 주는 걸 우려했으니까.
그가 아무리 생떼를 써도 이 민감한 주제는 이쯤에서 마무리 짓자.
“일단은 무슨 말인지 알아들었습니다. 그리고 계속 이 상태로 계신다면 다신 이곳에 안 올 겁니다. 그러니 그만하세요.”
그 또한 내가 한 번에 수락하지 않을 거란 것을 깨달았는지 한숨을 푹 쉬며 자리에 앉았다.
“정말 너무하는군요.”
“더한 것도 할 수 있다.”
“모울부터 해결하죠. 그리고 조금 전 아저씨께서 요청한 사안은 기대하지 마세요. 극도로 불쾌하지만, 아저씨이기 때문에 이 정도로 참는 겁니다.”
문창표가 다시 말하려 했지만, 자리에서 일어나 곧바로 문을 열고 모울로 돌아왔다.
젠장, 그가 무자비한 난제(難題)를 내게 떠넘길 줄은…….
일단 지금은 신이 숨겨 둔 금을 차지하고 모울의 양성화에 집중하자. 내가 정해 둔 우선순위를 차근차근 정리해 나가야 한다.
앞으로 협의할 사항들은 부캐가 다시 나서도 된다. 나는 황혼의 틈새로 올라가야 하니까.
그리고 포인트가 모이는 대로 5군주의 세계도 살펴봐야 한다.
뭐가 이렇게 할 일이 많은 건지.
부캐가 있어서 동시에 일을 처리할 수 있어서 다행이긴 한데…….
때론 자는 동안에도 머릿속에 부캐들의 활동이 계속 흘러 들어와서 피곤할 때도 많다.
내 솔직한 심정은, 미래를 알고 운이 따라 줘 크게 돈을 벌고 좋은 동료도 생겼지만, 지켜내는 과정이 2배는 더 힘들게 느껴진다.
* * *
본캐는 2명의 부캐를 남겨 두고 황혼의 틈새로 향했다.
그중 하나가 나다. 내가 맡은 임무는 광산 매입이다.
그리고 또 다른 부캐는 모울의 양성화를 위해 한국에 남아 있다.
마크 쉘비를 만나기 위해 캐나다로 향했더니……. 그는 휴가라며 발리로 갔다 한다.
이게 말이 되나?
놈이 나를 끌어낸 것도 당황스러웠는데, 약속을 잡은 그가 돌연 발리로 갔다니.
이거 혹시 까인 건가?
-어이, 이번 기회에 발리를 가 보는 게 어때?
“같은 부캐끼리 그러지 말자.”
-그래도 여행 다니는 게 좋지, 나처럼 방송사 들락거려 봐라. 겁나게 피곤하다.
또 다른 부캐는 모울의 임팩트를 언론에 띄우기 위해 현PD와 그리고 방송작가들까지 동원해 머리를 쥐어짜고 있다.
그래도 회귀 전 했던 일의 연장선이니 나보다 낫지 않나?
그때, 본캐의 감시하는 듯한 사념이 불쑥 들렸다.
-난 지금 죽어라 6층으로 가고 있는데 편한 소리 하고 있네.
하기야, 6층으로 향하는 본캐가 가장 미지의 영역이겠지. 이제부턴 정보도 없고 어떤 위험한 마수가 튀어나올지 모르겠구나.
회귀 전이라면 8층이 열렸겠지만, 현재 6층이 최고층이기도 하다.
-걱정하지 마라. 번 돈 다 쓰고 죽을 생각이니까.
“조 단위 돈을 어떻게 다 쓰고 죽냐?”
-이제 올라간다. 모두 수고해라.
본캐의 시선이 머릿속에 보였다.
6층으로 올라가는 방식은 하늘 위로 바위들이 띄엄띄엄 나선형으로 떠 있는 독특한 방식이었다.
여긴 S급 헌터가 아니면 갈 수도 없겠네.
바위와 바위 간격이 6미터 정도는 될 듯한데, 바위는 위로 오를수록 점차 크기가 작아지는 듯했다.
엄청나게 올라가야 하는데 자칫 떨어지면 골로 가겠다.
본캐는 비행 능력을 일부러 아끼는 듯한데…….
캐나다를 방문했던 필리쁘 덕분에 모울을 통해서 여길 왔길 망정이지, 비행기 타고 왔다면……. 열받아서 분통이 터졌겠지.
이번에는 발리로 가야 하는데 내 주변에 발리에 가 본 사람이 누가 있으려나.
아니지, 그전에 마크 쉘비의 관찰지를 들여다볼까? 이걸 안 보고 행동하니 이따위 불상사가 생겼으니까. 모울로 돌아가 그가 어째서 나를 피하는 건지도 알아야겠다.
샌프란시스코 모울로 돌아와 저스틴과 마주쳤다. 그가 미소를 보였지만 나는 여전히 불편했다.
인사동 모울로 가는 3번째 문으로 발길을 돌리자.
“지완. 잠시만 이야기하지.”
그의 말에 모울 홀에 가서 의자에 앉았다.
평소였다면 그의 얼굴을 똑바로 봤을 텐데…….
그는 내 마음을 아는 듯 직설적으로 내 가슴을 때렸다.
“내가 불편한가?”
“아닙니다. 그런 거.”
“아니라면서 지금도 눈을 마주치지 못하는군.”
“불편하다기보다 그때 일이 마음에 걸려서 그렇습니다.”
“인제 그만 편해졌으면 좋겠군.”
“…….”
“자네가 그렇게 나오면 나 또한 힘들거든. 그리고 얼마 전 이야기 들었네. 샬롯 앞에서 갑자기 눈물을 글썽였다고?”
아, 샬롯이 말했구나. 평소에 저스틴과 시시콜콜한 이야기는 안 할 거라 생각했는데.
“그만 털고 예전으로 돌아갔으면 싶네.”
“노력해 보겠습니다.”
“노력이 아니라 지금 당장 털어내게. 그리고 고개 들고.”
고개를 들자 그는 잔잔하게 미소를 지었다.
“자넨 충분히 숨길 수 있었지. 정황상 아무도 몰랐으니까. 하지만 이렇게 될 걸 알면서도 내게 말했지. 그것만 해도 난 충분히 감사하고 있네.”
“알겠습니다.”
“그리고 샬롯에게 그런 모습 다신 보이지 말게. 녀석이 단순해 보여도 눈치 하난 날 닮아서 빠르거든.”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화제를 바꿨다.
“이번에는 어딜 갔다 오는 길인가. 보니까 또 여러 명의 이지완들로 나뉜 것 같던데.”
“저는 캐나다에 갔다 왔죠.”
“그랬군.”
“약속을 잡고 갔는데, 바람맞았습니다.”
“이런, 탐욕의 마왕을 바람맞힌 상대가 더 궁금해지는군.”
“광산업자인데 발리로 갔다더군요. 그래서 저도 발리로 가 볼까 합니다.”
“흠, 자네가 그럴수록 오히려 좋지 않을 것 같은데.”
사실 나 또한 이게 맞나 싶긴 했다. 마크 쉘비가 어떻게 알았는지 필리쁘에게 나에 대해서 말을 꺼냈고, 담판을 지어도 나와 하겠다고 했으니까.
그래서 그곳까지 같던 나는 어처구니없이 퇴짜를 맞았다.
고로 관찰지를 볼 수밖에 없다. 그가 어떤 속셈을 가졌는지 알아야 했으니까. 그는 아직 그곳 광산에 금이 있는지조차 모른다.
주변 던전 2개가 내 소유가 된 것도 알 턱이 없고.
그래도 한시라도 담판을 짓고 황금을 정리하고 싶다. 신으로부터 모두를 지킬 확실한 보험이 필요하니까.
“세상에 이지완을 알면서 약속을 잡고 엿 먹였다? 그 친구 이름이 뭔가?”
“RNC 광물 회사 대표 마크 쉘비입니다. 혹시 아십니까?”
“하하, 설마 알 리가 있겠나. 다만 내 생각에 마크는 자네에게 호의적이지 않네.”
“어째서죠?”
“급한 사정이 생겼다면 연락을 했을 테지. 사업하는 사람은 신용이 생명이니까. 또한 어지간해서 이지완이란 것까지 알고 그랬다면 상당히 담이 크다고 봐야겠지.”
그의 말대로다. 그렇다면 혹시 내가 모르는 뭔가 문제가 발생했다는 건데. 어디선가 정보가 새어 나갔다?
그가 먼저 자리에서 일어나 늘 하던 대로 아이템과 마석 정리를 시작했다.
집으로 돌아온 나는 침대에 누워 마크 쉘비의 관찰지를 펼쳐봤다. 나와 꼬일 인연이었으니까 관찰지가 내 근처에 있었을 것이다.
한참을 볼 필요도 없었다.
망할! 그는 발리에 가지 않았다!
현재 호주에 있는 자신의 광산으로 향하고 있었으니까.
그렇다면 이제부터가 중요하다. 대체 누가 나에 대해서 말했는지.
계속해서 그의 관찰지를 펼치고 머릿속으로 필름처럼 지나가는 그의 과거 행적을 지켜봤다.
그리고 황급히 눈을 떴다.
미치겠네, 완다 헤밀턴. 끝끝내 이렇게 나온단 말이지. 그녀가 어떤 상황인지 알아야겠다.
그녀는 내가 두 던전을 매입한 것을 마크 쉘비에게 알렸다.
이것만 해도 내 계획을 그녀가 말아먹은 셈이다.
* * *
호주 관리국 총장실을 찾았다.
데이비드는 저번에 봤을 때와 달리 나를 크게 반겼다.
“이지완 회장 덕분에 엄청난 세상을 봤습니다.”
그는 비공식으로 모울을 방문했고, 현재 모울 양성화에 전념 중인 또 다른 부캐와 만났다.
그리고 우린 딱 한 곳만 그에게 보여 줬다. 다름 아닌 새로 만든 런던 모울이다. 공교롭게도 그는 영국을 보자 세상을 다 가진 듯 마구 비명을 내질렀다.
데이비드는 한참을 모울에 대해 침이 마르도록 이야기해댔다.
이 사람은 나이에 비해서 정말 말이 많구나. 슬슬 말을 끊어 볼까?
“그런데 어쩐 일로 다시 오셨습니까?”
그래도 스스로 물어보니 다행이네. 바쁘니까 빨리 알아보자. 지금 이 시각에도 마크 쉘비는 광산으로 향하는 중일 테니까.
“완다 헤밀턴 부장은 어떻게 지내고 있습니까.”
그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지더니 살짝 미간을 찡그렸다.
“그녀는 더는 부장이 아닙니다. 그리고 관계도 정리했고요.”
그래서 그 여자가 내게 칼을 겨눴다? 아니지, 그녀는 광물 회사를 알 턱이 없다. 이건 어떻게 설명해야 하지?
그럼, 분명 누군가 또 있단 말인데……. 합리적 의심은 JW밖에 할 수 없다.
내가 광산을 노리고 있단 걸 아는 사람은 나를 제외한 4명.
육지호, 민석 선배, 필리쁘 그리고 왕혜선이다. 그들은 내 사람인데…….
내 속도 모르고 데이비드가 흐뭇하게 미소를 지었다.
“덕분에 가족들과 더욱 가깝게 지내고 있습니다.”
그건 댁 사정이고. 왜 갑자기 개과천선을 이런 식으로 하냐?
또 다른 부캐로부터 사념이 들어왔다.
-금은 그렇게 쉽게 발견되는 게 아니야. 조급해할 필요 없다고.
-그렇긴 하지. 그래도 마크 쉘비가 그곳에 가고 있는 게 문제잖아.
-정 걱정되면 바로 그곳으로 가서 선택 감정으로 혹시나 모를 금을 인벤토리에 담든지.
그래, 이렇게 여기서 있을 이유가 없다. 내가 먼저 가서 혹시나 모를 돌발 상황을 정리하자.
“저는 그만 일어나 보겠습니다.”
“벌써 일어난다고요? 그러지 말고 제 가족과 함께 저녁 식사는 어떻습니까?”
아우 이 치킨집 할아버지야! 내가 지금 그럴 정신이 어딨다고? 라고 격하게 따지고 싶다.
“급한 일이 있거든요.”
아쉬워하는 그를 뒤로하고 급하게 모울로 돌아와 베를린 모울로 향했다.
광산 근처에 포털을 만들어 뒀다면 이런 고생은 안 할 텐데.
“로렐라이. 지금 당장 땅울림 던전을 열어 줘.”
로렐라이는 얼른 일어나 2번째 문으로 들어가 곡괭이를 집어 들었다. 그리고 뜻밖의 말을 꺼냈다.
“어디쯤?”
“어디쯤? 그게 무슨 말이야?”
“땅울림 던전 어느 위치를 뚫어 주면 돼?”
“로렐라이. 그곳 가 봤어?”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가 보지 않은 던전은 랜덤하게 뚫릴 텐데, 대체 무슨 소릴 하는…….
“로렐라이. 혹시 새로운 능력이 원하는 위치를 뚫을 수 있는 거야?”
“응. 가능해.”
그렇구나! 그녀의 새로운 능력 ‘던전 선택’이 그런 것까지 가능해졌구나.
“입구 근처로 부탁할게.”
그녀는 살짝 황금빛을 흘리며 곡괭이질을 했다. 안 그래도 아름다운 금발 머리가 더욱 아름답게 보였다. 나중에 그녀의 능력에 대해서 살펴봐야겠다.
그러다 허공에 떠 있는 바위에서 쉬고 있던 본캐가 사념을 급하게 흘렸다.
-로렐라이이게 물어봐. 황혼의 틈새도 새로운 능력으로 뚫을 수 있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