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4화
-초대
* * *
기자들과 방송국 사람들 앞에서 김동연과 포털 계약서를 주고받고 악수했다.
모울만큼이나 세상은 포털에도 관심이 상당했다. 특히 모울을 받아들일 예정 국가들은 영국에 만들어질 포털에 더더욱 관심을 가졌다.
외신들은 교통의 혁명이라는 기사를 내보내며 연일 방송에 대고 떠들어댔다.
0.08% 이것이 일신이 가져갈 모울의 지분이었다.
상의도 없이 지분을 늘리자 마켓템 내부에서는 탐탁지 않은 눈치였지만 대신 현지 업체와 지분을 나누는 구조를 나는 제안했다.
결론은 0.065%가 일신, 그들과 함께 할 현지 업체가 0.015%이다.
나로서는 이게 마지노선이자 김규석을 달래는 처우였다.
김동연의 옆에는 밝게 웃는 김규석이 보였다.
일신에서 사람을 풀어 데려올 줄 알았건만 낚시터까지 김동연이 직접 갔었다.
그들은 하룻밤 꼬박 낚시만 했고, 새벽이 돼서야 허심탄회한 대화를 나눴다.
김규석은 모든 걸 잃은 듯 흐느껴 울었고 김동연은 그런 아들을 처음으로 끌어안았다.
이때만큼은 김규석의 관찰지를 봤단 사실이 진심으로 미안했다.
지극히 그들의 가족사를 훔쳐본 거니 나 스스로 마음이 착잡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규석이 마음을 다잡고 오늘의 계약까지 오는 데 한 달의 시간이 소요됐다.
그를 기다려 주자는 내 말에 육지호를 비롯해 나머지 임원들은 이해할 수 없다고 했지만, 회장의 권한으로 그들의 불만을 일축했다.
처음 필리쁘가 말했듯이 포털 설치에 경험이 많은 일신이 적합하다고 생각했고, 현지 업체가 어느 정도 모울의 지분을 확보할 수 있게 되자 영국 정부도 나름 나쁘지 않단 눈치였다. 오히려 반겼다.
마켓템 임원들도 내 결정과 판단에 수긍했다. 영국 정부와의 잡음이 사라졌으니까.
내가 이렇게까지 했던 이유.
김규석은 몇 없는 SSS등급 각성자이자 기업가다. 분명 그의 존재가 필요한 날이 꼭 올 것이다.
계약이 끝나고 기자도 뭣도 없는 장소에서 김규석이 내게 먼저 손을 내밀었다.
의외였다.
그는 내 능력을 알고 난 후 웬만해서는 악수를 꺼렸었다.
김규석과 악수는 했지만 서로 아무 말도 건네지는 않았다. 그의 표정은 무뚝뚝해 보였다.
흥미로운 점은 그의 아버지 김동연처럼 그 또한 얼굴에 표정이 드러나 보이지 않았다. 한층 더 성장한 듯 보였다.
그렇게 모울과 포털의 구축을 위한 회사 간의 정리가 모두 마무리됐다.
이제 타국과 협의만 이뤄지면 해당 국가에 일사천리로 모울과 포털을 빠르게 정리할 수 있었다.
* * *
또다시 2달이 흘렀고, 모울을 받아들이겠다는 국가 또한 무려 19개국이다. 왕성한이 수주해 올 때마다 나 또한 모울을 늘려 나갔다.
아마 모울을 경험한 자국민들의 불만에 각 나라 정부나 정치인들이 등 떠밀렸겠지.
그래서 첫 단추를 성공적으로 성사한 왕성한의 공이 큰 거다.
일신의 포털부서 또한 내가 방문하지 않은 장소를 한 번에 정리하기 위해 그곳 사람들을 모울로 불러들였다.
내 능력 공간의 지배자를 탐했던 김규석답게 포털의 이해도가 상당히 높았고, 설치 또한 매끄럽게 진행됐다.
일신이 포털에 관심이 많은 이유 중 하나가 통신사업 부서 때문이었다.
포털과 함께 주변에 깔리는 인프라. 그중 통신사업을 해당 국가나 지자체에 비집고 들어간다는 전략이었다.
게다가 중국 통신사의 가장 큰 이슈는 국가 안보를 위협한다는 것이다.
반면 한국의 통신 장비의 신뢰도는 높았고, 중국 통신사가 밀릴 수밖에 없었다.
미국과 중국 그리고 러시아와는 모울 협의 자체를 미뤘다.
결국 참다못한 미국 정부에서 모울을 정식으로 받아들이겠다고 발표했다.
하지만 나는 협의가 이뤄진 것은 없고 미국 정부의 일방적인 발표일 뿐이라며, 모울을 미국에 설치할 의사가 없다고 다시 한번 못 박았다.
언젠가는 미국에 모울을 열겠지만, 감 놔라 배 놔라 하는 현 정부는 필요 없다.
중국 또한 어처구니없었다.
모울을 설치할 건물을 임대하는 계약 기간이 99년.
이해할 수 있다. 중국은 공산국가라 부동산의 개념이 다르니까.
문제는 다음 조항이었다.
99년 후 해당 건물과 토지 반환 시 모울 또한 포함이라 했다.
말인즉 계약이 이뤄지고 정치적 문제가 생긴다면 자신들이 모울에 적극적으로 개입하겠단 뜻이 깔려있었다.
나를 포함 JW 임직원 모두 헛웃음을 쳤다. 민석 선배가 그들을 보며 도발하듯 선을 그었다.
“그냥 비행기 타고 다니세요. 다신 여기 오지 마시고.”
건방지다는 둥 대국이 어쩌고 앞으로 중국 내에서 사업하기 힘들 거라는 별 시답잖은 소릴 했지만.
“아, 그거 아십니까? 유럽은 하늘길 운항을 줄인다더군요. 탄소 배출 규제를 강화한다면서.”
육지호가 살살 약 올리듯 그들 머릿속을 휘젓고 내보냈다.
모울을 양성화하고 흥미로운 상황이 벌어졌다.
EU에서 탄소 중립의 일환으로 모울이 없는 국가를 제외한 일반 여객기 운항을 5년에 걸쳐 줄여나가기로 결의했다.
고로 발등에 불 떨어진 건 미국, 중국, 러시아. 깡패 국가 삼인방이다.
러시아는 누가 양아치 아니랄까 봐 독일에 천연가스를 잠그겠다며 으름장을 놓고 있다.
그나저나 포인트도 꽤 모았고 5군주의 세계에 가 봐야겠는데…….
* * *
던전 너머 여행을 통해 우리와 다른 세상이 있단 것을 익히 알고 있다.
그리고 알루가 말했던 5군주. 그들이 지배하는 세상 또한 나는 알고 있다.
현재 내 힘은 SSS등급을 능가한다. 미아는 이미 황혼의 틈새 7층에 올라갔다.
그녀는 내가 7층에 오르지 않자 툴툴거렸다. 다행히 황혼의 틈새를 오르던 헌터들 중 SSS등급에 근접한 몇몇 각성자들이 5층까지 올라왔다.
상당히 괄목할 일이었다. 그들은 머지않아 6층으로 올라설 것이다.
상당히 순조롭다.
근데 SSS급이 된 크리스 리어는 어째서 아직도 4층에서 머무는 건지…….
휴, 그 인간은 머릿속에서 지우자. 정신건강에 해로우니까.
아우! 생각할수록 황당하네. 아이템에 뭘 그렇게 걸신들린 건지.
진정하자.
결정의 시간이니까.
[흑막을 활성화합니다!]
일단 흑막을 켜야 내 OS 스토어에 5군주의 세계가 보인다.
불법 동영상 내려받는 기분이네.
[스토어를 엽니다.]
창이 펼쳐지자 역시 5군주의 나라 탭이 보였다.
태초, 어둠, 영혼, 광기 그리고 공간의 군주.
“…….”
하나같이 범상치 않은 이름이다.
곰곰이 생각에 빠졌다.
어디든 놈들이 보낸 초대권은 쓰지 말자. 함정이 도사릴지도 모르고 두렵기도 하니까. 그리고 1만 포인트 딱 3시간 티켓을 구매하자.
가장 먼저 내게 호감을 표한 건 어둠의 군주였다. 그리고 가장 뒤늦게 보낸 건 영혼의 군주.
순서로 따지면 정보력의 차이 혹은 호감의 순서일 수도 있는데.
광기의 군주는……, 초대권, 티켓에 포인트까지, 뇌물이 아주 다채롭네.
아주 광적으로 보냈구나.
광기면 미친놈이란 말인데…….
“넌 무서워서 안 되겠다. 탈락.”
내 말이 들린 걸까, 눈앞으로 상태창이 미친 듯이 밀려들었다.
[광기의 군주로부터 포인트을 받았습니다.]
[광기의 군주로부터 티켓…….]
[광기의 군주로부터…….]
그만해라, 미친놈아!
손을 저어 놈의 상태창을 치우려던 그때.
[광기의 군주로부터 아이템을 받았습니다.]
응? 아이템이라니. 저 자식은 뭐길래 이렇게 안달복달 지랄발광이지?
스토어 창 아이템 탭이 미친 듯이 벌겋게 깜박였다.
열어 봐, 말아?
내 마음을 읽는 듯 아이템 탭이 파닥파닥 깜박이며 난리가 났다.
탭을 눌러 놈이 보낸 아이템을 확인하려 하자…….
[세트 아이템]
[초대에 응할 시 열람할 수 있습니다. 열람하시겠습니까? Y/N]
세트?
내가 아는 세트라면 갑주부터 검 혹은 칼 그리고 방패까지 모두 포함됐단 뜻인데.
다른 군주들은 얌전한데, 광기의 군주는 왠지 가볍고 사기꾼 기질이 다분해 보인다.
경박하고 급한 성격, 오히려 기분을 맞춰 주면 더 수월할 수도 있겠단 생각이 들던 그때.
[공간의 군주로부터 메시지가 도착했습니다.]
메시지? 이게 가능하단 사실은 처음 알았는데? 오늘 여러 가지로 놀라네.
[두 군주의 창 중 하나만 선택할 수 있습니다.]
이건 또 뭔……?
마치 나를 시험하는 것 같잖아.
허공에 떠 있는 2개의 창을 번갈아 봤다.
하나는 선물까지 보냈다. 또 다른 하나는 내게 대화를 청하는 듯하고.
왠지 상반된 성격 같단 말이지.
한참을 기다려도 나머지 군주로부터 반응은 없다. 2개의 창만이 내게 선택을 강요하듯 지켜보는 듯하고.
젠장, 저놈들 때문에 없던 결정 장애가 생길 판이다.
결정했다.
미친놈이 주는 세트 아이템을 선택하자. 말만 하는 놈보단 뭐라도 퍼주는 미친놈이 더 낫다.
고개를 돌려 공간의 군주가 보낸 메시지 창을 봤다.
“노.”
놈의 메시지 알림창이 서운하다는 듯 부르르 떨며 휙 닫혀 버렸다.
[광기의 군주 초대에 응했습니다.]
[아이템이 공개됩니다.]
무슨 뽑기도 아니고…….
괜스레 기대되는데.
아이템 창에 깜박이는 칸을 손가락을 뻗어 선택하자, 스르륵 빛을 발하며 생성됐다.
그리고 아이템을 보는 순간 내 표정은 그 어느 때보다 일그러졌다.
“미친놈아, 이게 어째서 세트냐?!”
[환상경 보조 세트]
환상경 사용 방법도 모르는데 세트? 이거 전부 펌웨어잖아.
아, 뒤통수 세게 맞았다.
[티켓을 사용하시겠습니까? Y/N]
“노.”
초대에 응하긴 할 거다. 그래도 놈이 주는 티켓은 거부할 것이다.
“포인트 구매 반나절.”
[1만 포인트가 차감됩니다.]
그런데 놈의 나라에 방문하는 건 OS 잠들기 같은 걸까?
내 의문을 풀어 주기라도 하듯 상태창이 뜨는 순간.
[환상경이 필요합니다.]
OS는 머릿속을 휘저어 놨다.
드라이어드 영감에게 환상경을 받았고, 지금껏 용도를 알 길이 없었다.
왕혜선의 기지로 손이 들어가는 것은 알게 됐었다. 하지만 그 안으로 비치는 것은 마수들의 기록 같았고 물건이나 마수를 만질 수는 없었다.
그런데 환상경이 필요하다니?
어떻게 사용하는 거지? 아니지, 나는 펌웨어 사용 방법을 모른다.
“그러니까 어떻게 설치하냐고?!”
[환상경 내부 왼쪽에 펌웨어를 설치할 수 있습니다.]
뭣? 내부 왼쪽? 갈수록 미치겠네.
처음으로 OS가 빠릿빠릿하게 답까지 알려 주다니. 어이가 없네.
방법을 알려 줬으니 왕혜선에게 환상경을 받아 와야겠다.
* * *
왕혜선에게 급히 연락해 모울에서 만나 환상경과 펌웨어를 건네받았다.
그녀가 입을 막고 하품했다.
“설마, 새벽에 이걸 찾을 줄은 몰랐네요.”
“잠도 안 오고 시간 때우기로 살펴보려고요.”
그녀는 어처구니없단 듯이 투덜거렸다. 하기야 아무리 회사 회장이라도 새벽에 전화해서 이걸 찾았으니 짜증 나겠지.
내 생각과 달리 그녀가 실눈을 뜨고 손가락으로 환상경을 가리켰다.
“뭔가 알아냈군요.”
“궁금해서 저도 손이나 넣어 볼까 합니다.”
역시 왕혜선은 눈치가 빠르다. 하지만 그녀의 말을 회피하듯 얼버무렸다.
괜한 호기심으로 왕혜선이 말려들 수도 있다. 위험은 나 혼자로 족하다.
그녀는 잠에서 깬 김에 내 옆에서 환상경을 같이 살펴보겠다고 했지만, 집에서 쉬면서 살펴보겠다는 핑계로 돌려보냈다.
딸각!
모울에서 방으로 돌아와 환상경을 노려봤다. 이 작은 거울 같은 곳에 손이 들어간다고…….
조심스럽게 손가락을 유리로 가져다 대자 살짝 물결이 일며 손가락이 쏙 들어갔다.
휴, 이걸 몰랐단 게 더 신기하네.
그런데, 내부 왼쪽이란 무슨 뜻일까?
다시금 손을 뻗어 환상경에 밀어 넣었다. 왠지 줄이 없는 테니스 라켓에 몸을 집어넣는 기분이었다.
환상경에 들어간 팔이 마치 포털처럼 반대편에 보이지 않았다.
말인즉 이건 포털과 비슷하단 건데…….
“아우, 내부는 알겠는데 왼쪽은 대체 뭐냐고?!”
환상경에 팔을 넣고 한참을 왼쪽 허공에 손을 휘휘 저으며 뻘짓거릴 펼쳤다.
슬슬 인내심에 한계가 왔다.
“안 가, 못 가 이것들아!”
그렇게 팔을 빼내다 어떤 쓸림이 손가락 끝에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