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9화
-다 들린다 (1)
광기의 군주가 커다란 사자머리를 끄덕이자, 놈의 사자 갈기가 치렁거림이 과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재밌네. 골드 드래곤이란 말이 무색하지 않구나.
그런데 광기의 군주도 나를 훔쳐본 것 같은데 다 알진 못하나 보네.
“7세계는 오로지 드라이어드 영감이 사는 곳만 가 봤다. 그리고는 댁의 나라가 첫 방문이고.”
“끄응. 그렇군.”
광기의 군주가 후회의 탄식을 깊게 내쉬었다.
얼굴을 보니 상당히 억울하고 재수 없단 표정이네.
그런데 황금이 우리 세계에 숨겨진 걸 아는데 어째서 양쪽 진영이 서로 보고만 있는 걸까? 그것도 주인 없는 땅이라고 명해 가면서.
혹시……?
“주인 없는 땅이 불가침 조약, 뭐 그런 거냐?”
“그렇다. 우리도 그들도 주인 없는 땅을 함부로 건드릴 수 없다.”
“누군가 침략한다면?”
“……전면전이다.”
전면전? 한 나라가 침공하면 자칫 3차 대전이 일어나는 우리 세계와 비슷한 상황이구나.
그동안 조금 답답했던 가슴이 조금 풀리는 듯한데. 이번 기회에 알아낼 수 있는 건 다 털어야겠다.
“너희와 적대적인 신이 어째서 내게 힘을 준 걸까?”
놈은 말없이 지그시 눈을 감았다. 그러다 체념한 듯 입을 열었다.
“인간인 그대가 군주가 되고 무주지의 주인이 된다면, 그대는 상대 신의 대리인으로서 금을 받칠 수도 있겠지. 이것이 상대 신의 노림수였을 것이다.”
놈의 말대로면 내가 그의 대리인이란 뜻이 설명된다.
말인즉 양 진영이 건드릴 수는 없지만 내가 가져다 바치는 건 어쩔 도리가 없단 말이구나.
그런데 난 그럴 생각이 없지만, 금만 포기하면 모든 게 해결되는 걸까?
“다시 질문하지. 만약 내가 그 망할 금을 신에게 건네면 이 어처구니없는 상황은 해결되는 것이냐?”
놈은 일말의 고민도 없이 답을 내렸다.
“무주지는 전장이 될 것이다.”
“어째서 그렇게 되지? 우린 더는 상관없을 텐데?”
“우리 세계가 전장이 될 수는 없으니까.”
콰아앙-!
광기의 군주 머리를 세차게 내려쳤다. 놈이 반항하려 들자 두꺼운 손목을 잡아 꺾고 복부에 주먹을 송곳처럼 꽂아 넣었다.
끄으윽 끅…….
놈이 신음하며 숨을 몰아쉬는 동안, 나 또한 놀랐다.
그리드 컴퓨팅 없이 내 순수 피지컬이 상당히 올랐다? 이건 예상 밖인데?
놈이 기운을 차리고 외쳤다.
“어째서, 어째서 이러는 것이냐!”
“더 맞자.”
퍼억! 펑.
분이 풀릴 때까지 놈의 머리를 제외한 나머지를 두들겨 팼다. 그래도 명색이 왕이라 얼굴에 표 나면 자존심 상할 것 같아 피해 준 건데.
홧김에 쓰러져 있는 놈의 코를 발질하고 소파에 털썩 앉았다.
“니들 땅은 소중하고! 우리 땅은 괜찮다? 무슨 개 같은 논리냐!”
“끄으윽, 당연하지 않으냐? 그, 그곳은 과거에도 전장이었는데…….”
저놈의 가치관에선 우리 땅이 별거 아닌 모양인 것 같다. 나머지 놈들도 비슷한 생각을 가졌겠구나.
망할 놈들.
잠깐만……. 혹시 이놈이 말하는 과거의 전장이, 꿈에서 봤던 그곳인가?
업데이트 때 양쪽 신이 싸웠던 곳이…….
후- 망할 것들. 그 흔한 풀 한 포기 없던 허허벌판이 지구라고?
화를 삭이고 놈의 커다란 눈을 노려봤다.
“너희가 전쟁을 펼쳤던 때가 언제지?”
놈이 육중한 다리를 일으켜 소파에 멀찌감치 앉았다. 처음 당하는 굴욕에 분노했지만 내 기세에 놈이 고개를 떨궜다.
넌 앞으로도 계속 처맞을 준비나 해라.
“언제냐고!”
“6500만 년 전이다. 내가 아는 것은 알려 줄 테니 같은 군주로서 대해다오.”
“닥쳐. 난 군주 아니니까.”
“그대의 격이 이미 군주…….”
“쓸데없는 말 계속하면, 네 머리하고 몸통 따로 나눠 주는 수가 있어.”
내 말에 놈의 전의가 꺾였다. 그리고 마음속으로 나를 불러들인 것을 한없이 후회했다.
놈은 나 정도는 충분히 누를 수 있다 생각했던 것 같다.
놈이 내게 잘 보이려 했던 건지 흥미로운 가설을 꺼냈다.
“상대 신은 그대를 대리자로서 전장에 세우려 했던 건 아닐까 싶은데.”
“이유는?”
“능력을 부여하고 거둬들이는 것은 신들의 권능이다. 그것을 그대에게 허락했단 건 다가올 결전에서 교착 상태를 깨겠다는 상대 신의 의지일지 모르거든.”
“너희는 어째서 그런 자를 내세우지 않았던 거지? 똑같이 할 수 있었을 텐데.”
“우리 신은 인간을 믿지 않지. 간악하고 상대를 언제든 속이는 존재들이니까. 나 또한 지금 당하는…….”
퍽 쾅. 텅-!
놈의 턱과 정수리를 무차별적으로 가격했다.
인간이 간악해? 지놈이 속아? 내가 무슨 비밀병기도 아니고. 나를 장기 말로 사용하겠다?
열받는 말만 늘어놓고 있네.
쓰러져 있던 놈의 육중한 몸을 일으켜 세웠다.
“야, 사자 새끼. 무슨 이상한 기미가 보이면 내게 재깍재깍 알린다.”
“…….”
“싫으면 죽든지.”
“적어도 동급의 군주로 대우해다오. 이런 처사는 지나치다.”
“5군주고 7세계고 모두 똑같이 만들 거니까. 오히려 그때 내게 처음 당했던 네놈을 네 오른팔로 세워 주지.”
놈은 말없이 한숨을 내쉬었다. 충격이 큰 듯해 보였지만 그건 내 알 바 아니다.
우리 세계가 전장이 된다면, 양 진영 모두 무너뜨려 놔야 한다.
각성자들이 아무리 강해져 봐야 이놈들을 상대하긴 버겁다. 그저 일반인 지키는 역할 정도밖에 안 되겠지.
사실 이번에는 광기의 군주가 방심했고 내가 운이 좋았다. 나머지 군주나 7세계 놈들이 이처럼 맥없이 당할 리 없다.
뭉쳐서 내게 덤벼든다면 나 또한 감당 못 할 것이고.
“가기 전에 한 가지 더 묻지.”
“휴……. 말해라.”
“모울에 대해 아나?”
“하나의 세계를 말하는 것인가?”
“하나의 세계? 그것도 망할 놈의 신들이 만든 거냐?”
“신들에게 배신당한 이가 만든 것으로 알고 있다.”
“배신당한 이?”
“그 이상은 모른다.”
배신당했다. 배신…….
어라? 난 그런 말들은 적 없는데.
또 다른 놈이 배신당했을까?
내 머릿속에 맴돌던 이름을 꺼냈다.
“그 배신당한 이가 알루인가?”
놈의 사나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알루가 맞구나. 진작 알았다면 모울에 관해 물어볼 기회였는데…….
회귀 후 내가 차지했던 모울부터 신에게 대항할 힘까지 모두 알루와 연관되어 있었다니.
왠지 알루에게 얻기만 한 느낌이다.
굳이 편을 나누자면 난 알루의 편이라 생각하련다. 그도 그 망할 신에게 복수를 원했으니까.
7세계와 앞으로 남은 4군주들의 구슬을 먹어 치우자.
우리 땅이 전장이 되는 건 어떻게든 막아내겠다.
광기의 군주가 모아둔 금을 모조리 인벤토리에 밀어 넣었다. 신기했던 건 놈이 모아둔 금은 고운 가루로 되어 있었다.
이유를 물었더니, 놈이 모시는 신이 원했다는 말만 했다. 군주는 내게 연신 울상을 지어 보였지만.
어쩌라고.
혹시나 해 질문을 던졌다.
“다른 군주들이 너를 훔쳐볼 수 있냐?”
“불가능하다. 나 또한 그렇고.”
그렇단 말이지.
“네가 다른 군주에게 오늘 일을 떠벌리면, 금가루 모두 바다에 쏟아 버리마.”
“아, 안 된다. 비밀로 하마.”
말은 똑바로 해라. 비밀이 아니라 쪽팔려서 입 다물겠지.
그래도 더 이상 놈의 자존심은 건드리지 말자. 너무 몰아붙이면 판을 뒤집어엎을 수도 있을 테니.
그런데 저놈…….
HP, MP 자릿수 하나가 뚝 떨어졌네? 구슬을 뺏겨서 그런 걸까?
격이 내려갔으니 타 군주들에게 또한 당할 수도 있겠네. 제 놈도 살기 위해서는 거짓말을 늘어놔야겠지.
생각지도 않게 많은 정보를 얻었다. 슬슬 돌아가 볼까?
* * *
검암 모울과 연결된 건물 앞 벤치에 앉아 여행객들을 지켜봤다.
기간이 상당히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건물을 나선 여행객들이 저마다 비명을 질렀고 흥분한 표정은 여전했다.
누군가는 마법 휴대폰 상태창으로 자신의 나라 지인에게 자랑하고 인증하기도 했다.
“Holly shit!!”
깜짝 놀라 보니 한 외국인 남자가 입구에서 나오자 소리친 듯했다.
그는 여전히 믿기지 않는지 허탈한 표정을 지었다가 미친 사람처럼 실실거리기까지 했다.
“고작 프랑스에서 한국까지 15분? 15분이 말이 돼? 하하하, 이게 말이 되냐고!”
남자는 옆에 여행객들에게 되물으며 저 혼자 새로운 세상에 들어선 듯 보였다.
나는 그의 말을 듣다가 어째서 15분이나 걸렸는지 갸웃거렸다.
분명 편도는 4분일 텐데?
그리고 의문은 단박에 풀렸다.
남자는 프랑스 한 마을에서 포털을 통해 모울까지 왔고 여러 가지 절차를 거쳐 도착했던 모양이었다.
국가를 넘나들다 보니 보안 절차를 아무리 간소화해도 어쩔 수 없겠지.
현재 일신은 각국에 포털을 잘 깔고 있었다.
물론 해당 위치를 내가 가보지 않았으니 그곳 현지 사람들이 모울을 방문했고, 내가 그들을 이용해 포털을 개통하는 데 평균 1시간이 소요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해당 국가의 사람들은 입을 뻐금거리며 놀랐었지만.
1시간 만에 한 나라의 교통망이 새롭게 개편된다는 건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라며 연신 내게 감사 인사를 전했었다.
이쯤 되다 보니 모울을 받아들이는 나라들은 포털을 패키지로 받아들이게 됐다.
“혹시……?”
고개를 돌려 목소리의 주인공을 올려다봤다.
“이지완 회장?”
어디서 본 여성인데…….
귀엽고 둥근 얼굴에 단발머리.
그러다 그녀의 목에 걸린 목걸이를 보는 순간 미소가 절로 지어졌다.
“세레나 로시 씨군요.”
마켓템 경매로 400억이나 들인 귀한 목걸이를 당당히 걸고 다닐 여성은 그녀밖에 없겠지.
“여기서 뭐 하고 있나요?”
“그냥 쉬고 있었습니다. 그러는 세레나 씨는 어쩐 일이십니까?”
“로마는 새벽 3시 20분. 한국은 아침 10시 20분. 그래서 쇼핑이나 하려고 나왔죠.”
그녀의 ‘나왔죠’라는 말이 무척 흥미로웠다. 마치 옆집 갔다 오는 듯한 말투였으니까.
하지만 모울을 자주 이용 중인 사람들은 이미 제집 드나들 듯 하루에도 몇 번씩 모울을 방문한다 했다.
“그런데 이지완 회장. 미국, 중국, 러시아는 전혀 계획이 없는 걸까요?”
그녀의 질문에 미소로 답변했다.
3국가는 마켓템부터 시작해 OW까지. 제재를 가하겠다 했다. 그것도 모자라 일신과 이도까지 압박하겠다고 으름장을 놨다.
아직도 정신 차리지 않은 그들에게 굳이 내가 굽힐 생각은 없다.
누가 더 고립될지는 지켜보면 알 것이고 그들의 바보 같은 짓에 얼마나 많은 사람이 낭패를 볼지 후에 알게 될 것이다.
신이 쳐들어온다면 드넓은 그대들의 나라가 전장이 될 가능성이 다분히 클 테니.
피해를 최소한으로 하고 싶지만 그렇다고 내가 그들을 구원해야 할 사명감은 없다.
나는 구원자가 아니다.
세레나는 아쉬운 표정을 짓다가 그길로 떠났다.
그럼, 나도 관리국에 가볼까?
* * *
문창표가 걱정 가득한 표정으로 나를 봤다.
“뭐가 그렇게 구름 낀 얼굴입니까?”
“네 말대로 관리국 직원들을 추렸다. 한데 여기서 더 추려질지 모른다 생각하니…….”
그의 걱정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악한 마음을 먹을지도 모르는데 내가 굳이 그들의 능력을 수정하고 붙여넣어야 할까?
“지완아. 사람은 누구나 양면적이다. 너만 해도 네 능력을 발휘해 세계 최고의 부자가…….”
손을 들어 문창표의 말을 막았다.
내 결정에 변함이 없다고 생각했는지 그는 물러났다.
이 모든 과정은 비공개이고 관리국에서 선별한 최정예는 고작 120명이었다. 그것도 C등급부터 SS급 윤호준까지.
특별히 관리국에서 마련한 밀실에 들어서자 윤호준이 내게 인사를 건넸다.
“큰 결심 하신 거로 알고 있습니다.”
“윤호준 과장님이 첫 번째이십니까?”
“아닙니다. 이거.”
그가 건넨 태블릿에 관리국 헌터들의 신상이 보였다.
잠시 후 밀실 문이 열리고 첫 번째 관리국 직원이 바짝 긴장한 채 들어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