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7화
-힘을 얻다
살짝 긴장됐다.
8층으로 가려면 저 푸른 공간을 통과해야 하겠지.
이곳을 통과하면 이제는 정보가 단 하나도 없다.
회귀 전 내가 아는 8층 정보는 그저 올라서는 순간 각성자들이 강해졌단 게 다였으니까.
회귀 전 그 정보 하나 믿고 미아에게 무리한 부탁을 했었다.
그녀는 약속대로 7층 북쪽을 혼자 클리어했다.
미아의 말로는 북쪽 보스는 정신 계열 하이 리치와 실버 드래곤이라 했었다. 보스가 두 놈이나 될 거라곤 생각도 못 했었는데.
그녀는 내가 붙여넣었던 백신이 없었다면 하이 리치는 매우 까다로웠을 거라 했다.
실버 드래곤이 하이 리치의 정신에 감응해 싸우는 형태였고.
하이 리치가 미아에게 정신 공격을 마구 해댔지만, 그녀는 그저 하이 리치가 숨겨둔 매개체를 찾아 박살 냈다고 내게 자랑스럽게 말해 줬다.
실버 드래곤은 별거 없었다고 했지만, 그녀는 제법 피곤해 보였다.
호랑이 같은 눈 밑에 있는 다크써클이 판다처럼 보였으니까.
시간을 되돌리기 전까지 황혼의 틈새에서 기대하는 건 딱 2가지다.
한 단계 더 강해지는 것.
또 다른 하나는 알루가 알려 줬던 이곳을 오르다 보면 7세계 놈들과 마주칠 수 있다고 했던 정보.
그 뜻은 분명 환상경에 들어갈 펌웨어이거나 놈들과 필연적으로 마주칠 거란 거다.
운 좋게 신의 음흉한 생각을 알 수 있다면 더없이 좋을 것이고.
그리고…….
시간을 되돌리기 전 5군주도 처리할 것이다.
힘의 균형이 무너지면 7세계가 날뛸 수도 있다. 그때의 상황도 상정해 두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
나를 기다리는 그녀를 봤다.
먼저 들어갈 수 있었을 텐데, 기약 없이 기다렸다니…….
고맙고 미안하네.
“그럼, 들어가 볼까요?”
그녀는 내 말에 의지를 불태웠다.
예전과 달리 그녀는 내게 애송이라 부르지 않았다. 힘의 격차를 인정한 건지 아니면 그저 어른 취급해 준 건지 모르겠지만.
푸른 기운을 흘리는 공간에 다가서자 마치 진공청소기처럼 주변 공기를 빨아들이는 느낌이 들었는데…….
툭-!
어, 뭐야?
뒤에 서 있던 미아 호라크가 내 등을 밀었고, 나는 공간 속으로 쑥 빨려들었다.
푸른 공간에 들어서자 몸에 차가운 기운이 온몸으로 타고 흘렀다가 다시 쏴아아 물 빠지듯 기가 빠져나가는 듯했다.
잠시 진정이 되자.
이번에는 뜨거운 기운이 몸에서 방출됐다가 다시금 미지근한 기운이 온몸으로 스며들어 차곡차곡 몸에 쌓이는 기운이 느껴졌다.
그러다 푸른 공간이 나를 뱉어내자 단단한 돌로 된 바닥이 내 시야에 들어왔다.
이게 뭐야? 이건 마치 유럽 도시에 깔린 돌길 같잖아.
척.
발소리에 돌아보니 미아 또한 공간에서 나왔다.
그녀는 뭔가 이상한 기운이 도는지 연신 손발을 비틀어 보다가 허리를 꼿꼿이 펴더니.
“어째서 내 힘이 더 차오른 것 같지? 아까까진 피곤했었는데?”
그녀의 놀란 얼굴을 보며 나 또한 당황스러웠다.
어째서 나는 느껴지지 않는 거지? 조금 전 이상한 현상을 분명 겪었는데?
설마 일반 각성자들과 달라서?
그렇다면 말짱 도루묵이란 말인데…….
잠깐 현타가 왔지만.
어쩌겠는가. 나는 언제나 재수가 없었는데 말이다.
그렇다면 내 상태부터 확인해 보는 게 좋겠지.
이름: 이지완(임시 군주?)
버전: 21.4.1
3500큐비트(Qubit)
램: -
디스크: -
배터리: 500000%
경험: 기능팩 35
버전은 미국에서 레이드를 치르면서 이미 미친 듯이 올랐었다.
그와 별개로 마력을 흡수해서인지 기초 체력 또한 몰라보게 달라졌고.
흥미로운 것은 마력 흡수로 얻은 새로운 힘은 내 OS에 반영되지 않았다.
기대를 품고 이곳을 통과했지만, 역시나 나는 꽝이란 말이구나.
그런데…….
후-
또다시 기묘한 명칭이 붙다니.
‘임시 군주’가 대체 뭐냐.
누가 이런 거지같은 걸 붙여 놓았는지 멱살이라도 잡고 묻고 싶다.
날 가지고 놀면 재밌냐고.
8층의 결과에 나는 절망하지는 않았다. 물론 실망은 했지만. 그나마 미아는 내가 봐도 등급이 꽉 찬 듯 보였으니.
그것만 해도 만족할 만한 결과다.
지금까지 내가 봤던 군주들과 그녀의 힘을 비교하자면, 동급 혹은 그녀가 다소 높은 듯했다.
물론 미아가 변신했을 때를 상정한 거지만.
그래, 어차피 난 다르다.
포기할 건 포기하고 빛의 군세를 풀어서 8층부터 정리를…….
[힘의 논리가 설치되었습니다.]
[권위의 자격이 설치…….]
[계층의 조정자가…….]
[각각의 정보가 입력됩니다.]
어? 이게 대체 무슨…….
힘, 권리 그리고 계층?
맙소사! 벌머 크랙널에게 빼앗았던 능력이 인제 와서 설치됐다고?
잠시 생각을 정리할 겨를도 없이 또 다른 상태창이 늠름하게 등장했다.
[기능팩 35 조건이 충족되었습니다.]
[OS 서브 관리자 등급을 획득하였습니다.]
이건 또 무슨?
가슴이 두근댔고 흥분이 가라앉지 않았다.
잠깐 머릿속 정리가 필요했다.
미아는 그러거나 말거나 본인의 힘을 가늠해 보느라 여념 없었다.
잠시 잠깐의 시간이 흘렀다.
그렇구나. 그랬어. 타인과 다른 나는 육체적 강함이 아니라 OS에 변화가 생긴 거다.
진작 알았다면 8층을 더 빨리 올랐어야 했는데.
아니지, 기능팩 35가 충족 조건이라 했으니 여기 올라서 봤자 이런 변화는 없었을 것이다.
쾅-콰콰콰 쾅!
굉음의 연속에 고개 돌려보니 미아는 8층에 어슬렁대던 마수를 사정없이 패고 있었다.
그것도 하이 오우거 무리였다.
하기야 하이 오우거가 애초부터 미아의 상대가 될 리 없지만…….
그렇다고 고작 뺨 한 대 맞고 하이 오우거의 머리며 몸통이며 다 떨어져 나가는 건…….
그러고 보니 하도 놀라서 이곳이 던전이란 것도 깜박했네.
OS를 살펴볼 동안 8층을 정리해 둬야겠지.
[빛의 군세가 활성화됩니다!]
글리터가 모습을 드러내자 평소와 달리 잠시 잠깐 황금빛 오라가 웅웅거리다가 매끄럽게 잦아들었다.
시선을 옮겨 보니 녀석의 뒤로 무릎 꿇고 있던 병사들 또한 마찬가지였다.
인간뿐 아니라 내 빛의 군세 또한 힘을 얻을 수 있었다니.
나로서는 엄청난 혜택이다.
“주군-!”
녀석이 평상시대로 내게 인사했지만, 그 짧은 울림은 두껍고 멀리까지 메아리치며 퍼져 나갔다. 마치 전지전능한 신과 같았다.
“8층에 마수들의 심장을 다 먹어 치워라.”
“주군의 뜻대로-!”
녀석은 4만이 조금 넘는 군대를 각 1만씩 나누어 동서남북으로 사라졌다.
그 장대한 모습을 지켜보던 미아가 화들짝 놀라 내게 달려왔다.
“내가 봤을 때보다 저것들이 더 늘어난 것 같은데?”
“앞으로 더 늘릴 겁니다. 미아 씨는 저들과 레이드를 뛰셔도 되고…….”
인벤토리에서 이동식 주택을 꺼내 바닥에 내려놓고 그녀에게 권했다.
“잠시 휴식을 취하셔도 됩니다.”
그녀는 잠깐 이동식 주택을 보다가 코를 킁킁거리며 자신의 체취를 맡더니.
“그럼 샤워라도 해야겠군.”
곧바로 이동식 주택으로 들어갔다.
그녀가 이동식 주택으로 들어간 지 얼마 되지 않아, 8층의 대지는 빛의 군세가 멱살이라도 잡은 듯이 마구 뒤흔들렸고.
곳곳에서 마수들의 단말마가 끊임없이 하늘로 울려 퍼졌다.
시끄럽지만 그런 건 개의치 않았다. 미국에서 치렀던 레이드에서는 이보다 더 심했으니까.
이제 OS를 살펴보자.
[도움말입니다.]
당연히 조금 전 얻은…….
“서브 관리자 권한.”
[서브 관리자 권한입니다.]
일부 권한을 변경할 수 있습니다.
EX: 재정(再整)의 간섭을 차단할 수도 있습니다.
일부 권한 변경……? 두리뭉실한 설명이다. 그런데 재정의 간섭? 재정이라…….
“아! 유리드 그놈이다.”
유리드의 고유능력이 ‘규칙을 손보는 자’였다. 그때는 언뜻 봤었는데 설마 그게 내 OS에 간섭하는 거였다니.
유리드의 직업란에 적혀 있던 재정(再整). 재정은 다시 정리하거나 정비한다는 뜻.
그래서 놈이 내 능력의 명령어를 뒤죽박죽으로 만들 수 있었구나. 다른 건 몰라도 이건 차단해야 한다.
유리드가 또다시 건드리면 골치 아파진다.
또다시 도움말로 재정의 간섭 차단에 관해 물어보자 상태창이 답변을 꺼냈다.
[OS 설정에 있습니다.]
OS 설정이란 게 있다고?
지금껏 몰랐던 창이다.
아니지, 권한이 없으니 어차피 열 수도 없었을 것이다.
8층에 들어서고 나서 OS 자체도 빠릿빠릿해진 것 같기도 하고.
“OS 설정.”
촤륵-!
창이 열리자 실눈을 뜨고 진득하게 살펴봤다. 그리고 2개의 단어가 눈에 들어오는 순간 머릿속이 뒤죽박죽 뒤엉켜 버렸다.
[OS 설정]
신의 그릇 On (관리자 권한)
관찰 On (관리자 권한)
재정 On
스토어 On
…….
젠장, 일단 재정부터 끄자…….
재정을 Off로 만들고 첫 번째와 두 번째를 보며 입술을 잘근잘근 씹어댔다.
신의 그릇, 관찰.
누가 봐도 관리자는 신이다. 지금껏 관찰이 켜져 있었기에 내 행동을 간섭하고 히죽히죽 비웃었을 게 뻔하다.
“망할 새끼!”
관리자에게 권한이 있으니 나는 절대로 끌 수 없단 건데.
그보다 기분 나쁜 건 ‘신의 그릇’이다. 단어만 봐도 더럽게 기분이 싸하다.
불안한 마음을 품고 도움말에 질문을 던졌다.
“신의 그릇.”
[기능팩 40에 도달 시, 엔키의 영혼이 그릇을 차지합니다.]
아…….
다리에 힘이 풀려 휘청거렸다.
탄식이 절로 흘렀다.
그리고 머릿속에 절망이란 단어가 깊숙이 새겨졌다.
이럴 수가…….
나는 놈이 들어가기 위한 그릇으로 선택받았었구나. 아무리 힘을 키운들 결국 놈의 손바닥 안에 놀아나고 있었던 거다.
그러니 내가 황금을 훔치든 5군주를 만나도 놈은 뒷짐 지고 방관 했던 거겠지.
엔키의 영혼.
당연히 신의 이름일 것이다.
저건 반드시 꺼야 한다.
그러다 등골이 오싹했다.
어쩌면 이 순간도 놈이 나를 지켜보며 히죽거리고 있을 것만 같았다.
억측일지 몰라도.
7세계 마수가 우리 세계에 쳐들어온 건 내게 힘을 쥐여 주고 빨리 키워내려는 수작질일 수도 있다.
내게 고문당한 마수들이 한결같이 그러지 않았는가.
‘고난을 주고 힘을 건넨다.’
그 말뜻은 나를 더욱더 빨리 키우려던 것일 수 있다.
업데이트를 무시하면 나는 신보다 약할 것이고, 업데이트하면 결국 놈에게 먹힌다.
그럼, 내가 소유한 황금뿐 아니라 모울이며 빛의 군세까지 고스란히 놈의 손에 들어간단 뜻.
진퇴양난이다.
죽 쒀서 개 준다는 말이고.
허공에 대고 고래고래 외쳤다.
“이 빌어먹을 새끼야-!!”
벌컥!
이동식 주택 문이 열리더니 미아가 깜짝 놀란 얼굴로 뛰어나왔다.
“무, 무슨 일이냐?!”
“…….”
“대체 무슨 일이냐고?!”
“앞이, 앞길이 막혔습니다…….”
“새삼스럽게 막혔다니. 언제는 앞이 뚫려 있었고?”
그녀의 농담에 씁쓸하게 웃어 줬다. 이 모습도 엔키는 피식대고 비웃고 있을 것 같았다.
젠장, 김규석이 내가 감시하고 있단 말을 들었을 때 그 심정이 이랬을까?
기분 더럽단 말로 표현이 안 된다.
여전히 마수를 토벌 중인 빛의 군세들. 저것마저 엔키 손에 모두 넘어간다면 그 어느 세력보다 강대하겠지.
내가 5군주 하나를 쥐어 패고 있었을 때도 놈은 쾌재를 불렀을 것이다.
진실도 모른 채 기고만장한 나는 라이벌의 힘을 알아서 줄여 줬으니까.
시간을 되돌린들 소용없다.
“복사, 잘라내기, 붙여넣기? 큭큭큭…….”
중얼거리고 냉랭하게 웃었다.
그래서 놈은 내게 능력을 복사하고 잘라내는 그런 힘을 줬겠지. 어차피 자신이 유용하게 사용할 계획이었을 테니까.
7세계 놈들이 나를 함부로 하지 못했던 이유는 신이 나를 그릇으로 선택했기 때문이다.
주인의 그릇을 깰 순 없으니까.
지금껏 내게 일어났던 모든 일들이 퍼즐처럼 하나둘 꿰맞춰지는 듯했다.
엔키가 내 몸을 차지하면…….
내가 빼앗은 능력을 바하마트와 벌머 크랙널에게 다시 부여해 주겠지.
어쩐지 7세계 놈들이 당하는 대도 내버려 두더라니.
한참을 혼자 상념에 잠겼던 나는 허탈하게 바닥에 주저앉았다.
허망했다.
그런데 내 마음 한쪽 편에서는 부아가 치밀어 올랐다. 하지만 딱히 이 난국을 헤쳐 나갈 방법이 떠오르지도 않았다.
신의 그릇을 끌 수만 있어도…….
그것도 아니면 적어도 놈이 날 보고 있단 것만이라도 막고 싶…….
흑막은? 신의 눈을 가린다고 하지 않았나? 물론 상대방 신과 5군주가 볼 수 있단 건 알지만.
밑져야 본전인데 해 봐도 되잖아.
[흑막이 활성화됩니다!]
OS 설정에 관찰의 On이 Off로 파닥파닥하더니 결국 Off가 됐다.
대신, 괄호 안 ‘관리자 권한’이 ‘엔릴의 눈’으로 바뀌었다.
허탈한 웃음을 짓고 말았다.
결국에는 두 신의 이름은 엔키와 엔릴이란 형제들이다.
아주 쌍으로 지랄하는구나.
미아를 잠시 보다가 통탄의 한숨이 흘러나왔다.
그녀에게 말해 봤자 소용없다.
이게 보이지도 않는데 뭘 상의하고 말고 하겠냐.
믿어줄 사람도 없…….
어……?
한 사람은 볼 수 있다.
채수진은 만질 수도 있고…….
또다시 깊숙이 생각에 빠져들었다.
그녀는 어째서 내 상태창을 볼 수 있을까?
지금까지는 간과해 왔지만, 상황이 상황이니만큼 채수진이 내 OS를 건드렸던 게 위화감이 들었다.
그러다 묘한 생각이 머릿속에 감돌았다.
내가 부여한 능력들 이름이 유일하게 바뀐 사람. 나는 그녀의 능력을 복사할 수도 없었다.
호환 불가라고 했으니까.
그러고 보니 프랑켄은 어째서 처음 보던 그녀를 여왕이라 불렀을까?
심지어 썸머도 그렇게 말했고. 채수진은 썸머의 말까지 들을 수 있었다.
가만 그러고 보니 채수진은 ‘공간의 지배자’까지 간섭하려 했다.
이 모든 게 단순히 그녀의 능력 이름 때문이었을까?
여왕의 권능.
내가 복사할 수 없는 능력.
계속 걱정스럽게 보고 있던 미아에게 입을 뗐다.
“미아 씨. 잠시 자리를 비워야 할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