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8화
-여왕의 권능
채수진을 만나기 위해 돌아가려다 잠깐 고민이 들었다.
빛의 군세를 수거해야 할까?
그러다 8층 던전이 고요해졌다.
물 만난 고기처럼 8층을 마구 휘졌던 4만의 빛의 군세가 모여들기 시작했다.
글리터의 부하들이 수많은 마석을 바닥에 내려놓았다.
“수고했다. 글리터.”
녀석은 소멸한 빛의 군세 병사 수를 내게 보고했다. 상당히 강해졌는데도 무려 2천이나 되는 병사를 잃었다.
녀석들이 가져온 마석의 절반은 빛의 군세에 투자했고 또다시 병사의 수를 늘렸다.
나머지 반은 새로 생성한 병사들에게 먹였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미아가 고개를 저었다.
“마석을 그렇게 사용하는 각성자는 네가 유일하겠군.”
“그럴 겁니다.”
“이제 내려갈 거냐?”
그녀의 물음에 끄덕였다.
내 생각이 맞다면 나는 채수진 그녀가 필요하다. 적어도 테스트는 해볼 가치가 있을 것이다.
* * *
관리국 안내대에서 간단히 면담 신청서를 작성하고 대기석에 앉았다.
여전히 흑막은 켠 상태였다. 내 행동을 어느 한쪽이 봐야 한다면 당연히 엔릴이 더 나을 듯했다.
그놈은 겨우 훔쳐보기만 할 뿐, 간섭은 할 수 없으니까.
이곳까지 오면서 여러 차례나 곰곰이 상념에 잠겼었다.
이 시기에 서브 관리자 권한을 어째서 부여해 준 건지 의문이 들었으니까.
내가 신이라면 이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지금까지 내 행동을 엔키가 지켜봤다면 당연히 알겠지만 나는 ‘신의 그릇’을 끄기 위해 발버둥 칠 성격이다. 놈이 그걸 모를 리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게 서브 관리자 권한을 부여했다?
만약 그렇다면 몇 가지 생각해 볼 수 있다.
엔키의 자신감.
이게 맞는다면 나는 절대 OS를 건드릴 수 없다는 것을 뜻한다.
엔릴의 방해?
황혼의 틈새 8층 자체가 엔릴이 엔키에게 방해하기 위해 세운 계획이란 전제다.
실제로 각성자들이 강해져 봤자 마수들에게 도움 될 건 하나도 없으니 엔키도 신경 안 썼을 테고.
알루의 도움.
이건 명확하지 않다. 만약 그랬다면 나를 만났을 때 그가 알려 줬을 것이다.
그리고 또 다른 내 가설은.
내가 모르는 세력이 존재한다는 것.
업데이트 당시 꿈속 거인에게 반기를 들었던 거인 신하들과 거인 여자.
그때는 거인들이 인간을 죽이는 것을 보고 충격을 받았지만. 분명 그들은 엔키에게 반기를 들고 있었다.
혹시 그 꿈속의 거인 여자가 여왕이라면?
지금껏 내가 봤던 꿈은 거인들의 역사이다. 그렇다면 이런 가설 또한 세워 볼 법하다.
‘황혼의 틈새’는 생성부터 성격까지 여타 던전과 달랐다.
애초에 던전 브레이크도 없거니와 알루의 말대로면 오를 때마다 오히려 내게 도움이 되는 그런 던전이다.
실제로 지금도 서브 관리자 권한을 얻었고, 빛의 군세 또한 힘을 받았다. 이곳에서 능력을 얻어 황금 또한 취했다.
마치 내가 신에게서 벗어나게끔 하려는 듯이.
또한 7세계 주인 놈들이 굳이 나와 마주칠 위험을 감수할 리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알루는 말했었다. 내가 오르다 보면 결국 놈들을 만날 수 있다고.
어쩌면 황혼의 틈새는 엔키와 별개란 뜻인 거다.
그래서 나는 채수진이란 변수를 믿고 싶다. 정확히는 그녀가 가진 여왕의 권능을.
그 호환 불가가 사실은…….
“이지완 길드장님. 치료실로 올라가시면 됩니다.”
안내원의 말에 상념을 걷어냈다. 그리고 엘리베이터에 몸을 실었다.
* * *
얼굴이 왜 저렇게 까칠해졌지? 잠도 거의 못 잔 거 같고.
상당히 마른 것 같은데 괜찮은 건가?
“수진 씨. 제대로 쉬고 일하는 겁니까?”
“아, 네. 최근에 무리하긴 했어요. 미국에서 헌터들이 꽤 왔었잖아요. 다행히 몇 분 빼곤 거의 재생 치료가 끝났네요. 그분들은 치료받기 전에 숨을 거두셔서…….”
그녀의 재생 치료는 오롯이 그녀의 힘만으로 불가능하다.
헌터의 기력도 중요하고. 아마도 죽은 이들은 체력이 받쳐 주질 않았던가 차례를 기다리던 중 숨을 거뒀겠지.
그렇더라도 중상자가 80명이 넘었을 텐데, 불과 이틀 안에 밀어붙였다면 채수진도 무리했겠구나.
내가 다 미안하네.
후- 감상에 빠지지 말자.
지금은 내 코가 석 자다.
“수진 씨 잠시 자리를 옮겼으면 하는데 괜찮을까요?”
“잠깐은 괜찮긴 해요.”
그녀를 데리고 내가 가 봤었던 카페로 향했다.
모울로 갈 수 있었지만 굳이 동료들과 마주치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항상 사용했던 ‘어리석은 자’ 던전 또한 엔키가 무슨 짓을 저지를지 모른단 생각이 들었다.
엔키도 우리 세계에 직접적 간섭은 지금껏 없었으니 카페를 택했다.
놈은 어쩌면 우리 세계를 드나들기 위해 나라는 그릇이 필요한 것일지도 모른다.
바이런스가 그랬지 않는가.
조건이 충족해야 신이 우리 세계에 넘어올 수 있다고.
과연 내가 생각한 방법이 잘될지 모르지만 OS 설정 창을 열고 그녀에게 보였다.
“수진 씨. 이게 보입니까?”
“아, 네. 그런데 요건 휴대폰 설정같이 보이네요.”
“그럼, 제 쪽으로 와서 스토어를 한번 꺼 보시겠습니까?”
그녀는 내 옆 의자에 앉으며 손가락으로 On 버튼을 툭 건드렸다.
스토어 Off.
나도 모르게 신음이 새어 나왔다.
된다. 심지어 그녀는 서브 관리자도 아닌데……. 희망이 보인다!
기쁨도 잠시였다.
그녀는 머리가 지끈거리는지 잠깐 관자놀이를 문질렀다.
“괜찮습니까?”
“네, 그런데 저걸 눌렀더니 기운이 살짝 빠지네요. 그리고 뭔가 머릿속에 울림 같은 것도 생기고요.”
말인즉 그녀가 이걸 누를 때마다 상당한 힘을 소모한단 말이구나.
그런데 울림은 무슨 말일까?
모르는 건 일단 넘어가고.
최우선으로 꺼야 할 건 ‘신의 그릇’이다.
그녀에게 단호하게 부탁했다.
“수진 씨 신의 그릇을 꺼 주시죠.”
“네? 괄호에 관리자 권한……, 알겠어요. 한번 해 볼게요.”
그녀가 손가락을 가져다 대자.
콰쾅쾅-!
그녀의 주변으로 사나운 번개가 일어나며 카페 안에 휘몰아쳤다.
사람들이 기겁하고 도망치고 엎드리고 테이블이 허공에 튀어 올라 바닥에 굴렀다.
크으윽.
뭔지 몰라도 저항이 생겼다.
그녀의 긴 생머리가 허공으로 하늘거리며 치솟더니 빛을 발했다. 동공 또한 허옇게 변해 있었다.
여전히 그녀 주변으로 빛과 전기가 미친 듯이 튀어 댔다.
“수진 씨 괜찮습니까?!”
“…….”
“수진 씨!”
“……결국 그를 막을 찬탈자…… 찾아냈구나.”
“수진 씨?”
찬탈자? 그게 무슨……. 맙소사! 지금 내게 말을 건 존재는 채수진이 아니다.
“누구냐?!”
“최초의 인간……여왕.”
“인간 여왕?”
울컥.
채수진의 입에서 토혈이 흘러내렸다.
뭔지 몰라도 이건 위험하다!
그녀의 손을 상태창에서 떼어내려는 순간 또다시 음성이 들렸다.
“희생 없이 이룰 건 없을 것이다. 나 또한 이번이 마지막 기회이겠지. 둘 중 하나는 내 존재를 알았을 테니.”
그녀의 장황한 말에서 내 귀에 또렷이 들린 단어는 희생과 마지막 기회라는 2가지였다.
그녀의 낮은 음성이 또다시 들렸다.
“더는 기회가 없다.”
그 순간 입술을 짓씹고 그녀의 얼굴을 물끄러미 봤다.
그래, 시간을 되돌리면……. 그러면 된다. 힘들어도 견디기로 했잖은가.
“해 주십시오…….”
“엔키가 당신을 택한 건 최악의 실수로군요…….”
그녀는 말을 마치자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마치 복수를 기다린 듯했지만, 묘하게도 그녀의 눈에서는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저 표정…….
조금 다르지만 봤던 기억이 있다.
아, 꿈속에 봤던 엔키 앞을 가로막던 그 인간 여자다.
여왕의 권능……. 재생이 다가 아니었었구나.
파앗 파파팟-!
채수진의 몸에서 스파크가 휘몰아쳐 대며 조금씩 연기가 피어올랐다. 마치 마지막 힘을 쏟고 있는 듯했다.
투툭 투툭 투툭.
상태창에서 On과 Off가 교대로 미친 듯이 바뀌고 있었다.
그리고…….
[신의 그릇 Off]
[엔키의 관리자 권한이 상실되었습니다.]
채수진의 파르르 떨리는 손가락이 힘겹게 다음 명령어로 향했다.
툭.
[관찰 Off]
그녀는 힘겹게 손가락을 가져다 대 스토어에 대고 툭 눌렀다. 굳이 저거까지 누르다니…….
[스토어 On]
또다시 그녀의 음성이 들렸다.
“엔키와 엔릴이 알루를 가뒀지만……. 알루를 던전으로 숨긴 건 나였다.”
아…….
그녀와 알루는 한편이었던 걸까?
“40에 도달해라. 그것만이 그들로부터 해방될 길이다.”
“40? 40이 무슨 뜻입니까?”
“35인 너는 그들보다 약하다. 40 이후론 아무런 의미가 없다.”
35? 아……. 내 업데이트를 말하는 거구나. 40 이후로 의미가 없단 말은 모르겠지만.
“인간의 강함을 그들에게 보여다오…….”
후두둑 후둑.
그녀는 조금씩 메말라 가고 있었다. 그리고 채수진의 눈에 생기가 돌아오더니 천천히 고개를 돌려 나를 봤다.
어…….
내 입에서 슬픔이 밀려 나왔다.
그녀는 잔잔히 미소 짓더니.
“지완 씨 좋아했…….”
채수진은 순식간에 한 줌의 흙으로 변해 무너져 내렸다.
풀썩.
바닥에 주저앉아 손으로 흙을 움켜쥐었다. 그리고 오래전 알루가 내게 했던 말을 뒤늦게 떠올랐다.
‘위로 올라가라. 계속 끊임없이. 그 끝에 그들을 마주할 방법이 나올 것이다. 넌 그때 한 사람에게 희생을 강요하게 되겠지.’
어째서 나는 이 말을 잊고 있었을까. 그 끝은 40층을 뜻하는 것이었고.
한 사람에게 희생을 강요한다는 말은 채수진. 그녀를 말하는 것이었는데…….
“어째서! 어째서 나는 그 중요한 말을 잊은 거냐고!!”
당장 시간을 되돌리고 싶다.
후욱- 후-
힘겹게 숨을 들이켜 분노가 치솟는 내 머릿속을 부여잡았다.
참아내야 한다. 잠시다, 그래 아주 잠시…….
엔키든 엔릴이든 찢어발겨 주마……. 반듯이!
* * *
벌컥-!
“문 총장님. 던전의 마수들이 모조리 사라졌습니다.”
윤호준의 말에 문창표는 백지장처럼 새하얘졌다.
“이틀……. 우리에게 이틀이 남은 건가?”
띠링 띠링 띠링.
문창표는 부르르 손을 떨며 수화기를 집어 들었다.
“문창표입니다.”
-문 총장. 우릴 도와주십시오.
“그, 그게 무슨 말입니까?”
-이탈리아 전역에 있던 던전 속 마수가 모조리 자취를 감췄습니다.
“이……런.”
-이지완과 미아 호라크에게 정식으로 파병을 요청합니다. 당장 우리에게 보내주십시오. 모울도 막지 말길 바라는 바랍니다. 한국에서 이탈리아 국민을 받아 준다면 차후…….
문창표는 이탈리아 관리국 총장의 말을 끊었다. 지금은 그들이 문제가 아니었으니까.
“미안하지만 우리도 똑같은 상황이라 힘들 것 같습니다.”
-뭐, 뭐라고? 그럼 미아 호라크라도 보내 달란 말이요!
문창표가 전화를 끊자 곧바로 전화가 또다시 울려댔다.
그는 전화기 코드를 뽑고 윤호준을 봤다. 이탈리아에겐 미안하지만 다행히 한국은 이지완이 있었다.
“지완이. 이지완 길드장에게 연락을 취하게.”
윤호준이 휴대폰을 꺼내 들자 관리국 직원이 급하게 뛰어 들어와 소리쳤다.
“성녀님. 성녀님이…….”
“채수진 힐러가 왜?!”
“소멸했답니다…….”
“뭐……?”
문창표는 망연자실하며 비틀거렸다.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 수 없었다. 다만 환란을 막아내려면 이지완의 힘이 필요하다는 생각뿐이었다.
* * *
이지완의 OS에 변화가 생기자 전 세계 던전 속 마수가 일제히 사라졌다. 그리고 이지완과 JW그룹 임원 그리고 가족들도 자취를 감췄다.
세계는 환란에 휘말렸고, 전 세계 모든 사람이 향한 곳은 모울이었다.
마수들이 유일하게 들어올 수 없는 모울, 그곳만이 안전하다는 소문 때문이었다.
하지만 모울은 이미 각국의 정부에서 점령한 상태였고. 각 정부는 군을 동원해 모울을 굳게 닫아 버렸다. 일부 국가는 강한 헌터들이 모울을 차지했다.
불과 이틀 만에 벌어진 일이었고.
이지완이 모울을 방치한 건 각 나라 정부가 어떻게 나오는지 알고자 함이었다.
사람들은 아프리카 모울을 떠올리며 살기 위해 모울 문을 필사적으로 두드리고 울부짖었다.
자포자기한 자들이 문 앞에서 자살하는 사태까지 벌어졌다.
하지만 모울 안을 점령한 이들은 문을 열지 않았다.
그리고…… 마수가 자취를 감춘 지 3일이 되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 어떤 던전에서도 마수는 나오질 않았다.
4일이 지나도 10일이 지나도 마찬가지였다. 심지어 아프리카의 마수들 또한 던전으로 들어가 종적을 감췄다.
사람들은 계속해서 공포에 떨었고 시간이 지날수록 깨달았다.
더는 지구상에 마수가 없단 것을.
이지완은 그런 모든 상황을 그저 묵묵히 지켜봤다.
모울을 차지했던 기득권층은 문밖으로 나올 수 없었다. 만약 나갔다간 자국민들에게 죽임을 당할 건 불 보듯 뻔했다.
그렇게 대다수 국가는 무정부 상태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