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1화
-포인트를 사다
환상경을 통해 광기의 군주 바이런스의 집무실에 도착했다.
“친우가 여긴 어찌 왔는가?”
“엔릴이 네게 따로 말한 건 없고?”
내 말을 들은 바이런스의 사자 코끝이 실룩거리더니 버럭 소리 질렀다.
“이놈-! 어찌 신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
퍼억-!
바이런스의 툭 튀어나온 주둥이를 후려갈겼다. 저놈에게나 신이지, 내게는 그저 없애야 할 악당 2일뿐이니까.
끄으윽…….
바이런스는 커다란 손으로 자기 주둥이를 움켜쥐었다.
누가 미친놈 아니랄까 봐 나를 반기다가 바로 성질을 내다니.
“까불지 마. 바이런스, 넌 나와 한배를 탄 동료니까.”
동료란 말이 그나마 듣기 좋았는지 조금 온순한 투로 내게 답했다.
“내, 내게 아무런 계시도 없으셨다…….”
“나머지 4군주들의 동태는?”
“별다른 움직임은 없다. 다만…….”
“말끝 흐리지 말고 답해라.”
“……영혼의 군주. 놈의 움직임이 범상치 않다.”
“정확히.”
녀석은 우물거리며 나를 보다가 어렵게 입을 열었다.
“……내가 힘을 잃은 걸 어찌 알았는지 왕국의 황금을 노리는 듯하다. 그래서 말인데 친우여…….”
“똑바로 말해. 자꾸 질질 끌지 말고.”
“우, 우리 왕국을 지켜 줄 수 있는가?”
이 미친 사자가 뭐라는 거지? 그리고 같은 군주의 황금은 왜 또 노려?
더는 껄끄럽거나 부끄러울 게 없는지 바이런스는 내게 사정하기 시작했다.
“영혼의 군주 그놈이 내가 모아 뒀었던 황금을 탈취해 신께 바치려는 것 같단 말이다. 나와 그대는 한편이지 않은가.”
휴, 그래서 내가 동료라고 한 말에 기분이 좋았던 거였군. 그런데 황금을 바치다니.
“잠깐. 영혼의 군주는 엔릴을 만날 수 있는 거냐?”
“친우 제발, 우리 신을 그런 식으로 부르지…….”
“내 질문에 말해라.”
바이런스는 한숨을 내쉬다가 커다란 주둥이를 턱턱 거리며 입을 열었다.
“우린 일정량의 황금을 신께 바쳐야 한다. 영혼의 군주가 있는 곳은 원체 황금량이 적었고.”
후, 저놈은 어찌 된 게 질문 한 번 던지면 빙글빙글 돌려 말하는지 모르겠네. 내 답변에 정확한 말도 안 하고.
“내 말은 만날 수 있냐고!”
“아니다. 보내는 방법이 있다.”
안 그래도 슬픈 일투성이라 힘겨운데, 사자 놈까지 내 속을 뒤집다니.
그런데 이건 저번에는 내게 말해 주지 않던 정보다.
그리고 또 하나.
조금 전 바이런스가 했던 말 중 거슬리는 부분이 있다.
“내가 황금을 모조리 챙겨갔을 텐데 어떻게 금이 남아 있는 거지?”
바이런스는 내 질문에 눈을 껌벅거리더니 아차 싶은 표정을 보이다가 이내 울상이 됐다.
그러다 침까지 튀겨가며 해명하듯 입을 턱턱 벌려댔다.
“어찌어찌 겨우 소량을 모았거든. 사실, 다음번에는 어찌 될지 모른다. 그보다 우리 왕국에 힘을 보태 달라. 친우 말대로 우린 같은 동료이지 않은가.”
말하자면 힘의 균형이 무너졌으니 군주 간 균열이라도 생겼단 말인데.
게다가 할당된 분량을 주기적으로 보내야 한다? 영혼 머시기는 더는 한계라 아군의 황금까지 노리게 됐고?
일이 재밌게 돌아가네.
“영혼의 군주가 쳐들어온다면, 너희는 하나의 세계로 되어 있는 거냐?”
“각기 다른 세계다. 그리고 우린 게이트를 생성해 이동할 수 있다. 물론 대규모 이동은 각국의 국력을 상징한다. 내가 친우에게 힘을 빼앗기지 않았다면 그놈에게 얕잡아 보이진 않았겠지만.”
녀석은 말을 마치며 내 눈치를 살폈다.
한 마디로 내 잘못이다? 그렇다면 영혼의 군주는 나와 비슷하든지 내가 해볼 만한 상대란 뜻이다.
그렇다면 내가 40으로 올라서는 순간, 군주들은 나를 어찌해 볼 수 없단 뜻인데.
바이런스를 보니 사자라기보단 고양이같이 내게 눈을 떴다.
미친 사자가 왜 이렇게 약한 표정을 짓는지. 어이없네.
“도와주지.”
“저, 정말이냐?!”
“그 전에 질문 좀 하자.”
“어떤 정보가 필요 한 것이냐?”
“너희, 이제 나를 감시할 수 없는 건 알고 있는데. 그렇다면 내가 시간을 되돌려도 그 기억이 남아 있을까?”
“이질적인 느낌을 받겠지만 친우의 기억이 잊힐 수도 있겠지. 설마……. 시간을 돌리고 모른 척하겠단 말이냐?!”
후-, 광기란 말이 아깝다. 뭘 또 겁먹고 그렇게 흥분하는지. 솔직히 시원한 답변은 아니다.
“너에게 빼앗은 황금을 가진 상태로 내가 시간을 되돌린다면, 네 황금이 중복해서 생기진 않을까?”
놈은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황금은 시간과 별개다. 그게 가능했다면 신이 먼저 했겠지.”
하기야 예언 능력을 회귀 전 누군가에게 줬다면서 켄타우로스 케이론도 어쩔 수 없다고 했지.
이제 여기 온 목적을 말해야겠다.
“부탁 하나 하지.”
“말해라.”
“전에 내가 포인트 주고 샀던 여기 티켓. 그거 환불해 줬으면 하는데?”
“…….”
“너흰 나를 초대하려고 포인트를 보내기도 했으니까. 딱 1000포인트만 주든지. 가능할 거잖아.”
“그, 그렇다면 황금을 달라.”
“가능하다는 말이네?”
“1000포인트면 황금 25kg이다.”
이 사자 새끼가 돌았나? 황금 25kg이 얼마나 큰 양인 줄은 알기는 한 건가?
“바이런스, 내게 투자하면 적어도 미래가 보장될 수도 있을 텐데?”
거짓은 아니다.
기능팩 40이면 아마도 엔키와 동등해진다는 뜻일 테니 아마도 나머지 4군주들 또한 내가 굴복시킬 수 있을 것이다.
휴우-!
사자의 코에서 한숨이 흘렀다.
“친우에게 포인트를 그냥 넘긴다면 내가 보유한 황금 25kg이 사용해야 하는데. 겨우 모아 둔 황금을 난 어쩌란 것이냐?”
뭐야? 이건 진짜 처음 알았는데?
포인트가 황금이라고?
가만, 지금까지 모았었던 포인트가 엄청난 양의 황금이란 거잖아.
반나절 티켓은 10000포인트였다. 그럼 황금으로 환산하면.
미친, 그게 250kg?
아하, 바이런스가 구했다던 황금이 아마 내가 이곳에 오기 위해 사용했던 포인트겠구나.
어쩐지 얼버무리더라니.
……차라리 모든 황금을 포인트로 바꾸면 어떻게 될까?
하지만 내 기대를 깨듯 바이런스가 커다란 입을 열었다.
“딱 바꿀 수 있는 양은 130000포인트까지이다.”
130000P면 이곳 하루 동안 지낼 티켓 가격.
고로 여기 하루는 39시간. 휴, 내가 왜 숫자 공부하고 있냐. 어쨌든 내가 필요한 양만 사용하자.
“1000p를 건네라. 황금을 주지.”
“기왕이면 130000포인트를 바꾸는 게…….”
도끼눈을 뜨고 노려보자 놈이 고개를 숙였다.
모울 통행료가 2만 원인데. 이것들 하루 체류비가 무려 황금 3250kg.
폭리도 이런 폭리가 없다.
“헛소리 그만하고 황금 25kg를 줄 테니 포인트나 줘.”
“나를 따라와라.”
바이런스를 따라 황금이 쌓여 있던 창고에 들어서자 거대한 천칭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고 바이런스가 천칭을 가리키며 방긋 웃었다.
“이 천칭 위에 황금을 올리면 된다.”
녀석의 말에 따라 인벤토리에서 황금을 꺼내 올리자 바이런스는 황금을 보며 입맛을 쩝쩝 다셨다.
잠시 후 밝은 빛과 함께 천칭 위에 올려 둔 황금이 소멸하자…….
[1000P를 광기의 군주로부터 받았습니다.]
나도 모르게 주먹을 움켜쥐었다.
길이……. 드디어 길이 열렸다.
돌아가서 빨리 업데이트하자.
* * *
황혼의 틈새로 돌아와 잠시 앉아 스토어를 열었다. 그리고 기능팩 탭을 눌렀다.
“기능팩 구입.”
[구매 완료]
[업데이트 정보가 있습니다.]
[업데이트하시겠습니까? Y/N]
드디어 여기까지 왔다.
한 가지 불안한 건 시스템 종료 후 또 꿈을 꾸거나 피치 못한 사건이 터질까 두렵긴 하다.
그렇다고 안 할 수도 없겠지.
생각해 보니 황혼의 틈새에서 내려가야겠구나. OS가 재시동되면 나를 지켜줄 빛의 군세는 해제될 것이다.
그런다고 동료들에게 지켜 달랄 수도 없다. 그러다 드라이어드가 알게 될 수도 있다. 엔키의 허를 찌르려면 업데이트는 숨겨야 한다.
방심한 놈들이 가장 싸우기 쉬운 법이니까.
결국, 황혼의 틈새를 내려와 조용한 바닷가에 누운 후 예스를 읊조렸다.
가장 최선은 시스템 종료가 없는 거겠지만…….
[업데이트를 시작합니다.]
[모든 시스템이 종료됩니다.]
알루를 만나고 업데이트를 해도 잠들지 않았지만. 역시나 40은 잠자기에 들어가는구나.
내려오길 잘했다.
시야가 서서히 흐릿해지며 눈꺼풀이 스르르 감겼다.
의식이 또렷하다.
결국, 어딘가의 꿈속이란 건데.
내 OS는 엔키의 관리에서 벗어났다. 그러니 큰일은 없을 것이다.
몸을 일으켜 주변을 둘러보자 꿈속 거인이 살던 장소와 흡사했다.
망할, 엔키를 만나겠구나. 그럼, 내가 업데이트한 사실을 알겠구나.
이건 달갑지 않은데…….
바로 그 순간이었다.
“40까지 올라왔구나.”
화들짝 놀라 돌아보니 그리스 복장의 여성이었다.
분명 낯이 익은데…….
“어? 설마, 인간 여왕?”
“내 이름은 이안나.”
“이 꿈은 엔키와 무관하군요.”
그녀는 대답 대신 끄덕였다.
“그렇다면 엔키는 아니란 말이고 이안나 당신이 내게 할 말이 있어서 꿈속으로 부른 거겠죠.”
“역시 그가 너를 선택한 이유가 있구나. 물론 그 선택이 독이 됐지만.”
“질문에 답해 주실 수 있습니까?”
“시간이 허락하는 동안은.”
이안나의 말뜻은 업데이트 동안이다. 생각보다 짧은 시간. 내가 제일 궁금했던 걸 알아야 한다.
“그들은 어째서 황금이 필요한 겁니까?”
그녀는 내 질문에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아마도 핵심을 물었다는 듯이.
“그들의 니비루 대기에 황금이 필요해서이다.”
이안나의 말에는 많은 의미가 담겨 있었다.
그들은 행성인. 대기에 황금이 필요하단 뜻은 황금이 어떤 필터 역할을 한단 뜻일 테고.
그렇다면 황금을 가져가면 그만일 텐데, 두 형제가 세력까지 만들어 가며 왜 이 짓을 벌이는 걸까?
그녀는 내 머릿속 상념이 들리는지 답을 내놓았다.
“왕위 찬탈을 위해 엔키가 우리 세계에 황금을 숨겼다. 엔릴은 황금이 절대적으로 필요하지만, 왕위를 내어줄 순 없었고.”
아…….
허탈함에 주저앉아 낄낄대고 웃어 버렸다.
고작 그따위 이유로 지금껏 싸우고 있다고? 그 싸움에 우리까지 휩쓸려 가면서?
그럼, 내가 엔릴에게 황금을 주면 끝나는 거잖아.
그녀가 또다시 답을 건넸는데 정치적인 문제라 짜증이 솟구쳤다.
“그곳의 왕은 엔키였다. 그리고 엔릴의 어리석음에 대기가 오염됐지. 금을 건네 봤자 소용없단 뜻이기도 하다.”
“그렇다고 우리가 그들에게 당할 이유도 없죠. 아닙니까?”
“엔키는 우릴 창조했단 의미에서 당연히 주인이란 입장이니까.”
우릴 창조해?
이 무슨…… 개소릴.
온몸의 피가 거꾸로 돌았다. 분노가 치밀었고 결국 그녀에게 소리쳤다.
“헛소리! 미쳐도 곱게 미쳐야지.”
그녀는 내 외침에 당연히 화가 솟구칠 거라는 표정을 지으며 바라봤다.
참자. 시간이 얼마 없다.
중요한 건 어떻게 지금의 상황을 끝내냐는 거다.
그녀는 터무니없는 말을 꺼냈다.
“그들에게 인간의 삶은 덧없이 짧다. 고로 엔키는 버티기에 들어갈 수도 있다.”
“그게 무슨……. 설마 내가 죽을 때까지 웅크리고 기다린다, 그 말입니까?”
“……가능성에 대한 말이다.”
뭐 이런 어처구니없는…….
“엔키와 결착 지을 방법을 알려 주시죠.”
“방법을 찾았다면 이렇게 시간을 끌고 왔겠는가?”
맞는 말이다. 그녀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다고 봐야겠지. 그다음은 내게 희망을 걸었을 테고.
마지막 질문이다.
“제가 시간을 되돌리면 채수진은 어떻게 됩니까?”
그녀는 그저 미소만 지었다.
설마, 살릴 수 없단 걸까? 왜 말이 없지?
[시스템이 구동됩니다.]
망할, 난 아직 듣지 못했다. 혹시 다음 업데이트에서 이안나가 나오는 걸까?
“이후로 업데이트는 없을 것이다. 대신 엔키와 엔릴이 나눠준 숫자를 그대가 집어삼켜야겠지.”
“누구에게 나눠줬단 거지?”
“5군주와 7세계 왕.”
그녀는 그 말만 남기고 건물로 걸어 들어갔다. 그리고 점차 시야가 흐려졌다.
귓가에 파도 소리가 들렸고 눈을 뜨자 키리바시 원주민들이 내 주변에 모여 있었다.
머쓱하게 자리를 털고 일어나 기지개를 켰다.
어떻게 변했는지 확인해 보자.
종족: 인간(이지완)
직업: 신(神)
버전: 22.0.6
배터리: 1500000%
등급: 40
이게 어떻게 된 거지?
시스템이 대폭 바뀌었다.
직업이 신? 내가 신이라고?
잠깐 멍하게 시스템 창을 보던 중 또다시 상태창이 펼쳐졌다.
[그리드 컴퓨팅이 ‘신의 반열(班列)’로 바뀝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