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4화
-혼자가 아니다
이럴 수가…….
엔키의 함정에 걸려들었다.
나와 엔릴을 동시에 몰아붙이기 위한 수에 빠지다니.
위기를 느낀 나는 구슬을 먹어야 했고, ‘신성한 자리’가 떴을 때 이 모든 게 놈의 계책이란 걸 깨닫다니.
‘주신의 권한’이 확정되기 30일 동안은 타신이 무주지를 넘어와 공격할 수 있다.
놈은 과거 엔릴에게 당했던 실수를 내게 똑같이 이용한 거다.
압도적 구슬을 보유한 나. 그것을 위험하다고 생각한 엔릴.
엔키는 엔릴이 본인과 협력할 수밖에 없다는 계산까지 깔고 있던 거다.
이걸 노리고 오히려 구슬 회수를 포기했었구나. 그들이 무주지에 침략할 계기를 내가 마련해 준 거다.
놈은 몇 수 앞을 내다본 거냐.
한참을 서성거리며 ‘신성한 자리’를 또다시 살펴봤다. 하나라도 자세히 알고 놈에게 맞대응해야 하니까.
무주지의 주신이 되기까지 30일.
2명이나 되는 타신이 협공해온다면 당연히 내가 불리하다.
나 외에 놈들과 대등하게 싸울 각성자도 없고…….
‘시간 역행’도 무용지물.
30일만 버텨도 엔키가 만든 던전을 모두 닫을 수 있을 텐데. 그 30일이 이렇게 길게 느껴지다니.
차라리 엔릴이라도 치면?
인벤토리에서 엘더 엘프의 시신을 꺼냈다.
놈의 위치부터 확인해야겠다.
[덧씌워라가 활성화됩니다!]
엘더 엘프의 그림자가 나를 덮치자 죽은 이의 기억을 들여다봤다.
붉고 탁한 대기. 황폐한 대지.
최근 기억을 살펴보자 엔릴이 머무는 거대하고 스산한 성이 머릿속에 그려졌다.
찾았다!
[공간지배가 활성화됩니다!]
허공에 공간이 비틀리다가 이내 풀리더니.
[실패]
[확정일 중 주신 후보는 무주지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뭐 이런 황당무계한 일이.
후우웅- 콰앙-!
분노에 휩싸여 주먹을 허공에 휘두르자 풍압이 벽을 때렸다.
젠장! 터무니없이 당했다.
한 마디로 나는 30일 동안 발이 묶였다.
마지막 희망이라고는 놈들이 들이닥치기 전 구슬을 삼키는 것 외에 마땅한 방법이 떠오르지 않는다.
입술을 잘근대며 마음을 가라앉혔다.
그래, 흥분해 봤자 엔키가 원하는 대로 끌려갈 뿐이다.
놈이 과거에 당했던 수라고 나 또한 그렇게 되란 법은 없다.
분명 불리한 규칙만 존재하진 않을 거다. 아직 주신이 아니더라도 놈들을 방어할 비책이 있겠지.
스스로 질문을 던졌다.
놈들은 협력해서 쳐들어오는 걸까? 마수들과 함께 밀려오는 걸까?
엔릴이 구슬을 수거했다면 더는 5군주는 없다. 그렇다면 엔키는?
상념에서 나와 ‘신의 교감’ 벽을 노려봤다.
확인해 보면 된다. 이곳은 그러라고 만들어진 장소니까.
우선은 엔키부터다.
내가 만났던 7세계 왕 중 바하무트와 유리드.
그들이 과연 살아 있을까? 그전에도 유리드는 보이지 않았었지만.
얼른 벽면을 보며 유리드를 떠올렸다. 몇 차례나 시도했지만 유리드는 나타나지 않았다.
그렇다면 바하무트는?
한참을 벽면에 대고 놈을 떠올리며 집중했지만,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유리드는 모르겠지만 바하무트는 구슬을 회수당했을 확률이 높다.
그렇다면 엔키를 확인해 보면 된다. 살아 있는 놈들은 이 벽면에 나타났었으니까.
가늘게 눈을 뜨고 벽을 보자.
우웅.
벽면이 흐릿해지더니 카메라 렌즈처럼 초점이 맞춰졌다. 그리고 엔키의 덤덤한 얼굴이 비쳤다.
엔키는 업데이트 꿈속에서 봤던 거대한 베히모스 등에 올려진 가마에 몸을 기댄 채 이동 중이었다.
베히모스 주변으로 다크 엘프와 드라이어드들이 포진되어 있었고, 그 뒤로도 오우거와 트롤 리자드맨들이 뒤를 이었다.
이럴 수가…….
마수 군대를 이끌고 이동 중이라니. 어떻게 이렇게 짧은 시간에 저 많은 마수를 준비한 건가?
망할 자식 일을 꾸미고 미리 준비했었구나.
그렇다면 엔릴은?
내 상념에 맞춰 엔키를 비추던 영상이 옆으로 밀렸다. 그리고 엔릴의 모습이 서서히 영상에 비쳤다.
엔키와 달리 엔릴은 황량한 대지에 외눈박이 거인들의 호위를 받으며 황금 의자에 앉아 있었다.
잠시 후 상상을 초월하는 거대한 손바닥이 엔릴 앞으로 내려왔다. 엔릴이 손바닥 위로 올라서자, 거인이 팔을 들어 올렸다.
엔릴은 거인의 손바닥 위에서 일장 연설을 하는 듯 보였다.
미친……. 얼마나 거대하길래 거인 엔릴이 저토록 작아 보이는 거지?
곧이어 하늘에서 드래곤 무리가 날아왔고 그 뒤로는 온갖 날개 달린 마수들이 속속들이 모여들고 있었다.
또다시 지상을 비추자.
외눈박이 거인부터 고블린까지 지금껏 본 적 없던 마수들이 끝없이 대지로 몰려들고 있었다.
그리고 군대가 줄을 잇자 그 광경은 무주지의 파멸을 예고하는 듯했다.
지구상 살아 숨 쉬는 모든 것을 멸하겠단 의지.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지만 엔릴이 손을 치켜들자.
불기둥과 번개가 아우러져 하늘을 뒤흔들었고 지상에 모인 마수들은 발을 구르며 붉은 흙먼지를 일으켜댔다.
무수한 드래곤이 허공에 대고 시뻘건 불을 내지를 때면 나도 모르게 입술이 바싹 타들어 갔다.
미친놈들. 고작 나 하나 상대하는 데 이렇게까지 총력전을 펼치다니.
제길. 뻔히 엔릴의 위치를 아는데 저걸 그대로 보고 있어야 한다니.
참담하다 못해 가슴속에서 열불이 난다.
저것들, 어디 던전을 향해 오는 거지? 저번 미국처럼 모든 던전에서 동시다발적으로 기어 나오는 걸까?
영상에 비친 수만 봐도 미국에 출몰했던 마수 때와 비교도 안 된다.
장소라도 알면 좋을 텐데…….
엔키는 출발했다 쳐도 엔릴은 여전히 마수들이 모여들고 있다.
저 장면을 누군가 봤다면 차라리 죽고 싶었을지도…….
하나의 던전에서 놈들이 나온다면 어찌해 볼 수 있는데…….
아무리 많은 마수도 입구만 한정적이라면 자연히 병목 현상이 생길 수밖에 없으니까.
저기에 메테오 몇 번만 날려도 놈들의 수는 현격히 줄 텐데…….
미친 척 영상에 대고 손을 폈다.
[메테오 샤워가 활성화됩니다!]
이게 된다고?! 가슴의 쿵쾅대며 잠깐 희망에 부풀었지만.
[에러.]
그럼 그렇지…….
이럴 게 아니라 규칙을 다시 한번 꼼꼼히 살펴보자.
도움말을 통해 ‘주신의 권한’을 계속해서 읽어 봤다.
첫 번째 문장엔 타신(他神)의 이물을 걷어낼 수 있다고 적혀 있다.
이물, 이물질, 이질적인 물질…….
엔키가 무주지에 만든 건 던전.
만약 이물이 던전이라면…….
던전을 걷어낸다. 없앨 수 있다?
하지만 첫 번째 문구는 주신의 권한을 획득 후에나 가능하니 현재 사용할 수 없다.
두 번째 문구를 살펴봤다.
‘이물의 입구를 제한할 수 있습니다.’
입구라 했으니 이물은 던전이다.
제한할 수 있다는 말은 즉 던전 입구를 닫을 수 있단 뜻이 된다.
그리고 이 문구 다음 괄호 안 글이 핵심 같은데.
‘주신 권한 소요 시부터 가능.’
이거다!
이 능력이 내가 가진 무기다.
30일 동안 타신이 주신을 공략할 수 있는 불합리한 규칙.
하지만 던전 입구 제한은 주신이 타신으로부터 무주지를 보호하는 방어책 같은 거다.
불공평하다고 생각했는데 그것도 아니다.
혹시 던전 입구를 하나의 통로로 제한할 수 있다면……?
나쁘지 않다. 아니 오히려 좋다.
그곳만 틀어막고 농성전으로 버텨 볼 수 있지 않은가.
주신의 권한 나머지도 살펴보고 움직이자.
‘주신은 가신을 최소 5명 지정해야 합니다. (가신 한 명당 구슬 1개)’
말인즉 이건 필수 조건이다.
망했다. 그렇다면 5개의 구슬을 건넨 나는 또다시 70. 말인즉 엔릴과 동률이다.
갈수록 태산이네.
예외 사항이 있었다.
구슬을 건네받을 자가 무주지 외부에 있을시, 주신은 무주지를 한 차례 벗어날 수 있다고?
일단 그렇다 치고.
구슬은 믿을 만한 누군가에게 군주의 지위를 줘야 한단 뜻인데.
엔키 놈. 칼을 갈았구나.
희망을 품고 차근차근 뒤를 읽어 보자 엿 같은 조건이 붙어 있었다.
주신이 섭취한 구슬에 한에서라고…….
뭐 이렇게 까다롭게 돼 있는지.
설명에 따라 설치 프로그램을 열어 봤다.
‘가신의 임명’이란 능력이 설치되어 있었다.
구슬을 일단 꺼내야 한다.
[가신의 임명이 활성화됩니다!]
그 순간 속이 울렁거렸다. 복부가 뜨겁더니 불덩이가 뭉치는 느낌과 함께 식도를 타고 밀려 올라왔다.
우웨엑-!
툭. 하고 입 안에서 푸른 구슬 하나를 뱉어냈다. 삼킬 때와 달리 이건 또 고통스럽네.
개인 무력도 문제지만. 그나마 내게는 빛의 군세가 있다.
믿을 수 있는 녀석은 글리터다. 녀석에게 구슬을 주자.
[빛의 군세가 활성화됩니다!]
“주군.”
녀석에게 구슬을 건네자 녀석이 손을 뻗었다.
바로 그 순간 녀석의 손바닥에 놓여야 할 구슬이 바닥에 툭 떨어졌다.
글리터가 손가락으로 구슬을 잡으려 했지만 잡히지 않았다.
어째서? 분명 저번에 글리터가 구슬을 잡아 내게 줬었는데.
인벤토리에서 구슬을 꺼내 글리터에게 건네 봤다. 그랬더니 이건 또 잡을 수 있었다.
말인즉 글리터는 내 선택을 받을 수 없단 거다.
미치고 환장하겠네.
대체 누구에게 줘야 한단 거지?
그것도 무려 5명이나.
그래서 엔릴이 최소의 숫자 5군주에게만 사용했던 거구나.
나를 제외하면 글리터만 한 무력을 가진 각성자가…….
아, 한 명 있다!
어째서 까마득히 잊고 있었지?
미아 호라크. 그녀만 한 무력도 없다. 게다가 그녀가 변했을 때 최종 단계가 ‘쿼드 수인 신’이었다.
잠깐 서성이며 머릿속 계산기를 두드리기 시작했다.
당시 그녀가 쿼드 수인 신이 된 건 내가 변신한 해신의 팔뚝을 흡수한 직후였다.
나는 현재 신의 반열에 올랐다.
30일 후면 무주지의 주신이다.
내 몸 일부를 그녀가 흡수한다면? 해신은 잘린 팔도 다시 생성됐다. 그래서 가능했다.
하지만 내 능력 ‘끈질긴 생명’은 그렇게까지 되지 않는다.
소생의 법칙?
얀델리안에게서 빼앗은 능력. 이 능력이라면 내 팔다리쯤 잘려 나가도 얼마든지 생성할 수 있다.
당장 그녀부터 만나야겠다.
그렇게 계산을 마친 나는 허공을 노려봤다.
[공간지배가 활성화됩니다!]
허공이 일렁이며 쫘악 열렸다.
* * *
공간을 비틀어 밖으로 걸어 나오자 모울에 있던 사람들이 화들짝 놀라 나를 봤다.
“이건 숫제 인간이 아니잖아!”
민석 선배의 농담 섞인 말이었지만 그걸 받아 줄 겨를은 없었다.
필리쁘 옆에 앉아 있던 미아에게 다가섰다.
“미아 씨. 길게 설명할 시간이 없습니다. 제게 힘을 보태 주실 수 있습니까?”
그녀가 말하기 전에 또다시 말을 이었다.
“이 전쟁에서 우린 죽을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살아남는다면 당신은 저 다음가는 힘을 얻게 될 겁니다. 얼마 후면 신들이 지구에 밀려들 겁니다.”
내 말에 그녀는 무겁게 고개를 끄덕이더니 피식 웃었다.
“보스가 아니었다면 나는 감옥에서 죽었겠지. 이제 그 은혜를…….”
“자, 잠깐! 어째서 미아입니까?”
필리쁘가 미간을 구기며 원망 가득한 눈으로 나를 올려다봤다.
죽는다는 말과 신들의 전쟁이란 말에 겁먹지 않을 인간은 없을 것이다. 그 또한 그러했고.
필리쁘에게 설명하려는 순간.
“당신은 내가 돌아오면 프러포즈나 준비해 둬.”
미아의 말에 필리쁘가 더욱 불안한 표정을 지었다. 내가 봐도 사망 플러그 꽂는 말로 들렸으니.
“미아 씨. 죽을 수 있다고 했지, 죽으러 간다고 말한 건 아닙니다.”
“나도 알고 있다.”
그렇게 답한 그녀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물었다.
“그래서 내가 뭘 어떻게 해야 하는지 말해 봐.”
“여기서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니 장소를 옮기죠.”
모두 불안한 표정을 내게 지었다.
분명 삼자 회담 전까지만 해도 밝은 미래를 꿈꿨을 사람들이다. 그런데 막상 돌아온 내가 신들과 전쟁 운운했으니 당연히 불안할 수밖에.
비록 내 마음은 절망 속에서 허우적댄다 해도 이들을 안심시키기로 했다.
“저 이지완입니다. 끝까지 살아남아서…….”
“나도 그 전쟁에 참여할게.”
“당연히 나도 가야지. 언제 신을 만나 보겠어?”
승연이와 샬롯이었다. 그러자 뒤에 있던 한미소가 입을 열었다.
“지금껏 혼자 그만큼 발버둥 쳤으면 우리에게 손을 빌릴 때도 되지 않았나요?”
로렐라이가 샬롯 옆에 섰다.
“나, 나도……. 싸울 수 있어.”
대호가 일어나 나서려는 것을 어깨를 꾹 누르며 말했다.
“대호야. 여길 잘 부탁한다.”
“네, 형.”
녀석은 코끝을 만지작거리더니 뜻밖의 말을 꺼냈다.
“형 이게 마지막이면 JW와 연합했던 헌터들 다 불러 모으죠.”
그렇구나. 그래…….
난 혼자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