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0화
-꺼져라
내 포효에 엔릴은 입만 뻐끔거렸다. 아마도 예상치 못한 행동이라 더욱 놀란 듯 보였다.
예전에 바이런스에게 장난스럽게 질문을 던진 적이 있다.
“바이런스, 내가 황금을 꺼내 놓으면 넌 이거 어떻게 옮길 테냐?”
“천칭에 올려서 우리의 신께 보내면 그만이다.”
그때도 인벤토리에서 황금을 꺼내 보였다.
바이런스는 넋 놓고 한참을 황금산을 올려보다가 고개를 내저었다.
“이, 이걸 모두 해체하려면……. 휴- 한참은 걸리겠군. 아마도 친우를 제외하면 이렇게 담고 옮길 수도 없을 것이다.”
“너희 신은 나처럼 옮길 수 있지 않을까?”
녀석은 여전히 고개를 저었다.
“아무리 그분이라도 불가능하다.”
“그렇군.”
“혹시 모르지, 아틀라스라면 가능하겠다만.”
이미 나는 알고 있다.
인벤토리 없이는 이걸 옮겨 갈 수 없다는 것을. 유일하게 황금산을 짊어질 수 있는 아틀라스는 요르문간드의 한 끼 식사가 됐다.
그렇다면 들고 갈 방법은 쪼개서 가져가야 할 것이다.
내가 그걸 가만히 보고 있을 리도 없고 엔릴이 명령한다 해도 이 전장에서 마수가 미치지 않고서야 황금산을 해체하고 있을 리 없다.
“엔릴! 와서 가져가라는데 어째서 꿀 먹은 벙어리처럼 그러고 있는 거냐!”
바이런스의 말에 따르면 이걸 모두 잘라내 가져가려 한다면 상당한 시간이 걸린다 했다.
황금을 여기에 둔다 해도 엔릴은 그림의 떡이다. 엔키가 가만히 있을 리 없으니까.
그래도 엔릴의 머릿속은 마구 휘저을 수 있다.
나의 또 다른 노림수는 엔키가 더 이상 멋대로 떠벌리지 못하게 하려는 거다.
“엔키! 네 입으로 그랬었지! 내가 나를 위해 이따위 전쟁을 벌이고 있다고! 그렇다면 너희들이 원하는 황금을 줄 테니 가져가란 말이다!”
엔키는 황금 이전의 문제가 있다.
저놈은 나라는 그릇이 필요한 거니까. 그렇다고 우리 인간들에게 나라는 그릇을 내놓으라고 징징댈 수도 없을 것이다.
또다시 놈들을 도발했다.
“준다는데도 어째서 말이 없는 것이냐! 빌어먹을 새끼들아!!”
* * *
난데없이 전장에 뛰어들어 터무니없는 양의 황금을 꺼내놓은 이지완.
황금산을 올려보던 성안 사람들은 경악했다.
그가 꺼내 놓은 황금은 전장을 가득 채우다 못해 일부는 성 주변까지 밀려와 있었다.
“황금이 너희 목적 아니냐! 그러니 당장 들고 꺼지란 말이다!”
이지완의 외침이 쩌렁쩌렁 울렸다. 그리고 성 위에 몰려든 사람들이 웅성거렸다.
“아니, 신이란 작자들이 황금은 왜 필요하대?”
“그걸 떠나, 이지완 저 친구는 정체가 뭐야?”
“저기 정말 금이라고?”
“조용! 가만있어 보라고.”
또다시 이지완의 목소리가 들렸다.
“너희가 원하는 것은 황금이지 않냐. 그런데 어째서 꺼내 놨는데도 아무 답도 없는 것이냐!”
그의 말을 듣고 있던 사람들이 눈을 번뜩였다.
이지완의 말대로 원하는 게 황금이라면 흔쾌히 받아들이고 물러나면 그만이다.
그런데 말이 없다?
보고 있던 군인이 입을 열었다.
“아까 저 엔키인가 하는 새끼가 이지완 저 친구를 내놓으면 살려 주겠다며? 그런데 저렇게 대놓고 제 놈들에게 갔는데 반응이 이상한데?”
“저 망할 새끼. 우릴 흔들려고 한 거네!”
“휴- 저따위 새끼들이 무슨 신이라고! 마수들 왕이나 되겠지! 그리고 이지완 길드장도 오죽 답답했으면 저기에 가서 저러려고.”
“젠장, 그것도 모르고 나는 이지완만 원망했는데…….”
이지완의 황당하고 저돌적인 대응법을 지켜보던 문창표가 헛웃음치고 말았다.
음해하는 상대를 향해 모두 거짓이라고 호소한 게 아니라 적을 향해 원하는 것을 들이밀었다.
그런데 상대는 이 상황에서 오히려 꿀 먹은 벙어리.
말하자면 이 싸움에서 저들에게 원하는 것을 내줘도 끝내 우리의 미래가 밝지 않다는 사실이었다.
이지완은 그걸 증명하듯 지금 상황을 확인시켜 줬다.
생각해 보니 늘 그랬었다.
결정적인 순간 확실한 물건을 상대에게 들이밀고 상황을 반전시켜 왔으니까.
누군가 크게 외쳤다.
“이런 마수 새끼들아! 우리가 호구로 보이냐!”
“네놈들이 원해서 이지완이 갔는데, 어째서 말이 없는 거냐!”
계속해서 엔키와 엔릴에게 악대구질 치는 성벽 위 사람들.
이지완은 황금을 그대로 두고 터벅터벅 걸어 성으로 돌아왔다. 어차피 가져가고 싶어도 불가능하니까.
거기에 전장을 가로막았으니 이 또한 마수들에게 난감했다.
무엇보다 엔키는 더 이상 사람들을 회유하는 거짓 발언을 꺼낼 수 없었다.
반면 눈앞에 거대한 황금산을 보던 엔릴은 엔키를 증오 어린 눈으로 노려봤다.
엔릴은 황금만 차지하면 됐었다.
하지만 엔키와 맺은 ‘신의 결속’ 그것이 엔릴의 발목을 붙잡았다.
* * *
다시 성으로 돌아온 나는 헌터들의 시선이 바뀐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내 옆을 지나는 사람들마다 응원은 아니더라도 증오나 원망의 눈빛은 아니었으니까.
문창표가 내게 물었다.
“저기에 황금을 그대로 두어도 되는 거냐? 저들이 원하는 게 황금 아니냐. 그럼 최후에 우리가 협상 카드로 사용할 수 있을 텐데.”
괜찮다는 말만 하고 김규석과 왕성한 그리고 길드장들을 한곳에 불러 모았다.
전투를 치른 길드장들은 상당히 피곤해 보였다.
치열한 전투로 피로한 것은 아니었다. 말 한마디에 동료가 죽어 나가는 전쟁. 그것을 감내해야 하는 그들의 위치가 부담감으로 다가온 듯 보였다.
“무슨 일로 이렇게 불러 모은 겁니까?”
한니발 라이징이었다.
내 예상과 달리 마수들의 마석을 섭취할 수 없다면 방법을 달리해야 했다.
첫 번째는 마수들이 구울화 되기 전 나 또한 네크로맨서 능력을 사용하는 것.
두 번째가 어쩌면 매우 중요한 미션.
김규석과 왕성한을 번갈아 봤다. 세계에서 가장 많은 마석을 보유한 회사 오너들.
“두 분. 그리고 길드장님들. 보유하고 계신 마석을 모두 제게 투자하십시오.”
어안이 벙벙한 사람들의 표정이 보였다.
뒤에서 지켜보던 미아 호라크가 내 생각을 읽은 것인지 손뼉을 짝하고 쳤다.
“아! 마석을 흡수하려는 거구나!”
“그렇습니다.”
JW 길드 소수만 알고 있는 내 비밀. 마석을 흡수할 계획이다.
모르긴 해도 지금 이곳에 모인 길드장들이라면 대량의 마석을 보유하고 있다.
그리고 각국의 관리국에도 요청해볼 것이다.
“마석을 흡수한다고?”
“이지완 길드장. 당신, 진짜 사람인가?”
모여 있던 길드장 중 한 명이 내게 던진 의심이었다. 하지만 미아를 비롯해 나와 친분이 있던 헌터들이 그를 노려봤고. 남자는 미안하다며 입을 다물었다.
만약 마석을 끌어모은다면 내게 투자할지 아니면 빛의 군세에 돌려야 할지가 관건이었다.
그래, 마석을 끌어모을 수 있을 때 결정하면 된다.
그렇게 상념을 털어내자 왕성한이 입을 열었다.
“당장 모울로 가져오겠습니다.”
“우리 일신도 내드리죠.”
김규석은 일신을 강조하며 내 눈을 봤다. 이 전쟁이 끝나면 일신의 공로를 기억해 달란 눈빛이었다.
두 사람을 필두로 길드장들은 모두 한 마디씩 던졌다.
“그딴 예쁘기만 한 돌덩이. 내드리죠.”
“마석을 먹을 수 있다니 신기하군요.”
“먹는 모습이나 한번 구경합시다. 하하하.”
그렇게 결정이 나고, 모두가 보는 앞에서 분신 셋을 만들었다.
저들이 마석을 챙겨오는 것보다 내 분신 셋이 인벤토리에 담는 게 효율적이니까.
대부분 내 분신 능력에 경악했는지 입을 허 하고 벌리자.
“한 명만!”
내게 이렇게 말한 사람은 다름 아닌 미아였다.
그녀가 다시 입을 뗐다.
“보스가 구심점인데 그렇게 여럿으로 힘을 나눠 버리면 위험하다.”
무슨 말인지는 안다. 하지만 언제든 분신은 해제할 수 있다. 위급 상황이 온다면 당연히 그럴 것이고.
“언제든 불러들일 수 있습니다.”
“그래도 한 명만 움직이는 게 좋을 것 같다. 저들이 당장이라도 쳐들어온다면 그 어찌 될지 모르니까.”
“우리가 모아 올 테니 분신은 거두시죠. 이지완 길드장.”
노아 마틴이 처음으로 입을 열었고 내게 이지완 길드장이라 불렀다.
“우리는 하루라는 개념이 있을지 모르지만, 저들은 아닐 겁니다. 지금 잠깐의 소강상태도 이지완 길드장이 전장에 황금산을 놓고 와서 그렇겠죠.
그러니 저것들이 정신을 차리고 파상 공격이 이뤄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니 이지완 길드장은 온전한 상태로 있어야 합니다.”
모두 노아 마틴의 말에 수긍했다.
결국 그들의 말에 따르기로 했다. 대신 운반을 맡은 헌터들을 불러들였다.
인벤토리를 붙여넣고 싶었지만 그건 불가능했다. 결국 능력을 원래 상태로 초기화하고 어둠 감옥과 티타네스의 보살핌을 붙여넣어 줬다.
어둠 감옥을 효율적으로 사용하려면 거인화 또한 필요했으니까.
나는 또 다른 계획을 위해 신의 교감으로 향했다.
신의 교감 방에서 엔키와 엔릴을 관찰하며 입술을 잘근대는 한미소에게 말했다.
“키포우가 어디 있는지 찾아봐 주시죠.”
그녀는 머리를 쓸어올리고 신의 교감 벽에 손가락으로 바삐 움직였다.
“혹시, 그가 소유한 구슬 때문에 그러나요?”
“구슬도 구슬이지만 다른 이유입니다.”
곧이어 벽면이 흐릿해지며 초췌한 수인들의 모습이 비쳤다. 그녀가 다시 한번 손가락을 옆으로 움직였다.
곧이어 코뿔소 수인 키포우가 바위에 걸터앉아 있는 모습이 벽면에 비쳤다.
수인이지만 그의 표정은 참으로 비통해 보였다. 그런 그에게 말을 걸었다.
“키포우. 내 말 들리냐?”
녀석이 움찔 고개를 들더니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그런 녀석에게 다시 말을 이었다.
“부탁이 있다. 키포우.”
벽에 비친 키포우가 하늘에 대고 고래고래 외치는 모습.
한미소는 내게 무슨 뜻인지 말하지 않았다. 그래도 알 수 있었다.
녀석은 나를 원망하고 있을 수도 있다. 아니 저주하고 있을 것이다.
자신들의 왕이 나를 위해 죽은 거니까.
“키포우. 악신에게 복수하고 싶다면 내 말을 들어라. 내 말을 듣고 나서도 악다구니질만 할지 아니면 나를 도울지는 네 판단에 맡기겠다.”
사과는 하지 않았다. 그럴 시간에 엔키와 엔릴을 흔들 묘책이 더욱 필요했으니까.
한참을 악다구니 치는 키포우.
“정신 차려라! 바이런스의 희생을 물거품으로 만들 것이냐!”
그제야 키포우가 우뚝 멈추어 섰다.
“지금 당장 가용할 수 있는 모든 인원을 데리고 너희가 싸웠던 전장으로 가라.”
“밤의 경계에 거의 다 왔는데 무슨 말이냐고 그러는군요.”
그렇게 말한 한미소 역시 내게 의문을 품었다.
“키포우. 남은 수인들과 너희 나라 백성들이 시체를 옮겨 줬으면 한다.”
내 말에 한미소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벽에 비친 키포우 또한 마찬가지였고.
440만이나 되는 마수를 상대할 수 없다. 엔릴이 버린 마수의 시체. 그 수는 적어도 200만에 가깝다.
이걸 미리 떠올렸다면 좋았지만, 엔키가 구울을 생성하는 것을 보고 나 또한 깨닫게 됐다.
모두 전멸할 거로 예상했던 수인들 또한 4분의 1이나 살아 있다.
나는 밤의 경계를 벗어날 수 없다. 그곳은 무주지가 아니니까. 그게 가능했다면 진작에 바이러스를 도왔을 것이고.
그것과 별개로 저들 한 명 한 명에게는 각자의 아공간 주머니가 있다.
그렇다면 이 기회를 사용할 뿐.
“키포우. 내게는 내크로맨서의 능력이 있다. 그 마수들의 시체를 내가 사용할 수 있게 도와줬으면 한다.”
* * *
새벽부터 성벽 곳곳에서 비명이 들리다 희미하게 사라졌다. 내가 던져 놓은 황금산 때문에 하늘길로 2만 정도의 하이 가고일이 덮쳐`왔다.
지성이 없는 던전 속 가고일과 저것들은 달랐다.
하이 가고일은 인간의 움직임을 살피고 상황이 불리하다 싶으면 하늘로 솟구쳐 전황을 살폈다.
그것뿐 아니라 솟구치며 헌터들의 시선을 자신에게 끄는 동안 2-3마리의 가고일 무리가 인간의 사각지대에서 공격해 오거나. 오우거나 트롤들을 옮겨다 성상로에 떨구기도 했다.
슈아악-
헌터가 칼을 크게 휘두르자, 역시나 한 마리의 가고일이 칼끝을 피하며 하늘 위로 솟구쳤다.
그리고 헌터들의 뒤와 옆에서 가고일 무리가 날카로운 손톱을 들이밀며 내려앉았다.
계속된 공격에 지친 헌터가 무너졌고. 곧이어 가고일들에게 몸이 찢긴 헌터의 팔다리가 분단되며 흩어졌다.
가고일이 히죽거리다 고개를 옆으로 기울였다.
팔다리가 잘린 헌터들. 느리긴 하지만 잘리고 뜯긴 상처에서 새로운 다리가 자라 나오고 있었다.
헌터들의 눈에서 광기가 흘러나왔다.
“우리도 쉽게 안 죽으면 해볼 만하다. 마수 새끼들아.”
상위 헌터들에 한해서 이지완이 붙여넣은 소생의 법칙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