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2화 〉 성씨세가의 사생아 류예린(막간)
* * *
어스름한 거실 한가운데.
어두컴컴한 음영이 스며들었다.
소파, 테이블, 텔레비전, 방문 틈.
그 모든 것들 사이에 어둠이 선명했다.
깜빡. 깜빡. 깜빡.
간헐적으로 전등이 점멸했다.
흐리멍덩한 불빛은 차차 사그라졌다.
“아.”
류예린은 조용히 현관문을 쳐다보았다. 굳건히 닫혀있는 현관문의 모습. 그 모습을 멀끄러미 쳐다보며 생각했다.
선생님은 할 말을 끝내고 집으로 돌아가셨다.
이곳에 남아있는 것은 오로지 류예린 뿐.
눈치 볼 사람은 없다.
“역시.”
일말의 시간 동안 침묵을 유지하던 류예린은 불현 듯 입술을 달싹거린다. 작달막한 입술을 한 번 우물거리며 혼잣말을 툭 뱉어낸다.
“가짜로 연인 행세를 해봐야 소용이 없는 건가?”
류예린은 씁쓸하고 허탈하게 중얼거렸다. 어깨를 짧게 들썩거리며 한탄했다. 역시 안 될 거라고 생각은 했지만, 이렇게 직접 경험을 하니까 여러모로 기분이 좋지 않았다.
선생님이 처음 기억을 잃었다고 했을 때 정말 깜짝 놀랐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길래 기억상실증에 걸렸을까 걱정이 되었다. 하지만 걱정도 잠시뿐. 설핏 욕심이라는 감정이 치솟았다. 이 기회를 이용하면 어떨까, 라는 생각이 머릿속에 가득했다.
“나도 참 바보 같긴.”
씁쓸하게 한숨을 푹 내쉬었다.
바보 같은 거짓말에 스스로가 한심했다.
선생님께 괜스레 민폐를 끼친 것 같아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선생님을 생각하고, 선생님을 바라보며 삶을 이었다.
류예린에게 남은 사람은 이제 선생님 한서준, 뿐이었다.
“흐음.”
류예린은 손톱을 세웠다.
왼쪽 손목 부위를 살살 긁적였다.
그 언저리에 칼자국 비슷한 게 남아있다.
요컨대 주저흔이다.
“그나저나 선생님이 거리를 두려고 하시니 좀 곤란한데.”
몇 번 더 피부를 긁자 쭉 하고 흉터자국이 뜯겨져나갔다. 마치 얇고 투명한 스티커처럼. 허물을 벗듯 흉터자국이 말끔히 사라졌다.
“어떻게 한다? 무턱대고 다가가 봐야 선생님이 싫어하실 텐데.”
류예린은 흉터 스티커를 꾸깃꾸깃 뭉쳐 쓰레기통으로 휙 하고 던졌다.
“음. 역시 그 제안을 받아드려야 하나?”
기실 이지현 헌터와 이야기 나눈 게 있다.
솔직히 말해서 썩 마음에 드는 제안은 아니었지만, 류예린에게 별다른 불이익은 없었다. 오히려 이익이 훨씬 많았다. 하지만 이지현이 제안 했다는 사실이 영 꺼림칙하다. 대충 무슨 생각인 줄은 알겠으나, 꺼림칙한 것은 꺼림칙한 것이다.
류예린은 찬찬히 발걸음을 옮겼다.
방을 향해 발을 내딛었다.
뚜벅뚜벅.
고요한 발소리가 울려 퍼졌다.
지나가던 도중.
어머니의 안방이 보였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이후 안방은 오랫동안 사용하지 않았다. 문고리 위. 먼지가 수북했다. 저 문을 열고 닫을 일은 다시없었으면 좋겠다.
한 번 어머니의 방을 흘끔 거리던 류예린은 별안간 발걸음을 재촉했다.
어느새 류예린의 방에 다다랐다.
책상 위 텔레비전이 켜져 있다.
쓸데없는 뉴스가 흘러나온다.
검백령 클랜 후계자 승계식의 결과는 과연?
후계자 승계식 이후 성백현! 모습을 감추다!
성씨세가 차세대 주인은 누구?
승계식 이후 후계자가 누구인지 밝혀진 게 없어……
흘끗 뉴스내용을 한 번 쳐다본 류예린은 잠시 옛 생각을 떠올린다.
소싯적의 일이다.
류예린은 성씨세가에서 괴롭힘을 당했다.
“야 류예린, 시발년아. 나대지 말라고.”
“니네 엄마? 걸레 아니야?”
“존나 싸가지가 없네. 왜 눈깔을 그렇게 뜨냐?”
엄마가 일반인이라는 이유로.
머리카락이 하얗다는 이유로.
눈이 빨갛다는 이유로.
약하다는 이유로.
별의 별 이유를 붙이며 괴롭힘을 당했다.
사실 이유 따위 중요치 않다.
만만하니까 건드리는 것 뿐.
괴롭혀도 탈나지 않으니 얼마나 좋아?
성백현의 자녀들은 그렇게 생각했다.
“…….”
“류예린 시발년아. 내 말 안 들리냐?”
“…….”
“하 시발. 진짜 뒤지려고.”
욕설이 난무하는 가운데 류예린은 고요했다.
이런 괴롭힘은 익숙하니까.
괜스레 반항해봐야 골치만 아프다.
설령 아버지에게 도움을 요청해도 소용없다.
아버지는 자녀들과의 싸움을 종용하고 방치했다.
적자생존, 약육강식을 강요하며 아이들의 행동을 묵인한 것이다.
어머니 또한 아버지의 눈치를 볼 뿐이었다.
류예린한테 ‘잠시만 참아라’, ‘좀 있으면 괜찮아 거다’ 라는 말을 반복하며 대화를 회피하는 모습을 보였다.
사실상 류예린을 버린 것.
이 저택에서 류예린의 편은 없었다.
“…….”
류예린은 언제나 참았다.
참는 행위는 익숙하니까.
그러니 참을 수 있어.
그렇게 하루, 한 달, 일 년?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류예린은 그만 실수를 저지르고 말았다.
그 실수 이후로 저택에서 류예린을 바라보는 시선이 바뀌었으며 얼마 가지 않아 류예린과 어머니는 저택에서 내쫓기게 되었다.
쓸모없다는 이유와 함께.
“아버지도 참. 그렇게 심한 부상이 아닐 텐데 계속 숨기시기는.”
류예린은 싱겁게 중얼거리며 텔레비전을 껐다.
쓸모가 없다고 류예린을 버렸던 아버지는 과연 이렇게 될 줄을 예상할 수 있었을까?
곧 흥미를 잃은 류예린은 터벅터벅 침대 쪽으로 걸어갔다.
침대 맡 근처 반쯤 버려진 채 방치되어 있는 칼 한 자루가 있었다.
핏빛을 연상케 하듯 검붉은 검집이 인상적이었다.
류예린은 잠시 검집을 붙잡고 그대로 검을 뽑아보았다.
한 번도 관리하지 않아 지저분하고 추레하였지만, 칼날은 전혀 죽지 않았다. 흘끔 봐도 알 수 있을 만큼의 명검이었다.
“선생님이 이걸 못 보셔서 다행이야.”
선생님은 이 검이 무엇인지 알고 있을 터.
못보셔서 정말 다행이었다.
스릉.
검집에서 칼날을 전부 뽑았다.
불그스름한 칼날 위. 이미 딱딱하게 굳은 핏자국이 남아있다. 닦지도 않은 채 다시 검집에 집어넣었다.
“찾지 못하도록 다른 곳에 놔둬야겠네.”
류예린은 잠시 방안을 살피다가 이내 침대 밑에 칼을 억지로 밀어 넣었다.
“여기라면 뭐, 한동안 괜찮겠지.”
깊숙이 밀어 넣은 후 류예린은 허리를 쭉 폈다.
그리고 침대 위에 털썩 주저앉았다.
“흐음.”
시선을 돌려 벽면을 훑어보았다.
벽면에는 선생님과 몇몇 여자들 그리고 성씨세가 사람들의 사진이 있었다.
멀뚱히 사진을 쳐다보던 류예린은 어느새 붉은 사인팬을 꺼내 와서 성씨세가 사람들의 얼굴을 X로 쭉쭉 그었다.
“어디보자.”
흘끗 시선을 돌려 이번에는 몇몇 여자들의 사진을 훑어보았다.
사진 밑 종이에는 여자들에 관한 정보가 빼곡했다.
류예린은 사진과 종이를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검은 사인팬으로 한 여자의 인적사항을 갭직이 긋는다.
“이지현, 이지현이라.”
10강 헌터 이지현.
그녀의 소문은 익히 들어 알고 있다.
또한 선생님의 소개로 몇 번 만났다.
텔레비전에서 봤던 것처럼 아름답고 강한 여자였다.
전형적인 자수성가형 인물로 개천에서 용났다, 라는 표현이 정확하게 들어맞을 만큼 천부적인 재능과 능력을 소유하고 있었다.
그 덕분에 아카데미를 졸업하자마자 세피로트 클랜에 스카웃 되어 지금까지 승승장구를 하였다.
물론 현재는 세피로트 클랜을 탈퇴하여 새로운 그룹을 만들려는 것 같지만.
“역시 이지현 때문이려나?”
선생님은 아무래도 이지현 헌터를 좋아하는 것 같았다.
기억을 잃기 전에도 은근히 이지현 헌터를 신경 쓰는 게 느껴졌다.
물론 겉으로는 내색하지 않았지만 선생님의 행동, 눈빛, 목소리 등등이 이지현을 대할 때와 류예린을 대할 때 차이가 있었다.
큰 차이는 아니었고, 아주 미묘한 차이에 지나지 않았지만, 류예린은 알 수 있었다.
이지현을 특별취급하고 있다는 것을.
선생님과 이지현은 흔히 말하는 소꿉친구 사이다.
어렸을 때부터 인연이 이어진 만큼 남들보다 친할 수 있다.
하지만 기억을 잃기 전의 선생님이 이지현을 바라보는 눈빛은 마치…….
“…….”
류예린은 고개를 잘잘 흔들었다.
기분 나쁜 생각을 하였다.
그 생각을 떨쳐내기 위해 고개를 몇 번 흔든 후 조심스럽게 휴대폰을 열었다.
얼마 전 이지현 헌터와 이야기를 나눈 적 있다.
사적인 대화는 거의 나누지 않고, 클랜 관련하여 몇 가지 제안과 함께 테스트를 받았다.
“이지현 헌터의 전화번호가…… 어딨더라…….”
잠시 동안 핸드폰을 훑어보던 류예린은 곧 이지현의 전화번호를 발견해내는데 성공했다.
그리고 통화버튼을 꾹 눌렀다.
별안간 전화소리가 발신음과 함께 한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보세요. 예린이니?”
“아, 네.”
“무슨 일이야?”
“저번에 말씀하신 클랜 건에 대해 할 말이 있어서요.”
“그래?”
이지현은 조용히 류예린의 답변을 기다렸다.
류예린은 잠시 벽면에 붙어있는 이지현의 얼굴을 싸인팬으로 쓱쓱 그으며 말했다.
“이지현 헌터님. 저 클랜에 가입하고 싶어요.”
“좋아. 잘 생각했어.”
“그런데 저도 한가지 조건이 있어요.”
“조건?”
“네.”
붉은 팬으로 얼굴을 한 번 더 긋는다.
“저번에 테스트 했던 것처럼…….”
어느새 얼굴이 보이지 않을 만큼 붉게 덧씌어져있다.
“저랑 한 번 더 대련해주실 수 있으세요?”
* * *